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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태후가 아들 이단에 대해 곰곰이 숙고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 속히 여인들의 작시 대결을 감상합시다.”
오늘 밤의 축하연에 참석한 여인들은 미시아, 여미아, 어처 극시아, 그리고 태평공주, 이루하 외에 월왕 이정(당 고종 이치보다 한살 많은 형)의 아들 왕자 이충李沖을 비롯한 몇몇 왕녀와 귀족들이었다. 그 중 여미아는 쓰러져 선실로 들어가고 없었다.
“작시 대결 방식은, 두 사람씩 겨루어 그 중 이기는 쪽이 다른 승자와 승패를 다투는 거예요. 괜찮죠?”
여인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시는 시간관계상 오언절구五言絶句나 칠언절구七言絶句로 한정하겠습니다. 그것도 괜찮죠?”
역시 모두 찬성이다.
“대결자 중 한 사람이 첫 행을 열면 다음 사람이 둘째 행을 다는 방식으로 하겠어요. 칠초七秒 안에 대구를 잇지 못하면 지는 것입니다.”
“기존의 시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한가요?”
“그렇습니다. 남의 시를 써도 괜찮으나 만일 상대가 그 시를 알지 못할 경우, 다른 대구를 들이대는 것도 허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어느 두 분이 첫 주자로 나설까요?”
“제가 먼저 나서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는 미시아였다.
“대결자는 누구죠?”
그러나 그녀와 함께 선뜻 겨루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녀는 비천한 하녀 신분이었으므로 그 곳의 왕자, 왕녀들은 그녀와 대결하기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제가 겨루어 보겠어요.”
어처 극시아였다.
“그럼 두 사람이 순위를 정해 시작해 보세요.”
어처 극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밤바람 살랑이고 오색등불 우는데
宵風溢浪鳴色燈 소풍일랑명색등
미시아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대구를 달았다.
춘정을 못 이겨 시흥을 읊는다네
不御春情啼詩興 불어춘정제시흥
극시아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반짝이는 은물결 달빛에 구슬프고
翠淵閃波悲月輝 취연섬파비월휘
마지막 행을 미시아가 멋지게 장식했다.
가슴도 물결인양 임 그려 출렁이네
心水深戀沸思郞 심수심련불사랑
좌중에서 요란한 박수가 일어났다.
“오, 아름다운 시예요. 근데 아가씨가 그리워하는 임이 누군지 몹시도 궁금하군요.”
무유서가 미시아를 향해 물었다.
“글쎄요. 그냥 누군가가 막연히 그리워요.”
“여기 계신 영웅호걸들이, 만약에 앞 다퉈 아가씨에게 술 한 잔을 권한다면, 아가씨는 누구의 술잔을 맨 먼저 받고 싶으신가요?”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군요.”
미시아는 좌중을 둘러보다가 복면인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저기 복면을 쓰고 앉아계시는 분에게 먼저 한 잔 얻어 마시고 싶습니다.”
복면인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며 말했다.
“오, 영광, 영광입니다. 소인이 술 한 잔을 즉시 따라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복면인은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미시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미시아는 사의謝意를 표하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태평공주는 복면인이 자신의 친 오라버니인 황제 이단임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흥! 체통 좀 지키셔야죠. 얼굴이 반반한 계집만 보면 사족을 못 쓰니. 그러니까, 엄마에게 임금 자리도 빼앗기고 그저 밥이나 축내고 있지 않은가?’
태평공주는 속으로 오라버니를 욕하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복면을 쓰신 공께서는 참 복도 많으십니다. 이런 천하절색 미녀의 환심을 샀으니.”
그 때 누군가가 탄식하듯 말했다.
“어허! 괴이한 일이로고! 자고로 미녀가 영웅에게 술을 올렸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으나, 영웅이 미녀에게 손수 술잔을 바쳤다는 얘긴 거의 들어보지 못했구려.”
사람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보니, 그는 다름 아닌 승려 회의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시아가 대꾸했다.
“제가 대사님께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소승, 아니 소인은 술을 끊은 지 오래지만 절세가인의 옥수로 주는 거라면, 파계해서라도 받아 마시고 싶소.”
“호호호호호! 역시 대사님은 멋진 대장부이세요.”
미시아는 좌중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드러지게 웃으며 술을 따라 회의에게 올렸다. 그 때 무 태후의 이맛살이 약간 찌푸려졌으나 이를 알아챈 이는 태평공주 뿐이었다.
승려 회의는 그 술을 다 받아 마신 후 무 태후에게 말했다.
“폐하, 소인은 오늘 기왕지사 파계했으니, 폐하께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아, 좋다마다요.”
