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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의 관계에 관한 연구
목 차
서 론 3
1. 연구의 의의 3
2. 연구의 방법 4
Ⅰ.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 5
1. 죠지 래드(George E. Ladd) 5
1) 일곱 재앙들의 해석 5
(1) 일곱 인 재앙 5
(2) 일곱 나팔 재앙 6
(3) 일곱 대접 재앙 6
2) 일곱 재앙들의 관계 7
(1) 인과 나팔의 관계 : 부분적 중복 7
(2) 나팔과 대접의 관계 : 연속적인 재앙 8
3) 요약 및 평가 8
2. 죤 왈부드(John Walvoord) 9
1) 일곱 재앙들의 해석 10
(1) 일곱 인 재앙 10
(2) 일곱 나팔 재앙 10
(3) 일곱 대접 재앙 11
2) 일곱 재앙들의 관계 : 연속적인 사건 11
3) 요약 및 평가 12
3. 죤 코튼(John Cotton) 13
1) 일곱 재앙들의 해석 14
(1) 일곱 인 재앙 14
(2) 일곱 나팔 재앙 14
(3) 일곱 대접 재앙 15
2) 일곱 재앙들의 관계 : 연속적인 사건 16
3) 요약 및 평가 16
4.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17
1) 일곱 재앙들의 해석 18
(1)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원리 18
(2) 일곱 인 재앙 18
(3) 일곱 나팔 재앙 19
(4) 일곱 대접 재앙 20
2) 일곱 재앙의 관계 : 점진적인 병행 21
3) 요약 및 평가 22
Ⅱ. 요한 계시록의 구조와 미래 대환난 23
1. 요한 계시록의 구조 23
2. 재앙과 미래 대환난의 관계 25
1) 미래 대환난설의 증거구절들 26
2) 증거구절들에 대한 재 고찰 27
(1) 예레미야 30:7 28
(2) 다니엘 12:1 28
(3) 감람산 강화(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30
Ⅲ. 주석적 고찰 31
1. 6장 1절 - 9장 21절 31
1) 두루마리의 정체 32
2) 일곱 인 재앙 33
(1) 보편적인 재앙 33
(2) 순교자들의 호소와 종말의 도래 34
3) 일곱 나팔 재앙 34
(1) 신적(神的) 심판 35
(2) "진노의 큰 날" 36
(3)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관계 37
2. 10장 1절 - 16장 21절 37
1) 삽입장면 37
2) 일곱 대접 재앙 38
(1) 최후의 재앙 38
(2)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관계 39
(3) 재앙과 그리스도의 재림 41
결 론 41
참고문헌 43
서 론
1. 연구의 의의
요한 계시록은 신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무수한 상징들, 이해하기 어려운 다양한 환상들, 흥미로운 숫자들, 그리고 난해한 묵시문학적 표현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이 책을 잘 읽으려 하지 않는다. 요한 계시록에 대한 이러한 외면은 고대로부터 보편적으로 있어 왔던 일이며, 이후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마저 계속된 일이었다. 그러면 계시록이 이처럼 난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그 주된 이유를 계시록 5-16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 일곱 인,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 재앙의 관계에 대한 혼란에 있다고 생각한다. 계시록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는 이 부분은 난해함의 극치를 달린다. 세 재앙들, 곧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이 연속적으로 언급되다가 갑자기 중간에 전혀 다른 장면이 나오곤 하는 이 부분은 독자들로 하여금 당혹감을 감출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본 논문에서 이들 재앙의 상호 관계를 명확히 밝혀 보고자 한다. 우리는 본 논문에서 일곱 인 재앙이 일곱 나팔 재앙을 이끌어 온다는 사실과, 종말의 날(재림의 날)에 일곱 나팔 재앙과 거의 동시적으로 일곱 대접 재앙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일곱 인 재앙은 역사상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재앙임에 반해,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재앙은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사건임이 우리의 논의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논의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익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 재앙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분명한 정립은 이 책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둘째, 이 모든 재앙들이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쏟아질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신자들은 주님이 당신의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며, 불신자들은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죄악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2. 연구의 방법
우리는 먼저 Ⅰ장에서 각 천년왕국설을 대표하는 네 명의 신학자들이 이들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주로 그들의 주석을 참고하여 살펴 볼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네 명의 신학자는 죠지 래드(George E. Ladd), 죤 왈부드(John Walvoord), 죤 코튼(John Cotton),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인데, 이들은 각 천년왕국설을 대표하는 학자들인 동시에 또한 자신들의 요한 계시록 주석에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를 비교적 많이 언급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를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은 논의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크게 유익할 것이다. 그런 다음, Ⅱ장에서 요한 계시록의 구조를 살펴보고, 재앙들과 미래 대환난의 관계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우리는 계시록의 구조를 기존의 틀에 일치시키지 않고, 교회의 구원과 악인에 대한 심판이라는 새로운 양대 구도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은 재앙들 사이에 간간이 등장하는 삽입장면들의 이유를 밝히는 데 유익할 것이다. 계시록의 구조를 밝힌 이후에는 문맥적인 상황을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일곱 재앙들이 미래 '대환난'의 상황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전통적인 견해가 비판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미래에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기존의 학설 자체를 비판할 것이다. 미래 대환난설은 이미 학자들 사이에 거의 정설로 굳혀져 있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이 말하는 것만 믿어야 하며, 인간의 사변에 의해 형성된 모든 인위적인 교의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Ⅲ장에서는 우리의 논의의 내용을 이루는 본문인 계시록 5-16장을 주석할 것인데, 이때 우리는 가급적 유대 문학의 틀 속에서 본문을 보지 않고 성경의 영감성 자체를 많이 염두에 둘 계획이다. 비록 요한 계시록이 묵시문학적 장르에 속해 있으나, 이 책은 다른 동류(同類)의 책들과 달리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작품의 인위성(人爲性)이 가급적 배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필립 휴즈(Philip Hughes)는 "요한 계시록에 담겨 있는 보화는 믿는 자들의 지성과 열의로만 채굴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과 진지하고도 조심스러운 지성적 자세로 본 논문에 임하고자 한다.
Ⅰ.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
1. 죠지 래드(George E. Ladd)
역사적 전천년주의자인 죠지 래드는 요한 계시록의 구조를 매우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계시록은 네 개의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환상은 "와서 보라"는 하늘의 음성과 함께 시작되며(1:9, 4:1, 17:1, 21:9), 이 음성에 따라 첫번째 환상(1:9-3:22), 두번째 환상(4:1-16:21), 세번째 환상(17:1-21:8),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환상(21:9-22:5)이 펼쳐진다고 한다. 이 중에서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일곱 재앙들은 두번째 환상에 해당되는데, 래드는 이 두번째 환상부터를 미래, 특히 세상의 종말에 일어날 일로 본다. 그는 인, 나팔, 대접 재앙이 동시에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과 나팔 사이에, 그리고 나팔과 대접 사이에 각각 어떤 관계가 있다고 구별해서 이해한다. 따라서 우리도 이 두 관계를 구별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일곱 재앙들의 해석
(1) 일곱 인 재앙
래드는 일곱 인 재앙에 대하여 말하기를, 처음 다섯 인은 역사상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종류의 재해들이며(첫번째 인은 복음의 전파임), 여섯째 인은 종말을 이끌어 오는 것이고, 일곱째 인은 일곱 나팔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일곱 인은 종말 그 자체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악한 자들이 마지막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된 예비적 재앙이다.
(2) 일곱 나팔 재앙
그는 일곱 나팔 재앙을 두루마리의 실제 내용으로 적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를 결정했던 사회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라고 한다. 처음 네 나팔 재앙이 자연에만 영향을 주는 것은 인과 마찬가지로 악인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며, 이것들이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려진 재앙과 유사한 것은 그것이 곧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은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비록 묵시자들과 선지자들이 유브라데 강을 중심으로 하여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지만, 적어도 본문은 그러한 실제적인 전쟁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나팔은 '종말 그 자체'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의 기간'을 소개하기 위한 것으로, 다소 범위가 넓은 기간이라고 한다.
