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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화이트 헤드 철학의 서로 다른점
-차나한잔님-
1.비교: 불가능한 가능성
많은 사람들은 서양 철학자들 중에서 화이트헤드만큼 불교철학과 유사한 철학을 전개한 이가 드물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지적은 일견 옳은 지적이다.
비교한다는 행위는 비교의 대상이 되는 둘 사이에 어떤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양자를 대화시키는 것이다.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아무리 다른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 상이한 철학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무엇인가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며 이제까지 이런 가정이
성공적인 결과로 드러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1) 화이트헤드 철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한 저작들은 꽤 있어 왔다.
앞으로 진행되는 토론에서 그들 중 몇몇 책이 인용될 것이다.
인용되지 않은 것들 중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John B.
Cobb Jr.
,
Beyond Dialogu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Robert C.
Neville,
The Tao and The Daimon (New York: SUNY Press,
1982).
필자가 1991년에 클레어몬트 대학원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도 화이트헤드와 원효를 비교한 것이다.
원제목은 “Wonhyo’s Doctrine of Ultimate Reality and Faith: A Whiteheadian Evaluation.
”이다.
또한 혹시 나중에 양자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괴리만이 존재한다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런 대화의 작업은 그것 자체로서 유익한 경우가 많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양자가 서로를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본 글도 불교철학과 화이트헤드 사이에는 유사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단 전제하고 비교를 시도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전제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난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른바 토마스 쿤(Thomas Kuhn)이 말하는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의 이론,
즉 서로 다른 통상적인 학문들 사이에는 비교 가능한 공통분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불교와 화이트헤드 양자를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불교철학은 하나의 종교철학이고,
반면에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하나의 과학철학에 근거한 형이상학이다.
종교철학과 과학철학적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적 장르가 서로 전혀 비교가 불가능한 분야들인 것은 아니지만,
그런 비교는 대개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 양자를 비교하려 시도하면,
그 두 장르는 마치 예를 들어 말하면,
오렌지와 그릇을 비교하는 것처럼 힘들고 무익한 작업이 될 확률이 크다.
다시 말해서 비록 서로 종류가 다르지만 오렌지와 귤을 비교하는 것은 그나마 비교가 가능하다.
그러나 오렌지와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을 비교하는 것은 무익한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와 불교를 비교할 때 그것을 오렌지와 그릇의 관계처럼 이질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오렌지와 귤의 관계처럼 비슷한 것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필자는 이 소논문에서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철학이라는 같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며
이 범주 안에서 서로 비교가 가능하다고 가정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불교와 화이트헤드 사이에는 공통점보다 상이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상호 다른 점을 지적해 내는 것도 본 논문의 한 과제로 삼겠다.
본 논문의 제목을 ‘불교와 화이트헤드 철학의 동이점(同異點)’이라고 잡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차이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 무조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양자 사이를 이간질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단견이다.
이미 말한 바대로 차이를 지적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하면서 서로 배운 후,
상호 모자란 점을 보충하는 데 이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식으로 차이를 강조하면서 비교를 시도하는 본 글의 입장은 본 글이 불교와 화이트헤드를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적절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함께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들은 그것이 종교든 철학이든 모두 생성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론은,
불교나 화이트헤드나 모두 고정되고 완성된 종교나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생성과정 속에서 앞을 향해서 발전되어 나간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우리는 양자가 어떻게 다른지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지적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매우 추천할 만한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와 화이트헤드를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업처럼 보이면서도 결국 가능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불교와 화이트헤드만큼 자신들의 철학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는 철학들도 드물다.
불교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각종 이론들을 흡수 병합하면서 발전되어 왔기에 좀처럼 흠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는 화이트헤드도 마찬가지다.
서양 철학자 중에서 화이트헤드에 비견할 만큼 정교하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직적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한 철학자를 만나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양자의 장점은 오히려 서로를 비교하는 데 부정적인 점으로 작용하기 쉽다.