무 태후가 흔쾌히 대답했다.
무 태후가 회의로부터 한 잔 술을 받아 마신 후 태평공주가 손뼉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자, 이제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두 분이 계속해서 다른 시를 지어주세요.”
미시아와 극시아가 즉시 대결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미시아가 먼저 첫 구를 읊조렸다.
武 境 渺 深 難 苛 思 무경묘심난가사
이것은 극시아도 익히 알고 있는 시구다. 지체하지 않고 다음 행을 댔다.
眞 寶 神 光 不 可 遮 진보신광불가차
다음 행들도 순식간에 끝났다.
失 色 一 道 滾 滾 走 실색일도곤곤주
燃 戀 洗 世 牧 丹 花 연연세세목단화
좌중에서 그 시를 알고 있는 이는 고조영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시의 속뜻을 해득할 수 없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오늘 두 분이 선문답 같은 시를 읊고 있군요. 아까는 가슴 속 깊은 그리움이 물처럼 끓어오른다더니, 이젠 그 그리움을 불태워버린다?”
누군가가 두 시를 비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움이 괴로움이라면, 불태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소?”
곁에 있던 이해고가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불태우는 게 너무 아깝지 않소? 경국지색의 그리움을 받는 그 남자는 얼마나 행복하겠소? 그 남자가 그 사실을 안다면.”
무유서의 말에 고조영이 고요히 대꾸했다.
“문제는, 그 남자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거요.”
“장군은 그 남자가 모를 거라는 사실을 어찌 그리 잘 아시오?”
“그건, 막연한 추측이오. 방금 전 미시아 아가씨가, 그리움의 일정한 대상이 없고, 그냥 누군가가 막연히 그립다고 하지 않았소?”
“하긴 그렇군요. 내가 그 남자라면 너무 좋겠소.”
“여기에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소?”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미시아는 곧장 제지하고 나섰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소녀는 폐하를 모시다가, 폐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비구니가 되어 일생 폐하만을 그리워하며 살 것입니다.”
“미시아, 그 말 믿어도 되는 건가?”
무 태후가 싫지 않은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미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선재善哉로다, 선재로다! 아가씨는 참으로 열녀요.”
회의가 감탄한 듯 그녀를 칭찬했다.
그 때다. 갑자기 고조영이 목소리를 높여 미시아에게 물었다.
“아가씨, 제가 술을 한 잔 올리고 싶은데, 받으실 의향이 있는지요?”
미시아는 고조영을 빤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소녀는 오늘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거절당한 고조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미녀에게 술을 올리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요.”
태평공주가 잠시 좌중의 주의를 환기시킨 후 말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오늘 밤 시작대회가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뭇 사람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 공주마마의 뜻은?”
“세 수首의 시를 연달아 지어도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에는 무승부로 하고, 다른 사람들이 겨루게 하죠.”
이렇게 해서 미시아와 극시아는 세 번째 대결을 벌였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작시 실력은 청산유수였다. 계속해서 여러 여인들이 대결을 벌인 결과 태평공주와 이루하, 미시아와 극시아만이 마지막까지 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평공주와 미시아가 겨룬 결과, 미시아가 승리를 거두었다. 미시아는 입을 열기만 하면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아름다운 시구가 줄줄이, 달달이, 날날이, 술술이 엮어져 흘러나왔다.
이루하와 극시아의 시합에서는 극시아가 이겼다. 끝까지 남은 미시아와 극시아가 다시 한 차례 겨루었다. 이번에는 오언이든 칠언이든 절구든 율시든 옛 시이든 오늘날의 유행이든,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대결하도록 했다.
극시아가 먼저 입을 연다.
미시아는 극시아의 시문을 듣고 은근히 긴장했다. 그건 <시경詩經>에 나오는 매우 익숙한 시문이었으나 삼행시三行詩였기 때문이다.
칡 캐는 저 아가씨 하루 못 봐 석 달 같네
彼采葛兮 피채갈혜
一日不見 如三月兮 일일불견 여삼월혜
미시아가 다음 행을 읊조린다.
대쑥 캐는 저 아가씨, 하루 못 봐 삼추 같네
彼采蕭兮 피채소혜
一日不見 如三秋兮 일일불견 여삼추혜
극시아가 웃음을 띠고 뒤를 이었다.
약쑥 캐는 저 아가씨, 하루 못 봐 삼년 같네
彼采艾兮 피채애혜
一日不見 如三歲兮 일일불견 여삼세혜
이 시는 이렇게 삼행으로 끝나지만, 미시아는 마지막 행을 멋지게 만들어서 달았다.