(3) 일곱 대접 재앙
그는 일곱 대접 재앙 역시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간접적인 목적을 가진다고 한다. 처음 네 대접은 각각 땅, 바다, 물, 해에 쏟아졌으나 다섯째 대접은 짐승의 보좌에 직접 쏟아졌는데, 래드는 이를 사단적인 문화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것으로 본다. 여섯째 대접은 소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불리는 재앙으로 매우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래드는 이 전쟁을 영적인 전쟁이 아니라 실제 전쟁으로 본다. 즉, 이 전쟁은 '동방의 왕들' 곧 이방의 무리가 전 세계의 왕들과 힘을 합하여 메시야와 벌이는 전쟁이라고 해석한다. 마지막 일곱째 나팔 재앙은 짐승의 권세의 장소인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7-18장에 자세히 나와 있음)으로서, 이를 미리 말하는 것은 "요한의 예기적인 진술 방식"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그는 종종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을 이미 이루어진 사실인 것처럼 표현한다는 것이다.
2) 일곱 재앙들의 관계
(1) 인과 나팔의 관계 : 부분적 중복
래드는 인과 나팔이 부분적으로 중복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두 재앙 사이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사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첫째, 인과 나팔은 모두 종말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섯째 인은 주님의 날의 도래를 표시하는 우주적 대이변과 관련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일곱째 나팔도 우리에게 종말의 도래를 알려 주고 있다고 한다. 둘째, 인과 나팔은 둘 다 막간의 내용에 의해 중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에는 두 무리들에 대한 환상이 개입되어 있고,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는 천사와 작은 책, 그리고 성전의 측량에 대한 환상이 개입되어 있는데 이러한 유사점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일곱째 인과 일곱째 나팔은 다른 여섯 재앙들과 달리 구체적인 화를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곱째 인은 어떤 내용도 갖고 있지 않고 다만 일곱 나팔들을 담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일곱째 나팔도 어떤 재앙이나 화를 갖고 있지 않고 다만 일곱 대접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래드는 이러한 유사점을 근거로 하여 두 재앙이 어느 정도 중복(병행)된다고 주장한다.
(2) 나팔과 대접의 관계 : 연속적인 재앙
이제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나팔과 대접 사이에도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 두 재앙들 사이에는 유사성보다는 상이성이 더 많다고 한다. 첫번째 상이성은, 강도면에서 대접 재앙이 나팔 재앙에 비해 훨씬 크고 심각하다는 점이다. 처음 네 나팔들은 인간 자체라기보다는 인간의 환경에 임하였지만, 대접 재앙은 처음부터 직접 인간에게 내리고 있다. 또한 나팔 재앙들은 3분의 1 정도가 해를 받았지만 대접 재앙에서는 그 제한이 없다. 두번째 상이성은, 인 재앙이나 나팔 재앙은 여섯째와 일곱째 사이에 막간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는 막간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단지 다른 재앙들과 달리 일곱째 대접은 그 자체가 내용(바벨론의 무너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이할 뿐이다. 따라서 래드는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을 별개의 재앙으로 본다. 그는 이것들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연속적으로 떨어지는 일련의 재앙들로 본다.
3) 요약 및 평가
지금까지 우리는 래드가 일곱 인, 나팔, 그리고 대접 재앙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며, 이들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래드는 이 재앙들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 계시록 해석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문제를 비교적 열심히 다루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래드의 견해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래드는 인 재앙과 나팔 재앙이 부분적 병행(중복)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인 재앙과 나팔 재앙은 그 내용에 있어서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시간적으로도 인은 두루마리를 떼기 전의 예비적 사건임에 비해 나팔은 두루마리의 내용 그 자체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재앙들이 부분적으로 중복된다는 견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둘째, 그는 일곱 재앙들의 목적을 최후의 심판 전에 주어지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곧 이 재앙들 자체가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함의한다. 처음 다섯 인들은 그것들이 오랜 기간 동안 존재할 역사상의 사건들이라고 볼 때 수긍이 간다. 그러나 여섯째 인의 상황은 종말의 예비적인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하다. 또한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도 그 재앙의 강도를 고려해 볼 때 도저히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지지 않으며, 실제로 본문은 회개한 자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9:20, 16:8). 셋째, 래드는 여섯째 나팔의 전쟁을 영적인 전쟁이라고 말했으나, 여섯째 대접의 전쟁은 실제 전쟁이라고 말하므로 해석의 통일성을 잃어버렸다.
2. 죤 왈부드(John Walvoord)
세대주의자인 죤 왈부드는 요한 계시록을 철저히 문자적, 미래적, 그리고 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ly) 이해한다. 그는 2-3장은 교회 시대의 여러 단계들을, 4-18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 마지막 7년간을, 19장은 예수님의 재림을, 20장은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을, 그리고 21-22장은 영원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왈부드는 "4장이하의 사건들을 미래의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 외에 다른 해석의 체계들은 모순점들이 서로 상충되어 미궁에 빠지고 만다"고 분명히 말한다. 결국 그는 6장 이후에 나오는 인, 나팔, 대접 재앙을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소위 "대환난"(The Great Tribulation)의 기간에 있을 일련의 사건들로 본다.
1) 일곱 재앙들의 해석
(1) 일곱 인 재앙
왈부드는 요한 계시록 전체에서 6장은 가장 중요하고 중심축이 되는 장들 중 하나라고 강조한다. 그는 6장의 사건들을 해석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중요한 전제적 답변을 제시한다. "첫째, 인을 떼면서 시작되는 사건들은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에 되어질 일들이다. 둘째, 이 인봉들은 교회의 휴거 뒤에 일어날 사건이다. 셋째, 다니엘 9:27에 나오는 마지막 칠십 이래의 마지막 일주간은 재림 전의 마지막 기간으로 인을 떼는 기간과 일치한다. 넷째, 6장 이후의 환난의 사건들은 렘 30:7, 단 12:1, 마 24:21이 말하는 "큰 환난의 기간"이라고 언급되어지는 '후 3년 반'을 지칭한다. 다섯째, 요한 계시록의 사건들은 소위 '감람산 강화'와 그 순서가 유사하다." 왈부드의 이러한 전제들은 인 재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철저히 배제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기에 쏟아질 재앙들 외에 다름 아니다.
(2) 일곱 나팔 재앙
왈부드는 처음 네 나팔을 대환난기에 일어날 천체지변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다섯째 나팔에 나오는 '다섯 달 동안의 황충의 공격'은 일정한 기간 동안 마귀가 악한 자들을 공격할 것임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보고, 여섯째 나팔의 전쟁은 단 11:44의 예언의 성취로서 2억의 군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이 개입된 실제 전쟁으로 본다. 또한 일곱째 나팔의 재앙은 16장에 있는 일곱 대접의 재앙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며, 또 그것에 대한 도입이 된다고 말한다.
