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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잡이(애지)
이동호 경북 김천 출생. 2004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부산작가상, 교단문예상 수상. 시집 『조용한 가족』. 신라중학교 교사.
세속도시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의 세 번째 장의 주제는 ‘가족’이다. 이동호의 시세계에서 ‘가족’은 아버지-가장(家長)의 죽음을 정점으로 비극적인 가계(家系)에 관한 이야기와, 해체 상태를 향해 달려가는 현대적 가족관게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족 ‘드라마’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의 시에서는 과거와 현재, 집단과 개인이라는 이질적인 계열들이 ‘가족’을 매개로 교차한다. 그러므로 한 가계의 예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는 ‘가족’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은 종종 동일한 시간대를 살고 있는 세대가 ‘가족’에 대해 갖고 있는 공통감각을 건드림으로써 보편적인 성격을 획득한다.
열린 창문 너머로 밤하늘이 보인다 아내가 창문 아래 세워놓은 스팀다리미는, 벽시계의 초침이 카운트다운을 끝내는 순간, 우주선이 되어 하늘을 날아오를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 그 경지가 높아서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은 날에도 만취상태였다 어머니는 늦게 배운 바느질 솜씨로 산격동에서 서문시장까지 비단길을 닦았다 한복에 동정을 달던 어머니 이마 위 주름살을 아버지가 다리미로 빳빳하게 펴놓은 날 밤 어머니는 다리미 줄을 목에 감았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식칼을 휘둘렀다 작은 누나는 골방에서 무릎 꿇고 아버지가 얼른 떠나기를 구들장에게 빌고 또 빌었다 아버지는 그런 가족들을 피해 서둘러 무덤 속으로 도망쳤다 잊을만하면 다리미를 타고 아버지가 찾아왔다 아내가 빳빳하게 다린 옷의 주름이 어머니 같아서 다리미를 힘껏 던진 것이었는데, 다리미가 아내의 허벅지에 불시착했다 제 방에서 공부하던 아들이 멱살을 붙잡았다 연락을 받고 날아온 처갓집이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도망가듯 작은 방에서 별거했다 작은 방 벽에 달린 시계초침의 카운트다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미 점화되었다는 거다 이혼서류의 적색버튼을 꾹 누르면, 나는 창 밖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다 내가 가야할 목적지가 창 밖 먼 별자리에서 반짝인다
-「다리미」 전문
비극적인 가족사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다. 물론 “처녀의 몸으로 미군부대를 잉태”(「히말리아」)한 고모와 그녀를 태평양 건너편으로 던져버린 할아버지, 역사적 격동기에 남편과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삼밭 마을 작은 할머니 이야기도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화자가 회고하는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의 중심에는 이미-항상 문제적인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문제적인 존재가 자리하고 있다. “태초에 아버지의 트럭이 있었다 아버지는 시멘트로 이 세상을 지으셨다”(「레미콘 트럭」)라는 진술처럼 화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 속에서 아버지는 레미콘을 운전하여 세상을 만드는 창조자였다. 그리고 한때나마 그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형제의 머리를 쓰다듬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리미」의 화자가 회고하는 바에 따르면 ‘술주정뱅이’였다.
-시집해설, 고봉준 「‘도시’라는 야생과 몰락하는 수컷의 운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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