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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海師全이 僞書인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Ⅰ. 序
<華海師全> 僞書 논란은 이 책의 발견 당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提起되어 왔지만 現在까지도 僞書라고 確證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推測만 난무하다. 오랜 기간 備藏을 거쳐 왔기는 하지만 <華海師全>의 내용으로 볼 때 申贒에 관한 事實이 高麗史나 그 밖의 관련 著述에 등장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떠한 文獻에서도 거의 아무런 言及이 없었다. 이 책이 僞書라고 疑心받는 가장 根本的인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이다.
이 책은 麗末 儒學者인 申贒에 대한 傳記로서 弟子들이 編輯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申贒의 性理學에 대한 認識, 우리나라 麗末 이전까지 儒者들에 대한 언급, 그리고 당시의 社會相을 살필 수 있는 내용 등을 담고 있으나 일부 편에서는 지나치게 家門의 立場에서 對象을 살피고 있어 統에 대한 觀念이 중요시되던 朝鮮末期에 그 後孫에 의해서 作成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疑心의 소지를 아울러 안고 있다. 또 著者가 沒한 이후인 1460년대 前後의 事實들도 일부 기록되어 있어 과연 이 책이 麗末 또는 朝鮮初期에 작성된 책이 맞는지 의심을 더욱 加重시키고 있다.
僞書라고 가장 강력하게 主張하는 측은 이 책 主人公 弟兄의 後孫들이다. 이들은 1957년<華海師全辨誣錄>, 1999년<僞書 華海師全을 解剖한다>라는 책을 만들어<華海師全>이 僞書인 것을 마치 考證된 것처럼 宣傳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背景에는 표면적으로는 平山申氏 最初의 族譜인 丙子譜의 上系秩序에 混亂을 초래한 점을 理由로 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宗統問題와 관련된 나름대로의 憂慮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推測이 可能하다. 이 책의 僞書與否는 專門分野 學者들의 硏究에 의하여 밝혀야 하는 사항이지 利害關係가 얽혀있는 絶對 多數의 쪽에서 한 목소리를 가지고 一方的으로 이 책이 僞書라고 몰아 부친다고 하여 僞書가 되는 것은 아니다.
1957년에 <華海師全>이 僞書라고 考證한 <華海師全辨誣錄>은 많은 問題를 가지고 있다. 辱說, 飜譯誤謬, 引用誤謬, 虛僞考證 등 이 分野에 조금이라도 識見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여러 가지 問題를 一見에 찾아낼 수 있다. 1999년 平山申氏 大宗中에서 발행한<僞書 華海師全을 解剖한다>는 꼼꼼하게 챙겨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도 大同小異하다. 考證하기 위해 노력한 痕迹은 보이나 作者의 主觀的인 생각이 지나치게 많이 介入되어 있다. 일부는 認定할 수 있는 內容이 있을지는 모르나 內容 대부분은 受容하기에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華海師全>의 모든 內容을 認定한다는 것은 아니다. <華海師全>도 僞書로 의심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問題를 가지고 있는 것은 分明한 事實이다.
이 책의 原本은 發見되지 않고 있어 筆寫本과 印刷本이 原本 그대로 傳하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발견당시 筆寫한 것으로 推定되는 것도 내용이 약간씩 다른 여러 종류가 있고 1920년 栗理祠에서 발행한 木版本과 1935년 湖西 儒林의 姜英直 선생이 발행한 活字本도 근본적인 내용은 비슷하지만 약간씩 다르다. 뿐만 아니라 禮州世祿의 底本이 되는 <華海師全>과도 差異가 있다. 또한 이 책의 주인공 號에 대해서도 몇 가지 다른 字의 漢字語가 존재한다. 이러한 多樣性은 筆寫에 따른 차이로 보여 진다. 이 책이 申贒의 後孫에게 가장 먼저 傳達되었다면 後孫에 의해 原本의 내용이 毁損되었는지 또는 添錄이 있는지도 의심해 보아야 하지만 現實的으로 이 부분을 밝히는 것은 사실상 不可能하다.
