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학산문화사에서 “무한의 파이터 / 최배달-오야마 마스타츠 일대기”가 출간되었다. “무한의 파이터”(일본명 공수도바보일대)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애국심에 의혹을 제기할 만한 단서를
이 책이 제공한다는 데 있다.
생각해보면 학산문화사에서 출간된 “무한의 파이터”를 읽을 때부터 우려가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일본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란 점 때문이다.
“무한의 파이터”에서 최배달은 일본의 패망을 슬퍼하고
일본의 특공대로 죽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울분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필자는 방학기가 쓴 “바람의 파이터”를 소설로 읽어보았고 여러가지 문건들을 통해 최영의의 일생에 대해서도 접했었다.
그리고 일본의 “공수도바보일대”(한국명 무한의 파이터)란 저서와 국내에서 출간된 “바람의 파이터”가
서로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는 것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것은 두 저서가 모두 동일한 실존인물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두 저서의 작가가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자국의 영웅을 묘사할 때 그가 타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유기한 채 저술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최영의는 ‘일본의 위대한 역대 10걸’ 중의 한명으로 국민적 영웅이었던 인물이다. 실상 일본에서는 최영의가 일본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도
서술상의 왜곡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70년대 출간 당시 패망이후 실추된 일본의 자존심과 정신적 가치의 회복을 위해 많은 부분이
픽션화 될 수 밖에 없었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는 국내에서 겨우 최영의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질 즈음에
그가 일본 패망에 슬퍼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점이다.
학산문화사 측에서는 이 책이 최영의가 극진 공수도를 이루기까지
치열했던 무도가로서의 삶을 충실히 저술했기 때문에 출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필자도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을 읽어보았다.
사전지식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만을 가지고 최배달의 정체성과 인간적인 고뇌에 대해 자칫 오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산문화사가 아무런 설명없이 일본판 그대로 출간한 사실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일본의 청소년들이 “공수도바보일대”를 보고 최영의를 영웅으로 추앙했던 것처럼
이 한 권의 책으로 최영의의 일대기를 한국의 청소년들이 오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그럼 짧은 식견이나마 최영의가 자국민으로서 가졌던 모국애와 포기하지 않았던 정체성에 대한 기술을 통해
“무한의 파이터”로 인해 제기되는 오해의 소지를 제거해 보고자 한다.
첫째, 최영의의 일본국적취득은 극진공수도의 세계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가 ‘일본의 위대한 역대 10걸’ 중 한명으로 뽑히자
극진회 후원장이던 사토 전 일본 총리는 “외국인이 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며 귀화를 요구했다.
원칙적으로 귀화는 이전의 국적을 상실하지만 최영의는 총리의 배려로
한국의 국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일본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최영의는 일본을 적국이 아니라 자신의 큰 뜻을 펼치기 위한 하나의 발판으로 보았다.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자신의 모국에서 극진공수도가 널리 행해지는 것이었다.
극진공수도가 자신의 국적취득으로 인한 안정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세계로 발뻗어 나가면
언젠가는 자신의 모국인 한국에서도 극진공수도가 널리 퍼지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명분상의 귀화(본인은 단순한 일본국적취득이라고 설명하곤 했다.)라는
어려운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 겪었던 정신적인 고뇌는 그의 뜨거운 눈물을 본 사람들에 의해서 이후에야 전해졌다.
국내 언론매체를 통해 몇 차례 소개된 바에 의하면 최영의 총재는 나라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망국민이었다.
둘째, 최영의 총재의 일본명 오오야마 마쓰다츠(大山倍達) 즉,
대산배달의 ‘대산’(이것은 그가 처음 열었던 도장의 이름이기도 하다)은
그의 성인 최(崔)에서 ‘배달’은 배달민족의 배달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가 귀화하면서까지 버리지 않았던 것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었다.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에서조차 조선인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자 했던
그의 굳은 민족애를 여기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기억하는 최영의는 김치를 즐겨먹고 한국음식을 손수 접대하길 즐겼던 한국사람이었다. 수련이 끝난 뒤 집으로 제자들을 초대한 뒤 “너희들은 몸이 힘드니 나서지 마라” 라고 하며
손수 음식을 접대했던 최영의 앞에서 그의 가르침대로 목구멍이 찰 때까지 한국음식을 먹어야 했던
어느 일본 제자는 지금도 한국음식에 대한 향수를 느낄 정도라고 말한다.