(3) 일곱 대접 재앙
왈부드는 계시록을 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ly) 보기 때문에 대접 재앙이 시기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가장 가까운 재앙이라고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일곱 대접들은 각각 독종의 고통, 바다(전 세계를 의미)에 있는 생물의 죽음, 죽음이 물과 그 근원에로 확대됨, 기상악화로 인한 재앙, 종기의 고통, 마지막 세계대전, 그리고 바벨론과 전 세계의 철저한 파괴를 의미한다. 그는 바벨론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 왕국은 마지막 시대에 유브라데 강가에 세워질 실제 왕국으로서 마지막 세계 정부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대접의 재앙은 사단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더불어 세상의 모든 도시들이 잿더미가 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무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2) 일곱 재앙들의 관계 : 연속적인 사건
앞에서 언급했듯이 왈부드는 요한 계시록을 철저히 문자적, 미래적, 그리고 연대기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층적인 방법을 택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에 점점 다가갈수록 사건은 점점 더 가속화되며 더 큰 재앙을 동반한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의 재림이 계시되면 그 이후의 장들에서는 광대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해서 간단히 요약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인, 나팔, 대접 재앙의 관계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연속적이다. 그는 대환난기에 일곱 인 재앙이 일어난 후 일곱 나팔 재앙이 일어나고 그후 일곱 대접 재앙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그래함 스크로기(W. Graham Scroggie)와 불랭카드(C. A. Blanchard)등의 입장과 동일한 것인데, 그들은 요한 계시록에는 비록 세 가지의 사건들이 있으나 이들은 사실 단 하나의 사건이라고 하였다. 물론 왈부드는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 사이에 유사점이 많은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유사성이 곧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나팔과 대접을 비교해 볼 때 비록 심판의 순서에 있어서의 유사성이 많이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가지 차이점들도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결국 왈부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와 올수록 심판이 점점 더 절정에 달하고 심판의 정도가 강해지며(intensive), 범위가 넓어진다(extensive)고 말한다. 세상 마지막에 있을 심판은 "세계를 마치 전동(電動)망치가 신속히 내려치는 것처럼" 연속적으로 내려치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3) 요약 및 평가
왈부드는 요한 계시록의 주요 의도를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에 동반할 사건들을 제시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비교적 건전하게 말했다. 그리고 계시록의 중심 내용인 일곱 인, 나팔, 대접 재앙은 연속적으로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이라고 명료하게 이해하였다. 왈부드의 견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앞두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의 견해가 명료성과 단순성을 가지고 있어서 계시록을 읽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먼저, 그의 세대주의 신학적 전제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는 계시록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였고,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이해하였다. 게다가 계시록의 대부분을 오직 세상 종말에 있을 일들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계시록은 그리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계시록은 무수한 상징과 독특한 묵시 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난해한 책이다. 둘째, 왈부드는 일곱 재앙들이 미래 대환난기에 일어날 사건들이라고 하였다. 그는 계시록 6-18장이 예수님의 재림전에 3년 반 동안 있을 대환난기에 일어날 사건들이며, 따라서 일곱 재앙들 역시 이 기간안에 있을 일들로 보았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겠지만 소위 '미래 대환난설'은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론이므로 그의 해석은 근본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셋째, 왈부드는 재앙들 사이의 상호 유사성을 너무 무시해 버린다. 요한은 인과 나팔, 그리고 대접 재앙간의 형식적, 내용적 유사성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왈부드는 이들 재앙들 사이의 유사성을 모두 무시한 채 오직 차이점만을 강조하여 이들이 연속적인 재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 죤 코튼(John Cotton)
에드윈 프룸(Edwin Froom)에 따르면, 죤 코튼은 "신대륙에서 요한 계시록을 최초로 해설한 청교도"였다. 그는 교회의 개혁을 통하여 뉴잉글랜드 대륙에 천년왕국이 건설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의 이러한 사상으로 다니엘 휫트비(Daniel Whitby)와 죠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와 같은 18세기의 신학자들이 후천년왕국설을 고백하였고,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과 찰스 핫지(Carles Hodge)와 같은 19세기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낙관적인 종말사상을 피력할 수 있었다. 코튼은 요한 계시록이 교회사를 기록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특히 일곱 재앙은 교회를 핍박하는 로마(천주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 일곱 재앙들의 해석
(1) 일곱 인 재앙
코튼에 의하면, 일곱 인은 콘스탄틴 대제 이전 이교적인 로마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며, 일곱 나팔은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 황제들이 다스리던 기독교적인 로마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것이요, 일곱 대접은 교황들이 다스리던 반기독교적인 로마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콘스탄틴의 개종 이전 이교적인 로마 제국은 기독교회에 대해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결국 승리하였고 보존되었다. 이것이 6장의 내용을 이룬다. 하지만 사실 코튼은 계시록을 해석하면서 나팔과 대접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졌지만 인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의 저서에서 인에 대한 그리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2) 일곱 나팔 재앙
코튼에 의하면, 일곱 나팔이 울려 퍼지는 것은 기독교적인 로마 제국 내에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콘스탄틴의 개종 이후 로마인들은 형식적인 개종을 했을 뿐 진정한 마음의 개종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에는 여전히 우상 숭배와 이교적인 풍습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 나팔이 울리자 땅이 심판 받았다. 코튼은 '땅'을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해석해서, 이 재앙을 "무정하고 다투기 좋아하는 저급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하였다. 둘째 나팔의 재앙은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빠지는 것이었다. 코튼에 의하면, 큰 산은 계급구조이며, 바다는 교회이므로 이 재앙은 곧 교회 안에 계급구조적인 정치제도가 도입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셋째 나팔은 교회 내에 이단적인 미신운동이 성행할 것을 보여주는 징조이며, 일월성신이 빛을 잃는 넷째 나팔의 재앙은 이단운동과 함께 "타락한 기독교회 상태에서 태양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두워진 중세의 암흑시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다섯째 나팔에서 등장하는 황충은 로마 천주교회의 수도승과 수사들이며, 여섯째 나팔에서 유브라데강의 네 천사가 놓임을 받는 것을 모슬렘(특히 터어키의 네 종족)의 일어남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일으키셔서 우상숭배와 미신에 빠져 있던 교회를 심판하셨다고 해석하였다.
(3) 일곱 대접 재앙
코튼은 일곱 대접 재앙을 교회의 부패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본다. 그에 의하면, 첫째 대접은 헨리 8세와 메리 여왕과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을 의미하며, 둘째 대접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로마 천주교회의 신학자 위에 부어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셋째 대접에서의 "강과 물의 근원"을 사제와 예수회의 수사들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엘리자베스 여왕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고, 넷째 대접에서의 '해'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활개를 치는 주요 통치자들로서, 특히 오스트리아의 의회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다섯째 대접에서 심판받은 짐승의 보좌는 로마 자체를 가리키며, 특히 로마 천주교회를 이끌어 가는 감독정치 체제(Episcopacy)를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여섯째 대접에서 유브라데강이 마른 것은 로마 천주교회가 권세를 행사할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즉, 유브라데 강의 마름은 로마 주교들의 수입원이 줄어 드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겟돈 전쟁을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천주교회) 사이의 마지막 전쟁으로 이해하였으며, 1618년 로마 천주교회가 개신교회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30년 전쟁에 적용하였다. 또한 마지막 일곱째 대접도 로마 천주교회 위에 떨어진 재앙으로 보므로 모든 진노의 대접들이 로마 천주교회 위에 떨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2) 일곱 재앙들의 관계 : 연속적인 사건
코튼은 교회 역사를 계시록에 비추어 설명하면서 일곱 재앙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곧 일곱 인 재앙으로 로마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표현되었으며, 일곱 나팔에 의하여 교회는 무지와 이단 사상과 인간적인 고안으로 타락하면서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졌는데, 이러한 로마 천주교회의 반기독교적인 경향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재앙들을 역사적인 사건과 결부시키고 있다. 즉, 각 재앙들은 저마다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앙들은 서로 중첩되거나 병행되지 않는다. 오직 재앙에 해당되는 사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각 재앙들은 공통의 대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로마 천주교회이다. 모든 재앙들은 로마 천주교회에 쏟아진다. 비록 그 시대는 각기 달랐으나 그 대상은 로마 천주교회이다. 곧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재앙들에 의해 그릇된 신앙으로 인도하던 로마 천주교회의 어두움이 폭로되고 몰락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번성할 것이라고 코튼은 믿었던 것이다. 결국 코튼은 일곱 재앙들을 각각 구체적인 재앙으로 이해하였고, 시대가 진행되면서 연속적으로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생각하였다.