이와 같이 이 책은 根本的으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발견 당시 儒林의 많은 儒者들은 이 책의 價値를 認定하였으므로 이 책의 主된 內容인 備耗, 簡齋笏書奏對, 家範 등에 나타나는 性理學說은 크게 問題가 없는 것 같다. 僞作이라면 이러한 부분을 盜用하였을 것인데 아직까지도 어디에 根據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正史에 나타나지 않는 麗末 儒者들을 대거 登場시키고 있는데 이 분들 중 상당수가 각 姓氏別 族譜에 기록이 되어 있는 점, 歷史에 없는 새로운 事實을 기록하고 있으면서 歷史의 빈틈에 安着시키고 있는 점, 氏族史에 관해서는 平山申氏 丙子譜의 欠缺을 보완할 수 있는 점, 同一한 事件도 편에 따라 相衝된 기록이 보이고 있어 著作者가 여러명 이라는 점 등 僞書로 看做하기에는 탐탐치 않은 기록들이 많이 包含되어 있다. 오늘날 專門 學者들조차도 眞僞 與否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僞書를 이렇게 精巧하게 만든다는 것은 거의 不可能에 가깝다.
이 책은 儒學의 系統과 당대 性理學을 理解하는데 중요한 資料的 價値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도 專門家에 의한 정확한 平價를 받지 못하고 特定 勢力에 의해 僞書로 매도당하고 있는 實情에 있다. 이 책이 僞書인지에 대해서는 이 분야 專門家들의 더 많은 硏究가 이루어지고 난후에 判斷하여도 늦지 않다.
Ⅱ. 歷史의 記錄에 나타나지 않는다.
史書나 個人文集 등에 申贒에 대한 記錄이 一切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華海師全을 僞書로 만드는 가장 根本的인 原因일 것이다. 이 책의 기록에 의하면 申贒은 당시 性理學에 대해 上堂한 境地에 到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대의 이와 같은 大學者가 우리 歷史의 記錄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問題는 이 책이 발견될 당시부터 시작하여 1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膾炙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명쾌하게 답변할 수 없지만 歷史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반드시 虛構의 人物이라고 斷定하기도 어렵다.
1. 正史의 기록
<高麗史>의 편찬 경위를 살펴보면 조선이 건국 되자마자 鄭道傳, 趙浚 등이 통사인 李齊贒의 <史略>, 李仁復 ·李穡의 <金鏡錄>, 閔漬의 <本朝編年綱目> 등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歷代 高麗實錄과 고려 말의 史草를 기본 자료로 삼아 1396년에 37권의 <高麗國史>를 만들었다. <史略>은 太祖에서 肅宗까지<金鏡錄>은 虎景大王에서 元宗까지 <本朝編年綱目>은 國祖文德大王에서 高宗까지 기록이다. <高麗國史>는 내용이 疏略하고 인물평가가 公平하지 못하며 잘못 기술된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1414년 河崙, 南在, 李叔蕃, 卞季良에게 恭愍王 이후의 사실을 바로 잡았으나 1416년 대표자인 河崙이 죽자 중단되었다. 1419년 柳觀과 卞季良 등이 본래의 史草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을 바로잡아 14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지만 儒敎的이고 事大的인 관점이 오히려 强化되었으므로 이 책도 頒布되지 못하였다. 1423년 12월에 다시 柳觀과 尹淮로 하여금 이 부분을 實錄에 따라 바로 쓰고 14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卞季良의 반대로 發刊되지 못하였다.
1431년 <太宗實錄>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高麗史>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申槩, 權踶가 <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으나 編纂者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請託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配布가 곧 중지되었다.
