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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극(荊棘)의 길 외동중학교 비사(秘史)
(작성 중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입실리(入室里) 443-1번지에 소재하는 우리들의 모교 외동중학교는 1947년 9월 20일 외동고등공민학교(外東高等公民學校)로 출범하여 1951년 9월 20일 사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로 개교하였다.
외동읍 입실리에 중학교(中學校)가 설립된 배경은 다른 중학교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지역 내 중등교육기관(中等敎育機關)의 부재로 초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경주(慶州)와 울산(蔚山) 지역으로 원거리 통학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에 지역 주민들이 뜻을 모아 1947년 9월20일 외동고등공민학교(外東高等公民學校) 설립인가와 함께 1학년 1학급으로 편성, 수업을 시작하여 4년간 운영해 오다가 1951년 8월8일 재단법인 외동중학교 유지재단 설립인가를 받아 사립 외동중학교를 개교 했다.
초대 재단이사장(財團理事長)에는 제2대 국회의원(國會議員)을 역임한 안용대 선생이, 초대교장으로는 권태훈(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부친) 선생이 취임하고, 4학급을 인가받아 출범한 외동중학교는 외동읍 유일의 중등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초대 재단이사장 안용대 선생(제2대 국회의원 : 1999.5.6 작고)
권영해 전 안전기획부장의 경우 1949년 경남 양산군 하북면 신평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외동읍으로 이주하여 1952년도에 사립 외동중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1951년 9월부터 5년여간 사립중학교로 운영되던 모교는 1956년 7월 20일 사립중학교에서 공립중학교로 전환하면서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불국사중학교 당시의 외동중학교 전경
(가운데 교무실 좌우로 3개씩의 교실이 있었고, 우측으로부터 1학년 1반, 1학년 2반, 2학년 1반, 교무실 순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모교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가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교명이 변경된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났지만 거리에는 거지들이 우글거렸고, 어려운 살림살이에 당시의 시골 어린이들은 국민학교(초등학교)에도 제대로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1965년도의 외동중학교 전경
월사금(月謝金)으로 내는 사친회비(師親會費)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자녀들은 중학교의 진학이 그만큼 어려웠고, 고등학교 이상의 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기였다.
공립 외동중학교 제1회 졸업생(통산 제7회)
(전열 우측에서 두 번째가 필자)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적었지만, 다니던 학생들도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특히 외동중학교가 그랬다.
1960년대의 별관
(재학생이 급증하자 별관을 지어 3학년을 수용했다)
때문에 요즘은 ‘중중퇴(中中退)’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를 정도지만, 그 당시에는 '중학교 중퇴’도 대단한 학력으로 인정받기도 했었다. 어쨌든 사정이 이렇고 보니 사립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1990년대의 교사전경(현재의 4층 건물 이전에 3층일 때의 모습)
그런데 마침 이 시기에 불국사역이 소재하는 당시의 내동면 구정리의 구정국민학교(지금의 불국사초등학교)앞 남천(南川 ; 형산강의 지천) 개울가에 있던 공립중학교인 불국사중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의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는 1955년 가을에 흙벽돌로 지은 4칸짜리 교사였는데, 이듬해인 1956년 홍수에 남천이 범람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의 불국사중학교 건물은 필자의 향리인 괘릉리 '자미산'에서 보면 가깝게 건너다보이기도 했었다.
1980년도에 개교한 지금의 경주시 시래동 206번지에 소재하는 ‘불국중학교(佛國中學校)'와는 전혀 다른 중학교다.
※ 현재의 ‘불국중학교(佛國中學校)’를 현지에서도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으나, ‘불국사(佛國寺)’가 아니고 ‘불국(佛國)’이다.
