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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간 키운 이슬람 공포증
서구 기독교, 이슬람 제국의 위협에 맞서 ‘왜곡된 이미지’ 계속 생산
최준석 편집장
▲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대모스크. 모스크 한쪽에 십자군 전쟁의 아랍 측 영웅 살라딘의 무덤이 있다. 그가 죽고 800년 뒤 시리아를 점령한 프랑스 장군은 “살라딘, 우리가 돌아왔다”라고 소리쳤다. 사원 건물은 원래 세례요한교회였으며 이슬람의 정복 후 사원으로 바뀌었다. |
기독교 · 이슬람교 모두 아브라함 시조
이슬람은 서양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교나 도교 등 동양의 종교에서 영감을 받기 시작한 사람들도 이슬람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을 시조로 한 세 번째 종교이다. 첫 번째는 유대교, 두 번째는 기독교다. 서양은 반유대주의만큼이나 견고한,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독일 제3제국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이후에는 많은 사람이 이런 옛 편견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오래된 증오심은 여전하다.
이슬람에 대한 적대감을 이해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슬람만큼 오래도록 서양에 도전해온 사상과 국가는 없었다. 7세기 중동에 이슬람 제국이 건설되었을 때 유럽은 후진 지역이었다. 유럽이 암흑기를 벗어나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을 때도 이슬람 제국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은 이 당당하고 역동적인 문화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12~13세기 십자군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오스만제국은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 이슬람을 전파했다. 이런 역사 때문에 서구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에 대해 도저히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었다.
이슬람교가 원래 폭력적이고, 광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분명 오류다. 이슬람은 보편적인 종교이며 반서양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다. 서구의 풍자만화, 광고 및 대중적인 기사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는 전세계를 장악하려는 이슬람의 음모에 대한 옛 서구의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종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가치나 궁극적인 의미 가운데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할 만큼 창의적이었다. 서구가 이슬람 세계로부터 신뢰를 잃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의사소통의 단절이 결코 어느 한쪽만의 과실은 아니다. 서구가 한때 이슬람 세계로부터 받았던 연민과 존경을 회복하려 한다면, 우리가 지금 용기있게 추구해야 할 것은 관대하고 너그럽고 용기있는 전통이다.
기독교인 50명 순교사건
서구와 이슬람 간의 씁쓸한 역사는 이슬람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 그곳에서 벌어진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 모독 사건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850년 페르펙투스라는 가톨릭 수도사가 코르도바의 시장으로 물건을 사러갔다. 코르도바는 이슬람 국가가 들어선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였다. 아랍인들이 다가와 그에게 예수와 무함마드 중 누가 더 위대한 예언자냐고 물었다. 페르펙투스는 질문에 함정이 있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후 그의 태도가 변했다. 이슬람의 예언자는 사기꾼에다 성도착자, 그리스도의 적이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아랍인들이 그를 덮쳤다. 이 사건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코르도바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페르펙투스에 대해 이슬람 국가의 재판관인 카디는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무슬림들이 페르펙투스를 먼저 부당하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다시 페르펙투스가 독설을 퍼부으며 무함마드를 모욕했다. 카디는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사가 사형을 당하자 기독교도들은 즉시 그의 사지를 절단하고 그를 순교자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이삭이라는 수도사가 다시 카디 앞에 나타나 무함마드와 이슬람을 비난했다. 카디는 위법 행위를 그대로 묵과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스페인의 기독교 평신도 파울 알바로는 페르펙투스 수도사를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무함마드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비난은 코르도바에서 소수 민족의 마음을 움직였다. 권력을 쥐고 자신만만했던 무슬림들은 기독교 광신자들을 마지못해 사형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기독교도들이 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건 순교자 숭배뿐이라는 걸 무슬림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삭이 순교한 뒤 같은 수도원에 있던 6명의 수도사가 찾아와 무함마드를 비난했다. 그해 여름 모두 50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들 순교자의 무함마드에 대한 생각은 8세기에 나온 책에서 비롯됐다. 100년 전인 8세기에 무함마드 일대기가 기독교 세계의 오지인 팜플로나 인근 레이레 수도원에서 만들어졌다. 팜플로나는 오늘날 스페인 북부의 나바라주의 주도. 서양판 무함마드 일대기는 끔찍한 공상소설이었다. 무함마드는 세상을 속인 사기꾼이자 협잡꾼이며 호색한으로 나온다. 이슬람은 독자적인 계시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에서 파생된 이단 종교였다. 전쟁과 살육을 찬양하는 폭력적인 칼의 종교였다.
