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기전 240년. 해모수 22세.
이튿날 편지들을 부하 장수들에게 전해준 해모수는 고수리가 마련해준 커다란 사두마차에 설이매, 기진, 삼칠성주, 연은소, 백선의, 청아련 등 여섯 여인을 태우고 홀로 마상에 앉아 왕의 대로를 따라 눈보라치는 혹독한 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백악산부터 장당경까지는 구백여 리 길이다.
수일 후 해모수 일행은 장당경을 에둘러 기비의 본진이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날씨가 이토록 추운데 고생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큰 폐를 끼치는 것 같군요. 군사들 가운데 혹시 동사자凍死者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해모수가 기비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천만에요. 겨울에 움직이는 만큼 큰 화로들을 네 명 당 하나씩 챙겨왔습니다. 화목火木도 많이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바로잡아 보자고 발 벗고 나선 게 아닙니까? 이까짓 일이야 고생이라 할 수 있겠소?”
“밥 짓는 물과 식수는 어떻게 조달하십니까?”
“건량乾糧을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겨울철인데도 다행히 수량이 풍부한 강물들이 있어서 물 문제는 괜찮습니다.”
“이 겨울에 제가, 정말 못할 짓을 시키고 있습니다. 하루 속히 정국이 안정되어야 왕세자님도 궁에 가셔서 편히 쉬실 터인데.”
해모수는 이어서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상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고열가 임금이 밀서를 통해, 자신을 웅심산성 성주로 임명한 일, 그 이전에 대부여평국상장을 제수한 것, 그리고 백악산아사달 욕살과 영고탑, 아사달 욕살 등이 모두 자신에게 협력을 약속한 것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곁에서 듣고 있던 설이매에게 말했다.
“공주마마, 아무래도 제가 장형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번조선의 군대가 이 엄동에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을 수도 없고, 정세가 불안에 싸여 있으니 일단 무슨 협약이라도 해서 번조선의 군대를 철수하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더구나 머나먼 동쪽 두만수 가까이에 가서 고생할 번조선 군사들을 생각하니, 제가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이 아픕니다.”
설이매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장군님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할 수 없죠. 나와 함께 장당경으로 들어가도록 하세요.”
“애당초 번조선 군대의 힘을 빌려 장당경을 위협하려고 했으나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하고, 저와 공주마마께서 단둘이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 그리고 번조선을 대표해서 기진 공주님도 동행하셔야 할 것 같고요.”
“네, 그래요. 저들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사로잡히는 거죠.”
기진은 해모수와 함께 간다는 생각에 용기가 솟구쳐 오름을 느꼈다. 그녀가 기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 열흘이 넘도록 저희들이 장당경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붙들린 것으로 판단하고 오라버니께서 장당경을 다시 포위해 주세요.”
기진이 그토록 용기있는 말을 한 데는, 다른 요인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번조선의 국력과 군사력은 사분오열되어 있는 진조선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로잡힐지도 모를 적진으로 들어가는 일이, 작은 용기로 손쉽게 가능한 건 아니었을 터다. 해모수가 가는 길이라면 자신도 어디든 따라가고 싶다는 욕구가, 그녀의 용기를 더욱 부채질했으리라.
“나도 함께 가는 것이 좋겠구나.”
삼칠성주가 말했다. 아무래도 젊은이들만 보내는 것이 마음에 켕겼던 것이다.
기비는 먼저 해로운에게 사자를 보내, 포로로 잡힌 설이매 공주를 보내겠다는 약속과 함께 회담을 요청했다. 이튿날 사자가 곧바로 답신을 가져왔다. 이틀 후 정오에 장당경 남쪽 태평문에서 조정의 대표단이 기다릴 터이니 협상 대표를 보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삼칠성주, 해모수, 설이매, 기진 네 사람은 나머지 일행을 기비의 진에 남겨두고 태평문 밖에 도착해 여관에서 일박하고, 이튿날 남쪽 태평문을 통해 장당경으로 들어섰다. 전시라, 가는 도중 검문검색이 매우 삼엄했다.
태평문에 당도하니 거대하고 장엄한 삼층 누각이 해모수 일행을 압도했다. 설이매 공주와 해모수, 기진, 삼칠성주 묘고미향은 초병의 안내를 따라 삼층 누각으로 올라갔다. 조정의 대표단이 이미 나와서 거기에 앉아 있었다. 해모수는 일단 인사하고 그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마가의 대신, 그리고 장당경 수비대장과 함께, 또 한 사람이 와 있었는데, 의외로 그는 해모수가 잘 알고 있는 해로운의 가신장 아불한이었다. 그는 아마도 군에서 매우 중요한 직을 맡고 또 해로운에게 깊은 신임을 얻고 있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해로운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해모수가 먼저 인사를 올린 후 입을 열었다.