당시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가 무너지던 때는 아마 몇 십명의 학생들이 1.2학년에 재학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당시는 울산역에서 경주역까지 통학열차(문짝도 의자도 없는 시커먼 '유게 화차' 5-6량을 일본제 '미카' 증기기관차가 끌고 다니는 초라한 것이었지만)가 운행되고 있어서 불국사역전 마을인 구정리 등의 경우 기차교통이 편리하여 거의가 경주중학교를 비롯한 경주읍내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때문에 초라한 시골학교인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에는 거의 진학자(進學者)가 없어 전체 학생수가 몇 명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학교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보니 당시의 교육당국에서도 전쟁후의 교육재정(敎育財政)이 바닥이 난 상황이었고, 개울가에 다시 재축을 한다 해도 거듭 홍수피해(洪水被害)를 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학교를 폐교하기로 했다.
이 때 모교(母校)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공립중학교(公立中學校)로의 전환을 목표로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 측과 협의하여 경상북도 교육위원회(敎育委員會)에 사립인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대한 폐교를 신청하고, 공립중학교인 불국사중학교의 소재지를 외동중학교의 소재지인 입실리로 변경하는 '위치변경승인'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경상북도(慶尙北道) 교육위원회에서는 1956년 7월 20일 이들 두 가지 신청을 동시에 인가(認可)하였고, 이로써 사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없어지고, 공립 불국사중학교로 통합 발족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 내동면(內東面) 구정리(九政里)에 소재하던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에 다니던 학생 몇 명이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로 편입해 왔고(어떻게 보면 필자들이 불국사중학교에 편입했다고 볼 수 있음), 재직하던 선생님 서 너 분도 함께 옮겨 오셨다.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에서 전근오신 선생님들이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로부터 지금의 용어로 '왕따'를 당하고, 놀림을 당하던 모습이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당시의 중학교(中學校) 3학년생들은 15세에서부터 21세까지의 연령이 분포되어 있어 덩치가 큰 학생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갓 전입해 오신 선생님들이 여간 거북해 하지 않으셨다.
당시에는 이렇게 고령 중학생이 많아 중학교 3학년생에게 징집영장이 발부되기도 했었다. 전쟁중에는 물론 휴전이 되고 난 뒤에도 언제든지 전쟁이 다시 시작될 상황이어서 징집영장을 받은 중3년생들은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당시의 문교부에서는 1952년도부터 중고등 학생 중 징집연령에 해당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4시간씩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군사교육을 받은 학생들에게는 문교부장관 명의로 전시학생증을 발급해 주고 군복무를 연기해 주었다.
당시 발급했던 전시 학생증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외동중학교는 제7회 졸업생의 경우 2학년 1~2학기 '통신표'는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 교장선생님 명의로 발급되었고, 제6회 졸업생 역시 3학년 '통신표'와 졸업장은 불국사중학교 교장선생님 명의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8회 졸업생은 1학년 '통신표'가 그랬을 것이다.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로 9개월 동안 운영되던 모교는 제7회 졸업생들이 졸업반으로 진급한 며칠 후인 1957년 3월 15일 공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외동중학교 위용
(왼쪽 건물은 진지관[체육관]이다)
이러한 우여곡절로 필자를 비롯한 제7회 졸업생들은 사립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입학하여 공립 불국사중학교(佛國寺中學校)를 거쳐 공립 외동중학교를 졸업함으로써 세 곳의 중학교를 동시에 다닌 셈이 된다.
외동중학교 전경과 공립 1회(통산 제7회) 졸업생들
(2007.4.12 제7회 졸업생 대표들이 모교를 방문하여 찍은 사진)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원래 남자중학교였으나, 1956학년도부터 여학생을 모집하여 남녀공학 학교가 되었다. 당시의 여학생은 입실국민학교(入室國民學校) 출신 5명이 필자가 소속한 1학년 A반에 편성되기는 했으나, 1학기가 지난 후에는 3명인가로 줄어들더니 2학년이 되었을 때는 한사람도 남지 않았다.
1960년대의 외동중학교 3학년 여학생들
1년만에 남녀공학이 해체된 것이다. 짓궂은 머슴애들 틈바구니에서 견뎌낼 수 없어 모두들 당시의 경주읍내 근화여중인가로 전학을 갔었기 때문이다.