3) 요약 및 평가
후천년주의자이자 탁월한 청교도였던 죤 코튼은 요한 계시록을 통하여 교회의 낙관적인 미래를 내다보았고, 결국 이를 기초로 하여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계시록 전체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교적인 로마 기독교에 대한 심판보다는 주로 교회의 개혁에 있기 때문에, 그는 일곱 재앙들에 대한 해석보다는 20장의 천년왕국을 해석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일곱 인, 나팔, 대접 재앙들이 로마 천주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 심판으로서 이를 통하여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일곱 재앙에 대한 해석은 그의 주석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이러한 선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는 분명한 기준 없이 각 재앙을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상징으로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의 객관성을 해치는 것이다. 둘째, 그는 각 재앙들이 가지고 있는 유사성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각 재앙들은 명백한 내용적, 형식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코튼은 이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다만 재앙들이 의미하는 구체적인 사건만을 찾고 있다. 셋째, 그는 많은 곳에서 풍유적인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취한다. 계시록의 재앙들은 분명히 상징적이나, 풍유적 해석은 상징적 해석과 분명히 다른 것이다.
4.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무천년주의자인 윌리엄 헨드릭슨은 요한 계시록을 일곱 단원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단원은 서로 병행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간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동일한 기간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헨드릭슨은 각 단원들이 대체로 교회가 승리할 것이고 악한 자들이 최후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헨드릭슨에게 있어서 이러한 구분은 계시록 해석의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되며, 또한 일곱 재앙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1) 일곱 재앙들의 해석
(1)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원리
각 재앙들에 대한 헨드릭슨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계시록의 상징들에 대한 그의 해석학적 전제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작업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상징들의 해석 기준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헨드릭슨은 그의 주석 서론 부분에서 계시록의 상징에 대한 해석 원리를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는 먼저 상징을 해석할 때 상징의 너무 세부적인 부분까지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계시록의 상징을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한다. 첫번째는 새 시대의 시작이나 종말의 경과를 말하는 상징들이며, 두번째는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 사이에 끼인 상징들이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어떤 특수한 사건을 의미하고, 후자는 어떤 특수한 사건이나 역사의 세세한 부분이 아니라 세계 역사 전체를 운용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첫번째 상징의 예는 한 아들과 남아를 낳은 여인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다는 것과(12:1-5), 두 차례의 추수가 최후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14:15 이하) 등이다. 그리고 두번째 상징의 예는 계시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숫자(일곱, 3분의 1, 4분의 1, 144,000 등)와 촛대, 인, 나팔, 대접 등이다. 따라서 헨드릭슨에 의하면, 일곱 인, 나팔, 대접 재앙은 역사상 일어나는 어떤 특수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역사 전체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원리를 의미한다. 즉, 이들은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2) 일곱 인 재앙
헨드릭슨은 처음 네 인을 인류가 당하는 공동의 재난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는 첫째 말을 탄 자를 그리스도로 보고, 나머지 세 말을 탄 자들은 첫째 말을 탄 자들의 수종자, 즉 그의 백성을 강하게 하고 또한 청결케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도구로 본다. 그리고 다섯째 인을 떼었을 때에 등장한 순교자들은 둘째 인을 뗄 때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로서, 이들이 자신들의 보복을 구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과 신뢰를 하나님께 두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결국 그들이 죽었을 때 세상은 하나님을 비웃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존귀와 거룩한 주권과 공의가 보여질 그 날이 오기를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 인은 종말에 대 파멸이 있을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헨드릭슨은 이 진술을 근거로 해서 세상 끝 날에 천체(天體)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만 심판 날의 공포를 이야기하는 상징적 사실(寫實, picture)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상징들을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으로 보는데, 이 본문은 오직 한 가지의 교훈, 곧 교회를 핍박한 세상에 대해 쏟아 붓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의 진노가 매우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인을 뗀 후에 하늘이 반 시쯤 고요했던 것은 전능자의 현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3) 일곱 나팔 재앙
헨드릭슨에 의하면, 일곱 나팔 재앙은 이 시대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재앙으로서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이 재난들은 어떤 특정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어디에서나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목적은 악한 자들에 대한 경고라고 한다. 즉, 나팔은 경고하고 대접은 진노를 쏟아 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째 나팔에서 하늘로부터 땅에 떨어진 별 하나, 즉, 마귀가 무저갱의 문을 열었을 때 그 구멍에서 연기같이 보이는 것이 올라와서 세상을 어둡게 한 것은, 기만과 미혹과 죄와 슬픔과 도덕적 타락이 지옥으로부터 나와서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허락하셨을까? 헨드릭슨은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행악자들의 회개를 위하여 사단의 힘까지도 악인들에 대한 경고로 사용하시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여섯째 나팔의 전쟁을 세상 끝 날에 있을 특정한 나라들간의 실제 전쟁으로 보며, 특히 9:17은 각종 전차와 전쟁 무기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4) 일곱 대접 재앙
헨드릭슨은 일곱 나팔 재앙과 마찬가지로 일곱 대접 재앙 역시 초림과 재림의 기간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심판이나 대접 재앙은 특별히 종말적 양상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한다. 즉, 둘째 나팔이 불어졌을 때에는 바다에 있는 생물 3분의 1이 죽었으나, 둘째 대접이 쏟아졌을 때는 완전한 멸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셋째 나팔이 울렸을 때에는 물의 3분의 1이 쓴 쑥이 되었으나, 여기서는 바다의 전체가 피로 변했다.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은 대접 재앙이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접 재앙이 최후의 심판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는 시대 내내 악인들을 향해 되풀이되는 하나님의 진노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재앙의 최종적인 완성이 분명히 종말에 존재할 것이라고 본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계속적인 심판을 받다가 결국 최종적인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섯째 대접 재앙에 대한 헨드릭슨의 해석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 전쟁이 사사기 4-5장을 배경으로 한다고 말하는데, 그곳에는 드보라의 지도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깃도'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력한 가나안 족속을 이길 수 없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였다. 헨드릭슨은 이런 까닭으로 아마겟돈 전쟁은 성도들이 억압받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자기 백성들의 이익을 위하여 갑자기 능력을 보이며 원수를 무찌르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군사 185,000명이 여호와의 천사에 의해 진멸된 것도 아마겟돈 전쟁의 한 전례가 되며, 우세한 적을 열세의 마카비가(家) 사람들이 무찔러 승리하게 한 것도 아마겟돈 전쟁의 한 모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실제적이고 결정적인 아마겟돈 전쟁은 사단의 짧은 때(계 11:7-11)와 일치한다고 한다. 즉, 적그리스도에 의해 교회가 마지막 환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셔서 그의 백성들을 구해내시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아마겟돈 전쟁이라는 것이다.
2) 일곱 재앙의 관계 : 점진적인 병행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헨드릭슨은 계시록을 일곱 단원으로 구분한 뒤 각 단원은 동일한 시기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각 단원은 동일한 내용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독특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맞게 기록되었다고 한다. 헨드릭슨은 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시록의 일곱 부분은 향상하며 절정에 이르는 순서로 배열되었다. 종말론적인 강조는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최후의 심판은 처음에 '예고'되었고, 그 다음엔 '소개'되었으며, 그 후에는 '설명'되었다." 헨드릭슨의 이 말은, 각 단원이 동일한 시기에 일어날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단순히 동일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재앙의 강도와 심각성은 뒤로 갈수록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곧 인과 나팔과 대접이 뒤로 갈수록 더욱 진전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재앙들의 점진적인 병행은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측면이다. 헨드릭슨은 이 세 재앙들이 시간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사이의 기간에 광범위하게 일어날 재앙들이며, 내용 역시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것이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점을 가진다고 한다. 그는 인 재앙은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팔 재앙은 핍박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한 경고로, 그리고 대접 재앙은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으로 본다. 즉 교회를 핍박(인)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경고되며(나팔),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최종적인 심판(대접)이 내려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 재앙들이 상호 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인 재앙은 반드시 나팔 재앙을 이끌어 오는 것이고 나팔 재앙은 반드시 대접 재앙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3) 요약 및 평가
헨드릭슨은 계시록을 일곱 단원으로 구분하면서, 각 단원은 동일한 시기(초림에서 재림사이)의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점진적인 병행의 관계를 가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단원의 주 내용을 이루는 인, 나팔, 그리고 대접 재앙이 동일한 시기에 일어날 동일한 재앙들이며, 뒤로 갈수록 더욱 진전된 형태를 띠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는 각 재앙들이 구체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상징 해석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러면 이제 그의 주장을 자세히 평가해 보자.