1449년에 金宗瑞, 鄭麟趾, 李先齊 ·鄭昌孫가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金宗瑞는 드디어 1451년(문종 1)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崔恒 등이 열전,盧叔仝 등이 紀, 志, 年表를 金宗瑞, 鄭麟趾 등이 교감을 맡았다. 列傳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批判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1452년(단종 즉위)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14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印刷, 頒布되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高麗史>는 60년간 陣痛을 겪고 나서 誕生하게 되었다. 편찬 경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史書의 客觀性과 公正性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高麗史>는 政權을 簒奪한 朝鮮時代 勝者의 손에 의해 쓰여진 史書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公正을 기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全體를 믿기는 힘들 것 같다. 특히 이 책의 底本이 된 史書와 당대의 個人文集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조선 초기에 고의적으로 毁損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鄭麟趾의 <高麗史>는 비록 여러 가지 志가 있으나 조잡하고 疏略한 것이 심하고 戶口 같은 것은 史家가 반드시 써야 할 것인데도 기록하지 않았으니 다른 것은 알만하다고 批判하고 있다. 특히 麗末의 記錄은 역대 高麗實錄과 麗末의 史草가 底本이 된 것 같은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고려 말기 史官이 事實 그대로 記錄하였는지도 잘 알 수 없고 朝鮮開國의 正當性 문제로 麗末의 사실이 歪曲되지는 않았는지 疑心의 對象이 되고 있다.
<華海師全> 跋尾에서는 이 책이 燒却되고 秘藏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차 發行本과 2차 發行本은 申贒이 佛敎를 排斥한 관계로 辛旽과 普愚에 의해서 燒却당한다. 대부분의 高麗 儒者들은 佛敎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佛敎를 전적으로 排斥한 儒者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3차 發行本은 申贒의 孫子인 伯淸이 上訴로 인해 죽음을 당할 때 陳子誠 패거리에 의해 押收 燒却 당하고 역사의 책을 꺼내어 서책에서 빼어버리고 그 怨讐를 갚은 것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申贒은 ‘陳子誠의 祖父가 父親을 감금하고 繼母를 쫓아낸 사실을 法司에 알려서 죽이게 하였고 權近의 부친 僖는 喪服期를 3개월 단축했다 하여 司憲府에 알리고 官職에서 쫓겨나게 하였으며 鄭道傳이 처음으로 官職에 薦擧되었을 때 반드시 高麗朝를 떠날 것이다.’ 라고 하여 偶王이 살필 것을 권한바가 있다. 이러한 일 때문에 대대로 怨讐가 된다고 한다. 鄭夢周는 4차 發行本 10권을 元天錫에 보관시키고 몇몇 사람이 가지고 있는 책을 收去하여 간직할 것을 부탁하나 宋因, 權近, 鄭道傳 등에 의해 燒却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高麗史節要>에 陳子誠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恭讓王 2년(1390년) 史臣 陳子誠이 말하기를, “왕이 즉위한 이후로 神靈과 부처에 아첨하여 섬기기를 거의 거르는 달이 없으므로, (중략) 신령과 부처의 힘만 빌려서 그 나라를 보전하고 그 지위를 편히 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미혹됨이 심하지 않는 것이랴” 하였다. 公田과 私田의 田籍을 저자거리에서 불살랐는데 불길이 數日 동안이나 꺼지지 않으니,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祖宗의 私田의 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改革되니 애석한 일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高麗國史는 編輯者의 主觀이 지나치게 介入되어 있고 이를 수정 보완한 자료는 儒敎的이고 事大的이며 또다시 보완한 高麗史全文는 編纂者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請託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다고 한다. 華海師全에서는 麗末 儒學者 申贒이 歷史의 記錄에 나타나지 않는 원인이 陳子誠 등에게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陳子誠은 史臣에 불과하지만 恭讓王을 非難하는 그의 말이 高麗史節要에 나타나고 있어 그의 손에 의해 麗末 史草 또한 일부 毁損할 수 있는 位置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개 史官이 歷史의 記錄에 자기의 말을 기록할 정도라면 당시의 社會 분위기가 어떠하였는지를 대략 짐작이 가능하다.
