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는 비단 역사학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은 작품이 극히 드문 향가 연구에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참고로 현재 전해지는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린 14수와 균여전에 실린 11수를 포함하여 총 25수뿐이다. 그리하여 국문학계 내에서도 위서론과 진서론이 치고 받고 있는 실정이다. 화랑세기에 수록된 향가는 송사다함가, 청조가 두 수이다.
이쪽의 쟁점은 역시 수록된 향가인데, 향가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 연구가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06.04~1944.02.08의 1929년 발표 '향가 및 이두의 연구'이고 이어진 무애 양주동의 1935년 발표 '고가연구'인데 박창화의 필사시점은 1930년대로 추정되며 이 시점에 향가를 맘대로 지어낼 수 있을리 없다, 향가에 쓰인 표현이 16세기 문헌에서나 발견되는 표현이다 등의 진서론쪽의 주장과 필사자 박창화가 한학에 조예가 있으며 수록된 두 향가의 해석이 너무 쉽다, 전자의 표현도 19세기 문헌에도 발견되며 송사다함가의 1, 3연에 나오는 '~라고 해도'라는 표현은 19세기 후반에나 최초로 발견되며 1900년대에 와서 일반적으로 굳어진 표현으로 신라시대에 있지 않았으리라 보는 위서론의 주장이 부딪히고 있다.
즉 보통의 신라 향가와 일부 다른 향찰 표기를 두고 위서론에서는 '근대에 향가를 창작한 근거'라 하고, 진서론에서는 '보다 오래된 향가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향가가 분석된 게 1930년대라는 걸 두고 위서론에서는 '1930년대 이후에 창작되었다는 증거'로 내밀고, 진서론에서는 '그 시점에서 향가 창작은 불가능'이라고 보는 것.
다만 이 작품의 저자(?) 박창화는 1960년대까지 생존해 있었고 이 시기는 양주동 등이 1940년대에 향가 해독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내놓은 상태였다. 박창화가 1930년대에 책을 지었(?)다고 해도 이후 이런 점을 반영하여 개작했을 공산은 얼마든지 있는 셈. 이렇게 본다면 화랑세기 필사본의 향가가 현대의 해독법으로 쉽게 해석되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