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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桓)은 아르 아라인데 즉 고대최고신 안이 환이고 이게 대홍수 후 수신이 되어 안(아누)가 환(아르)로 변한 것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한(韓)은 일본말로 가라로도 읽는다.
일본 훈독을 뒤져보면...한(韓)이라는 말 자체가 가라다. 한(漢) 도 가라다. 당(唐)도 가라다. 하(夏)도 가라다.
중국고대최초세습왕조인 하(夏)나라나 한고조 유방이 세운 한(漢)도 가라 인것이다.
중국전체가 그냥 가라국 가야인 것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저 멀리 남미 베네수엘라 수도가 카라카슈이니 이 나라도 가라가 된다.
가르 가라로 붙은 도시명을 쭉 보면 답이 나온다.
중국은 지금 쓰는 한자발음이 청대 북경위주로 보통화되어 버려서 옛 발음을 다 잊엇다.
그래서 지금 한자발음으로는 알기가 힘들다.
사실 한국보다 더 원 한자발음에 가까운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이 섬지형으로 고립되어 원형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
결론은 지구인류가 그냥 다 대홍수후 퍼진 가라족이라는 말이다.
인류의 종을 표현할때 호모사피엔스가 아니고 호모가라라고 해야 할듯하다.
왜 아사달인가?
그런데 왜 아사달이 아사타르인지 가르가 왜 사타르(축약으로 사르나 사라 사로 사탄 등이 됨)가 됐는지 아직 답을 내지 못햇다.
그럼 더 진행해 보자.
사실 환웅 단군탄생신화에 힌트가 숨겨잇다. 거기부터 시작해보자.
신화내용을 보면...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들의 간청을 들은 환웅은 쑥 한 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그것을 먹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곰은 시키는 대로 하여 삼칠일 만에 여자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곰 여인[熊女]은 혼인할 상대가 없자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갖기를 기원하였다. 그러자 환웅은 잠시 인간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였다. 그 후 웅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쑥(莪)의 초음(初音)은 가르[gar]이고 마늘(蒜)의 초음(初音)은 사르[sar]이다.
한국인들 특징이 마늘을 지구 다른 지역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으로 엄청 먹어댄다는 것인데...
좀 더 진행해보자.
단군조선 성립시기(BC2200년경)에 지구춘분점은 황도12궁의 황소자리에서 양자리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면서 수메르 우르 등 소를 표현하는 이름보다 양 특히 산양인 염소를 표현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
그게 사타르이다.
로마신화에서 제우스에게 밀려난 크로노스는 로마의 농경신 사투르누스로 부활하는데 양신이다.
처음에 소였다가 양으로 바뀌는 것이다.
크로노스에 해당하는 염제신농은...말 그대로 불칸으로 금속문명을 이끄는 제왕이요.
신농으로 씨뿌리고 농사지어서 열매맺는 농업의 신이다. 염제신농이 황소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염제신농은 강(羌)씨의 시조가 되니 양(羊)+사람(人)임을 알수있다.
즉 이것은 황소시대에서 대홍수이후초기까지 권좌를 유지햇다는 걸 알수 있다. 대홍수 후 인류는 염제신농에 기원한다.
그런데 그 특성을 잘 알수 잇는 것은 그리스신화에서 크로노스로 크로노스가 로마에서는 사투르누스로 불린다. 크로노스는 티탄족 출신으로 제우스의 아버지다.
사투르누스는 사티로스라는 존재로 표현되었는데 이들은 일종의 반신반수의 염소신들이었다.
사티로스(로마에서는 파우누스)
염제신농이 크로노스의 부활한 사투르누스이고 사티로스종족의 원조격이다. 로마에서는 파우누스가 되는데 여기서 물고기가 나온다.
춘분점이 황소자리에서 양자리로 변했는데...들판의 양이 아니고 산의 양이 되어 사타르가 됐다.
왜 들판의 양이 아니고 산의 양인가? 추정할수 잇는 것은 대홍수후 물이 아직 다 빠지지 않은 고로
인류가 여전히 고지대 산에 주로 거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이것은 먼 훗날 황도12궁시가대에서 염소자리시대를 암시하는 측면이 있다.