비교를 하다 보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우열을 따지게 되는 수가 많은데,
그럴 경우 상대방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 철학의 완벽함을 합리화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대화는 유익함보다는 서로 상처만 입은 채 무익하게 끝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대로 적어도 불교와 화이트헤드만큼은 이런 장애물을 피할 수 있는
체계를 자신들 안에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고정 불변하는 완벽한 철학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생성과정 속에 있는 발전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은 화이트헤드와 불교철학을 비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되,
한편으로 서로 철학적인 공통점들이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 논의를 전개하면서 동시에
상호 다른 점들도 솔직히 지적해 내는 것을 또 하나의 목적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불교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은 여러 각도에서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철학과 과학철학을 비교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는 양자의 우주론을 비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우주론으로 필자가 지칭하는 것은 일종의 세계관이다.
과학철학은 물론이고 어느 종교이건 세계관이 없는 종교는 없을 것이며,
이것이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표현될 때는 일종의 우주론이 된다.
특히 불교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이 일견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다르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우주론적인 전제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주론을 비교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우주론을 비교하다 보면 서로가 만물의 실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른바 철학 용어로 존재론,
혹은 실재론의 문제가 될 것이다.
불교철학이나 화이트헤드 철학이나 동일한 실재관,
즉 사물의 본질을 생성과 과정으로 보는 실재관을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를 주제로 놓고서 비교하는 작업은 언제나 흥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대개 실재론을 비교하다 보면 일반적인 비교에 그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약점을 피하기 위해서 필자는 양자를 보다 구체적으로 비교하는 사례를 보여주려 한다.
그러한 사례의 일환으로 필자는 역사와 시간에 대한 양자의 이론을 소개하겠다.
역사와 시간에 대한 양측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들은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어떻게 매우 다른 장르에 속해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2.우주론
우주론을 통해서 불교와 화이트헤드를 비교한다고 말할 때,
혹자는 도대체 불교에 우주론다운 우주론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먼저 던질 수 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우주론을 생각하면서 대개 자연과학과 그것에 근거한 우주론을 염두에 두고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화이트헤디안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우주론은 현대적이지 않기에 어쩌면 초보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화이트헤드는 17세기 이래 발전된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을 두루 섭렵한 후에,
그것에 근거하여 플라톤 이후 진행되어온 서구 철학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려는 철학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전근대적인 과학관에 기초하여 단지 종교적인 세계관 하나에만 주로 관심하여 온 불교철학의 우주론이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불교의 우주론은 그토록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역부족이기만 할까?
물론 불교는 주로 종교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자연과학적 우주론을 전개하지 않는다.
불교의 수많은 경전들이 전혀 과학적 우주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우주론이 현대의 자연과학이 말하는 우주관에 대응될 만한 정교한 과학적 이론을 펼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불교에 우주론다운 우주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주론이란 자연과학적 우주론도 있지만 철학적 우주론도 있으며,
때로는 철학적 우주론이 보다 더 심오하고 폭이 넓은 우주의 의미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의 자연과학적 우주론은 철학적인 우주론의 배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모든 학문은 대개 철학적 우주론을 배경으로 해서 탄생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2) 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그 반대의 경우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철학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을 분석하고 종합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철학은 사회과학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서양에 있어서 플라톤과 그 이전의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의 철학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들의 철학은 대부분 법정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철학을 만들어 내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최근에 이런 문제를 다룬 고전이 우리말로 번역된 바 있다.
콘포드의 책,
《종교에서 철학으로》를 참조하라.
즉 하나의 철학은 경험과학의 근거와 배경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철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탄생되었건,
그것이 일단 탄생된 이후에는 여러 가지 경험과학의 근간이 되곤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요즈음 유행하는 양자물리학의 경우,
동양철학의 우주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그 이론이 더욱 정교하게 정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양자물리학의 경우 역학(力學)에 관한 물리적 실험을 거듭하다 보니 나온 가설이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지만,
한편으로 그런 가설이 하나의 이론으로서 정립되는 과정에서,
만일 양자이론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이전에 존재하던 사건(event)이나 관계에 대한 이론에 전혀 어두웠다면,
그런 새로운 이론을 정립하는 데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과학이론에는 언제나 철학적 이론이 하나의 근거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길게 다룰 지면을 갖고 있지 않다.