첫째, 헨드릭슨은 계시록을 일곱 단원으로 구분하면서, 각 단원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 사이에 있을 일들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첫째 단원은 교회에 대한 주님의 관심을 서론적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여섯째 단원도 17장에 이어 바벨론의 멸망과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초림에서 재림 사이에 있을 사건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둘째, 헨드릭슨은 재앙들을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원리라고 보면서 세세한 해석을 피하고 전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계시록의 기사는 일정한 구조적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내용을 의도적으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들을 모두 무시하고 무조건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셋째, 헨드릭슨이 각 재앙들을 점진적 병행이라고만 말한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일곱 단원의 점진적인 병행 이론이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과 나팔 사이에 있는 구조적 유사성과 나팔과 대접 사이에 있는 내용적 유사성을 분명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각 재앙들은 명백한 내용상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헨드릭슨은 일곱 재앙들이 특별히 종말에 결정적으로 일어날 사건인 동시에 또한 초림에서 재림 사이에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재앙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설득력이 없다. 먼저, 일곱 재앙의 강도의 규모로 볼 때 신약 시대에 그토록 큰 사건이 보편적으로 일어난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또한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 시대 동안 일곱 재앙들이 악인들에게 임하는 것을 그리 쉽게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 동안의 보편적인 사건(원리)이 종말에 최종적인 심판과 구별된 채 결정적인 사건으로 구체화되어 일어난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Ⅱ. 요한 계시록의 구조와 미래 대환난
우리는 앞장에서 각 천년왕국설을 대표하는 신학자들이 일곱 재앙들의 상호관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 이 장에서 우리는 일곱 재앙들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 계시록 5장에서 16장을 주석하므로써 그들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찾고자 한다. 우리는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먼저 계시록의 구조와 문맥적 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계시록의 문맥이 미래 대환난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할 것이다. 그런 다음, 필요에 따라 선별된 주요 본문들을 자세히 주석 할 것이다.
1. 요한 계시록의 구조
어떤 책이든지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학적 구조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책 전체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구절을 문맥으로부터 고립시켜 해석하므로 그 의미가 왜곡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경우 구조에 대한 선행적 이 해는 더욱 필수적이다. 메릴 테니(Merrill Tenney)는 계시록의 구조가 비록 복잡하지만 이 책의 문학적 구조를 분석하여, 그 저변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이 책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첩경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도날드 거스리(Donald Guthrie)는 지금까지 등장한 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소개하면서, 어느 견해도 결코 확정적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다고 비관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계시록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이 책의 구조를 알아내는 일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계시록의 정확한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계시록의 기록목적과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계시록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Domitian, AD 81-96)에 의해 핍박받던 당시 교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교회가 때로 극심한 박해를 받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임을 말하면서, 교회의 보호와 견인이 결국 주님의 재림에 의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이 책은 교회를 핍박하는 악인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진노를 내리실 것인지를 다양한 상징들을 동원하여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록이 교회에 대한 보호와 악인에 대한 심판의 구도를 가진다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계시록을 자세히 구분해 보자.
A. 서론(1:1-8) : 핍박받는 교회로 하여금 재림을 약속함으로 희망을
가지게 함.
B.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1:9-3:22) : 교회의 보존과 성장을 권면함.
C. 일곱 재앙들(4:1-18:24) : 악인들이 받을 형벌을 예언함.
a. 일곱 재앙의 준비(4:1-5:14)
b. 일곱 인 재앙(6:1-8:1)
ⓐ 일곱 인이 떼어짐(6:1-17)
삽입장면(7:1-17) : 구원받은 교회의 모습을 보여줌.
ⓑ 일곱째 인이 떼어짐(8:1)
c. 일곱 나팔 재앙(8:2-14:20)
ⓐ 일곱 나팔의 준비(8:2-6)
ⓑ 일곱 나팔이 울림(8:7-9:21)
삽입장면 ①(10:1-11) : 교회에 선교 사명을 부여함.
삽입장면 ②(11:1-2) : 교회의 보호를 약속함.
삽입장면 ③(11:3-14) : 교회에 선교 사명을 부여함.
ⓒ 일곱째 나팔이 울림(11:15-19)
삽입장면 ④(12:1-14:5) : 교회와 사단의 싸움에서 교회가 승
리할 것을 말씀함.
삽입장면 ⑤(14:6-20) : 악인의 심판을 경고함.
d. 일곱 대접 재앙(15:1-18:24)
ⓐ 일곱 대접의 준비(15:1-8)
ⓑ 일곱 대접이 부어짐(16:1-21)
삽입장면(17:1-18:24) : 일곱째 대접(바벨론의 멸망)을 보다 상
세히 설명함.
D. 예수님의 재림과 그 이후(19:1-2:15) : 악인들의 완전한 멸망을 말
씀함.
E. 새 하늘과 새 땅(21:1-22:5) : 교회의 최종적 완성을 말씀함.
F. 결론(22:6-15) : 핍박받는 교회로 하여금 재림을 약속함으로 희망
을 가지게 함.
이상과 같은 구분에 따라, 우리는 계시록이 교회의 구원과 악인에 대한 심판의 양대 구도를 가지고 있음을 명확히 알게 된다. 즉, 계시록은 교회와 악인의 각각의 운명을 제시하므로써 교회로 하여금 어려움 중에서 희망을 가지게 하고, 한편으로, 악인들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된 책인 것이다.
2. 재앙과 미래 대환난의 관계
일곱 재앙들간의 상호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피기 전에 최종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믿고 있는 바 일곱 재앙들이 소위 '미래 대환난'(The Great Tribulation)의 시기에 발생할 사건이라는 견해를 비판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미래 대환난설 자체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설일 뿐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먼저 미래 대환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증거구절들을 살펴본 후, 그 구절들을 면밀히 조사할 것이다. 우리의 증명의 결과는 윌리엄 킴볼이 내린 것과 동일하게, "어느 구절도 이 보편화되어 있는 주장(미래 대환난설)을 뒷받침하고 있지 않으며, 마지막 때의 실재 상태는 흔히 현대의 예언 연구가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상황일 것이다."라고 내려질 것이다.
1) 미래 대환난설의 증거구절들
세대주의자 아이언사이드(Henry A. Ironside)는 미래에 대환난이 있을 것임을 언급하는 구절들로 구약에서는 신 4:26-31, 사 17:4-11, 렘 30:4-9, 겔 20:33-38, 단 12:1-4, 욜 3:9-11, 슥 14:1-4를,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마 24:15-29, 막 13:14-27, 눅 21:20-24), 살후 2:1-10, 그리고 계 3:10-11등을 제시하였다. 동일한 세대주의자 다비(John n. Darby)는 그의 유명한 '네 증거구절'(four proof texts), 곧 렘 30:7, 단 12:1, 마 24:21, 막 13:19이 미래의 특별한 환난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하였다. 무천년주의자인 벌코프(Louis Berkhof)는 살후 2:3, 딤전 4:1-2, 딤후 3:1-5, 계 7:13-14등을 미래 대환난을 가리키는 구절들로 제시하면서, 대환난을 예수님의 오심의 징조라고 강조하였다. 한편,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일반적인 환난이 있으나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최후의 결정적인 대환난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고, 죠지 래드는 [The Blessed Hope]라는 책 전체를 통하여 대환난전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는 세대주의자들의 환난전 휴거설을 비판하면서 환난후 휴거설을 주장하였다.