마치 용이 물고기가 된것은 황도12궁시간대에서 쌍어궁시대를 암시하는 것과 같다.
이미 말했듯 하늘의 용 미르가 대홍수속에 물속에서 물고기로 변한게 가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물고기가 어디로 갔을까?
사티로스중에 사티로스 파우누스중의 파우누스 판이라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이 존재가 염소몸에 물고기꼬리를 한 바다염소다.
즉 판에게 크로노스 즉 염제신농의 혈통이 흘러간 것이다.
로마인들은 파우누스와 연관지어 생각했다. 본래 아르카디아 지방의 신으로, 판이라는 이름은 파온(paon:목축)이 도리아식으로 줄어든 것이지만 고대인들은 보통 판(pan:모든 것)과 관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판의 아버지는 제우스며 어머니는 님프이다. 제우스와 님프가 섹스를 해서 낳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염소와 닮은 모습으로 태어나 요정에게 버려진 것으로 등장하며, 일반적으로는 머리에 작은 뿔이 있는, 인간과 염소를 합친 모습에, 늘 '시링크스'라는 이름의 팬파이프를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 판의미로에 등장하는 판
판은 꼬리가 물고기인 바다염소가 된다
즉 판은 제우스의 아들이고 크로노스가 조부가 된다. 님프는 사냥신 아르테미스 여신을수호하는 존재들인데 고대에는 아르테미스를 신봉하는 결속력 강한 여성집단이 잇었다.
판은 단순한 사티로스가 아니고 물고기꼬리를 가진 염소다. 이 신화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바로 아사달은 아사타르인데...사타르가 염소다. 그냥 염소가 아니라 바다염소인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선(鮮)이 양양(羊) + 물고기어어(魚) = 바다염소가 된 것이다.
즉 생명나무를 수호하던 물고기 가라가 바다염소 사타르가 된 것이다.
아나 가는 모음과 자음의 첫자들로 보통 신(神)을 상징하는 첫자로 사용한다.
이걸 어떻게 더 알수 있냐면 판은 아르카디아지방의 신이라는 사실이다. 신인데 제우스 혹은 제우스의 분신인 헤르메스의 아들이다. 전설의 아르카디아가 바로 아사달이다.
아르카스가 단군이다.
좀 더 특정하자면...칼리스토신화에 답이 잇다.
칼리스토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사냥할 때 시중드는 요정 가운데 하나로,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남아 있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칼리스토는 제우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아들을 출산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아르카스다.
처녀맹세를 저버린 칼리스토는 큰곰자리가 되었고, 플레이아데스의 7자매중 장녀인 마이어가 키운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외조부 리카온이 제우스의 전지(全知)를 시험하기 위해 아르카스를 죽여 신탁(神卓)에 내놓았는데, 제우스가 이를 알아채고 리카온을 이리의 모습으로 바꾸어 아르카스를 소생시켰다. 나중에 아르카스는 곰의 모습으로 바뀐 어머니를 쫓아 금지된 성역(聖域)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제우스는 칼리스토를 큰곰자리 별로, 아르카스를 작은곰자리별로 바꾸었다. 또한 아르카스를 목동자리 아르크투르스이기도 하다.
아루크투르스를 검색해보면...이는 목동자리로...
목동 자리는 소가 끄는 쟁기를 발명한 아르카스의 별자리로 알려져 있다. 제우스신과 칼리스토의 사이에 태어난 아르카스는 후에 아르카디아의 왕이 되었으며 사냥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인 칼리스토는 헤라의 미움을 받아 곰으로 변했고, 엄마를 잃은 아르카스는 착한 농부의 도움으로 자랐다.
아르카스는 작은 곰 자리의 주인공이라고도 한다. 곰으로 변한 어머니인 칼리스토를 몰라보고 활을 겨냥하는 것을 본 제우스가 그를 곰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중 큰 곰 자리가 칼리스토, 작은 곰 자리가 아르카스에 해당한다. 사냥개 자리는 큰 곰 자리 뒤에 있는 것으로 아르카스가 사냥할 때 데리고 다니던 사냥개로 알려져 있다.
