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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심시조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홍성란
이 글은 성균관대 문예창작의이해 학습자들을 위한 참조글로서 홍성란, 「시조의 형식실험과 현대성의 모색 양상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학위논문(2004) 김학성, 「현대시조의 좌표와 방향」, 『한국시가의 담론과 미학』(보고사, 2004)
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을 참조하였습니다.
형식 form
레이먼드 윌리엄즈는 형식을 가시적이거나 혹은 외부로 나타나는 모습과 내재적인 형성의 충동을 포괄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를 적용한다면, 현대시조의 형식은 그 ‘외부적 모습’은 시조라는 전통적 율격모형을 따르는 것으로 되지만 그 ‘내재적 형성충동’은 현대정신(우리시대의 미학적 정신이라고 할 개성과 창조성 및 참신성을 지향하는 정신)이라는 내적 욕구에 의해 그러한 관습틀을 벗어나려는 지향을 보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볼 때 현대시조를 ‘형식’면에서 규정한다면 시조의 정형틀을 따라야 하는 지향과 그것을 따르되 현대정신을 텍스트화하기 위한 ‘자율성’의 모색을 동시에 추구하는 접점에서 산생된 것이라 할 것이다.
고시조가 일정한 율격모형을 기반으로 하는 정형시라 한다면, 자유시는 그러한 정형의 틀을 거부하고 순전히 내적 충동을 따라 자율적으로 형식을 창조하는 자율시라 할 수 있고, 현대시조는 시조의 양식화된 정형율(양식틀)을 따르되 행의 배열과 연의 구성은 내적 충동에 의한 자율성을 허용하는 자율적 정형시라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성란, 「시조의 형식실험과 현대성의 모색 양상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학위논문, 2004년, 21면.)
고시조의 경우 가곡의 여러 악조와 다양한 풍도형용을 가진 악곡에 실려 음창으로 실현되는 ‘노래하는 시’였지만, 오늘날의 대중일반이 향유하는 신창작의 현대시조에서는 입으로 낭독하는 ‘읽는 시’여서 그러한 악곡은 아무런 의의를 갖지 못하여 다만 필요한 것은 시적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시조가 의미를 악곡에 담아 ‘음성의 의미와 조화적 통일체’를 이루는 데 성공하여 수백 년을 향유했다면, 현대시조는 고시조의 소멸과 함께 이러한 악곡적 음률을 모두 상실하고 ‘노래하는 시’에서 ‘읽는 시’로 전화하게 됨에 따라 남은 것은 시조 사설이 갖는 ‘형식장치’뿐이게 되었다.
시적 형식(행 배열과 연 구성)은 내부적질서의 완결과 함께 연과 연 사이의 내밀한 긴장관계를 수수하고 결속시키는 효과로서 '도식적 운율화’가 아니라 ‘의미생산적 율동화’로 나아가야 서정적 미감을 자극할 수 있다. 현대시조는 작품의 율격은 시조의 정형율을 따르되 시행의 배분은 시적 율동으로서의 새로운 내적 질서 곧 ‘의미 질서’에 따라 율동을 조성해 나아감으로써 ‘의미생산적 율동화’가 실현되도록 하는 방법을 자율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김학성, 「현대시조의 좌표와 방향」, 『한국시가의 담론과 미학』, 보고사, 2004.)
형식 form 형식의 가장 상식적인 의미는 첫째 장르이고(예컨대 서사시의 형식), 둘째로는 외형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운율, 장, 절을 뜻하고(시조의 형식), 셋째로는 작품구조에 있어서의 막연한 공통성을 뜻한다(비극의 형식, 삼각관계의 형식 등). 그러나 이들을 다 포괄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의 형식에 대해서는 철저한 이론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우선 ‘한 예술 작품의 개별적 요소들을 단일한 전체로 조직하는 원리’라는 형식의 정의에서 출발하기로 한다. 잡다한 것들, 우연한 것들은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정말로 소용이 있기 위해서는 어떤 커다란 전체 속에 적당히 배치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의 형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빈 껍질’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무의미한 것들을 의미 있는 하나로 뭉쳐놓는 창조적인 힘이다. 플라톤은 형식의 그 창조적이고 본질적인 성격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의 철학에 있어서 형식은 곧 관념이었다. 모든 구체적인 사물들(연필, 고양이, 구름 등)은 모두 그들에게서 떨어져서 존재하는 관념의 그림자로 보았다. 구체적인 연필은 부러지고 없어질 수 있으나 연필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이 나타나도록 뒷받침하고 있는 연필의 관념(또는 형식)은 없어지지 않고 불변한다. 그 구체적 연필은 사라져도 계속 다른 구체적 연필들이 생길 수 있는 것은 그 불변하는 관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어떤 형식(관념)이 구체화된 실례의 하나이다. 