필자가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단지 불교철학이라고 해서 과학적 우주론이 약하다든지,
혹은 정교하지 못하다는 주장을 펼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불교철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의 자연과학이 주장하는 가설들을 예측하고 있었다.
요즈음 들어 속속들이 발견되듯이 현대의 물리학이 발견한 세계관은 불교철학이 전제하고 있는 우주관에 매우 비슷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프리조프 카프라(Frijof Capra) 같은 이들의 주장을 보면 불교적 우주관은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양자역학의 세계나
상대성 원리의 세계에 매우 가까운 세계관을 오래 전부터 전제하고 있었다.
이는 앞에서 말한바 철학이 자연과학의 근간이 되면서 그것을 예견하는 전형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논자가 화이트헤드 철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하면서 우주론을 비교의 도구로 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우주론이라는 개념으로서 논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자연 및 지구의
외부환경으로서의 거대 우주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루고 있는 미시적 우주 및 그런 우주에 대해서 사유하고 있는 인간세계의
삶의 원리를 지배하는 일반적인 거대이론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한마디로 세계관이 지칭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을 말한다.
단지 세계관이라는 개념과 우주론이라는 개념에 다른 점이 있다면,
세계관은 주로 정치 경제적이고,
사회 철학적인 면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말하는 것임에 반해,
우주론은 세계를 주로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상정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경우 그의 철학은 철저히 우주론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가 펼치려는 과정 형이상학이나 사변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은 한결같이 올바른 의미의
우주론을 형성하려는 목표로 가득 차 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이렇게 우주론을 형성하는 데 집중되는 것은 그의 철학이 단순히 하나의
과학철학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거대한 형이상학을 건설하는 것을 타깃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의 생각에 따르면,
하나의 철학이 온전한 의미의 철학이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우선 철저하게 현대과학의 결과에 기초해서 합리성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그런 자연과학적인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런 것을 넘어서는 단계,
한마디로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세계를 탐구할 수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즉 “사변철학이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일반적 관념들의 정합적이고 논리적이며
필연적인 체계를 축조하려는 시도이다.
”3)(강조는 필자의 것) 이 주장은 바로 철학이 하나의 우주론으로서 존재하면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요소들,
즉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소까지도 설명하고 해석해낼 수 있는 기능을 할 수 있어야
이상적인 철학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3) 화이트헤드,《과정과 실재》 오영환 역(서울: 민음사),p.49.
이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비교하여 불교철학이 가지고 있는 우주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불교철학은 모든 우주론을 종교적인 입장에서 취급한다는 특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불교 우주론에 있어서 철학은 단지 종교적인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인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왜냐하면 불교도들이 철학을 한다면 그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일 뿐이다.
불교 우주론의 특성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보여져야만 한다.
즉 불교 우주론은 어떤 때에는 논리적인 일관성조차도 요구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아무리 논리가 좋아도 용인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안에 철학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존재 목적이 불교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구원을 획득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은 불교철학에서 왜 과학철학이 사용하는 사변 이성이 선호되지 않고 직관이 선호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물론 사변 이성은 대개 인간 인식의 꽃으로 간주되지만,
동시에 인간이 우주를 통전적으로 조망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데는 오히려 방해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변 이성을 피하고 그것보다 더 깊은 인식의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우주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토론을 종합해 보면,
불교도들이 단지 종교적인 각도에서 우주론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그것의 한계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여기서 과학적인 우주론과 종교적인 우주론 중에서 어느 것이 우월한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전자는 전자의 방식대로 우주에 공헌하고 있고 후자는 후자의 방식을 따라서 우주에 공헌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적인 우주론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반면에 불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세계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3.존재에 대한 분석
화이트헤드와 불교는 서양철학적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존재론적으로 비주류의 입장에 서왔다.
서구 사조의 주류 존재론은 실체론(sub-stantialism)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실체론이 어떻게 서구에서 주류 존재론으로 자리잡게 되었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합리주의를 이해해야만 한다.
서구의 주류 인식론이었던 합리주의가 실체론을 주류 존재론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구에서 합리주의란 어떻게 태동하였는가?
인간은 인식론적으로 불합리한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서구적 사고가 발아된 그리스 철학만 보더라도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모두 불합리성을 싫어했다.