“장형은 매우 바쁘신가 봅니다.”
“그분은 어전친위무사단과 궁궐시위대를 관할하실 뿐만 아니라 진국상장震國上將 겸 삼조선부흥군 진군총대장을 제수 받고, 또한 어명에 따라 중부여후中夫餘侯가 되셨습니다. 공사다망하시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가의 대신이 대답했다. 해모수는 속으로 어느 새 참 대단한 직책을 많이도 가졌구나 하고 생각하며 물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뿐입니다. 폐하를 알현하고 폐하 앞에서 서로 화해하며 함께 힘을 합해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이오. 하나, 번조선 군대를 코앞에 들이대고 우리를 위협하면서 무슨 화해를 이야기할 수 있겠소? 진심이 그렇다면 우선 번조선 군대를 철수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소?”
“번조선 군대는 제가 아무런 까닭 없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분연히 일어나 저를 도우러 온 것뿐입니다. 만일 조정에서 평화로운 웅심산으로 쓸데없이 군사를 파견하지 않았다면, 번조선 군대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동쪽으로 군사를 보내 우리를 위협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번조선 군대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해모수가 말을 마치며 기진을 바라보았다.
“해모수 공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전에서 해로운 대인이 평화를 약속한다면, 저희 군대는 본국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곁에 있던 설이매가 입을 열었다.
“해모수 공자는 지금 실질적으로 웅심산성의 성주를 맡고 있습니다. 일의 경위야 어찌 됐든 어전에서 폐하의 뜻을 여쭈어 동북東北 조선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해로운 대인께서 중부여후를 맡으셨다고 하니 중부여는 안심이지만, 동북조선은 사방이 어지러운데다 북쪽 읍루挹婁인들의 위협까지 상존해 있습니다.”
“도적떼처럼 불법으로 성을 점령하고 폐하의 추인을 받고자 하니, 어찌 이것이 우리 조선에서 있을 법한 일입니까? 중부여후 전하殿下께서 군사를 보내신 것은, 그 잘못을 엄히 묻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에서 후候의 지위는 곧 소국小國의 군주를 의미했다.
장당경 수비대 장수가 언성을 좀 높이자 해모수가 온유한 목소리로 해명했다.
“불법으로 성을 점령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일은 소인이 여기에서 함부로 망발할 수 없는 내막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전에서 밝힐 것입니다.”
이어서 해모수는 기진과 더불어, 줄기차게 임금의 어전에서 조선에 평화를 정착시킬 방안을 논하자고 요청했다. 조정의 대표도 그들의 의견을 논박하고 이견을 제시할 구실은 없었다. 더불어 평화롭게 살자는데, 속으로 껄끄러울지언정 겉으로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일 아침 어전회의에 세 분이 참석하도록 하시오.”
마가의 대신이 결론을 내리고 회의는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한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오늘은 불편하더라도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겠소.”
아마 그들은 해모수 일행을 태평문 안에 가두어 두려는 것 같았다.
그는 좌석에서 몸을 일으키며 설이매 공주에게 말했다.
“마마, 저희들을 따라서 궁으로 돌아가시죠.”
설이매가 의외로 강경한 말을 했다.
“싫습니다. 나도 이 사람들하고 여기에 같이 있겠소. 언제부터 우리 조선이 협상 대표를 차가운 성문에 가두어두는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단 말인가요?”
마가의 대신이 매우 난처해하며 말을 못하고 있었다. 궁내에서 설이매 공주는, 성격이 아주 까다롭고 바른 말을 잘하며 상대하기가 극히 어려운 존재로 대신들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공주마마,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어서 속히 대인을 따라 궁에 들어가서 쉬세요.”
삼칠성주가 권했다.
“아닙니다. 난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설이매는 단호히 거부한다. 그녀가 이처럼 고집을 부린 것은, 물론 조정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항의이기도 했지만, 해모수와 기진이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아주 꺼림칙했기 때문이리라.
“대인은 즉시 우리를 안내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분들을 안내해서 궁 안의 영빈관으로 모시겠소.”
설이매가 마가 대신에게 요구했다.
“마마, 이건 중부여후 전하께서 당부하신 일입니다. 제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흥! 중부여후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란 말이오? 폐하께서도 우리를 이곳에 감금해 두라고 명하셨습니까?”