2. 高麗時代 發行된 책
高麗時代 발행된 책으로 오늘날 現存하는 것은 金富軾의 三國史記(1174년), 李仁老의 破閑集(1260년), 李承休의 帝王韻紀(1287년), 一然의 三國遺事(1281년), 李齊賢의 益齋亂藁(1363년) 등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破閑集은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1659년에 중간되었고 三國遺事도 당시의 刻本은 전하지 않고 1512년 중간본이 전한다. 益齋亂藁는 없어진 원고가 많아 책 이름을 亂藁라고 하였고 1432년 櫟翁稗說등과 함께 益齋集으로 중간하였다.
<益齋亂藁> 제6권에 의하면 李齊贒은 1323년 정월에 元나라에 들어가 丞相 伯住(拜住의 오기인듯하다)에게 忠宣王이 고국에 돌아와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上疏文을 올린다. 이 상소문 중간에 보면 “丞相께서 당초에 극력 구출해 주셨으니, 끝까지 은혜를 베풀 것을 잊지 마시고, 천자께 進達하여 天澤을 베푸시도록 인도하여 고국에 돌아와 여생을 마치게 해주신다면...” 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拜住를 통한 忠宣王 救命運動은 이 上疏文이 올려지기 이전에도 누군가에 의해 진행된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20년 忠宣王은 元나라 仁宗이 죽자 吐藩에 流配되었으며 1321년 忠肅王은 瀋陽王의 모함에 의해 元나라에 불려갔다. 1321년 英宗은 아버지 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는 하지만 실권이 없었고 實權 回復은 1322년에 이루어진다. 1323년 英宗과 拜住는 鐵失에 의하여 殺害당한다. 1323년 泰定帝가 즉위하자 忠宣王은 流配에서 풀려났으며 忠肅王은 1325년 歸國하게 된다.
중국인명사전에 의하면 拜住(1298-1323)는 1315년 太常礼仪院使이였으며 英宗 即位年인 1321년 中书平章政事를 거쳐 中书左丞相이 된다. 儒學을 좋아하고 重視했으며 儒者를 기용하여 改革에 착수했다. 漢族을 통해 예의를 이어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1323년에 铁失에 의해 英宗과 동시 被弑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拜住는 儒學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元史에서도 역대 황제들 중에서 仁宗과 英宗은 文化政治를 추구한 皇帝로 꼽고 있다. 申贒이 1321년 忠肅王을 扈從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拜住는 申贒과 동갑인 24세였고 忠肅王은 28세, 英宗은 18세였다.
<華海師全>元主問答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辛酉(1321)년에 忠肅王이 元나라에 들어갔는데 선생이 함께 가서 尙書인 拜住의 집에 머물렀다.’ 라고 하고 仁宗(英宗을 仁宗으로 착각한 것 같다)과 주로 中華와 오랑캐 구분에 관한 대화 내용을 싣고 있다. 丞相 拜住에게는 “佛敎의 定心之功과 儒敎의 靜敬之妙는 같은 것이나 공부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하고 拜住는 “申君子와 뜻이 같아 佛敎를 멀리 하려하나 그 바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3. 朝鮮時代 氏族이 言及된 책
<氏族源流>는 趙從耘(1607-1683년)이 丙子胡亂 후 1650년 전후 조선 仁祖때 40여년을 전국을 누비며 여러 문중의 족보를 筆寫한 책자이다. 17세기 중반까지의 조선의 大姓·望族이 網羅되어 있는데, 全州李氏를 위시하여 대략 540여개 姓貫이 수록되어 있다. 정확한 발행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680년에 발행한 책자에 氏族源流를 引用하고 있음을 미루어 보아 그 이전에 發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寧海申氏의 시조는 得淸으로 기록하고 있고 諱 仲明의 子로 諱 諿과 諱 君平만 기록되어 있으며 諱 贒은 보이지 않는다.