연근 캐는 저 아가씨 하루 못 봐 세 겨울 같네
彼采蕫兮 피채동혜
一日不見 如三冬兮 일일불견 여삼동혜
시작 대결이 끝나자 잠시 후 복면인의 그것을 뒤따라 요란한 박수소리가 적취지의 물결을 갈랐다.
“압운도 멋지게 맞았구려. 근데, 연근 캐는 아가씨는 누구요?”
복면인 이단이 미시아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건 작시자가 남몰래 연모하던 어떤 아가씨가 아닐까요?”
“그건 총각이겠군요.”
그 때 태평공주가 다시 속으로 이단을 욕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오라버니. 오라버니에게는 사부인, 구빈, 이십칠세부, 팔십일어처, 총 일백이십이 명의 처첩이 국법으로 보장되어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미시아를 탐하고 있소? 남자들이란 군왕이건 종놈이건 한결같이 모두가 속물이라니까.’
“이러다간 언제 끝날지 모르겠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두어 수만 더 읊기로 하고 그래도 무승부면 공동우승으로 하죠. 누가 먼저 시작할까요?”
이렇게 선언한 태평공주가 미시아와 극시아 두 여인을 바라다본다.
미시아가 먼저 운을 떼자 극시아가 도도한 강물처럼 이었다.
看朱成碧思紛紛 간주성벽사분분
그리움에 정신이 산란해 붉은 빛도 푸르러 보이고
···
그건, 애독자님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말한다면, 무 태후 무조가 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서 태종이 죽자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에 있던 시절, 태자 이치李治를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시다. 이치는 당 고종이다. 무 태후의 남편이 되었던 그는 사년 전인 683년에 세상을 떠났다.
무 태후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좋은 밤에, 쓸쓸한 시를 읊어 내 마음을 울적하게 하는구나.”
미시아가 마지막으로 이 시를 읊은 것은, 무 태후를 좀 띄우기 위해서다.
“이 멋진 시를 지은 분이 누구인지 혹시 아시나요?”
대담하게도 극시아가 좌중을 향해 물었다. 좌중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내 시야. 갑자기 옛날이 그리워지는군.”
무 태후가 길게 탄식하다가 고개를 내려 달빛 젖은 호수의 물결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 때 느닷없이 극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이었다. 선상에 남은 이들 중 고조영과 미시아 외에는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외로운 일척 가슴 뉘 손이 어루만져
한 절을 천천히 읊은 후 그녀는 고조영과 미시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미시아는 극시아의 뜻을 알아차리고 달빛 받은 적취지를 지그시 응시하며 대구를 달았다.
유실幽室 속에 감춘 눈물 적취지에 뿌려줄까
극시아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 위의 교교한 만월을 쳐다본다. 그녀의 입술이 떨린다.
은물결에 달빛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미시아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대구를 달았는데, 만월을 가득 담은 그녀의 낯에서는 취한 듯,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다.
임의 가슴 옷깃 속을 빗물 되어 적셔볼까
당사자들과 고조영 외에 아무도 그 뜻을 해득하지 못했지만 취기가 가득한 모두의 얼이 어떤 강력한 그리움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좌중의 눈길이 두 여인의 얼굴로 향하고 있을 때, 고조영이 그 뜻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무 태후가 하늘의 달빛을 바라보며 말한다.
“어느 새 자정이 넘은 것 같구려. 오늘 잔치는 이만 파하는 것이 좋겠소.”
“그럼 마지막으로 한잔씩만 더하고 마치죠.”
태평공주의 말에 일행은 술을 한 잔씩 더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영은 몇 발자국 걷다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아, 내가 마시지 못하는 술을 과음했더니, 너무 취했나보구나.’
겨우 배의 돛대를 붙잡고 몸을 지탱한 조영은 갑자기 옆에서 쿵 소리가 나서 놀라 돌아다보니, 누군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승려 회의였다.
하지만 회의를 필두로 태평공주, 무 태후, 무유서, 극시아 등등 선상에 있던 남녀들이 죄다 쓰러지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니 자신처럼 돛대를 붙잡고 버티고 서 있던 이해고도 마침내 주저앉더니 곧 벌렁 눕고 말았다.
자신과 미시아만이 쓰러지지 않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장군님, 술 속에 미약媚藥과 미혼약이···.”
미시아가 말을 맺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니, 아가씨···.”
고조영이 놀라서 부르짖다가 그도 역시 말하는 도중에 혼절하고 말았다.
외로운 일척 가슴 뉘 손이 어루만져
유실幽室 속에 감춘 눈물 아리하에 뿌려줄까
은물결에 달빛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임의 가슴 옷깃 속을 빗물 되어 적셔볼까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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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8. 30. 초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