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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같은 시인,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참 시가 단출해서 좋습니다. 허지만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있는 듯하지요.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시지요. 언뜻 초등학생이 쓴 동시 같기도 합니다. 나태주 시인이란 이름을 빼고 초등학교 4학년 나태주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시지요. 어찌 보면 단순하다 못해 허전하지요. 이 작품을 신춘문예나 어떤 공모전에 내 놓았다면 보나마나 낙선이겠지요. 아니라고요, 글쎄요. 불길하게도 제 말이 맞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쓰게 된 시인의 면모를 알게 되면 아하, 그럴 수 있겠구나 싶어집니다.
시를 많이 쓰다 보면 단순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세상을 다 돌아보고 돌아온 사람은 말수가 적어지지요. 큰 강이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은 속이 깊기 때문이지요. 이 시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작은 키에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 골목대장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시인이지요. 나이가 적은 사람들은 맘씨 좋은 할아버지 같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더군요. 분명한 것은 그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참 순해지지요. 지상의 언어들이 나태주 시인에게로 가면 동심을 익혀 오순도순 친화력을 가지게 되지요. 마음에 동심을 들여놓고 살아 맑은 마음의 시인임을 보게 됩니다.
<풀꽃>이란 이 작품은 시업 35년으로 완성해 낸 작품이지요. 물론 이 작품이 나태주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시집을 무려 25권이나 발표한 시인이 왜 이렇게 단순한 시로 돌아갔을까에 더 관심이 가지는 것은 저만의 관심일까요.
먼저, 그의 이력을 살펴보는 것이 나태주 시의 속내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했지요. 첫 시집도 <대숲 아래서>입니다. 이후 『누님의 가을』, 『막동리 소묘』,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풀잎 속 작은 길』, 『슬픔에 손목 잡혀』, 『산촌 엽서』, 『쪼끔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등 25권의 시집과 『빈손의 노래』,『손바닥에 쓴 서정시』,『추억의 묶음』 등 선 시집과 동화집 『외톨이』, 산문집 『외할머니랑 소쩍새랑』, 『시골사람 시골선생님』 등을 펴냈지요. 또한, 흙의 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박용래 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한국 문단의 한 역할을 했음을 반증하는 예들을 열거했습니다.
세상의 풍파를 거치다 보면 삶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지요. 사람이 살아온 세월만큼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에게 삶은 늘 시의 모태가 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그의 인생을 그대로 닮았겠지요.
나태주 시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대도시에서 살아본 일 없이 늘 시골을 맴돌며 살았다고 합니다. 30년 가까이 산 공주가 그가 산 도시 가운데 가장 큰 시골도시이기도 하지요. 청소년 시절 그가 가졌던 세 가지 소원은 첫째가 시인이 되는 것이고, 둘째가 좋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고, 셋째가 공주에서 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오늘에 이르러 그는 그 세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잘했다 여겨지는 일로서 네 가지를 꼽고는 합니다. 들어보실랍니까, 곰 새겨들을수록 의미가 새록새록 합니다.
첫째가 초등학교 선생을 한 일이고, 둘째가 쉬지 않고 시를 쓴 일이고, 셋째가 한 번도 시골을 떠나지 않고 산 일이고, 넷째가 아직도 자가용차를 갖지 않고 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교직은 그의 삶이 탱글탱글하게 만들어주는 터전이었고, 시는 그가 살아가는 의미를 제공해준 정신의 샘물이었지요. 시골은 교직과 시를 병행하면서 살아가기에 그럴 수 없이 좋은 조건을 제공하는 마당 같은 것이었지요. 자가용차 없이 사는 날들은 자연과 더욱 친할 수 있는 많은 계기를 제공해주었다고 믿고 있는 듯하더군요. 지금 그는 충남 공주시 금학동 187 대일아파트 3동 903호에서 살고 있습니다.