2) 증거구절들에 대한 재 고찰
미래 대환난의 증거구절이라고 믿어져 온 구절들 가운데 신 4:26-31, 사 17:4-11, 겔 20:33-38은 이스라엘의 귀환과 관련있는 구절이며, 욜 3:9-11와 슥 14:1-4은 많은 전천년주의자들에 의해 마지막 전쟁(아마겟돈 전쟁)을 예언하는 구절로 알려져 있고, 딤전 4:1-2과 딤후 3:1-5은 말세에 사람들이 악해질 것임을 예언하는 구절들이며, 살후 2:1-10도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구절로서 이들 모두는 대환난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계 3:10과 7:14의 경우, 그것들을 미래 대환난에 대한 언급이라고 이해할 경우 각각 일곱 교회에 대한 관점에 문제를 일으키게 되며, 계시록의 구조적인 문제와 충돌하기 때문에 이 구절들은 미래 대환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렘 30:7, 단 12:1, 그리고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마 24장, 막 13장, 눅 21장)만이 대환난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구절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이 세 구절을 보다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예레미야 30:7
대환난 문제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렘 30:7에서 나타난다. 대부분의 전천년주의자들은 본 절의 "야곱의 환난의 때"란 미래에 유대인들이 겪을 종말론적 대환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므로써 이 구절이 대환난의 존재를 강력하게 증거하는 구절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는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한다. 그는, 먼저 "비할 데 없이 크니"라는 말을 고통의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하기보다는 긴 기간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어서 '때'(time)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예언이 주전 587년 느브갓네살에 의해 이루어진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에 나온 것인데, 이때 예레미야가 먼 미래에 있을 3년 반 동안의 대환난을 예언했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뵈트너는 이 구절을 미래의 대환난에 대한 예언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이 구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부터 오늘날까지(1948년 이전까지) 계속해서 자신들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수모를 겪을 것임을 예언하는 구절로 본다.
(2) 다니엘 12:1
단 12장은 11장의 연속이므로 11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12장도 달리 해석된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단 11:30까지를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에 대한 언급이라고 이해하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31절이하에 등장하는 왕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언급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예언하는 것이라고 종종 주장한다. 하지만 본문에는 이 왕이 먼 미래에 나타날 인물일 것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다. 또한 다니엘이 30절까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만을 말했는데, 31-39절에서는 미래의 적그리스도를 이중적으로 언급할 어떤 이유나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적어도 본문 자체로서는 이 왕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일 뿐이지 다른 어떤 인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11:40이 "마지막 때에"라고 시작한다 해서 40절 이하를 종말의 상황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마지막 때가 언제나 종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으며, 40-45절을 새로운 내용이라고 보기보다는 앞의 내용에 대한 요약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오히려 자연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11장 전체가 오직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제 12장을 살펴보자. 먼저, 1절의 "네 민족"과 "개국 이래로"라는 표현은 구약적 관점에서 볼 때 오직 이스라엘을 가리킬 뿐이다. 이를 모든 사람에게 확대하여 적용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다음으로, 여기서의 "환난"은 11장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로 인한 환난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뒤이어 나오는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은 분명히 마카비 일가의 업적으로 인한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2-13절이 종말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활동에 대한 예언이라는 증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므로 12장 전체의 종말론적 해석의 여지를 철저히 제거하고자 한다. 첫째, 7절의 '한때와 두때와 반때'는 마카비 상 1:59과 4:52, 그리고 요세푸스의 [고대사] 제10권 6장을 참고할 때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재위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둘째, 11:31의 '미운 물건'과 12:11의 '미운 물건'은 둘 다 동일한 것으로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성전에 세워질 우상을 의미한다. 셋째, 이 예언을 미래의 어느 시기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12장의 내용으로 볼 때 매일 드리던 제사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장차 유대교적인 제사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다니엘 12장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지 종말에 있을 일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3) 감람산 강화(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소위 '감람산 강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 대환난에 대해 가장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본문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생각이 오해였음을 금방 알게 된다. 본문은 일부분에서 필요에 따라 미래의 사건을 언급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자.
감람산 강화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세상의 종말이라고 믿었던 제자들의 오해 섞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있을 징조들을 말씀하시고(마 24:4-8), 그때에 인내할 것과 동요하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할 것을 교훈하신다(9-14). 그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14)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그때가 곧 종말이 아니므로 동요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복음증거의 과업을 수행하도록 권면하신다. 그는 계속해서 신자들의 피난을 위한 지침을 말씀하신 후(15-20),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21)라는 결정적인 말씀을 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이 결코 가장 큰 환난이 아니므로 여기서의 환난은 종말의 대환난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죠지 머레이(George Murray)는 "우리 주님께서 심중에 두고 계셨으며, 전 역사상 그와 같은 일이 없으리라고 하셨던 바로 그 말씀은 환난의 정도(the magnitude of the tribulation)라기보다는 환난의 성격(the nature of the tribulation)이었다."라고 말했다. 즉, 여기서의 "큰 환난"이란 말은 환난의 규모나 크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성격과 종류(kind)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재림은 공적이고 가시적이므로 거짓 메시야가 등장해도 믿지 말 것을 말씀하신 후(23-27), 인자의 재림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신다(마 24:29-31). 예수님은 "그 날 환난 후에 즉시......"(마 24:29) 인자가 올 것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환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즉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 단어를 굳이 짧고 연속적인 일을 표현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환난과 인자의 재림 사이에는 긴 도약(overleaping)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누가의 기록을 살펴봄으로 증명된다. 누가는 21:23까지는 마태복음 24:28과 거의 동일하게 기록한다. 그러나 눅 21:24에 이르러서는 마태복음에 없는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수님의 재림 사이에 대단히 의미있는 사실을 끼워 놓고 있다. 눅 21:24은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방인의 때"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다시피 매우 긴 기간이다. 따라서 환난과 인자의 재림 사이에는 긴 삽입기간(신약시대)이 있는 것이다. 결국 감람산 강화는 미래에 있을 대환난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Ⅲ. 주석적 고찰
1. 6장 1절 - 9장 21절
1) 두루마리의 정체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음을 보았다. 그 책은 안팎으로 글씨가 적혀 있었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다. 아마도 그 책은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두루마리 형태(papyrus roll)의 책일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이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책을 봉하셨음을 시사한다. 그러면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일까? 마운스(Robert H. Mounce)는 이 책의 배경을 겔 2:9-10에 있는 '안팎에 글이 씌어 있는 두루마리 형태의 책'에서 찾는다. 그리고 시 139:16에 언급되어 있는 '주의 책'과 이 책이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유대 묵시문학 중에 인간의 모든 행동을 기록한 '하늘의 판'(heavenly tablets)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것과(에녹 1서 81:1-2, 47:3, 106:19, 107:1), 로마의 법은 어떤 문서들이 일곱 명의 증인에 의해 인쳐져야 됨을 요구하는 조항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이 책의 문학적 상징성을 말한다. 겔 2:9-10에 있는 책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시 139:16에 있는 '주의 책'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책이다. 따라서 마운스는 주의 오른 손에 있는 책을 심판의 책으로 본다. 헨드릭슨은 이 책이 모든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뜻과 계획을 표시한 책이라고 하였고, 모리스(Leon Morris)는 이 책을 세상의 운명을 내포하고 있는 책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이 개인과 우주의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계시록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한 그리 상세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책에 대해 자세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이 일곱 나팔의 재앙을 담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책을 봉하고 있던 일곱 인이 떼어지자 곧바로 일곱 나팔이 울렸다는 사실(8:1-6)은 이 책이 일곱 나팔의 재앙을 담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시간적 관계를 발견하게 된다. 일곱 인은 일곱 나팔에 앞서는 것이며, 양자는 분명히 구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일곱 인 재앙
(1) 보편적인 재앙
두루마리를 봉하고 있는 인(印)을 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이다(계 5:5). 인이 떼어진다는 것은 계시가 열린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린양에 의해 인이 떼어지는 것은 곧 예수님에 의해 계시가 열리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계시록 5장과 6장은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한 미래의 일을 예수님의 사역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인 재앙은 그 내용에 따라 처음 네 인과 다섯번째 인, 그리고 여섯번째 인으로 각기 구분된다. 따라서 먼저 처음 네 인에 대해서 살펴보자. 처음 네 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말 탄 자가 등장하면서 재앙이 일어난다. 헨드릭슨은 처음 네 인을 떼면서 등장한 말 탄 자들에 대해 "흰 말 탄 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붉은 말 탄 자는 순교적인 죽임을 당하는 것을 나타낸다. 검은 말 탄 자는 불법과 비행에 의한 경제적 궁핍과 빈곤을 뜻한다. 청황색 말 탄 자는 죽음, 전쟁, 기근, 질병, 사나운 짐승을 표시한다."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들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일곱 인이 두루마리를 봉하고 있다( )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곱 인은 두루마리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두루마리를 봉하고 있는 예비적인 사건이다. 이는 곧 래드의 말처럼 일곱 인이 종말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이끌어 오는 것임을 의미한다. 흐레이다누스(Greijdanus)는 인 재앙이 요한 당시(초대교회 당시)의 역사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일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인 재앙을 교회의 역사에 한정하는 것도 반대한다. 그는 인 재앙을 마지막 날까지의 모든 역사, 곧 교회를 포함한 모든 세대의 모든 역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처음 네 인이 종말에 일어날 재앙이 아니라 역사상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재앙이라는 래드와 흐레이다누스의 말에 동의한다. 재앙의 내용을 이루는 전쟁, 사망, 기아, 흉년, 패스트 등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보편적인 재앙들이다.