서구철학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탈레스는 물론이고 존재론의 아버지라 명명되는 파르메니데스도 불합리를 싫어했다.
따라서 그들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나 생성하고 있는 것이면 안 되고,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것이란 무질서와 변화하는 것에서 불변하고 질서가 잡혀 있는 것을 찾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아르케(arche) 즉 원리를 추구했는데,
원리란 변화하는 것 속에서 고정된 원칙을 찾아내는 도구이었다.
그런 것이 있어야 세계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리를 찾는 것은 카오스의 혼돈에서 질서의 우주를 찾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우주’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cosmos(질서)’로 번역되는 것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서구인들이 왜 합리주의를 선호했으며,
또한 어떤 이유에서 합리주의가 실체론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된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코스모스,
즉 인간을 둘러싼 자연세계가 질서가 잡혀 있는 우주라고 보았으며,
이런 우주는 인간의 합리정신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원리에 따라 질서 있게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아르케(arche),
즉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를 불로 보든지 물로 보든지,
혹은 존재로 보든지,
모든 사물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實體,
sub-stance)로서 이루어져야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것은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실체론적 존재론이 주류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불교와 화이트헤드가 서구적 입장에서 볼 때 비주류의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불교와 화이트헤드는 생성,
변화,
과정 등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참 실재이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이 연기(緣起)와 공(空)의 이론으로 설명되었다.
본래 만물이 고통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불교의 심리학적인 분석은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존재론적인 분석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다시,
모든 존재는 오온(五蘊)의 합에 지나지 않기에,
존재를 해체하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공뿐이라는 철학적인 실재론으로 발전했다.
엄밀히 말하면 실재는 없다는 실재론이므로 불교의 실재론은 비실재론(non-realism)이다.
한편 이런 이론은 연기론으로 강화되었는데,
만일 삼라만상의 만물들이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것에서 가능한 것이므로
이런 상호적 의존관계가 없다면 존재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삼라만상의 모든 만물은 무상하다는 것이 연기론의 핵심이다.
서구에서 ‘연기’를 ‘의존적 상호 발생(dependent co-origination)’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번역이다.
관계와 상호 생성의 입장에서 실재를 바라다보는 점에서는 화이트헤드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연기이론이 화이트헤드 철학에서는 ‘상대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relativity)’로 나타난다.
4) 여기서 상대성의 원리란 세상에 고정되고 문이 닫힌 채 홀로 존재하는 실체 같은 것은 없고,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상대성 이론은 그저 단순한 종류의 ‘관계 이론’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의 존재는 다른 존재 안에 내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그것 안으로 들어간다는 이론이 화이트헤드의
‘상대성의 원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체는 다른 존재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전통적 주류 서양철학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이었다.
4) 《과정과 실재》의 p.80을 참조하라.
한마디로 화이트헤드는 실체라는 개념이 서구철학의 모든 문제점을 담고 있다고 보았기에,
실체 개념을 극복하는 철학을 세우는 것을 평생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고정되어 홀로 존재한다는 실체(substance)라는 개념은 하나의 추상이며,
우리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것은 과정과 순간적인 계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런 존재를 그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라고 불렀는데,
이런 현실적 존재는 그것이 생성하자마자 곧 소멸되는 특성을 갖는다.
우리는 여기서 현실적 존재라는 전문적 용어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개념이나,
혹은 ‘존재’라는 철학 용어 때문에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본래의 의도를 오해해서는 아니 된다.
비록 현실적 존재를 존재의 최종단위로 명명할지라도 그것의 본질이 ‘사건(event)’이요
‘생성(becoming)’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현실적 존재라는 어휘의 ‘존재’는 이미 보았듯이 ‘being’의 번역이 아니다.
그것은 ‘entity’의 번역으로서 우리말의 ‘것’에 가깝다.
좋은 것,
나쁜 것 등에서 사용되는 ‘것’이라는 단어는 고정된 실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거기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이트헤드 철학에는 존재론이 없다.
존재론은 과정론으로 대체되고 있다.
