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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흐름을 강화하는 3 가지 응답: “예”, “아니오” & “대안”<
우리가 거의 그것에 대해
기대하지 않을 때,
길을 막고 있는 것이 길이다.
부서진 문이 빛을 들어오게 한다.
부서진 심장이 세상을 들어오게 한다.
바람에 흔들린 과일처럼,
우리의 부서진 계획들이 천사들을 매혹시킨다.
- 마크 네포, <endless practices>-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만나는 실재에 대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은 그 실재(사람, 관계, 상황, 사건, 일, 이슈, 과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만일 그것이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이거나 안전을 넘어선 통제하기 쉽지 않은 대상, 즉 자극(stimulus)으로 인식될 때 자동적으로 우리의 반응은 맞서기, 얼어붙기, 회피하기로 대응하게 마련이다.
맞서기(fight), 얼어붙기(frozen), 그리고 회피하기(flight)라는 이 3F’s의 자동반응은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의식 속에 있는 신념체계(고정관념)과 과거의 그와 유사한 상황에 대한 나의 무력감과 온전히 처리되지 않고 남은 감정적인 찌꺼기, 즉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의 기억이 그 자극으로 활성화되면서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격발(triggering)되는 행동들이다. 이런 반응들은 삶의 정황들에 관해 자신의 자아가 내리는 선택에서 오는 충일감을 막고, 우리의 심장을 응결시켜 마음을 닫히게 만든다.
맞서거나 얼어붙거나 혹은 회피하는 나의 반응은 머리의 판단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민한 촉수를 높여서 두려움과 결핍에 대한 안전과 자기 보호의 기제(메커니즘)를 작동시킨다. 나에게 다가오는 삶의 실재들에 대해 충분한 성찰에 따른 선택이전에 이러한 무의식적인 자동반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바로 삶의 자극이라는 게스트에 대해 내가 맞이할 때 내면에서 사용하는 문이 시비(옳고 그름)와 호불호(좋아하고 싫어함)의 에너지로 문을 열고 맞이할 때이다. 즉, 원인은 게스트에게서가 아니라 게스트를 맞이하는 나의 내적 상태가 시비/호불호의 에너지로 있을 때, 그리고 내 상태가 옳지 않음과 좋아하지 않음의 부정적인 에너지로 반응할 때 정확히 맞서기, 얼어붙기 혹은 회피하기라는 세 방법 중 하나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
물론 이 시비/호불호의 에너지는 여러 원인들로 인해 만들어진다. 종교적·신념적 확신, 어렸을 때 통제적이거나 지나치게 태만한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오는 불안전감과 무능력감에서 파생된 처리되지 않은 감정적인 기억들, 충동과 욕망에 대한 무절제, 삶의 여러 관계망 속에서 오는 불협화음의 경험에서 오는 습관과 행동의 패턴화, 자기 선택과 행동들에 대한 성찰적 피드백의 결여, 심리적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보상심리 등등의 수많은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자극들이 ‘문제(a problem)’로 인식될 때 우리는 그러한 반응에 경향성에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빠지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의식 안으로 이러한 시비/호불호를 주의 깊게 성찰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경향으로 우리가 수용하고 그에 대해 우리가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멈추어서 성찰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낯 설거나 고통까지 유발시키게 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행동유형이 자신의 원래 지닌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비극적 간극(tragic gap)’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선한 의도-원하는 결과사이의 이러한 비극적 간극은 마음이 닫혀 연결이 되지 않은 내적 상태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행동이든 그 결과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한 의도에서 유래된 행동유형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비극적 간극을 경험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선한 의도에 대한 정당성으로 인해 힘과 권력이라는 강제와 비난, 영향주기라는 힘(power-over)의 행사는 무의식적이게 된다. 그래서 쉽게 내가 상대방에 대한 ‘영혼의 폭력’(상대방의 심리적 공간에 침범하기)이 자각되지 못한 채로 있게 된다.