(2) 순교자들의 호소와 종말의 도래
다섯째 인은 최종적인 심판을 촉구하는 순교자들의 요구에 대해 아직 때가 차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의 순교자들은 단지 종말 시의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주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순교했던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속히 종말이 도래하여 교회가 온전한 구원을 받고 악인이 최종적인 심판을 받도록 주님께 간청한다. 그러나 주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조금 더 참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이제 여섯째 인이 떼어진다. 여섯째 인은 실제적인 종말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6:9은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라고 말한다. 이 날에 우주적인 대 격변이 일어난다. 유대 묵시문학(에녹 1서 80:4 이하, 예언록 3:801 이하, 에스라 4서 5:4 이하 등)과 구약 성경(욜 2:11, 31, 습 1:14, 18, 2:2, 사 54:10 등)은 종말에 일어날 천재지변을 예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 재앙은 역사상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재앙들과, 빨리 악인들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을 시행해 달라는 순교자들의 호소와,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조금 더 참으라는 주님의 말씀과, 드디어 최종적인 심판의 날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3) 일곱 나팔 재앙
7장은 삽입장면으로서 구원받은 교회의 모습을 묘사한다. 주님은 6장에서 악인들이 처한 운명(심판)을 보여주다가, 잠시 장면을 바꾸어서 교회의 운명(구원)을 보여준다. 그러나 8장 이후 다시 악인들이 받을 재앙을 기록한다. 이같은 장면전환은 계시록이 교회의 구원과 악인에 대한 심판이라는 이중 구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한 것은(8:1) 마치 폭풍전야와 같이 심판 직전의 긴장을 상징하는 것이다. 드디어 일곱째 인이 떼어지자 일곱 나팔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는 5장의 두루마리가 펼쳐졌음을 의미한다.
(1) 신적(神的) 심판
일곱 나팔의 재앙 중 처음 네 나팔은 땅, 바다, 물, 하늘에 내려진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네 나팔을 자연에 내려지는 재앙으로 한정하고, 나머지 세 나팔이 인간에게 직접 내려지는 재앙이라고 말하므로 처음 네 나팔의 강도를 약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이 심판을 받을 때 인간이 별로 큰 타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게다가 재앙의 범위가 삼분의 일이라는 것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즉, 처음 네 나팔 재앙은 인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가공할 만한 재앙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처음 네 재앙들이 애굽에서의 재앙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곧 나팔 재앙이 사단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보여준다. 일곱 나팔은 우연한 자연 재앙이나 인간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심판이다.
다섯째 나팔의 재앙 때 등장하는 황충( )이 "다섯달 동안" 활동한다는 것은(9:5) 황충이 그 기간 정도 살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지 재앙이 오랜 기간 동안 내려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팔 재앙은 짧은 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여섯째 나팔은 나라간의 실제적인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세력을 묘사하는 것이다. 유브라데 강에 결박되었다가 풀려난 네 천사들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되어 있던 자들이다(9:15). 그들에 의해 악한 자들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물론,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재앙의 목적이 회개를 위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나팔 재앙의 목적은 심판을 위한 것이다.
(2) "진노의 큰 날"
한편,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나팔 재앙들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 헨드릭슨은 이 시대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재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래드는 처음 여섯 나팔은 대환난의 시기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마지막 일곱째 나팔은 '종말의 기간'을 소개하는 것으로서, 다소 범위가 넓은 기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옳지 않다. 우리는 이미 미래 어느 시점에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구체적인 성경의 증거를 들어서 증명했다. 따라서 나팔 재앙을 대환난의 문맥에서 보아야 한다는 래드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마지막 일곱째 나팔을 특별히 따로 떼어서 다루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그렇게 보아야 할 어떠한 근거도 우리는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역사상 이처럼 엄청난 재앙이 반복적으로(보편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헨드릭슨의 주장도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일곱 나팔의 재앙은 역사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전 세계적인 재앙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재앙들은 언제 일어날 재앙들인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나팔 재앙은 두루마리를 봉하고 있던 일곱 인을 뗀 이후에 일어나는 재앙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팔 재앙이 특별히 여섯째 인의 상황, 즉 "진노의 큰 날"에 일어날 재앙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즉, 일곱 나팔 재앙은 종말의 때에 연속적이면서 거의 동시적으로 내려지는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3)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관계
일곱 나팔 재앙은 그 내용, 강도, 그리고 범위 면에서 일곱 인과 확연히 다르다. 일곱 나팔 재앙은 일곱 인과 마찬가지로 4.2.1의 구도를 가지고 있고 둘 다 중간에 삽입장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그것들 외에 다른 어떠한 유사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흐레이다누스는 6장과 8-9장이 그 의도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6장은 전쟁들과 재앙들과 환난들이 나타나는데, 복음의 승리를 위한 준비로서 나타나고, 8-9장은 시련들과 환난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시행)으로서 나타난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는 인과 나팔 재앙이 의도에 있어서 뿐 아니라 또한 내용상으로도 전혀 유사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인은 전쟁, 기근, 죽음, 순교자의 호소, 진노의 날 등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나팔은 땅과 바다와 물과 하늘과 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양자는 시간적으로도 두루마리를 펼치기 전과 펼친 후라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결국 인 재앙은 역사상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재앙이지만, 나팔 재앙은 여섯째 인의 상황, 즉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에 일어날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2. 10장 1절 - 16장 21절
1) 삽입장면
요한은 여섯번째 나팔의 재앙까지를 말한 후 계 10:1-11:14에서 삽입장면을 넣고 있다. 그는 여기서 또다른 환상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환상들은 교회의 선교 사명과 교회의 보존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다. 드디어 일곱째 나팔이 울리자(11:15-19) 하늘에서 큰 음성으로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다. 찬양의 내용은 주님과 성도들이 신천신지에서 왕노릇 할 것이라는 사실과, 악한 자들에게 주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회의 운명과 악한 자의 운명을 그리는 이러한 양자 구도는 계시록 전체의 구도와 동일하다. 따라서 마지막 일곱째 나팔은 이러한 양자 구도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곱째 나팔이 울린 후 마지막 재앙이 등장하지 않고 대신 또다른 환상들이 12-14장에 걸쳐 나온다. 모리스는 12-14장에 나오는 환상이 일곱 개라고 말하면서(seven significant signs), 요한이 이 환상을 다른 환상들(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과 동등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요한은 악한 자들에 대한 운명을 기록하다가 최후의 결정적인 재앙을 말하기 전에 교회의 승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12-14장에 대한 해석에 있어 학자들 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궁극적으로 교회와 사단의 싸움에서 결국에는 교회가 승리할 것임을 말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2) 일곱 대접 재앙
(1) 최후의 재앙
