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 사상경계
예수 피조물/이단규정 희석/설교해방 미사강론 모델제시
정용섭 목사는 (이하 : 정 목사) 서울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성결교 출신, 계명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구성서아카데미 (http://dabia.kehc.org) 원장, 샘터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그는 속빈설교 꽉찬 설교 /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 335쪽 / 1만원>/ 설교비평에 저자로서 세간에 이슈이기는 하나, 그의 사상에 따른 설교 비평과 그 대안에 결과는 자신의 신학사상에 의혹과 성경의 가르침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정 목사 사상의 흐름은 신학의 다양한 일면에 시각인 이 소리 저 소리를 나열 제공하기는 하나, 그 주장은 성경적인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배설물 같은 자유주의 사상을 팔려는 말장난 노릇에 불가하다.
그는 성경에 반하는 신학이나 철학자의 소리를 인용, 이에 편승 매끄럽고 교묘하게 달콤한 것 같으나, 자신하는 소리가 진정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지 의문이라는 지적과 더불어, 그의 글 솜씨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상의 흐름에 장애를 일으킴은 물론, 정통신앙에 도전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이라는 평가이다.
그 증거는아래 1.2.3.에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1. 예수님은“ 그 인간성을 유지한 채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요“
2. 이단의 규정을 무시하는 기독교영성신학의 실천 이단규정 진리수호 희석초래 속빈 설교비평 초래
3. 설교비평 설교해방 회복대안 이단 가톨릭 미사 강론 모델제시 가톨릭화 의도에 결과를 초래 했다.
물론 사상에 대한 연구나 소개를 하는 자기의 표현은 자유하나, 유감스럽게도 신학검증에 대상임을 자초하는 글로 기교를 부린다는 것은 생명을 전하는 목사의 할 일이 아니라 믿는다.
1. 정 목사 예수는 처음부터 인성유지 하나님의 아들 주장 < 비판 .
아래 인용문은 대구성서아카데미(htty://dabia.net) 연락처 :053-856-5079/ 011-9577-1227 /신학마당 / 온라인 강의실/ 여성신학 / 번호 69 / 12장 :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관한 신학적 고찰 2005/05/23/조회1473/추천69에서, 아래의 인용문과 같이 예수님을 피조물 확정 신성 모독을 했음이 확인된다.
1) 정 목사의 주장.
“...다시 한 번 더 정리하자. 동정녀 출생의 실질적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와 일치한다.
둘째, 이 역사적 예수가 어떤 한 시점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게 아니라
그 인간성을 유지한 채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중재하는 자였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고유한 기독교 사상과 만난 셈이다.
역사적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시간을 초월해 있다는 ‘예수의 선재성’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 내재와 역사 초월이 이미 예수의 탄생 설화에 개입해 있는데,
이런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수 이해는 오늘까지 지속된다....”.
2) 비 판.
정 목사의 말과 같이 예수님이 처음부터 인간성을 유지한 채 하나님의 아들인가?
이는 곧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피조물 하나님이 존재를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럼에도 정 목사가 삼위일체를 믿는다면 이 믿음은 헛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이 빠진 이위일체로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①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인간성을 유지한 피조물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일 뿐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성(인성)을 유지한 하나님의 아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빌2:6-8 /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②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다.
그가 없이 지은바 된 만물인 피조물이 없는 고로 처음부터 인간성을 유지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 요1:1-3/ 1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太初)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萬物)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③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육신이 되신 것은 초림하신 때이다.(도성인신).
▲ 요1:14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榮光)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獨生子)의 영광(榮光)이요 은혜(恩惠)와 진리(眞理)가 충만(充滿)하더라
예수님에 대하여 독생하신 하나님(요1:18),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인자(행7:56,마8:20)라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인간성을 유지한 채 피조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구속을 위한 초림 때에 도성인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2. 이단사상 무시 기독교영성신학 실천 속빈평가 이단규정 희석초래.
2006/12/15초판<대한기독교서회>「속빈설교 꽉찬 설교」정용섭의 설교비평 ① 저술이 세간에 시선을 끌고 있다.
이 책은 이단자 구분이 없이 설교비평 ① 편집에 동승을 시켜서 진리수호의 결과를 희석함에 이용되는 속빈 평가라는 우려가 거세게 일고 있음이 현실이다.