칸트나 헤겔의 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적 이론은 형식(관념)의 구현이 곧 예술이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 존재하기 위하여 네 가지 원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예술작품을 예로 들자면, 그 작가, 그 목적, 그 재료 및 그 형식 등 네 가지 요인이 작품을 생겨나게 한다. 이 중에서 작가와 목적은 작품의 밖에 있는 것이고, 그 재료와 형식은 작품 자체와 본질적 관계에 있다. 작품은 재료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형식은 그 작품으로 하여금 그 작품이 되게 하는 요건이다. 그러므로 형식은 단지 겉모양이 아니라 겉모양은 물론 속 모양까지 형성하는 것이며, 단지 골격 구조나 특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골격 구조의 원리이며 그 특질을 부여하는 주체인 것이다. 하나의 작품으로 제시된 사물- 구체적인 시 한편- 은 하나의 형식을 이루기 위한 원리에 따라 그 재료들이 선정되고 배열되고 조직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다시 순수한 재료로 환원시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아마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자동차를 완전 분해하여 광물 이전의 토양의 상태로 환원시킬 수 없듯이). 그렇다고 해서 작품은 형식만이라는 것도 아니다. 재료가 없다면 형식은 무의미하다. 이는 형식이 없다면 재료 역시 무의미한 것과 같다. 형식은 언제나 재료를 통해서 구현된다. 작품을 세분하면 여러 가지 요소(소리, 낱말, 의미 비유, 문장 등)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각각 그들 나름의 형식화의 단계를 거쳐 전체 작품에 참가하고 있다. 즉 작은 형식들이 큰 형식, 통일적 형식을 이룬다. 이는 작은 재료들이 큰 한 덩어리의 재료를 이루어 한 형식으로 구현된다는 말과도 통한다.
문학의 재료는 크게 말해서 언어이다. 작가는 자기 시대의 말을 가지고 작품을 만든다. 그런데 말 자체도 따지고 보면 순수 재료가 아니라, 그것대로 인간의 체험을 형식화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은 이미 형식화되어 있는 것을 다시 더 의미 있는 형식을 위하여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운율, 수사학, 문법, 사상 체계 등은 모두 말의 형식화 인데, 작가는 이들을 다시금 재료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작가에게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일체의 사물이 재료의 상태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재료들은 그들대로의 형식들인 것이다. 이 점을 보아도 작품에서 쉽게 순수한 재료를 추출하기란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작품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하고자 하는 말,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은 작품 제작이라는 커다란 종합적인(즉 형식적인) 과정의 한 부분만을 차지할 뿐이다. 그러므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 작품의 재료이고 그 나머지는 형식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습관은 아직 없어지지 않고 있지만 틀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작품 속에는 사상, 감정의 표현은 다양한 의미 구조의 한 요소로 참여할 뿐이다. 의미 구조로 형식화되지 않은 한 참여할 수도 없다.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재료에다 형식을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재료와 형식의 결합은 통일성(단일성)을 이루는 반면, 어떤 내용을 아무리 잘 표현한다고 해도, 표현되는 것(사상, 감정)과 표현하는 것(언어 또는 시인)은 언제나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이라는 말이‘빈 껍질’이라는 뜻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부분들을 하나로 화합시키는 원리라는 의미의 형식을 ‘유기적 형식’이라 하고 딱딱하게 굳어진 껍질이라는 의미의 형식을 ‘기계적 형식’이라 하여 둘을 인정하면서도 엄격히 구별한 것은 영국 이론가 콜러리지였다(뒤엣것을 허버트 리드는 ‘추상적 형식’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기계적 형식은 한 주어진 재료에, 그 재료의 성질과 필연적 관계가 없는 미리 정해진 형식을 주었을 때의 결과를 말한다. 진흙에 신발 자국 내는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한 편의 글을 4.4조의 운율로 짜 맞추는 것도 기계적 형식을 강요하는 것이다. 유기적 형식은 재료의 본질에 잠재하는 것으로서 속으로부터 꿈틀거려 밖으로 나타나 결국 그것의 최종적 발현은 그것의 외형의 완성과 동일하다. 예컨대 나무의 껍질은 나무 자체의 소산인 동시에 나무의 외형을 이룬다. 