5) 존재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을 굳이 찾자면 사건,
혹은 계기(occasion)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독자가 자주 듣게 되는 단어인 ‘현실적 존재’도,
엄밀히 말해서는 ‘현실적 사건’이요,
‘현실적 계기’라고 생각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건이나 계기는 분명히 실체라는 개념을 피하기 위해 선택된 말이며,
관계와 생성으로서의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 선택된 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는 분명히 불교의 연기론이나 공의 철학과 흡사하므로 필자는
여기서 그것이 얼마나 유사한지 좀더 분석해 보겠다.
5) 여기서 말하는 과정론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여러 가지 다른 용어로 나타난다.
우선 과정은 ‘합생(concrescence)’ 이론으로 나타나는데 ‘합생’은 사물이 자신의 것을 갖는 과정을 말한다.
한편 과정은 ‘전이(transition)’의 이론으로도 나타나는데,
‘전이’는 사물이 타자를 위해서 먹이가 되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이런 과정론은 화이트헤드 철학의 인식론이자 동시에 존재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합생과 전이에 관한 이론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과정과 실재》의 3부를 참조하라.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실재로 명명되는 현실적 존재는 느낌(feeling)과 파악(prehens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갑자기 전문적인 용어가 등장해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을 불교 개념과 비교하면서 쉬운 용어로 표현해 보자.
불교의 오온(五蘊)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거니와,
이를 잘 분석해 보면 느낌이나 파악과 다르지 않다.
우선 색·수·상·행·식 중에서 ‘색’은 원어에서는 ‘ru?a’인데 이는 잘 알다시피 물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세계란 이런 물질뿐만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수(受)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 즉 원어의 ‘vedana阪??영어로는 ‘feeling’으로 번역되고 있다.
거기에 나머지 상·행·식은 영어로는 perception·impulse·consciousness로 번역되고 있는데,
화이트헤드의 인식론을 공부한 사람은 이런 불교의 오온 이론을 들으면서 적지 않게 놀라게 될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인식론을 구성하고 있는 파악이론과 명제이론을 공부해 보면 방금 우리가 말한 색·수·상·행·식과
같은 개념들이 거의 순서까지 비슷하게 등장하면서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이나 인식론이 불교에서 차용되었다거나,
혹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불교적 개념들을 현대 물리학과 철학을 동원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주장들에 대해서 그 진위 여부를 토론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흥미 있게 관심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적 존재라는 최종적 실재는 언제나 다른 것과의 관련 하에서만
생성되어 가는 과정적 존재라는 것이다.
이미 말한 대로 이런 현실적 존재는 또다시 ‘느낌’이나 ‘파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느낌이나 파악의 이론은 현대 물리학의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양자(量子)나 미립자 차원까지 내려가 보면 모든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극미한 원소(元素)들은 물질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사건이나 해프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상황이 이렇다면 이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어서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성이나 의식과 같이
고도로 발달된 인간의 인지방법을 동원할 수는 없고,
단지 ‘느낌’이나 ‘파악’ 같은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가 ‘느낌’이라는 다소 넓은 의미의 인지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보다 하위에 있는 존재들,
즉 원소들이나 미생물들이 타자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런 배경을 감안한다면,
‘느낌’이라는 개념은 인식론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자들과 자신이 합치되어 존재를 구성할 때의 단위를 말하기도 하는
존재론적인 개념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는 그것이 미물이든 인간이든 혹은 그것을 구성하는 미립자이든 모두 느낌과 같은 기본단위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이 해체되면 남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불교가 관계를 연기로 표현하고 실재를 공으로 표시한 것이나,
한편 화이트헤드가 관계를 과정으로 표현하고 실재를 생성으로 표시한 것은 관점의 차이뿐이지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의 관점은 자연과학적으로 영향받은 관점이기에 존재를 분석하면서 그것들의 관계를 볼 때,
그것을 시간 위상 위에서 보게 된 것이다.
즉 존재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의 국면을 통과하면서 생성하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아야만 자연과학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존재,
즉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현실적 존재는 사실은 엄밀히 말해 과거의 산물이다.
예를 들어 그 현실적 존재를 ‘나’라고 가정한다면,
그런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나의 경험들,
즉 방금 전에 내가 경험한 것들이 하나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현재는 과거의 종합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종합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무’요 ‘공’이다.