“이곳은 중부여후 전하께서 다스리시는 지역입니다. 전하께서 작은 일은 폐하의 재가를 받지 않고도 처리하실 수 있습니다.”
“장당경은 삼조선의 도성으로서 폐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곳이 아닌가요?”
마가의 대신이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아랫사람이라 전하를 통해서만 폐하께 의견을 여쭐 수 있습니다.”
“흥! 도대체 언제부터 오가 대신들이 임금께 직접 의견을 주청하지 못했단 말이오?”
삼칠성주가 다시 나섰다.
“공주마마,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어서 빨리 대인을 따라 가서 쉬십시오.”
“아닙니다. 나도 여기 있을 것입니다.”
설이매는 거듭 이렇게 대답한 후 마가의 대신에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속히 가서 이르시오. 중부여후에게. 우리가 여기에 있다가 내일 아침 조회에 참석할 것이라고.”
마가의 대신이 탄식하며 장당경 수비대장과 아불한을 데리고 문을 나섰다.
한편, 해로운은 같은 시각에 자신의 공관에 심복들을 불러 구수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잡아 가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무래도 설이매 공주와 무슨 밀약을 한 것 같은 예감이 드네.”
“전하, 잡아 가두어서 어찌하시렵니까?”
“그걸 내 입으로 꼭 말해야 하겠는가?”
“그렇게 하신다면, 번조선의 저항에 부딪힐 터인데, 번조선의 군대를 어찌 막으시렵니까? 아직 우리 중부여의 군사력은 번조선에 비해 크게 열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진 공주만 보내주면 되지 않겠는가?”
“아닙니다. 해모수와 기비가 서로 밀약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우리 군대가 웅심산성으로 가자마자 기비의 군대가 이곳으로 왔겠습니까? 그리고 기비의 군사 삼만이 먼저 동쪽으로 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신臣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막조선 군대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동쪽 해안과 두만수 일대를 봉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해로운의 심복은 해로운 앞에서 철저히 칭신稱臣하고 있었다.
“기비의 군대가 큰 골칫거리네.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일단 저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들이 무슨 요구를 할지 모르나, 대표단이 오는 대로 말을 들어보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어 번조선 군사를 완전히 물러가게 한 후, 저들이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자객을 보내는 것이, 군사를 동원하는 편보다 차라리 났다고 봅니다.”
곁에 있던 다른 심복도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자객이 실패하면 그 때 가서 군사를 진격시켜도 늦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제거할 대상은 둘입니다. 기비와······.”
“잘 알겠네. 그럼 대표단이 도착하는 대로 회담결과를 듣고 새로운 전략을 짜도록 하세.”
그날 밤은 몹시도 추웠다. 누각 안에 만든 방이 넓었으므로 큰 화로를 몇 개 피웠으나 추위를 별로 덜어주지 못했다. 해모수 일행은 군사들이 가져다준 몇 장의 털이불로 몸을 감싸니 좀 나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서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음은 따스했다. 더구나 설이매 공주와 기진 공주는, 해모수와 함께 있어서인지 모르나,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것 같았다.
네 사람은 내일 있을 어전회의에서 어떤 발언을 하고 해로운의 모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논의하며, 모든 결과를 천제님께 맡기기로 했다. 해모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웅심산성을 맡게 된 경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여인들은 손에 땀을 쥐고 그의 무용담을 듣다가 탄성을 발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한다.
“이건 차마 제가 말씀드리기 곤란한 일이지만, 실은 폐하께서 제게 밀지를 내려 웅심산성 성주의 직을 제수하셨습니다. 대부여평국상장에 임명하신 것도 밀지를 통해서였으니, 이런 일이 개국 이래 언제 있었단 말입니까? 폐하의 정황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폐하께서 몹시도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설이매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다.
해모수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부언했다.
“하지만, 마마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폐하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삼칠성주도 거들었다.
“그래요. 해모수 말이 맞아요. 이럴 때 우린 조용히 천제님을 부르며 마음의 평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승리의 길입니다.”
해모수가 기진을 보며 물었다.
“기진 공주님, 혹시 제가 재작년에 선물로 드렸던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해모수의 질문에 곁에 있던 설이매가 속으로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은 그가 준 책을 내팽개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네, 여러 차례 읽어보았습니다. 매우 유익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 책을 잘 읽고 소화하면, 무예뿐만 아니라, 상제님을 섬기는 일에도 상당한 진보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 날씨도 추운데, 함께 호흡기도나 하죠?”