그렇다면 ‘마음이 열려 연결된’ 내적 상태에서는 삶의 실재에 대한 응답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한 가지 비근한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두어 달 전에 학교폭력사건으로 인해 학교 측에서 심각한 상황이어서 도움을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서너 명의 중학생이 자신의 통합반에 있는 특수아동(지적장애아동)을 비디오로 찍은 동영상이 문제가 되었다. 그 특수아동의 부모와 교사가 보기엔 아이를 ‘놀림감’(부모의 생각)으로 대하고 있고, 자기 자녀에 대한 심각한 부당행위로 보여진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 동영상을 찍은 아이들은 교사가 보기엔 그나마 그 아동과는 절친들이었는데, 놀다가 짧은 시간(1분)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그간의 친했던 상황을 고려해 일처리를 하려는 과정에 있다가 양쪽 부모들의 불편한 감정을 건들게 되면서 일이 커져 버렸다. 담임교사와 학생부장이 선한 의도로 다가가 일처리를 하려 했다가 학폭위 건으로 전환되면서 일이 크게 번져 결국은 중재요청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회복적대화모임의 방식으로 학교, 학부모,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만나고, 당사자학부모들과 교사들(담임교사, 학년부장, 교감)의 서클모임과 학생들과 피해학생부모간의 서클모임이 진행되면서 상황에 대한 이해와 사과, 추후 할 수 있는 대안적인 행동에 대한 약속들, 그리고 학교 내에 특수아동부모와 학부모대표 그리고 학교담당교사가 함께 하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전체 특수아동들과 다른 학생들 간의 건강한 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제안들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통합반의 비장애학생들의 고통과 장애학생의 소외감과 학습지원에 대한 ‘돌봄과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대화모임 진행자로 내가 관찰한 것은 언제나 학폭건에 보듯이 자극이 되는 상황에 대한 맞서기, 얼어붙기, 회피하기의 행동패턴이고, 갈등당사자들은 시비/호불호의 관점에서 ‘선한 의도’와 ‘초래한 결과’의 비극적 간극에서 모두가 희생자로 힘들어 하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번 모임은 내가 경험한 일반 유형의 학교폭력과 달리 ‘장애아동’이라는 민감한 피해자 인권에 대한 경험하기 드문 사례여서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여러 차례 있어서 진행자인 내게도 매우 깊이 경청하고 연결하는 몰입의 순간들이 많았다. 그러한 몰입의 진행을 통과하고 나서 뒤돌아보며 한 가지 크게 다가온 통찰은 바로 맞서기, 얼어붙기, 회피하기에 대한 다른 지평에 대한 통찰이 오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사건에 대한 고통에 대한 당사자들의 이해와 그 정황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들이 들려지고 나면 서클안에 있는 갈등당사자들은 이제 맞서기, 얼어붙기, 회피하기라는 감정과 그러한 인식의 에너지가 전환이 되어 결과로 보여진 고통과 비극의 현재 상태에 대한 상호연결에서 오는 아쉬움과 돌봄의 에너지가 올라오게 된다. 그러한 새로운 에너지가 확인되면 이행동의의 최종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데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제안에 대해 3 가지 응답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진행자는 이 3 가지 가능성을 깊게 들어가 서로를 연결하여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펼쳐내게 된다. 그 3 가지 응답이란 ‘예’ ‘아니오’ 그리고 ‘대안’이다.
자극에 대한 자동 반응이 내려지고 자극이 가능성에 대한 기회로 전환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러한 갈등상황이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잠재적인 기회로 이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인생길을 막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확인하고 다시 길을 가는 제안(suggestion)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첫 번째 응답으로 상대방은 ‘예’를 할 수 있다. 갈등당사자중 누군가는 문제상황을 새로운 가능성의 제안으로 전환시켜 다른 상대방에게 연결을 시도하고 그 상대방은 그 제안에 대해 ‘예’를 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는 그 ‘예’가 허공의 추상적인 동의가 아니라 모두가 그 펼쳐진 ‘예’위에서 걸어갈 수 있는(walk-able) 동의가 되도록 진행자는 ‘예’로 전환된 제안을 구체적으로 실행가능하도록 다듬는다.