판이 제우스와 님프사이에 난 아들이므로 판이 바로 아르카스임을 알수 잇다.
아르카스가 곰으로 변해버린 모친 칼리스토 대신에 누구의 손에 의해 자랐는지는 알수 없다.
어쨋든 마이어나 헤르메스와도 깊은 연관성 잇어보인다.
보통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분신인데 아르카스를 지상의 헤르메스 즉 성부가 성신을 통해 육화되어 성자가 되는 관계일수 있다는 것이다.
아르카스는 제우스의 피를 받은 염소물고기로 제우스는 환웅이고 염제신농이라고 말할수 잇다.
아르카스가 목동의 신이고 농경의 신이다.
이 아르크투르스별은 후에 예수에 투사되서 양들을 이끄는 목자이미지가 구세주라는 개념으로 투사됐다.
어쨋든 아르카스가 바로 단군이라는 게 나의 판단이며 그가 다스리던 아르카디아 왕국이 아사달이라는 것이다. 아르카디아는 영어풍으로 아르케이디아, 아카디아, 아케이디아 등으로 불리고 아카드로도 된다.
아르카디아는 아르카르인데 카르는 그냥 물고기다.
그러므로 아르카디아는 아직 아르카스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다. 그의 외조부 뤼카온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칼리스토는 뤼카온 왕의 딸이엇다.
아카다이를 보면 아르가 아 한자로 압축되버리는 걸 알수 잇다.
이미 알다시피 아르는 환이다. 그러므로 아르카디아는 환국(桓國) 즉 배달신시가 된다.
대홍수는 제우스와 칼리스토사이에 아르카스가 태어나고 난후 얼마 후에 발생한 것으로 나온다.
전설의 낙원 아르카디아가 환웅의 배달신시다.
그런데 아르카디아가 어떻게 아사달이 돼는가...아르카디아는 아르카르다...아카르로 할수도 잇다...
아스카르는 염소물고기다. 사타르다. 아가르가 아사타르가 된다. 아사달이 되는 것이다.
이때가 대홍수후에 황소시대가 물러가고 양자리시대가 본격 시작되는 때임을 알수 잇다.
사타르는 사탄 타르 사르로 한글자를 빼면서 축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지금 중앙아시아에서는 타르 타라 탄이라는 말이 평야를 의미한다. 스탄은 나라 이름끝에 붙는다.
한국에서는 가라가 사라 서라가 됐다. 신라의 신(新)이 사라다. 일본 훈독으로도 사라다.
즉 가라라는 물고기에서 염소물고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사달(阿斯達)은한자 고음으로만 보면 카사르다. 아(阿)가 아가 아닌 카로 발음된다.
왜 그럴까...간단하다...아르카스로부터 새로운 가문이 출발한 것이다.
본래는 대홍수후 모든 가문의 부리는 아르(桓)가문이다.
그런데 아르카스의 카스로 시조가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카스사타르인데...카스를 카로 축약, 카사타르가 되어 아사달이 된 것이고..
나중에 사타르도 사르로 축약되서... 아르카스가문은 카사르가문으로 정립되는 것이다.
아르카스가 단군이고 카사르가문의 시조라고 할수 잇다.
결론적으로 아사달(阿斯達)은 카사타르이고 아르카스이전에는 아사타르다.
카사르가문에 단군혈통이 흐른다.
사르곤이 아르카스 단군왕검인가의 문제...
고대사에서 한획을 그은 인물이 잇는데 바로 사르곤대왕이다.
사르는 염소이고 곤은 용이 바달 들어가 물고기로 변한 바다의 큰 물고기니
사르곤이라는 말 자체가 염소물고기다.
아르카스가 바로 염소물고기 판이고 단군이라고 추정했다.
그런데 이 사르곤대왕의 활시기가 단군시기와 일치한다.
사르곤대왕의 기록을 보면 아르카스와 너무 흡사하다.
그대로 발췌해 싣는다.
사르곤(Sargon)
BC 24~23세기에 활동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군주(BC 2333경~2279 재위).
별칭은 Sargon of Akkad(아카드의 왕)
사르곤왕
사르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국가를 통일해 아카드 제국을 세우고 스스로를 황제라고 불렀다.