<增補文獻備考>의 編纂 過程을 살펴보면 1770년(영조 46) 東國文獻備考를 編纂 刊行한 바 있는데 象緯輿, 地禮, 樂, 兵, 刑, 田賦, 市糴, 選擧, 財用, 戶口, 學校, 職官 총 13고 100권으로 印刷까지 되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이루어져 잘못된 부분이 많아, 1782년(정조 6) 李萬運 등이 재 編纂에 착수하여 1790년 一段落되었으나 正祖 즉위 후의 事實이 많이 빠져 계속 補完 增補의 作業이 이루어졌다. 이 增補事業은 기본 골격은 앞에서 이미 갖추어진 대로였고 앞의 13고에 物異, 宮室, 王系, 氏族, 朝聘, 諡號, 藝文 등 7고를 더하여 총 20고 146권을 이루어졌고 1908년에 刊行되었다. 이 책의 권49 姓氏에 寧海申氏의 始祖는 得淸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氏族에 관한 다른 책에서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성일(1538~1593)의 <鶴峰集> 제7권 ‘돌아가신 할머니 宜人 寧海申氏의 묘갈명’에 의하면 ‘할머니의 성은 申氏로, 丹陽의 명문 집안이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서 크게 드러난 사람으로는 太僕寺正을 지낸 휘 得淸이 있는데, 과거에 급제해 현달하여 門戶를 크게 키웠다. 그의 아들은 中郞將을 지낸 휘 芸으로, 이분이 바로 할머니의 高祖이다. 江界敎導를 지낸 휘 永錫은 曾祖이다. 義盈庫副使를 지낸 휘 祉가 할아버지인데, 마음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행실이 당대에 높았다. 碧潼郡守를 지낸 휘 命昌이 아버지이다.’ 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 系譜는 宗孫집안의 系譜인데 아마 당시 종손집안의 家牒 보고 작성하는 것 같다.
<鶴峰集>에서 諱 得淸 이전 上系에 대한 言及이 없어 諱 得淸을 寧海申氏의 始祖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寧海申氏라고 언급한 점을 참작해 볼 때 16세기 후반에도 平山申氏 始祖 壯節公의 後孫으로 繼代를 연결하지 못한 것 같다. 平山申氏 최초의 金石文인 종부시령공 휘 晏의 墓誌에도 壯節公의 後孫이라는 글귀는 보이지 않고 諱 弘尙의 後孫으로 기록하고 있다.
諱 贒에 대해 문헌상 최초의 언급은 宗孫 집안이 아닌 次孫 집안이다. 辛壬之禍 이후 長子인 諱 自亨과 3子인 諱 自誠 집안은 沒落하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하였는데 비해 2子인 諱 自明 집안은 비교적 피해를 적게 입는다. 그러나 1600년 전후에는 宗孫 집안의 後孫이 가장 많아 寧海申氏 전체의 80%내외를 차지하였고 自明 집안의 후손은 10%내외에 불과하였다.
自明 집안의 後孫인 竹老公이 1637년「寧海公語及門譜」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 諱 贒이 기록되어 있다. 推定해 보건데 각 집안에 내려오는 다른 종류의 家牒이 있었던 것 같고 이전부터 諱 贒을 始祖로 하는 家牒이 존재하였는지 아니면 1637년 이후에 발행되는 어떤 家牒에 최초로 기록되는지는 文獻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명백한 것은 我申의 始祖 統一은 1764년 英祖甲申譜에 의해 諱 贒으로 매듭지어 진다.
申應鉉은 <英祖甲申譜>跋文에서 甲子譜, 丙申譜 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底本이 된 다른 家牒이 존재한 듯하다. 辛壬之禍 이후 後孫들은 沒落하여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오랜 기간 동안 집안 간에 交流가 없었던 것 같다. 집안마다 각기 다른 돌림자를 사용하여 왔고 하물며 諱 贒의 5세손인 諱 仲錫의 후손이 <純祖甲申譜>를 修譜할 당시인 1824년에 合譜되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집안 간에 서로 다른 家牒이 존재 했을 可能性은 충분히 있다.
<氏族源流>에서는 寧海申氏의 始祖를 諱 得淸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寧海申氏의 통일된 최초의 족보책인 英祖甲申譜가 발행되기 90여년 이전이므로 寧海申氏 宗孫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어떤 家牒을 보는 것 같다. 諱 仲明의 子로 諿과 君平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1636년에 발행한 平山申氏 丙子譜의 내용을 이기한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에 刊行한<增補文獻備考>등에서도 寧海申氏의 始祖를 諱 得淸으로 記載하고 있는데 당시 寧海申氏 집안의 資料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 같다.