“이슬람·유대교는 하나의 적”
이로부터 몇백 년이 지난 11세기 말 유럽은 교황을 중심으로 다시금 일어났다. 이슬람 국경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1091년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에서 이슬람교도를 몰아냈다. 스페인 북쪽의 기독교도들은 남부의 이슬람교도와 전쟁을 벌여 1085년 톨레도를 정복했다. 1095년 교황 우르반2세는 유럽의 기사들에게 예수의 무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원정 여행을 명령했다. 제1차 십자군전쟁의 시작이었다. 1099년 힘겨운 전쟁 끝에 십자군은 겨우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사실상 무함마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때가 되어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당시 서구에는 샤를마뉴 대제, 아더 왕, 로빈 후드 신화가 유행했다. 동시에 기독교의 망령이자 적인 무함마드의 신화도 서구인의 가슴속에 굳게 자리잡았다.
원래 유럽 땅에서 유일한 외래 종교는 유대교였다. 제1차 십자군전쟁은 라인계곡을 따라 들어선 유대인 공동체들을 짓밟는 유럽 최초의 유대인 대학살로, 중동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반유대인 정책은 십자군전쟁 중 불치의 유럽병이 되었다. 1179년, 1215년에 열린 제3차, 4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이슬람과 유대교를 묶어 하나의 적으로 간주했다. 기독교도들은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와 식사만 같이 해도 제명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들의 아이들을 돌보거나 거래를 할 수도 없었다. 122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9세는 다음과 같은 법령을 추가했다. ‘무슬림과 유대인은 기독교도와 구별되는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한다, 기독교 축제일에 거리에 나와서도 안되고 공직을 맡을 수도 없다.’ 중세의 지식인들도 이같은 반이슬람 물결에서 피해가지 않았다. 단테는 ‘신곡’에서 중세의 위대한 지성인 이슬람 철학자 이븐 시나와 이븐 루시드를 지옥의 변방에 살고 있다고 묘사했다.
과거 다른 종교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쪽은 서구의 기독교였지, 이슬람은 아니었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들은 이슬람 제국 안에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1242년 프랑스의 루이9세는 유대교의 탈무드를 예수에 대한 악의적 공격으로 간주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인으로 인정한 그는 탈무드를 금서로 지정하고, 자신이 보는 앞에서 모두 불태웠다. 유대인과 논쟁하는 방법은 오직 “칼로 깊숙이 배를 찔러”죽이는 것뿐이라고도 했다. 기독교 이단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최초로 종교재판을 소집한 것도 루이 왕이고, 수백 명의 남녀를 화형에 처한 것도 그였다. 그는 이슬람교 또한 증오했으며 두 번의 십자군전쟁을 이끌었다.
무슬림 이용해 순교자의 왕관을 얻다
12세기 이슬람에 대해 좀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한 인물은 클뤼니의 대수도원장 피에르였다. 그는 스페인의 베네틱트회 수도원을 찾아가 이슬람 서적을 번역해 달라고 했다. 코란을 라틴어로 옮긴 최초의 번역서가 1143년에 나왔다.
13세기 초 제5차 십자군전쟁이 소강 국면에 들어갔을 때 한 유명한 수도회의 성자는 자신의 수사들을 이슬람 세계에 보냈다. 스페인의 세비야에 도착한 이들은 9세기 코르도바 순교자들의 행동을 그대로 반복했다. 처음에는 무슬림들이 금요 예배를 보는 동안 모스크에 들어가려다 쫓겨났다. 그러자 군주의 궁전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예언자 무함마드를 욕했다. 이들은 선교 여행에서 사랑과 연민으로 무슬림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무슬림을 개종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무슬림을 이용해 순교자의 왕관을 얻는 일에만 급급했다. 당국은 이들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자는 이렇게 외쳤다고 전한다. “이제야 나는 내게 다섯 명의 수사가 있다는 걸 알겠구나.”