그림은 사르곤의 손자인 나람신의 정복 이야기를 보여주는 비석
사르곤(Sargon)은 세계사 초기의 대제국 건설자의 한 사람으로서 남부 메소포타미아 전체와 시리아·아나톨리아·엘람(서부 이란)의 일부를 정복하여 최초의 셈계 왕조를 세웠으며 메소포타미아의 군사적 전통을 창시했다(셈족).
사르곤은 설형문자로 기록된 2,000년의 메소포타미아 역사 속에서 대부분 전설과 설화로만 알려졌고, 그의 생애 중 기록된 문서를 통해 알려진 것은 없다.
당대의 기록이 없는 것은 그가 건립한 도읍지 아가데의 위치가 밝혀지지 않아 발굴된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가데는 사르곤이 창건한 왕조의 말년에 파괴되었으며 그뒤 복구되지 않았다.
민간전설에 따르면 사르곤은 하층민 출신의 자수성가한 인물로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한 정원사가 발견하고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어릴 때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어머니는 유프라테스 강 중류에 있는 한 마을의 여제사장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유력한 인척의 도움 없이 자라났으나, 고대 수메르 북부 키시 시(市)의 통치자에게 술잔을 따라 올리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가 최고의 권력을 잡게 된 계기는 우루크(성서에 나오는 에렉으로 수메르 중부에 있음)의 왕 루갈자기시를 패배시킨 일이었다. 루갈자기시는 이미 수메르 도시국가들을 점령하여 통합시켰으며 그 도시국가들의 영토만이 아니라 서쪽으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를 패배시킨 것을 계기로 사르곤은 남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그 이전에도 셈어(語) 이름을 가진 수메르 왕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사르곤은 수메르어보다는 아카드어로 알려진 셈어를 날 때부터 사용한 최초의 군주로 기록되었다(아카드). 그러나 수메르 도시들은 새로운 군주에게 복종하지 않고 루갈자기시에게 뺏겼던 독립을 되찾고자 했기 때문에 그는 무수한 전투 끝에야 승리를 확정지을 수 있었다.
이같은 전과를 올리면서 그는 추종자와 군대를 끌어모았다. 그러나 그는 유서 깊은 도시에서 세습을 통해 왕위를 얻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이전부터 자신의 왕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샤루 킨('정당한 왕'이라는 뜻)이라는 호칭을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시기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사르곤은 당시의 문명세계와 아가데와의 교역을 유리하게 확보하려는 욕심에다 활동적인 기질까지 갖추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유프라테스 강 중류를 따라 시리아 북부를 비롯해 은이 풍부한 아나톨리아 남부 산악지대까지 도시들을 정벌해 나갔다. 그는 또한 이란 서부의 자그로스 산맥에 있는 엘람인들의 도읍지 수사도 지배했는데 그의 통치에 관한 당시의 기록은 유일하게 이곳 수사에서만 발굴되었다(엘람). 당시 그의 명성은 아나톨리아인 도시의 상인들이 그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의 중재를 그에게 간청할 정도로 널리 떨쳤다고 한다.
그 전설에 따르면 사르곤이 한 무리의 용사들을 데리고 부루샨다('푸루샤한다'라고도 하는데, 위치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음)라는 문제의 도시로 가서 모습을 보이자마자 그 자리에서 분쟁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사르곤의 군사적 위세, 조직능력, 정복을 통해 수메르 도시국가들에서 물려받은 자산, 그리고 옛 수메르 도시와 다른 나라들 사이에 일찍이 있었던 교역관계 등으로 인해 그의 치세에는 상업이 번창했으며, 인더스 강 유역, 오만 해안, 페르시아 만의 섬들과 해안, 바다흐샨의 보석광산, 레바논의 삼나무숲, 은이 풍부한 타우루스 산맥, 카파도키아, 크레타를 비롯하여 그리스와도 교역을 했던 것 같다.