4. 寧海申氏(현 平山申氏判事公派)의 世譜
(1) 英祖甲申譜
1764년 발행한 寧海申氏의 최초 족보인 <英祖甲申譜> 卷之一을 보면 始祖 申崇謙으로 分派始祖로 諱 贒을 기록하고 있는데 分派始祖 이전의 11世까지는 平山申氏 丙子譜의 繼代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丙子譜를 인용한 것 같다. 諱 仲明과 樂浪郡夫人金氏의 子로 諿, 君平, 贒을 기록하고 있고 諱 贒을 1308년생으로 子인 諱 用羲를 1325년생으로 孫子인 諱 得淸을 1342년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타 집안의 族譜에 비해 조상님들의 生沒年代를 비교적 詳細하게 기록하고 있고 繼子와 庶子를 구분 표기하고 있다. 分派始祖 贒에 대해서는 ‘高麗國子進善元武宗至大元年戊申生 室慶州金氏父允 墓失傳’ 라고 기록하고 있다.
(2) 純祖甲申譜
1824년 발행한 寧海申氏 <純祖甲申譜>卷之一의 舊譜辨疑附錄에 의하면 宗長 竹老公은 1637년 「寧海公語及門譜」에서 我申系出平山 始祖以上世系失傳이라고 하고 있다. 이 <純祖甲申譜>에서는 4世에 諱 晟을 入錄하고 本譜無라고 기록하고 있어 다른 무엇을 보는 것 같다. 10世 諱 衍과 11世 諱 仲明사이에 淑과 益保를 入錄하고 있다. 일부 기재사항은 그 근거가 萬姓譜임을 밝히고 있다. 萬姓譜의 어떠한 내용까지 引用하는지 잘 살펴보지 않았지만 <英祖甲申譜>를 대비해 볼 때 贒, 用羲, 得淸의 새로운 略歷이 일부 추가되는데 이 내용도 <萬姓譜>를 인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華海師全>에 나타나는 上系 기록과 行狀, 出生年度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이때까지만 하여도 후손 집안에서는<華海師全>의 존재여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寧海申氏 始祖 贒에 대해서는 ‘舊譜高麗進士貫寧海始此 按萬姓譜云 高麗國子進士陞進善左僕射 以大勳芳封寧海君 配慶州金氏父允 墓失傳 又按元武宗至大元年戊申生 高麗忠肅王朝進士 忠惠王朝國子進善左僕射 恭愍王十八年己酉奉使皇明 高皇帝素聞公乙名節特賜爵金紫光祿大夫庚戌春使還恭愍王二十一年壬子封寧海君諡文貞公’ 라고 기록하고 있다.