그의 저술에 대하여 민영진의(대한성서공회총무) 참된 설교를 향한 이유 있는 비평에 대하여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으나, 결과론적으로 생명을 전하는 강단설교 비평을 운운함에 비평대상 편집에서, 이단의 규정을 받은 김기동목사, 윤석전목사, 박옥수목사를 선별하여 분리하지 않고 동승을 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진리수호에 시각에서 진리의식이 흐릿하여 혼란을 야기케 할 뿐 아니라,
각 교단의 결정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정 목사의 다원화 혼합주의 사상에 입문하는 영성신학 바탕에 따른 분출이라 본다.
그의 저술은 성경적 잣대에서 라기보다는 영성신학의 토대에서 설교평가이다.
이것이 속빈 강정인 것은 각 교단의 이대위나 전문연구의 결정을 무시하여 경계의 벽을 허무는 균열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사단의 참소가 쓴 소리 단 소리로 위장한 역설로 비추어진다.
왜냐하면 정 목사는‘이단이라는 딱지를 무시, 그의 설교를 들리는 그대로 듣고, 보이는 그대로 보는 방법밖에 없다.
선입견 지우기가 기독교 영성의 토대라는 평소의 지론을 평가실천’을 한 것은 양의 옷으로 위장한 노략질하는 이리의 정체를 무시한 평가에 쓴 소리와 단 소리이가 혼합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기독교 영성은 영성신학에 분류에서,이는 기독교의 토대를 이탈한 성경에 반하는 가톨릭으로부터 기독교형의 탈을 쓴 사상이다. 이에 연루한 맥락에서 영성신학에 준한 설교평가는 성경적인 평가로 인정될 수가 없음이 확인되어 위장한 것이라 믿는다. 정 목사가 진리수호 관련에서 비판을 받는 것은 이단과 사이비규정을 별것이 아닌 것으로 헷갈리게 어필하도록 희석하므로 진리수호에 역기능적인 행위로 지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성신학 사상에 의한 설교평가는 성경에 반하는 잣대의 평가기준에 흐릿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신학사상에 정통성이 의심스럽게 됐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예방할 수 있는 피할 기회를 본 협회는 정 목사에게 1년전 기독교사상에 연재한 글과 대구성서 아카데미의 지료를 근거로‘윤석전목사 설교비평 재연구 평가에 유익한 자료 지원과 고언대책’에 협조를 정중히 요청한 바가 있음에도(기이사연대협 : 제2005-48호 2005.12. 20. 화요일). 이를 전혀 간과하지 않아서 스스로 자초함이 유감스럽다.
3. 설교해방 회복에 미사강론 모델 대안제시 가톨릭화 의도.
정 목사는 속빈설교 꽉찬 설교에 이여 /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 335쪽 / 1만원>/정용섭의 설교비평② 저자이다. 그의 설교비평은 진리수호를 무시하는 속빈평가이다.
왜냐하면 영성신학을 신봉하는 바탕에서 설교해방 대안이 가톨릭의 전통 미사와 강론 귀환 모델을 제시한 흠모론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설교 비평을 의도한 설교해방의 대안이, 그럴싸하게 공감이 되는 비평의 부분이 있더라도, 이는 사단의 변론과 언쟁으로 떠버리는 글쟁이 간계인 사단의 참소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좇는 것이 아니다.
장 목사의 제시는 기독인의 감소 해결이나 설교해방의 대안도 아니다. 어찌 제안 할 것이 없어 설교비평의 회복 제시가 중앙집권체제 가톨릭 이단의 미사와 강론을 모델로 제시한다 말인가?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교와 지도자 성도들을 모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평의 요소를 빌미로 요란스럽게 침소봉대 스스로 업신여기어 얕잡아 깔보는 행각이다. 기독교 암흑시대 가톨릭에 의하여 1,500만명이 진리수호로 피 흘린 발자취로 얼룩진 것을 모르는가? 이를 안다면 이렇게 경솔한 대안제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정 목사의 설교비평을 진리수호 시각에서 각성을 촉구하는 비판임을 밝힌다.
사실 그가 지적한 비평의 요소들은 이미 비판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신화적 설교와 신학적 설교,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 개혁적인 신앙, 혹은 신앙의 신비, 말씀의 숨과 결,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 규범 설교의 역사허무주의, 교회의 미래를 설계하는 설교의 미래, 계몽 설교와 미몽의 길, 허무주의 영성, 들리는 설교와 들리지 않는 설교,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 큐티 식 설교의 효율성과 미숙성, 기독교 신앙의 도구화, 적극적인 설교와 소극적인 설교”로. 성경의 재해석을 이탈하는 것은 비평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이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에는 공감하는 바이나, 진리수호 의식이 흐릿하여 이단을 묽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성서 택스트 영의 생각에 반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우군적인 적군의 행각이란 것이다.