이제 일곱 천사가 일곱 대접을 준비한 후(15:1-8), 차례대로 대접을 붓기 시작한다(16:1-21). 요한은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해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쳐지리로다."(계 15:1)라고 말한다. 일곱 대접 재앙은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에게 내려지는 마지막 재앙이다. 더 이상의 재앙은 없다. 계 20:11-15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은 이 세상에서 받을 형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 받을 형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접 재앙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처음 네 대접 재앙은 땅, 바다, 물, 하늘에 쏟아졌다. 이들은 처음 네 나팔 재앙 때 심판 받았던 대상들이다. 땅, 바다, 물, 하늘은 이 세상의 모든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팔과 대접이 이들에 쏟아진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영역에 무서운 재앙이 임한다는 뜻이다. 다섯번째 대접은 짐승의 보좌에 쏟아졌다. 대접이 쏟아지자 그 나라가 곧 어두워졌다. 필립 휴즈는 대접 재앙을 시종 애굽의 재앙과 대조하면서, 이 어두움은 하나님과 그의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마지막 고통이며 공포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여섯번째 대접은 소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불리는 재앙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을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으나,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재앙은 그리 중요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다. 본문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귀신의 영이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하기 위해 '아마겟돈'이란 곳에 군사를 모았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유브라데의 상징성이나 아마겟돈의 의미에 대해 해석을 시도하려던 과거의 노력들은 결국 사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며, 결국 이 재앙에 대한 해석 역시 본문 자체에 근거하기보다는 인간의 사변에 근거하여 지나치게 거창해 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러한 노력들은 본문의 주된 의미를 알아내는 데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본문을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정황(Sitz im Leben)을 고려해야 한다. 즉, 본문은 악한 자들에게 내려지는 주님의 재앙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해석은 간단해진다. 본문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악한 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 일곱째 대접은 악인에게 내려지는 가장 강력한 심판을 담고 있다. 일곱째 대접이 쏟아지자 엄청난 지진과 함께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졌다. 그리고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없어졌다. 그리고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거대한 우박이 떨어져서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 이 재앙은 17-18장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유독 일곱째 대접 재앙이 이처럼 두 장에 걸쳐 자세히 보충 언급되는 것은 그 재앙의 중요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관계
이로써 악인들에 대한 이 세상에서의 심판이 모두 끝났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논의의 핵심으로 돌아가서 나팔과 대접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이를 위해 먼저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나팔 재앙과 대접 재앙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유사점이 있다. 첫째, 처음 네 나팔과 네 대접은 동일하게 땅, 바다, 물, 하늘을 파괴한다. 둘째, 여섯째 나팔과 여섯째 대접은 모두 유브라데 강을 배경으로 한 전쟁에 관해 언급한다. 셋째, 일곱째 나팔과 일곱째 대접이후 하늘에서 승리와 완성을 선포하는 큰 음성과 함께 번개와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었다(11:15-19, 16:17-18).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이러한 유사점 외에 또한 차이점이 있다. 흐레이다누스는 대접 재앙이 8-9장에 있는 나팔 재앙과 크게 보아서 일치성을 가지고 있지만, 양자간에는 몇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대접 재앙은 특별히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하고 있다는 점과, 대접 재앙은 나팔 재앙보다 훨씬 맹렬하다는 점, 그리고 재앙을 받는 사람들의 범위 제한이 나팔 재앙에서는 있는데 비해 대접 재앙에서는 없다는 점등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다 한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일곱째 나팔에서는 찬송 외에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비해 일곱째 대접에서는 결정적으로 큰 성 바벨론이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을 비판하면서 차이점을 존중하여 양자가 별개의 재앙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의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처음 네 나팔과 네 대접의 대상이 땅, 바다, 물, 하늘로 동일하게 언급된 것은 그것들이 인간 세상의 모든 실제적인 공간들이기 때문이다. 즉, 이는 재앙이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파괴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여섯째 나팔과 여섯째 대접에서 거론되고 있는 '유브라데 강'은 예로부터 중요한 전쟁의 장소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셋째, 일곱째 나팔이 울린 후 하늘에서 찬송이 있었고(11:15-19), 이례적으로 많은 삽입장면이 있은 후(12-14장), 15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곱 대접이 준비되었다는 사실은 양자간에 어느 정도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넷째, 15:1은 일곱 대접 재앙이 마지막 재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곱 나팔 재앙에는 마지막 재앙이라는 언급이 없다. 비록 일곱째 나팔 이후 하늘의 음성과 함께 번개와 뇌성과 지진과 우박이 있어서 일곱째 대접 이후의 마지막 상황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사실은 첫번째 나팔을 불기 전에도 이미 동일한 현상들이 있었으므로(8:5) 이를 마지막의 상황으로 보기 어렵다. 다섯째, 일곱 대접은 다섯째 나팔(9:1-12), 여섯째 나팔(9:13-21)과 더불어 세 개의 화(禍)를 이룬다(8:12, 11:14 참고). 이는 곧 다섯째 나팔과 여섯째 나팔이 각기 하나의 단위(unit)를 이루고 있듯이 일곱 대접 전체가 하나의 단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은 각기 달리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이들이 주님의 재림 시에 연속적이면서 동시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믿는다.
(3) 재앙과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는 지금까지 여섯째 인의 상황(진노의 큰 날)에서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재앙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섯째 인의 상황은 예수님의 재림의 상황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는 단지 재림 그 자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과 더불어 악한 자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심판이 동시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주님의 재림의 광경을 기록한 계시록 19장을 살펴보므로써 확인된다. 요한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쟁하러 오는 용사(warrior)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19:11-14). 주님의 재림 시에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이 만국을 쳐서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무너뜨릴 것이며(19:15-16), 그 결과 많은 악한 세력들이 폐하여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19:17-18). 또한 그 날에 악한 세력들이 예수님과 그의 군대로 더불어 싸움을 벌이다가 모두 사로잡혀서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19:19-21).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는 재림 자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재앙이 악한 자들에게 거의 동시적으로 쏟아질 것이다.
결 론
요한 계시록 1:3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라고 말한다. 이 책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가져다준다. 이 책을 읽는 신자들은 현재 주님의 교회가 어떤 지위를 누리고 있는지, 그리고 장래에 그들이 신천신지에서 어떠한 영광스런 상급을 얻게 될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불신자들은 이 책을 읽으므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이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의 난해성을 제거하여 요한 계시록의 메시지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 논문을 작성하였다. 우리는 계시록의 난해성의 가장 주된 원인을 5-16장에 있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관계에 대한 혼동이라고 생각하고, 이 논문에서 그들의 상호 관계를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이들의 상호 관계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그것들이 연속적인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학자들은 동일한 재앙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또다른 학자들은 부분적인 중복(병행)을 주장하기도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재앙들이 소위 '대환난'의 기간 동안에 있을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재앙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그들의 주장이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서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더욱이 미래에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 자체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설에 불과함을 밝혔다. 결국 우리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상호 관계에 대하여, 처음 네 인은 역사상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재앙들이며, 다섯째 인은 종말의 도래를 고대하는 순교자들의 간구이고, 여섯째 인은 실제적인 종말의 도래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드디어 일곱째 인이 떼어지자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이 연쇄적으로 임하게 되며(여섯째 인의 날에), 이와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게 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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