(3) 禮州世錄
申贒, 申用羲 등 영해신씨 34명의 實記 및 事蹟을 기록한 9卷 4冊의 木版本이다. 역대 영해신씨(현 평산신씨판사공파) 중에서 비교적 宗族의 발전에 공이 큰 선조님의 史蹟을 수집하여 기록하고 있다. 책머리에 平山世系圖와 禮州派系圖, 不諠齋先生實紀序가 있다. 不諠齋先生實紀序는 許傳이 1855년도 作成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許傳의 性齋先生文集 卷之十一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의 卷頭에 있는 禮州派系圖에서는 贒에 대해 ‘高麗國子進士進善左僕射 大明高皇帝進階金紫光祿大夫 賜號不諠齋 封寧海君諡文貞’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때의 平山申氏 大宗中에서는 申贒은 虛構의 人物이라고 主張하지만 根據가 없다. 華海師全이 僞書라고 하여도 申贒이 허구의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華海師全이 발견되기 200여년 전부터 申贒은 寧海申氏(現 平山申氏 判事公派)에서 始祖로 모셔오고 있었다. 寧海申氏 家門에서 정성스럽게 祖上의 系統을 이어 내려온 <英祖甲申譜(1764년)>, <純祖甲申譜(1824년)>, <禮州世祿(1855년)> 등 모든 家牒이 僞造되었음을 立證하여야 實存人物이 아닌 것이 된다. 우리가 代代로 繼代를 이어 내려온 譜牒을 우리의 家系를 잘 알지 못하는 제 3자가 僞書라고 하고 大衆媒體를 이용하여 架空人物이라고 떠들고 있는 것은 後孫을 侮辱하는 것으로 看做하여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이것은 분명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諱 贒이 족보상에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純祖甲申譜의 附註의 기록이라고 하여 華海師全의 발견시기를 1870년대로 보고 이와 연관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事實을 잘못 살핀 것이다. 派宗中에서는 合譜 당시 英祖甲申譜를 提出하였는데 이것을 묵살하고 任意的으로 기록한 것 같다. 그렇게 하려면 英祖甲申譜, 純祖甲申譜, 禮州世錄에 있는 不諠齋先生實紀가 1873년 以後에 만들어지는 僞書로 보아야한다. 兩 舊譜에 나타나는 上系와 華海師全의 上系 記錄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그 점을 說明할 수 있어야 한다. 純祖甲申譜에서는 萬姓譜가 일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 부분도 說明이 可能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譜牒의 경우 後孫들이 記錄하므로 그들의 祖上에 대해 檢證되지 않는 내용들이 登載될 수가 있고 우리의 譜牒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蓋然性을 안고 있다. 正史와 비교 또는 주변의 여러 가지 與件과 비교해 보면 의심할 수 있는 기록들이 간혹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최초 記錄시 지나간 몇 백년 전의 祖上에 대한 기록이라면 그 可能性은 더 높아진다. 아마 이러한 부분은 비록 우리의 譜牒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의 譜牒에서도 이와 類似하게 發見될 것이다. 기록된 사항들이 眞實인지 여부는 確認할 수 없지만 後孫된 입장에서는 反證이 없는 한 眞實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正史뿐만 아니라 朝鮮初에서 甲午改革 이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文集을 발행하였을 것인데 여기에도 一切 申贒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1923년 朴麟善의 跋文이 실려 있는 <貞齋先生逸稿>, 1910년 禹夏轍의 跋文이 있는 <易東先生實紀>, 1919년 <盈寧承覽> 영덕과 영해지방의 傳說을 수집 기록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에 ‘귀신을 물리친 선비’ ‘원나라 공주를 구한 선비’이라는 題目으로 두 편의 傳說이 전해 내려오고 몇 권의 野史기록에 나타나는 정도이다. 두 편의 傳說은 언제부터 傳來되어 내려오는지 잘 알 수 없고 나머지 기록들은 대부분 <華海師全> 발견 이후의 記錄들이다.
朝鮮 初期에 발행되는 李穡의 牧隱文集이나 李崇仁의 陶隱集은 權近이 撰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申贒에 대해 言及이 없는 것은 있을 수 있다. 圃隱文集은 18세기에 발행된다. 吉再의 冶隱集도 16세기 후반에 後孫에 의해 發刊되는데 冶隱先生의 글은 거의 없다. 不事二君의 忠節을 지킨 高麗末 忠臣들의 글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다. 朝鮮 初期 個人文集에서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후에 發行되는 個人文集에서도 膾炙되기는 어렵다.
易學의 大家로 널리 알려진 禹倬 선생의 性理學에 대한 見解가 <華海師全>의 備耗 편에 나타나고 李穡과 鄭夢周의 性理學에 대한 見解도 다른 文獻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 책을 통하여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正史나 個人文集에 이름이 言及되지 않는다고 虛構의 人物이라고 斷定하기는 무리가 있다. 正史와 個人文集 등에서 言及은 없지만 寧海申氏(現 平山申氏判事公派)의 宗中에서는 <華海師全>이 發見되기 오래전부터 始祖로 모셔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