자신이 창시한 극진의 정신이 옛 한국의 화랑정신에서 나왔음을 자주 이야기했다던
그를 기억하는 제자들을 통해서도 그가 얼마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에 차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혹자는 세계적인 무도의 달인으로 활약하던 그가 애틋한 모국애에도 불구하고
왜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중장년 정도 연배의 사람이라면 한 때 ‘태권 격파왕’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던 최영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60-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초대에 의해 국내에 들어왔던 그는
요청에 의한 어려운 약속을 해야만 했다.
한국 태권도의 국기 발전을 위해 자신의 생전에 극진공수도를 보급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무도가였지만 모국의 국기 발전을 위해 자신이 창시한 극진공수도 보급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 약속을 지킨다. 자신의 고향산천이 자리잡고 있는 이 나라의 이름이 국기(태권도)를 통해
온누리에 떨치게 될 그 날을 위하여 길고 긴 기다림을 인내했던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를 태권왕이라고 소개할 수 밖에 없었던 국가의 자존심 문제다.
최영의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도록 수련하던 무술이 일본에서 많이 성행했던 공수도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일본인의 영웅으로 추대받던 최영의를 서술하는 데 있어
많은 일본의 언론인들이 그를 일본인이 아닌 조센징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점이 더 안타깝다
. 국가간의 입장차이라는 깊은 골이 작은 책 속에서조차 한 인물의 인생을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변질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양국의 오랜 숙원으로 인해 왜곡되고 와전된 채 전달되었어도
그가 부정할 수 없는 최강의 무도인임에는 변함이 없다.
최영의 총재는 1994년 일본에서 안장되었다.
일본에선 영웅이었으나 한국에선 그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 최영의.
그의 사후 10년이 된 지금, 최영의가 배달민족의 자긍심을 잃지 않았던 대한의 아들로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낸 진정한 무도가로 이 나라에서 올곧이 자리매김되는데
이 글이 작은 보탬이 되길 바라며 끝을 맺는다.
1923년 7월 27일, 전라북도 김제, 용지면 와룡리에서 태어난 최영의는 아버지 최승현과 어머니 김부용의 사이에서 태어난 4번째 남자였습니다.
그는 혼란의 시기를 거쳐 무예가로서 가장 전통적인 모습을 확립하고 보여준 인물로서 국제공수도연맹의 총재와 자신이 설립한 극진회관관장으로 공수도 10단의 유일무이한 존재였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일본에서 국적을 재취득하면서도 한국국적을 버리지 않은, 양국 국적의 소유자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오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는 1994년 4월 26일 죽을 때까지 일본 공수도, 즉 가라데계에 있어서 신적인 존재로서 군림했고 그의 존재는 일본 무도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세계 무도계에 있어서 가장 경이적인 인물로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귀화한 일본명이 오오야마 마스다츠로서 이외에도 최맹호(崔猛虎), 최배달(崔倍達)이라는 명칭을 썼고 귀화명으로 통하게 된 이후에도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의 성은 자신이 일본에서 거주할 때 도와준 오오야마(大山)집안에서 받은 은의를 생각해서 이름을 붙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최배달의 배달이 일본명에서도 그대로 쓰였는데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배달국, 배달민족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알려진 형태의 모습과 달리 일본에서의 기록은 최영의로서의 존재로서 자각하는 유년기보다 1938년 9월부터 가라데를 송도관류(松濤館流)와 강유류(剛柔流)를 중심으로 배워, 종전 후에 치바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주로 한국인들을 위한 존재로서 지역민을 지키는 불량배와도 같은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을 하다가 산에 들어가 수업하는 형태의 수업형태를 거쳐서 자신의 무도를 닦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요 한국에서도 그의 전기는 다양한 형태로 그려졌고 최영의는 한국에서도 놀라운 무도인으로 알려졌지만 살기 위한 수단과 행사, 발전의 기반에 있어서 일본에서의 활동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음은 어쩔 수 없다고 할 것 같습니다.