이후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서는 필자가 졸업한 2년 후인 1960학년도부터 본격적인 남녀공학(男女共學)이 재개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
1960년대 외동중학교 여학생들의 수업장면(가사수업)
(별관 3학년 교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는 지난 2007년 2월 제56회 졸업식을 통해 총 13,26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지난 1979년에는 22학급 1천525명의 재학생으로 규모가 팽창하기도 했으나, 1990년 이후 이농현상(離農現象)으로 점차 감소해오다 근래에 들어 다시금 증가하고 있다. 2007학년도에는 17학급(특수학급 1포함), 547명의 재학생으로 편성돼 있다.
외동중학교 청운비
지금의 외동중학교 교정에는 ‘청운정(靑雲庭)이라는 뜰을 만들고, 재학생들에게 청운(靑雲)의 기개를 고취하는 격문(檄文)을 새긴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비문(碑文)을 소개한다.
비문에서 말하는 ‘봉서산(鳳捿山)’은 외동중학교 교가에 나오는 ‘동대산(東大山)’을 말하는 것으로 울산광역시 농소면에 소재하는 ‘동대산(東大山 ; 442m)이 아니다.
교가에 등장하는 ‘동대산’은 토함산 북쪽에 있는 ‘동대봉산(東大封山)’에서 모화리 원원사 뒤쪽 삼태봉(三胎峰)을 거쳐 건대령(建大嶺)까지의 ‘동대산맥’ 구간 중 개곡리에서부터 모화리까지의 산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모두 ‘동대산’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따라서 교가의 ‘동대산’은 학교 바로 동쪽 입실1리에 우뚝 솟은 산을 말한다.
외동중학교 동편에 위치한 '동대산'
(입실초등학교 교정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봉서산(鳳捿山)은 해발 600여m의 산으로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으나, 모화리 원원사(遠願寺) 뒤쪽부터 삼태봉까지의 능선을 이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봉서산’이라 칭하고 있다.
봉서(鳳捿)란 그 유래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일설에 의하면 큰 새를 연관지어 높이 솟은 산악(山岳)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봉서산(鳳捿山)을 동대산(東大山)의 별칭으로 보기도 하는데, 비문(碑文)의 봉서산은 학교 동쪽 ‘동대산’을 말하는 것 같으나 그 위치를 기준으로 할 경우 의문이 제기된다.
교가의 ‘동대산’은 입실리(入室里)에 소재하고, 청운비의 ‘봉서산’은 모화리(毛火里)에 소재하기 때문이다. ‘봉서산’의 별칭이 ‘동대산’인 것은 맞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동대산(東大山)’은 울산광역시에 소재하는 ‘동대산’을 포함하여 토함산(吐含山) 이남에 늘어서 있는 ‘동대산맥(東大山脈)’ 전체의 총칭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옛적에는 울산시 북구 연암동에 소재하는 ‘무룡산(舞龍山)’을 ‘동대산’이라고도 했다. 이 산 또한 '동대산맥'의 한 주봉이기 때문이다.
외동중학교의 또 하나의 정기 ‘아기봉’
(모교 교정에서 찍은 것인데, 황사 때문에 희미하게 보인다)
외동중학교는 그동안 다양한 교육활동을 펼쳐오면서 인근 학교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지금은 주요 견학 시범학교로 지정이 되어 있다.
경상북도 지정 교과교실 시범학교로 지정된 이후, 도 지정 ICT활용교육시범학교, 도 지정 학교운영위원회 시범학교선정 등 다양한 시범학교 선정, 운영과 2002년 경주시 독서환경 콘테스트 최우수상, 2004년 경주시 전화 친절도 평가 최우수상, 2005년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중학교 선정 등의 수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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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퍼온 글
새삼 어릴적 생각도 떠올릴수있어 참 좋으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