정 목사의 비평에서 진리수호에 반하는 행각을 서슴없이 한 증거는 그의「속빈설교 꽉찬 설교」에서 확인된다. 정 목사의 그럴싸한 설교 비평의 품위 손상에 결정적인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들어냈다.
이는 그의 설교해방과 설교개혁에 가당치 않는 대안을 제시한 2007년 <2월 24일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열린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연차회의 발제문>에서, 그의 설교개혁이란 것이 가톨릭으로 귀환을 흠모하는 미사와 강론을 모델로 제안하는 것이 한심스럽게 됐다. 왜냐하면 거대한 공룡 이단 가톨릭으로 가닥을 잡아 초점을 맞추다니 위험한 발상이다. 따라서 설교비평을 의도한 저의가 의심스럽다.
정 목사는“마지막으로, 설교문제와 연관해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하나?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하겠지만 쉽게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미 교회의 전통이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전통은 그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미 미래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쪽을 향해서 영적인 촉수를 늘 기울어야 한다.
여기서 전통은 교회력과 예전을 의미한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와 설교 전문을
일정한 수준에 올라선 설교 전문가들이 작성하고,
그것을 개별 설교자들이 섬기는 교회의 형편에 맞도록 활용하는 방식이 최선이다. 이럴 때 개별 설교자는 설교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되고, 청중들은 품격 높은 설교를 들을 수 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방식에 염려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별 설교자들의 영성이 훼손된다고 말이다.
그건 그야말로 쓸데없는 노파심이다.
목사의 영성은 설교 준비에만 달려 있는 건 아니다.
개인의 성서 읽기와 묵상, 섬김, 예배 인도 등등, 영성 심화의 길들은 많다.
전문가에 의해서 준비된 설교 전문으로 설교를 하게 되면 개별 설교자들의 영성도 그만큼 심화되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라.
시인도 아닌 사람이 억지로 쥐어짜낸 시를
청중들에게 떠들어대는 것과
진짜 시인의 시를 청중들에게 읽어주는 것 중에서
우리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하겠는가.
필자의 생각에 개인 설교자들을 설교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미 이런 패턴으로 가고 있다.
그들은 사제의 개인 역량보다는 가톨릭교회 전체의 역량을 키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교회의 일치, 교회력에 의한 미사와 강론 등등, 이런 것들이 개신교회와 달리 로마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장점들이다.
이 장점들이 결국 한국에서 가톨릭교회의 외형적인 발전까지 불러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정 목사가 이런 수준에 의식을 가진 것이라니, 양을 지켜야 할 목사로서 그의 신앙부터 의심스런 것이다. 이것이 설교비평으로 진리논쟁의 대안을 위한 설교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는 뼈를 깎는 제시인가?
위 제안은 지성인을 견향하여 이단을 만드는 선동적인 가톨릭化이다.
이는 기독교를 이단의 미궁으로 잡아넣으려는 마치 토끼몰이나,
새 그물을 처 놓은 곳으로 모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는 구역질나는 가증한 짓이다.
이것이 성서 택스트 중심과 해석으로서 말씀의 능력을 회복하는 설교해방이란 말인가?
정 목사는“한국교회가 설교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는 말씀의 능력을 회복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복음을 훼손하는 종교적 잔소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질타한다.”
그러나 위 저질적인 해법의 제안 의식에 준한 그의 쓴 소리 단 소리 설교비평은 사단이 위장한 이단과의 연함을 도모하는 행각으로서 참소라는 혹평이 마땅할 것이다.
정 목사는 기독교의 영성을 토대로 하는 지론에서 진리의식이 흐릿한 설교비평의 속내를 여실히 들어 낸 것이다. 그는 이단의 규정을 받았거나, 경계의 범주 안에 있는 자들을 구분하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이다.
사실 영성신학의 지론을 토대로 신봉하는 자들은 성서 택스트 해석을 운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운동은 모든 민족들의 종교적 사상을 알맹이라(진리) 인정하고, “다양한 세계 종교란 하나의 동일한 신적 실재 (the real)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응답이라는 것이다.”
영성신학은 체험과 경험을 중시 하나님은 먼저 체험케 하시지 않고는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는 가치관에 따른 것으로 신비주의 이단이 은신함에 최적한 환경 분위기이다. 한편 이 영성운동이란 것으로 상업적 직업화로 이득을 노리는 치병과 예언집단의 접목이야말로 반 성경적인 가치관의 합일로 타락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이단사이비연구대책협회 / 상임회장 원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