결국 그의 활동이 산에 처박혀 수업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이기고, 강함을 추구한 형태는 많은 무도인들에게 교감을 얻게 했고, 1956년 대동류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의 강자인 요시다 고타로(吉田幸太郞)에게 간단하게마나 합기유술과 스틱봉술을 배운 그는 1947년 교토에서 벌어진 전후 최초의 공수도 선수권에서 우승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1952년에 프로 유도선수인 엔도 (遠藤幸吉)4단과 미국으로 떠나 1년간 거주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프로레슬러 그레이트 토고(グレ-ト東鄕)와 형제라는 설정으로 가라데의 모법 연기를 보이고 다녔습니다. 이 때 다양한 프로레슬러, 복싱 선수와 대결을 선보였는데 맥주병 목을 수도로 잘라버리는 모습에 놀란 관객들이 최영의에게 붙인 ‘Hand of God’, ‘Miracle Hand’라는 명칭을 받았습니다.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맨손으로 소를 쓰러트리는 공수도 쇼를 선보였는데 (총 47마리 이중 4마리는 즉사) 그 영상이 공개되면서 수많은 나라의 무도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무도를 격투기로서 완성시켜 나가게 되었습니다.
시합용으로 개발된 룰과 달리, 직접 타격하는 형태의 공수도를 기반으로 극진공수도, 극진가라데(極眞空手)를 일으킨 그는 일본에서 <공수도 바보일대(空手バカ一代)>라는 만화를 통해서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는 대중적인 무인으로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무인 형태의 존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쾌하고 정이 많은 인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연재된 만화 때문에 당시 만화를 읽었던 소년들에게 있어서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아 그의 제자로 등단하거나 가라데에 입문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일화도 있는데 이 작품은 논픽션으로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레이트 토고와 동시대에 활약한 레슬러 등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가 기반이어서 논픽션이라는 형태로서 표현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신격화된 부분이 적은 것은 그가 기록으로 남겨져있는 부분이 많고, 실존인물로서 기억하는 이들이 동서양에 존재하기 때문에 최영의, 오오야마의 무인적인 전설은 많은 실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수행을 거쳐서 손가락과 악력을 키운 그에게 있어서 ‘세손가락으로 동전 구부리기’와 같은 재주는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힘자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자주 알린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수업이나 기술을 위한 시범이 아니라 자신을 응원하는 술자리에서 후원금을 받고 즉흥적으로 선보인 기술 중 하나로서 지금은 다양한 스포츠, 격투기 선수, 그리고 폭력조직원들 사이에 있어서 그의 기술은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이러한 기록을 깰 수 있는 이는(한 손, 세 손가락만으로 동전 구부리기) 그의 제자 중에서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전설로 기록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는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오야마로서 활동하게 된 그는 일본의 전설적인 무인 미야모토 무사시를 존경하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저서로 알려져 있는 오륜서를 산에서 수행할 때도 챙겨서 보는 것으로 알려졌고 어느 작가가 무사시가 호모였을지도 모른다고 한 소리를 듣고 분노해서 그 작가를 때릴 뻔한 모습도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놀라울 정도로 무서운 연습광이면서 근대적인 강함을 추구한 무인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신장 175센티미터에 불과했던 그가 체중 85킬로그램에 가슴둘레가 132센티미터에 달하는 근육을 키웠는데 렌트겐 검사 때 막이 보일 정도로 놀라운 근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공격력, 파괴력을 늘리기 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다양한 트레이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 방법이 좋다고 듣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실천해서 바로 그 성과를 몸소 느껴보는 등의 적극적인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맨손으로 소 잡기, 한 손 팔굽혀펴기, 보디빌딩, 맨손으로 돌 깨기, 송판 격파, 기왓장 격파와 같이 타격, 격파술의 모습도 정리한 것으로 유명한 그의 행위는 결국 세계 무도인들에게 있어서 스트리트 파이팅의 꿈을 현실세계에 보여준 인물로서 지금의 이종격투기 팬에게 있어서도 꿈과도 같은 존재로서 인식된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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