한쪽의 제안이 상대방 혹은 일부에게 ‘아니오’로 응답되어지는 경우에는 그 ‘아니오’를 말한 당사자로 하여금 그것의 의미를 표현하도록 하게 하여서 그 ‘아니오’의 진정성과 그 ‘아니오’속에 품어있는 ‘예’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니오에 대한 옳고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그 ‘아니오’에 대한 호기심어린 끈기있는 탐구이다. 그 표면적인 ‘아니오’는 항상 그 깊이에 있어서 ‘예’와 연결되어 있다. 상호 동의되는 부분과 동의되지 않는 부분의 영역을 노출시켜서 상호동의되는 부분을 강화하고 확대하며 동의되지 않은 부분을 최소화하되 전자는 이행동의로 후자는 이해와 관용으로 남겨두되 다음 모임에서 신뢰관계가 쌓이면 다시 시도할 과제로 남긴다.
쌍방의 제안이 서로 만나지지 않은 평행선을 달리는 ‘아니오’의 양극으로서 제안인 경우에는 ‘대안’을 모색한다. 이는 한쪽의 ‘아니오’의 경우에도 사용하는 것이지만 특히 양쪽의 제안이 서로 배치되거나 모순되어 서로가 양립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대안’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양쪽이 소속한 시비/호불호의 공간에서 다른 제 3의 공간을 모색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각자가 집착하는 공간에서 나와 새로운 공간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제안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집착에서 그 제안의 내용과 방법이 함의하는 의미의 영역들을 탐구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아니오’로 응답하는 자기 제안의 내용과 방법이 왜 자신에게 소중한지를 다시 표현하도록 하고 그 소중함과 의미의 출현에 대해 함께 있게 함으로써 각 제안의 내용과 방법의 상호 배타적이고 모순적인 경계선을 흩트려서 ‘통찰의 섬광’이 일어나도록 함께 그 공유된 의미와 소중함에 머물러 있게 만든다.
내가 이 사건의 경험을 통해 점차 확연하게 다가오는 것은 학교폭력사안을 넘어 우리 인생의 일반적인 사안들에 직면할 때, ‘마음이 열려 연결된’ 내적 상태에서는 삶의 실재에 대한 응답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에 대한 내 실존적인 질문에 그 어떤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정황에서 오는 자극들(stimuli)에 대해 맞서기, 얼어붙기, 회피하기의 반응이 아니라 가장 간단하면서도 삶의 풍성함으로 다가가는 3 가지 응답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예’ ‘아니오’ 그리고 ‘대안’이다.
우리는 삶을 포기하기 않고 우리의 일상을 영위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데는 그 무언가 ‘예’에 대한 응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의 파도속에서 전복되지 않고 오는 데는 이미 내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발휘하고 있는 ‘예’의 경험이 나를 지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움, 불안, 격동어린 삶의 파고, 추락과 반등, 도전과 상실, 슬픔과 웃음 속에서 그 뒤에 내가 붙잡고 있는 가치있음과 의미있음에 대한 끊어지지 않은 밧줄을 내가 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치있음과 의미있음에 대한 본질적인 직관에 따라 삶의 진정한 것(what-is-true/what-is-authentic)에 대한 감각을 선천적으로 갖고 살아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삶의 진정한 것이 제안으로 다가올 때 이를 수용하여 ‘예’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예에 대한 감각을 강화하고 활성화시켜 확대한다. 이러한 진정한 것에 대한 예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확대하면서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삶의 수용에 대한 예만이 아니라 삶의 맥락(context)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탈과 길 잃어버림, 에너지 소진과 불편함, 복잡한 얽힘과 모호함, 장애와 방해물들을 만나면서 우리의 ‘예’에 대한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부정적인 경험들을 하게 된다. 이러한 부정성(negativity)과 무(nothingness)의 경험들은 우리를 버팀목 없는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러한 자연적인 경향성에 대해 ‘아니오’를 배우는 것은 그러한 부정성과 무의 경험에 대한 저항과 자기 보호를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혹은 그런 경험들을 삭제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조류(currents)에 맡기는 것에 대한 ‘아니오’이며 그것은 내면의 방향감각에 대한 헌신(commitment)에로의 방향틀기에 대한 것이다. 조류로서 삶의 맥락(context)에 대한 자동적인 허락이 아니라 부정성과 무의 경험에 대한 자동허락과 신념에 대한 ‘아니오’이며, 자기-사보타지에 대한 ‘아니오’이며 다른 사람의 요청에 대한 습관적인 반응태도에 대한 ‘아니오’를 말한다. 이 내면의 방향감각은 ‘선한 것(what-is-good/what-is-ok)에 대한 영혼의 목소리를 향상시킨다. 그러한 내면의 방향감각에 대한 헌신에서 나오는 ‘아니오’는 삶의 맥락 속에 숨어있는 의미(text)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 ‘아니오’로 삶의 조류로부터 부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부력을 얻게 되면 내가 경험하는 그 모든 것이 ‘선한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는 사실도 영혼의 깊이에서 알게 된다.