1945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습니다. 시초초등학교, 서천중학교를 거쳐 1963년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42년 동안 교직생활을 해왔고요. 1999년 공주 왕흥초등학교 교장으로 첫 발령받아 상서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 시인의 인생이란 것을 정리하다 보니 뼈만 앙상히 남는군요. 우리에게 한 시인의 이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과 시인이 만들어낸 산물인 시가 진정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아이들과 평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가 인생을 닮는다고 이야기했듯이 그의 시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풀꽃>도 그러한 배경에서 태어났나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소개되는 시는 <저녁 일경>이라는 나태주 시인의 시입니다.
불이 켜지고 있었다
장독대 곁에 과꽃이며 분꽃
두어 송이 던져놓고
부르지 않았음에도
방안까지 들어와 흐느끼는
풀벌레 울음
창밖에 서성대는 빗방울 두어 날
우산 씌워 세워놓고
불이 켜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기 밥그릇에
숟가락 부딪는 소리
드문드문 흩어졌다.
이 시는 <풀꽃>과는 사뭇 다른 시지요. 시어에서 과꽃이나 분꽃 그리고 풀벌레 울음이라는 단어들을 제외하면 동시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지요. 그리고 과꽃, 분꽃, 풀벌레 울음도 동시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골 농가의 한 풍경을 그리는데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지요.
<부르지 않았음에도/ 방안까지 들어와 흐느끼는 / 풀벌레 울음> 아주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장독대 곁에 과꽃이며 분꽃 / 두어 송이 던져놓고> 방으로 달려 들어온 풀벌레 소리가 저녁의 한가로운 풍경이 그려집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는 아주 눈앞에 실경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들을 그리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아주 가까이 그리고 아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태주 시인의 시를 동시와 시의 접경지대에서 빚어 만든 경계의 시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녁 일경>이라는 작품은 시라고 할 수 있지요. 허지만 다수의 시가 시라고 하기엔 동심의 무게가 깊은 것들이 있거든요.
이러한 면은 그의 안온한 안색과 정제된 마음의 갈피마다 동심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월이 흘러가다 멈추곤 하는 들길의 어느 굽이를 가만 들여다보면 꽃이 피어있지요. 나태주 시인이 그렇더군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바람이 머물다 가는 들꽃 같은 느낌을 가지고 됩니다. 살아온 세월이 사뭇 많이 남아있는 얼굴에는 어쩐 일인지 동심이 남아있어 반가운 시인이기도 하지요.
세상을 살아온 훈장으로 또는 나는 이렇게 살고 있노라고 적어 놓는 것이 있지요. 우리말로 하면 개인의 이력서인 셈이지요. 요즘은 흔히 프로필이라고 하더군요. 나태주 시인의 프로필에는 이런 이력이 하나 적혀 있었습니다.
<첫 애인에게 차인 날> 이라는 이력이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나태주 시인은 말합니다. 자신을 시인이게 한 것이 바로 그 여자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사건보다도 젊은 날에 사랑을 잃은 것이 개인의 인생 사에서는 큰 사건일 수 있지요. 그리고 내가 찬 것이 아닌 차였을 때에는 아픔의 강도가 더 크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자신의 이력에 적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더구나 차인 이력을 자랑처럼 시집 프로필에 적어 놓은 사람은 어쩌면 나태주 시인뿐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나태주 시인은 작은 것이라고 치부되는 삶의 조각들을 놓지 못하고 끌어안으려는 시인이지요. 사회적인 잣대보다는 개인의 인생 사에 중점을 두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는 주인을 닮아서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지요.
지난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편지 겉봉을 뜯자 사연과 함께 시가 하나 적혀있었습니다. 그 시는 뜻밖에도 제시였습니다. 제시를 곱게 적어서 보내 주신 것이지요. 붓 펜으로 정말 정성들여 쓴 글에 고마웠지요. 그리고 그 안에는 함께 동봉한 그림이 있었는데 나태주 시인 자신의 자화상이었습니다. 땅딸막한 키에 벗겨진 머리, 앞으로 걸어가는 동화적인 모습이었지요. 멋있게 그리려거나 폼 나는 모습이 아니었지요. 그만큼 나태주 시인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 세상에 보여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과 함께 시는 저희 집 거실에 걸려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는 순한 어린애의 마음을 담고 있지요. 시어가 아주 편하게 다가오거든요. 저는 이런 말이 나태주 시인을 떠올리면 생각납니다. 동심으로 깨달음에 다다른 어른, 그러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시인이라고요. 어쩌면 동시 같은 시에 넉넉한 동양의 선이 한 자락 내려앉은 것을 확인하게 되지요. 참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할아버지의 시라고 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길을 가다가 들풀이나 꽃을 보면 반갑게 찾아가는 마음을 가진 시인이기도 하지요. 세상을 살면서 독한 마음을 품으면 독초가 되지요. 고운 마음을 품으면 약초가 됩니다. 저마다의 가슴의 모양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게지요. 물처럼 맑고 풀처럼 순한 모습을 가진 나태주 시인은 마음도 맑고 순한 분임에 틀림없지요.
