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가까이
요나서 4장 10, 11절
1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11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동상이몽(同床異夢)
여러분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존재입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요나는 요나서 4장 2절에서 시편 기자와 꼭 닮은 문장으로 고백합니다.
“주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다”(시 145:8)
요나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선지자였고 하늘에 계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욘1:9)이었습니다. 요나의 하나님에 관한 생각은 훌륭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선지자이며 그에 합당한 고백과는 다른 생각과 이해와 실천이 요나서를 통해 발견됩니다. 분명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과 내밀하게 소통하는 관계로 함께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지 못하고 한자리에 앉아 다른 곳을, 다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나서 하면 선지자 요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재밌게 엮어진 책으로 기억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멸망을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고 스페인(다시스)으로 가는 배를 탑니다. 그 배에서 풍랑을 만나고 바다로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며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요나를 살리셨습니다. 드디어 요나 선지자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 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 니느웨로 가서 예언합니다.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예언을 들은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욘 3:8.9)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이 뉘우치고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해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요나 선지자의 반응과 행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반응입니다.
이해와 명분이라는 질곡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4:1, 개역 개정)
하나님을 향해 성질을 부리는 선지자의 모습은 굉장히 낯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시리라는 것을 예측했고 하나님께도 이미 말씀드렸으며 전혀 용서할 수 없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 재앙을 멈출 것을 알았기에 스페인(다시스)으로 도망갔다(욘4:2a)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는 한술 더 떠 하나님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나님을 겁박합니다. 요나가 이렇게 한 까닭은 니느웨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이러한 행동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니느웨는 당시 이스라엘에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준 가장 악독한 원수의 나라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죽이고 그들의 가죽을 벗겨 니느웨 성벽에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가장 악독하고 무자비한 나라였습니다. 요나 선지자에겐 수용하고, 인정하고, 용납할 수 없는 끔찍한 존재였습니다.
땅끝이라고 생각했던 스페인으로 도망치던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의 사흘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영을 따른 후에도 요나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재앙를 내리지 않는 것을 본 요나의 반응은 화를 내고 죽여 달라며 니느웨 성 동쪽에 초막을 짓고 이후에 이루어질 일을 관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이해와 생각과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고 생각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지적 동의와 그리스도를 통한 신뢰
여러분은 “믿음”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존 웨슬리는 처음엔, 믿음을 “동의”(同) 라고, 이해했습니다. 믿음을 신념의 한 종류로 봤고 하나님의 일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두 경험, 어찌 보면 시간의 간격은 크지만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경험일 수도 있는 경험을 통해 믿음을 새롭게 고백하게 됩니다.
1735년 미국 조지아주로 선교 여행을 떠나는 배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습니다. 웨슬리는 두려움에 죽을 것 같았지만 모라비안 교도들은 풍랑 중에도 평안이 있었습니다. 미친 듯 거칠게 요동치는 풍랑으로 빠져들어 갈 듯한 배 위에서도 평정심을 갖고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두 번째 경험은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와 실의에 빠져있던 1738년 5월 24일 우연히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라비아 교인들의 기도회 모임에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 이후 웨슬리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그리스도교적 믿음은 단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동의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전적 의지, 그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의 공로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음은 단지 성경과 교리가 참되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만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 가지게 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공로로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는다는 확실한 신뢰이며 확신이고, 죄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여 이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확신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지적 동의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새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감격이며 흔들림 없는 신뢰와 확신입니다.
변화
하지만 이러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확신에 찬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요나 선지자도 도망자에서 놀라운 경험 후 진정한 선지자의 길을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모습은 하나님 뜻에 따를 수 없고 내 뜻대로 안 되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구경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기적, 이적, 권능의 체험이 사람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으셨습니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마을들에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쓰고서, 회개하였을 것이다.(마11:21)
요나 선지자가 도망자, 구경꾼의 옷을 벗고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에 자기 생각을 맞추기 위하여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기적과 이적이 아니라 내 열심과 헌신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고 만유 중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를 맞추어 갈 때 일어나는 열매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박넝쿨 연가
하나님께서는 성내고 화내며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요나 선지자에게 박넝쿨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하나님께 가까이 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박넝쿨 연가’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연가를 불러주시고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 동쪽에 초막을 짓고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바라보는 구경꾼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마련하여 그늘을 만들어 편안하게 해주셨고 요나 선지자는 그 편안함에 취해 무척 좋아하며 그 안락함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하나님께서는 벌레로 박 넝쿨을 시들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뜨거운 바람과 햇볕으로 괴로워진 요나 선지자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며 화를 냅니다. 이렇게 보면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로 보였지만 넘을 수 없는 강이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함께 있지만 따로 있는 것 같은 관계였습니다. 그러한 요나를 향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요나서의 가장 중요한 핵심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10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11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 선지자가 도망자, 구경꾼으로 살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도망자, 구경꾼의 인생을 청산하고 지적 동의를 뛰어넘어 만인을 사랑으로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니느웨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지적 동의를 넘어 내가 사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인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 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후 15:1)
하나님은 내 안에, 만유 중에 현존하고 임재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과 일치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지적인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나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전부 주시는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고백적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축도
지금은 죄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전부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가늠할 수 없는 사랑하심과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 역사 충만하심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빈들공동체 위에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