종교개혁가 루터는 인생의 후반기에 오스만제국의 침략 위협에 직면했다. 그는 코르도바의 순교자들과 같은 악몽에 시달리며, 기독교계가 이슬람교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기에 서구인은 이슬람 세계를 좀더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1453년 세고비아의 요하네스는 무슬림과 기독교도 간에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국제회의 개최를 제의했다. 1679년 계몽 운동 초기에 두 편의 영향력있는 작품이 나왔다. 하나는 바르텔미 데르벨로의 ‘동방 총서’다. 19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이슬람과 동양학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같은 해 영국의 동양학자 험프리 프리도는 ‘무함마드:사기꾼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저자가 중세의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734년 조지 세일은 코란의 영어 번역본을 출간했다. 18세기 말 ‘로마제국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이슬람교의 일신교로서의 특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슬람이 세계 문명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는 걸 보여줬다. 그러나 편견은 워낙 뿌리 깊었다. 기번은 무함마드가 전리품과 섹스를 미끼로 아랍인을 유혹하여 자신을 따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그는 이집트를 점령한 뒤, 카이로의 가장 큰 사원이자 오래된 대학교인 알 아즈하르의 학자 60명을 자신의 막사로 불러들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무함마드를 칭송하고 그들과 함께 볼테르의 저서 ‘무함마드’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슬람교에 대한 그의 이해심은 이집트인의 적개심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렸다.
19세기는 식민지 시대로, 유럽인에게 자신들이 다른 종족에 비해 우월하다는 건전하지 못한 확신을 심어줬다. 1917년 예루살렘에 도착한 영국의 앨런비 장군은 십자군전쟁은 종결됐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군 사령관은 병력을 끌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을 때 대사원 내 살라딘 무덤을 향해 “우리는 다시 왔다. 살라딘!”이라고 외쳤다.
무슬림의 서양 인식은 불과 200년 전
이런 서구의 오만한 태도는 이슬람 세계로부터 서구가 따돌림을 받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반(反)서방 정서가 이슬람 세계에 팽배해있지만 이건 새로운 현상이다. 서양은 무함마드가 적이라는 환상을 오래도록 품어왔지만 대부분의 무슬림이 서양을 인식하게 된 건 불과 200년 전부터다. 십자군전쟁은 유럽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중동 대부분의 지역 내 이슬람교도에게는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 십자군전쟁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이라크와 이란에 있는 이슬람 제국의 심장부는 중세 서구의 공격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들은 서양이 적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무슬림은 기독교 세계를 생각할 때 서양이 아닌 비잔틴 제국을 떠올렸다. 이슬람 세계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부 사정이 복잡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중동인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이들은 프랑스 군인들의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들은 서양의 급진적이고 현대적인 사상에 매료됐다. 19세기 말, 이슬람 세계의 거의 모든 지도적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자이자 서양론자였으며, 서양의 생활 방식을 흠모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달라졌다.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소원해진 한 가지 이유는 서구 문화에 깊이 뿌리 박힌 이슬람과 무함마드에 대한 적대감과 경멸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적의와 멸시가 후기 식민지 시대 이후에도 이슬람 국가에 대한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슬람 세계의 많은 사람은 서양을 무분별하고, 일방적이며, 사악한 집단이라며 무조건 거부한다.
서양은 이슬람에 대한 증오심 표현을 위해 새로운 고정관념을 계속 만들고 있다. 1970년대에는 석유재벌인 이슬람 셰이크의 등장으로 시달림을 당했고, 1980년대에는 광신적인 아야톨라(이란 시아파 이슬람에서 고위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 호메이니에게 시달렸다. ‘악마의 시’ 작가 샐먼 루시디 사건 이후로 이슬람은 창의력과 예술의 자유를 말살하는 종교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 중에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건 하나도 없다. 무슬림이 유대인, 기독교도와 같은 신을 숭배한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알라’를 마치 로마 신화에 나오는 주피터처럼 완전히 다른 신으로 상상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가 예수를 숭배하는 것과 같이, 무슬림이 무함마드를 숭배한다고 추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