<그리움은 삶의 밥이다.> 이 말은 나태주 시인의 산문에 나오는 글이지요. 그러면서 부연설명으로 이렇게 달고 있습니다. <우리를 숨 쉬게 하고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때로 바람이 되게 하고 구름이 되게 하고 키 큰 나무 되어 까치발 딛고 서 있게도 한다. 여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있기에 오늘도 나는 살아있는 사람일 수 있다. 얼굴 모르는 사람들 있기에 내일도 나는 가슴 뛰노는 사람일 수 있으리라. 내일. 참 좋은 말이다.> 그의 말이 대변해주고 있는 그의 시에는 그리움이 어느 만큼 고여 있지요. 가만히 읽어보면 그리움의 언어들이 벌판에 피어난 들꽃처럼 듬성듬성 모여 서성거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유년시절의 그리움부터 삶 그 자체에 대한 심연적 그리움까지를 포괄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나태주 시인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나 아주 어려서 까까머리 초등학생이었을 때, 외할머니랑 둘이서 사는 아이였다. 외가 마을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집, 꼬작집. 서향으로 비틀어 앉은 꼬작집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주 잘 보였다. 그것은 유리로 보는 세상처럼 맑고도 깨끗한 세상이었다. 하늘이 우선 크게 맑게 보였고 마을의 집들이 눈 아래로 보였고 방문만 열면 봉긋한 산봉우리 하나가 이마를 치며 와락 달겨들기도 했다. 이름하여 천방산. 그 천방산이 내 고향 서천지방에서 제일 높은 산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었지.
또 서남방으로는 고개가 하나 보였다. 넉배재. 황토빛 비단 피륙을 풀어놓은 듯 고개는 길고 긴 곡선의 길을 끌고 어디로인 듯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외할머니 가끔 그 넉배재를 넘어 질매장이란 델 다녀오시곤 했다. 질매장은 또 시오리라던가, 이십리라던가… 아주 먼 곳이라 했다. 세상에 없는 것 없이 다 있다고 했다. 군입정거리를 사오시곤 했다. 오늘은 무엇을 사 오실까?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나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넉배재를 바라보며 질매장에서 돌아오는 외할머니를 기다리곤 했다. 차라리 외할머니가 들고 오는 장보따리 속에 들어있을 군것질감을 기다렸다는 말이 더 옳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살았던 산촌의 풍경이 고스란히 한 폭의 동양화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시인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정말로 시골스럽게 잘 그려져 있습니다. 정감이 넘치는 지명이며 외할머니와 손자와의 관계가 동화 같습니다. 턱을 괘고 할머니가 오실 방향을 막막한 시간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할머니와 손자가 살아가고 있는 한적한 시골풍경이지요.
막막한 기다림은 사람의 영혼을 증발시키는 기분이 들게 하더군요. 적막이 물처럼 고여 있는 곳에 아이 혼자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여도 숨 막히는 일이거든요. 이러한 기다림이 시인을 만들었는지도 모르지요. 시인에게는 아직도 그때의 기다림, 즉 그리움이 가슴 그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듯합니다.
조금만 이 글을 더 소개해 볼까 합니다. 어쩌면 이 부분이 한 어린아이가 시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일지도 모르거든요.