삶의 흐름 속에서 진정한 것에 대한 감각을 가져오는 것에 대한 ‘예’와 삶의 조류라는 파고 속에서 경험하는 부정성과 무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성에 대한 내면의 방향감각에 대한 헌신에서 나오는 ‘아니오’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상쇄시키거나, 잊게 만들거나, 침해하거나 혹은 모순처럼 다가올 때 ‘대안’을 모색한다. 내가 느껴지는 일방의 ‘예’와 다른 일방의 ‘아니오’가 혹시 서로를 박탈시키거나 상대 에너지를 희미하게 하거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해서 모순으로 다가올 때, 나의 선택은 ‘대안’을 여는 것이다.
‘대안’을 찾는 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서로에게 경계를 만들며 충돌한다고 여겨지는 상호배타성 혹은 상호상쇄성의 경험은 문제나 모순(contradiction)이 아니라 역설(paradox)라는 점이다. 여기서 역설이란 의미와 가르침(-dox)을 함께 품고(para-)있다는 뜻으로 안으로는 통전적인 일치가 겉으로 볼 때는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을 사는 것은 바로 내면의 헌신(아니오)과 삶의 전체성(예)에 대한 자기 개방과 이 둘에 대한 연결을 붙잡고 있을 때 가능해진다. 우리는 이것을 바로 ‘동시성(synchronicity)’이 발생했다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 둘에 대한 연결을 붙잡고 동시성을 살 때, 우리는 삶의 소용돌이를 문제나 모순이 아니라 역설로 이해하게 되며, 전체적인 삶의 흐름이 그 소용돌이를 포함하여 바다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파편적인 것을 넘어 아름다운 감동을 주는 더 충만한 완전함으로 안내한다.
삶의 조류에 대해 우리가 ‘예,’ ‘아니오’ 그리고 ‘대안’을 다시 배운다는 것은 그리고 자극에 대해 반응(reaction)이 아니라 응답(respond)하는 데로 전환하는 동기를 얻는 방법은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이나 현대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이 말한 삶이 원래 ‘숨겨진 전체성(hidden wholeness)’에 기반해서 모든 존재가 발생하고 움직이고 거기로 나아가기 때문임을 앎으로 온다.
예수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한 복음서의 말을 다시 새겨봐야 할 때이다. 삶의 조류에 있어서 언제 예, 아니오 그리고 대안을 찾을 것인지 치열하게 숙고한다면 우리의 눈이 ‘마음의 빛’을 얻어 진실에 대한 예로부터 오는 새로움, 헌신의 아니오로부터 힘을 얻는 선에 대한 감각, 그리고 역설에 대한 대안찾기에서 오는 더 큰 온전함에 대한 미적인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직학습 이론가인 윌리엄 아이작스가 말한 이러한 진-선-미의 분열에 대해 우리는 치유를 받게 되고 이러한 분열을 통합하는 새로운 행동 유형에 대한 인식과 에너지를 다시 얻을 수도 있게 된다.
우리가 거의 그것에 대해
기대하지 않을 때,
길을 막고 있는 것이 길이다.
부서진 문이 빛을 들어오게 한다.
부서진 심장이 세상을 들어오게 한다.
바람에 흔들린 과일처럼,
우리의 부서진 계획들이 천사들을 매혹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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