해모수가 설이매의 얼굴을 쳐다보며 제안했다. 삼칠성주와 설이매, 기진이 모두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삼칠성주가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삼백육십육사>[일명 <참전계경>]에서도 항상 천제님을 잊지 말고不忘 쉬임없이不息 천제님을 찾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호흡기도야말로, 그 일을 이루기가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어머니께서도 호흡기도를 늘 실천해 오셨습니까?”
해모수가 물었다.
“그렇단다. 하나님을 잊고서 어찌 한시라도 살 수 있단 말이냐?”
“<삼육육사>에서, 하나님 섬기기에 관한 여섯 몸통六体의 순서를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敬神, 탐욕을 버리며 마음을 바르게 하는正心 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이지만, 잊지 않고, 또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다섯 번째 몸통인 지극한 감동至感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해모수가 보충설명을 가했다. 삼칠성주가 그의 얼굴을 보며 대견한 듯 칭찬한다.
“너도 <삼백육십육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구나.”
그리고 두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지극한 감동至感의 아홉 가지 쓰임九用을 보면, 사실상 지감至感이 없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삼칠성주는 다시 해모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그 아홉 가지 쓰임을 기억하고 있느냐?”
“네, 어머니. 그걸 기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 사항들을 담고 있으니,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들만은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곁에서 듣고 있던 설이매가 삼칠성주에게 요청했다.
“나도 어렸을 적부터 스승님께 <삼백육십육사>를 배우면서 그것을 앵무새처럼 외우긴 했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어보니 무엇인지 좀 알 것 같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뜻밖에도 설이매 공주가 천제 섬기기에 대해 대단한 열의를 보이며 다가왔다.
“지극한 감동, 혹은 하나님과의 지극한 교감, 이것의 아홉 가지 쓰임은, 아시다시피 시천侍天, 응천應天, 도천禱天, 청천聽天, 대천戴天, 대천待天, 낙천樂天, 강천講天, 순천順天입니다. ‘시응도청 대대락강순’이라고 외우면 쉽죠.”
삼칠성주가 아홉 가지 쓰임을 나열한 후 빙긋이 웃으며 해모수를 바라다보았다.
“아들아, 네가 그 의미를 설명해 보겠느냐?”
해모수도 미소로 대답했다.
“시천이란 마음속에 하나님을 천제天帝 즉 하늘임금님으로서 모시는 것입니다. 응천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고 답하는 것이고요, 도천은 물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죠. 청천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이고, 대천戴天은 하나님을 머리 위에 인다는 뜻인데, 곧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 받들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해모수는 기진과 설이매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녀들의 표정을 살피며 천천히 덧붙였다. 두 여인이 웃음 띤 얼굴로 해모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설이매가 평소의 냉엄하고 차가운 표정을 버리고 미소를 지으니, 그녀의 얼굴은 가슴이 설렐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설이매의 눈빛에서 해모수는 어떤 간절함을 읽고 있었다. 기진의 눈에는 따스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두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해모수는 속으로 뜨끔하며 말을 이었다.
“또 하나의 대천待天은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기다리거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낙천은 하나님을 기쁨의 대상으로 삼는 거죠. 호흡기도에 익숙해지면, 낙천 즉 하나님을 즐기고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게 되죠. 세상에서는 그런 기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남녀 간의 애정도, 술도 도저히 그 기쁨과 행복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삼칠성주가 이어서 설명했다.
“이 낙천을 거쳐 강천 즉 하나님을 아는 단계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설이매 공주가 물었다.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사랑, 선하심, 위대하고 존귀하심, 놀랍고도 아름다우심, 거룩하고 위엄차심 등을 조금씩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자비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크게 울게 됩니다. 행복하고 황홀한 울음이죠. 사람이 너무 기쁠 때도 그저 눈물만 흘리잖아요? 그런 경우가 바로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을 깊이 깨달을 때입니다.”
해모수도 한 마디 거들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알고 나서, 천제께 완전히 반하고 미치지 않을 인생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흉악한 도적이 아주 변해서 딴 사람이 되는 것도 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사랑에 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반하면 흉악한 죄인이 왜 변해요?”
설이매가 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 애정과 성품이 너무나도 매혹적이고 좋아서, 자기도 그 성품을 닮고 싶은 갈망이 마치 홍수처럼, 도도한 강물처럼, 폭풍우처럼,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무서운 들불처럼 가슴 속에 밀려오기 때문이죠. 홍수와 강물, 태풍과 야화野火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요. 사람은 미치지 않으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미쳐야만 변합니다.”
(다음회로 계속)
********************
샬롬.
2023. 2. 17. 봄정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