까마득히 먼 거리. 오가는 사람 많지 않은 꼬불길 위에 하얀 옷 입은 사람 하나 떴다. 저 사람이 우리 할머닐까? 아닐까? 흰옷 입은 사람이 여잔지 남잔지 그조차 가늠이 안 갈 만큼 작게 보이지만 번번이 마음속에서는 그렇다, 그렇지 아니하다, 해답이 떠오르곤 했다. 십중팔구는 그 해답이 들어맞아 주는 바람에 나는 스스로 놀라기도 했었지. 나중에 어른 되어 어려서 보았던 고개들을 실지로 넘어보고 얼마나 여러 번 나는 실망을 해야만 했는지 모른다. 실상 고개, 그 너머는 그다지 먼 곳도 아니었고 결코 아름다운 그 무엇도 없었던 것이다. 고개는 그리움이다. 아름다움이다.
아니다. 그것은 속임수다. 실망이다. 허지만 나는 아직도 멀리 보이는 고개를 만나면 불현듯 그 고개를 넘어 어디로인 듯 더욱 멀리멀리 가보고 싶어진다. 가슴 후끈거려지고 눈빛이 뜨거워진다. 하루하루 속아서 사는 삶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때로 속아서 사는 인생조차도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때로 생각해본다.
<고개는 그리움이다. 아름다움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꾸어서는 속임수며 실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 날의 기다림과 그리움이 어른이 되어 삶의 반전으로 실망했지만 이제 나이 든 시인은 포용의 길을 안내 받고 있습니다. 포용은 극한의 양쪽을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삶의 각성이거든요.
그러나 때로 속아서 사는 인생조차도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시인은 이제 넉넉함을 곁에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넉넉함의 기반 위에서 단순함으로 세상을 끌어안은 <풀꽃>이라는 시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제목을 위에 두고 글을 밑에 쓴 원문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니 느낌이 또 다르군요.
나태주 시인은 고인이 된 이성선 시인, 송수권 시인과 함께 절친한 시골 출신 서정시인 3인방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세 시인은 성격도 다르리라 생각됩니다. 시가 우선 다르거든요. 이성선 시인의 시는 불교적인 선이 담겨져 있는 반면 송수권 시인의 시는 남성적인 큰 틀과 어휘에서 남도적인 활달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는 동심을 들여놓은 직관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지요. 세 시인의 시는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정을 오랫동안 함께 나누어온 사이이기도 하지요. 이제는 이렇게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성장했지만 그는 시인이 살아가는 목표인 때가 있었습니다. 시인은 이 시대에 분명하게도 성공의 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소년은 아, 이제 내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시 쓰는 일밖에 없다. 또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도 시 쓰는 일밖에 없다 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모함과 다부진 결의와 허장성세의 열정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소년은 한 사람 시인이 되기로 마음먹게 된다. 아니, 스스로 소년은 그때부터 시인이었다. 누가 인정해주든 아니하든 시인이었다. 시인이 되리라. 시인이 되더라도 좋은 시인이 되리라. 그리하여 소년은 세상에 있는 모든 시를 읽고야 말겠다고 결심한다. 소년은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은 물론 공주 시내를 돌며 고서점에서 헌 잡지며 책을 뒤지면 시를 골라 읽는다. 마음에 드는 시는 베끼기도 한다. 또 소년은 습작노트에 <육성을 찾을 때까지>란 제목을 붙이고 시를 습작한다.
허나 그것은 아직 시도 산문도 그 무엇도 아닌 문장 이전의 낙서일 따름이다. 그래도 소년은 멈추지 아니한다. 정진에 정진. 그만큼 시에의 이끌림이 강했던 것이다. 좋은 직장을 갖는 것, 예쁜 여자와 연애하여 장가가는 것, 출세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 그 어떠한 것보다도 시 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소년은 생각한다. 자신은 시를 쓰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삶은 참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인가 봅니다. 시가 인생의 목표인 사람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걸까요. 결국, 소년은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소년에게 있어 시인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진 가장 큰 소원을 성취하는 일이었는데, 그 시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35년을 살았으니 성공한 인생인 셈이지요.
사람이 가장 성공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고 그 길에서 행복하게 사는 일이라면 나태주 시인은 성공한 시인임이 틀림없습니다.
신광철(한국 한비문학 작가협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