결국 화이트헤드가 불교와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는 말은 이런 뜻에서 다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와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전혀 차이가 없는가? 이제까지 우리는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면을
주로 보았으니 이제부터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것을 보도록 하자.
앞으로 보면 알겠지만,
존재론에 관한 한 어떤 면에서 양자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차이도 별 것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를 최종단위로 말했을 때,
‘현실적’이라는 말을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현실존재가 과거의 종합으로 이루어졌어도 그 과거의 존재는 어쨌든 현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말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존재뿐이다.
과거는 지나갔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현재의 존재,
즉 현실적 존재에 입각하지 않은 모든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은 추상일 뿐이다.
구체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것은 현재의 경험에서 출발해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존재론적으로 볼 때,
‘현실적 존재’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현실존재가 과거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것이 종합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의 수많은 경험들이 통합될 때에,
거기에는 누군가 통합하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입각점이 있어야 통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의 수많은 경험들을 통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나의 자아가 있다고 가정하자.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그런 자아는 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생성하는 과정에 있고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그런 하나의 자아가 있어야 나의 과거의 경험을 통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아가 없이는 나는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고 회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여기 지금 존재하는 것,
즉 현실적 존재가 최종 실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런 것 없이는 느낌도 파악도 발생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느낌도 파악도 현실적 존재가 있기에,
느낌과 파악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말이다.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이 보여주는 이런 특성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과정 실재론이 마치
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실재론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실재가 전혀 무(無)요 공(空)이라는 입장,
즉 대승의 화엄과 선(禪)이 주장하는 입장과는 상당히 다르게,
화이트헤드는 현실존재라는 최종적 존재 단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대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파악과 느낌이 단지 현실적 존재 안에 있어야 실재적이라고 말했으니,
이는 결국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최종 실재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는 결국 실체론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일 화이트헤드가 설일체유부와 비슷하다면,
과연 그는 화엄이나 선이 말하는 과정 존재론에 미칠 수 있을까? 이에 답변하는 것은 사실 많은 지면을 요한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간단하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해 보기로 하겠다.
사실 대승의 화엄과 선과 비교할 때,
화이트헤드의 실재론이 서구의 실체론적인 이론처럼 보이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만 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불교와 화이트헤드,
특히 화엄과 선의 공관(空觀)에 입각한 무(無)의 존재론과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론은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 그런가?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현실적 존재는 과정적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실재를 성취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주체성을 잃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화이트헤드에 있어서는 하나의 실재가 있더라도 그것이 고정 불변하는 것으로서의 실체가 아니라,
과정과 생성으로서의 실재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을 획득하자마자 곧 자신을 잃는다.
흐르면서 생성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는 언제나 자성(自性)을 얻더라도 곧 잃게 된다.
자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사건이 타자와의 관련 하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를 만들어냈고,
그런 다른 것이 새로이 생성되었으니 자성이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자성이 있다고 가정하게 된 것은 타자에 의해서 그렇게 인정된 것이지 자성이 참으로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획득하는 생성으로서의 자성적 과정과 다른 것에게 자신을 주는 과정,
즉 소멸적 과정이 있을 뿐이다.
6) 한마디로 생성과 소멸이 있을 뿐이지,
존재(being)는 그 안에 없는 셈이 된다.
6) 여기서 필자가 생성이라고 사용하는 용어는 이미 앞에서 말한 바대로,
화이트헤드 전문용어로서는 합생(concrescence)이라고 명명되며,
소멸이라고 번역되는 과정은 전이(transition)라고 명명된다.
즉 과정 안에 두 가지 양상이 있으니 하나는 합생이고,
또 하나는 전이라는 말이다.
존재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생성하고 소멸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과정 안에서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양상을 생성이라 하고,
존재를 잃는 것처럼 보이는 양상을 소멸이라 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전문용어로 말하면,
현실적 존재는 객관적 실재를 얻자마자 자신의 ‘주체적 직접성(subjective immediacy)’을 잃는다.
한마디로 모든 현실적 존재는 자성(自性)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과거의 존재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