재료가 스스로 발전하여 최종적 단계에 이른 상태가 곧 그 재료의 형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지나치게 생물학적 유추에 기울어져 있으나, 재료와 형식의 나눌 수 없는 관계를 인상 깊게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시조는 낱말들을 줄이고 늘이고 하여 그 외형에 맞추어 넣었을 때에는 기계적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 되고, 여러 다양한 재료들을 선정, 배열하고 또한 시조의 엄격한 운율까지도 재료로 이용하여 그러한 모든 재료들이 하나로 화합할 수 있는 원리에 따라 제작한 결과 시조 한 수가 되었을 때에는 유기적 형식을 이룬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정해진 형식(정형시 등)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계적 형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현대 자유시를 유일한 시적 형식으로 알고 있는 우리 시대의 어떤 문학 지망생이 시를 잘 써보려고 부지런히 습작을 하는데, 그때의 큰 고민은 시를 쓸 때마다 자유시를 쓰려고 해도 웬일인지 자꾸 가사체(4음4보격의 정형율)의 규칙적 율문이 된다는 고백과 통하는 면을 보여준다. 문제는 왜 이런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조와 같은 정형률 혹은 정형의 양식이 까다로운 형식규율로 존재하는 구속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시적 형식임을 증언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시조의 까다롭다는 형식규율이 전혀 까다로운 것이 아니며, 특히 각 장의 운율적 제어 기제로 작용하는 4음4보격이라는 정형률은 우리 민족어의 언어미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자연스러운 운율양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조의 율동형은 우리의 의식 혹은 잠재의식의 심층에 자리하고 있어서 언제든 '자연스럽게' '현재화되어'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우리 민족의 대표시가 될 수 있는 여건을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시조라는 정형률은 이처럼 언제든 자연스럽게 현재화될 수 있는 우리 민족의‘양식적 원형(modal archetype)’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시조를 창작한다는 것은 개인이 좌우할 수 없는 엄정한 규칙과 구조적 질서, 그리고 독특한 미학을 가진 시조라는 양식적 원형을 선택하여 그 주어진 외재절주(형식규율)를 따라 작품으로 실현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실현하는 구체적 방식 곧 제시형식은, 고시조의 경우 가곡창이나 시조창이라는 음악적 형식으로 실현되었으므로, 각종 가집에 수록될 때 노랫말을 어떤 형식 모형으로 제시할까라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즉, 노랫말을 해당 악곡의 형식에 따라 얹어 부르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굳이 행이나 연 같은 형식 단위의 구분, 곧 시적 형식이 필요하지 않아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내리박이 줄글식 표기’로도 아무런 불편 없이 악곡의 분류에 따라 수록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에 와서 고시조를 ‘듣는 시’가 아닌 ‘보는 시’로 감상하면서도 그것을 수록할 때 천편일률적으로 3행시로만 표기해야 하는가에 있다. 고시조는 마음속에 담아둔 시적 정조를 그에 맞는 음악적 형식으로 풀어낸 것이기에 음악적 제시형식(악곡표지: 이삭대엽 계락 만횡청 등)부터 살피고 나서 악곡표지가 지시하는 풍도형용(시적 분위기와 어조)에 맞게 행과 연으로 재편해야 한다.
(조동일 교수가 엮은 <<역대시조선>>에는 고시조의 악곡표지를 무시한 채 임의로 고시조의 행을 배열하고 연을 구성하여 현대시조의 외양을 취하고 있다.)
개화기 이후 인쇄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음악과의 분리가 시가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남에 따라 시조 역시 듣는 시(시노래)에서 보는 시(노래시)로 제시형식이 바뀌게 되고 이런 연유로 3장(혹은 5장)의 음악형식을 어떤 형태의 시적형식으로 제시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개화기 시조에서는 가곡창보다 대중화된 시조창의 영향이 큰 상황에서 창작되었으므로 3장의 시조창 음악 형식을 3행의 시적 형식으로 바꾸는 정도의 행구분 의식만 드러내는 수준에서 출발하여, 거기에다 구두점을 활용하거나 6구를 6행으로 제시하는 수준까지 발전해간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발전은 근대시조를 넘어 현대시조로 이어져 오면서 더 이상 시조는 노랫말로서가 아니라 시로서 인식됨으로 해서 서정시로서의 시조가 어떤 시행발화로 제시되어 시적 율동을 어떻게 가져가느냐가 본격적으로 문제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곧 행갈이와 연 구성을 어떤 모양새로 표출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결된다.