사르곤의 통치시대에 앞서 수메르어에 쓰이던 서체는 아카드어에 맞게 고쳐졌으며 새로운 필사체가 개발되어 이 왕조 시기의 점토 서판(書板)에 쓰였다. 또한 신화와 향연의 장면을 아름답게 배치해 그려넣은 당시의 원통형 인장에도 쓰였다. 이같은 새로운 예술적 감정이 싹튼 것이 반드시 사르곤의 개인적 영향 때문만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르곤의 새로운 도읍지에서는 군사적·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 또한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재위중의 일들에 대해서는 당대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후관계를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가 살았던 연수나 통치 시점도 정확히 알아낼 수가 없다.
현재는 BC 2334년을 아가데 왕조가 시작한 해로 꼽고 있으며 수메르 왕들의 인명록에 따르면 그는 56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의 통치 후반기는 여러 차례의 반란으로 혼란스러웠는데 후대의 문헌에는 이러한 반란의 원인이 그가 저지른 신성모독행위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수메르인과 아카드인들은 재난을 겪을 때마다 그러한 해석으로 불행의 원인을 규정지었다. 아마도 혼란의 실제 원인은, 그처럼 광대한 제국을 아무리 활동적인 인물이라 하더라도 숙련된 행정조직의 도움 없이 혼자서 통제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특별히 가혹하게 통치했다거나 수메르인들이 셈족인 그를 싫어했다거나 하는 증거는 없다. 어쨌든 제국은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으며 사르곤의 계승자들은 제국을 계속 통치해 나갔고, 후세대는 그를 자신들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았다.
기록에서 보듯 그는 여사제의 아들이엇다. 아르테미스신전의 여사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테미스신은 여성의 순결을 강조했으므로 이를 어긴 문제로 처벌을 받고 아이는 버려졌다.
이런 내용이 칼리스토가 아르카스를 낳은 후 곰으로 변했고 아르카스는 버려져 타인(물에 떠내려오는 바구니를 정원사가 건져 키움)의 손에 키워진 것과 일치한다.
또한 사르곤은 아카드의 왕이라고 했다. 아르카디아가 아카드인 것은 바로 알수 잇다.
아르카스는 외조부인 뤼카온이 죽여서 아르카스의 아버지에게 인육으로 내놨다가 부활한 존재라고 한다.
이는 뤼카온과 제우스간의 분쟁이 매우 큰 상황에서 칼리스토가 제우스의 아이를 낳게된 것을 유추해볼수 잇다. 아르카디아에서 권력을 장악하기위해 매우 힘겨웠을 것이고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왕권을 확립해 나갓던 것이 아닌가 본다.
전체적인 분위기로는 아르카스가 사르곤대왕이고 그가 단군왕검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단군왕검 조선이 BC2333으로 보니 사르곤 재위기와 일치한다.
[신문과 놀자!/조지형 교수의 역사에세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황제는 사르곤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황제는 누구일까요? 황제라는 용어는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연원합니다. 중국의 역사서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사냥법과 불을 가르친 복희, 농경을 가르친 신농, 집과 옷을 만들고 수레를 발명하며 글자를 도입하고 천문과 역산을 시작한 헌원이 삼황입니다. 이들의 아들이 오제입니다. 역사적인 인물은 아니고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황제라는 용어는 아시아에서는 진의 시황제 영정(嬴政)에서, 지중해 세계에서는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제나 아우구스투스가 역사상 최초의 황제는 아닙니다.
기원전 2350년경에 아카드 제국을 세운 사르곤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단군이 아사달에 고조선을 세웠다는 단기(檀紀) 1년이 기원전 2333년이니까 단군보다 더 오래전의 인물입니다. 사르곤은 수메르는 물론이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산재해 있던 많은 도시국가를 정복하고 총독을 파견하여 지배했습니다. 이전에 도시국가를 통치했던 독립 군주라는 뜻을 지닌 ‘엔시’는 사르곤 시대에 와서 총독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사르곤은 자신을 정당한 왕 혹은 진정한 왕이라는 뜻의 ‘샤루-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왕 중의 왕, 즉 황제를 의미했습니다
황제라는 용어는 제국을 지배하는 권력자의 가장 높은 존칭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실질적으로 황제 아닌 권력자가 자신을 황제라 부른 경우도 있고 실제로 황제이지만 왕이라는 명칭을 고수한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 중심주의적 사고 때문에 실제로는 제국이지만 마치 변방의 족속처럼 폄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흉노족이나 스키타이족은 항상 떠돌이 민족은 아니었습니다. 한동안 대제국을 형성했습니다. 사르곤은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황제 였던 셈입니다.