양식적 원형으로서의 시조의 형식장치와 구체적인 시행발화로서의 율문표출
우리는 시를 감상할 때 시인이 작품을 통해 시적 대상을 어떻게 노래했는가에 주목한다. 시는 직접 음악에 실리건 실리지 않건 진술방식을 노래하기에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속에 음악이 없다면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속의 음악이 바로 내재절주이며, 내재절주가 내용 요소를 이루어 詩情 곧 마음 한가운데 일어나는 정감으로 된다. 그리하여 이 시정을 언어로 형상화하면 시가 되므로, 시적 정감 곧 정서는 시의 본질적 요소가 된다. 그리고 마음속의 정서는 본질적으로 절주를 가지며, 그것이 파장의 형식으로 나타나 긴장과 느슨함, 격동과 평정, 강함과 약함, 적극성과 소극성 등 양극성을 갖는 波高를 가진다. 그리하여 내재절주는 시정이 유동하는 속도와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사대부층의 엄정하고 절제된 유가적 미의식이 빚어낸 시조라는 노래양식은 이같이 정감의 자연스러운 유동적 속도에 맡기거나 무한정한 정감의 방출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情에서 출발하여 禮에서 멈춘다’거나 ‘음악으로써 즐거움을 절제한다(악이절락:樂以節樂)’는 歌樂觀이 미적 표준이 되어 내재절주의 양극성을 제어함으로써 中正和平과 溫柔敦厚 杻의 미학을 추구한다. 이러한 미학이 시조의 양식적 원형으로 응결된 것이 시조의 악곡이고 노랫말인 것이다. 따라서 시조는‘뜻(의미)을 말함(言志)’에 있어서나, 정을 펼침(연정)’에 있어서 양극성을 피하고 고도의 절제와 균형, 그리고 화평과 온유돈후로써 내재절주를 제어하려 했다.
시조는 3장으로 작품의 전체 시상을 압축하여 완결하는 고도의 서술 억제에 의한 절제의 미학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고, 이에 더하여 각장의 내구와 외구가 2음보:2음보로 대등한 평형을 이루도록 하여 안정된 균형을 갖도록 함으로써 감정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정화평의 미학을 구현한다. 그리고 초장의 운율(4음4보격)을 중장에서 완전 동일하게 되풀이함으로써 반복의 미감을 갖도록 함과 동시에 동일한 반복에서 오는 시상의 등가적 연속성과 서술의 연계성도 배려하고 있다. 끝으로 시상을 완결하기 위하여 종장에서는 앞장의 운율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운율에 변화를 주어 전환의 미학을 실현한다. 그 방법은 종장의 첫 음보를 작품의 전반에 규율화 되어 있는 음량률의 지배를 받지 않고 반드시 3자(음절)로 고정하여 자수율에 따르도록 하는 운율적 異端性을 보임으로써 초, 중장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일거에 차단하고, 이어서 둘째 음보에서 두 음보의 축약 형태를 띠는 과음보로 실현함으로써 변형4보격이 되어 운율적 전환을 이룸과 더불어 시적 메시지가 완결을 향해 치닫도록 설비하고 있다. 시조는 이처럼 정치한 형식구조와 독특한 미학을 자랑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유기적 긴장의 응결체라 해도 좋다.
현대시의 한 양식으로 창작하는 현대시조는 시조의 양식적 원형을 율동모형으로 가져오되 작품의 시행발화를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경우 시조의 도식적 운율화가 아니라 시적 의미를 긴장력 있게 생산해내는 시행발화로서의 행갈이와 연 구성이 문제가 된다. 시조를 창작하는 일은 이미 정립되어 있는 양식적 원형을 외재절주로 하여 작품 속에 율동모형으로 가져와 그것을 시적 형식으로 재배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시조의 양식적 원형이 그 구현하고자 하는 독특한 미학-절제와 균형의 미학, 반복과 전환의 미학, 완결의 미학-과 견고하게 결속되어 있어서 그러한 미학을 제대로 표출하려면 작품의 시행발화를 시조의 율격모형에 그대로 일치시키는 시적 형식, 곧 정통형으로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방법이라 했다. 그러나 듣는 시로서의 고시조와는 다르게 현대시조는 보는 시로 제시형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므로 시의 형식이 갖는 의미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인의 정감적 분위기와 어조tone, 감성적 결texture, 발화상의 의미 비중, 시각적 효과 등에 따라 행갈이와 연 구성을 정통형과 다르게 가져가는 변화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자유시에서는 행, 연 갈이가 내재절주의 리듬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므로 정서적 흐름을 천천히 가져가기 위해서는 행, 연 갈이를 가능한 한 자주하여 시행발화의 흐름을 느리게 진행하도록 속도를 차단해주고, 정서적 흐름을 다급하고 촉급한 리듬으로 가져가려면 행, 연 갈이를 드물게 하여 한 행에 수용되는 말을 가능한 한 촘촘히 엮음으로써 빠른 템포로 읽어 내리도록 시행발화를 조절하면 된다. 그러나 시조는 이미 정립된 4음4보격이라는 을동 모형을 따라 율독해야 하므로 시행발화의 휴지설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구와 장 단위를 따라 템포를 일정하게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시조에서 행, 연 갈이는 시적 율동에 관여하지 못하지만 시적 어조나 분위기를 짧은 호흡으로 가져가느냐(행, 연 갈이를 자주할 경우에 해당), 긴 호흡으로 가져가느냐에 유의미한 관여를 한다는 사실은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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