사르곤은 역사상 최초의 상비군을 두었다고 추정됩니다. 약 5000명의 군인이 ‘그와 식탁을 같이했다’고 전해집니다. 식탁을 같이했다는 말은 함께 동고동락을 했다는 뜻이라기보다 정복 전쟁의 결과로 얻은 약탈품과 이익을 사르곤으로부터 하사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르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석권하여 남쪽으로는 걸프 만에 도달합니다. 북쪽으로는 오늘날의 터키 인근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으로까지 제국의 영역을 넓혔고 56년간 황제의 자리에서 군림했습니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항상 신비로운 이야기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신비로운 이야기는 다른 영웅의 이야기로 둔갑하여 반복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점토판에 새겨진 이야기는 이렀습니다.
‘사르곤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르며 어머니는 여사제였습니다. 사르곤을 몰래 낳은 어머니는 갈대 바구니에 사르곤을 담아 유프라테스 강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강에서 물을 긷던 어떤 사람이 사르곤을 우루크의 여신 인안나와 동일시된 여신 이시타르의 정원사로 길렀습니다. 사르곤은 생성과 풍요의 여신이자 용맹한 군신(軍神)인 이시타르의 사랑을 받아 양육되었으며 키시라는 도시국가의 왕 우르자바바의 총애를 받아 술잔을 드리는 시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신들이 분노하여 왕권을 우르자바바에게서 빼앗아 사르곤에게 주었습니다.’
강에 떠내려 보냈지만 신의 보호를 받은 아이가 무사히 구출되어 강건하게 훈육되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옵니다. 구약성경의 모세는 나일 강에서 구출되고, 로마를 건설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테베르 강에서 신의 보호를 받습니다. 사르곤의 탄생신화는 이집트의 호루스 탄생신화와도 유사합니다. 이시스는 남편 오시리스를 살해한 세트의 위협을 피해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호루스를 몰래 출산하여 광주리에 담아 강에 떠내려 보냅니다. 사르곤의 시대는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시대입니다.
그러나 사르곤은 분명히 역사적 인물입니다. 사르곤은 키시에서 북쪽에 위치한 아카드라는 도시를 제국의 통치 중심지로 정했습니다. 수메르 지역을 넘어 북쪽으로 제국의 팽창을 도모한 겁니다. 아카드는 남쪽의 수메르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카드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기에 제국에서 아카드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또 동일한 연호의 사용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연호는 경제, 군사 원정, 도시 건축, 제의(祭儀) 문서에 주로 사용되는데 오늘날에까지 우리는 사르곤의 연호 사용으로 아카드 제국에서 발생한 사건의 발생 시기를 명확하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르곤은 사상적으로도 제국의 통일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인 엔헤두안나를 달(月)의 신 난나의 대제사장에 임명했습니다. 사르곤의 딸은 수메르의 문화적 중심지인 우르에서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신에 바치는 찬송시를 읊으며 메소포타미아의 막대한 신전 재산과 다양한 종교를 이끌었습니다. 이후 50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사르곤의 사례는 우르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는 권력자가 자신의 딸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 선례가 됩니다. 사르곤이 다양한 분야에서 후대 왕의 모범이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라오와 달리 사르곤 자신은 신(神)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의하면 사르곤의 아버지는 정원사였습니다. 사르곤이 비천한 신분 혹은 평민 출신이라는 애기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는 사르곤이 신의 아들임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사르곤의 손자인 나람신은 사르곤의 ‘세계의 왕’이라는 존칭을 넘어서 우주를 지배하는 왕이라는 뜻을 가진 ‘(우주의) 네 모서리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 신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나람신은 아카드 제국을 더욱 넓히고 통치를 용이하도록 도량형의 통일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의 놀라운 업적도 역사상 최초의 황제 사르곤이 없었다면 이룩할 수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르곤과 아르카스는 동일 인물이 아닌가..
그리고 사르곤이 단군왕검이 아닌가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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