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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필요한 오늘의 양식( (El pan mi de cada dia/my daily bread) (상)
나운영 작곡 '시편 23편'에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 How Sweet The Sound/Early
American melody)를 더해 번갈아 불기 30여분?
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가.
한밤중이 되도록 인기척이 없기 때문에 방문했다는 다른 봄베이루(소방대원)로 인해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관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날짜가 바뀌도록 잠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이 봄베이루스의 밤 역시 요즘 연속되고 있는 나홀로 방지기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일당 50km 이상 걷기를 연속으로 해도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시피 되어 있는 알베르게의
밤인데 이토록 잠에 빠져든 것은 까미노 걷기에서는 초유의 일이다.
차량의 왕래가 없는 까미노에서는 백주에도 드렁컨(drunken/醉漢)처럼 비틀대며 걸을 때가 간혹 있다.
졸음에 시달려 흐느적거리면서도 잠시나마 오수에 들만한 곳이 없을 때는 강행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만
이 하루는 길에 착오가 있었을 뿐 육체적 혹사는 없었는데도.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 시장기였다.
지도에서 인근의 해결사(Meu Super Caxarias)를 찾기는 하였으나 진즉 종료(영업)되었을 시간이다.
단어 '메우'(Meu)는 '나의'(my)라는 뜻의 뽀르뚜갈어다.
'내 슈퍼 마켓'은 친밀감을 갖게 하는 뽀르뚜갈의 토종 슈퍼 체인이다.
3일전(쎄르나셰)에도 애용했으며 까미노 뽀르뚜게스에서는 단연 으뜸 단골이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잖은가.
다행히도, 백팩을 청소하듯 제고량을 모두 먹고 마신 하루였으므로 잠 못이루게 할 만큼 심한 공복 상태는
아니라 하겠으나 길 떠날 아침까지의 긴 시간이 골칫거리로 등장할 태세였다.
전에 없이 몇시간을 곤히 자고 난 후라 더욱 심할 텐데 소형 탁자 위에 놓인 책 한권이 시선을 끌어갔다.
'Santa Biblia'(싼따 비블리아/Holy Bible/성서)
스페인어 Antiguo Y Nuevo Testamento(안띠고 이 누에보 떼스따멘또/구 신약성서)다.
봄베이루스의 비품은 아니고(비품이라면 뽀르뚜갈語 version일 테니까) 어느 에스빠뇰 순례자의 것이라고
짐작되는 묵직한 책을 무심코 집어들고 어떤 의도(意圖) 없이, 절로 열리도록 자연스럽게 펼쳐 보았다.
열린 페이지는 Mateo(마태복음) 5장 ~ 6장이었다.(이 책의 주인이 자주 열어보았던 페이지였을 것이다)
El Sermon del monte(엘 썰몬 델 몬떼/산상 설교) 중 참된 행복(Las bienaventuranzas/라스 비에나벤
루란사스/팔복)에서 욕망과 불안(El afan y la ansiedad/엘 아판 이 라 안씨에닫/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
하라)까지.
내 스페인어는 성서를 편하게 읽고 알(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우리글로 암기하고 있는 구절들의
스페인어는 불편 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읽은 부분은 6장 25절에서 34절까지.
책 주인의 지문이 무수히 덕자덕지 찍혀있을 만큼 자주 찾아가서 읽었으리라고 짐작해 보도록 손때가 묻어
있는 책장(冊張/page)이다.
Por tanto os digo:No os afaneis por vuestra vida, que habeis de comer o que habeis de beber;
ni por vuestro cuerpo, que habeis de vestir.
No es la vida mas que el alimento, y el cuerpo mas que el vestido?(25절)
Mirad las aves del cielo, que no siembran, ni siegan, ni recogen en graneros: y vuestro Padre
celestial las alimenta. No valeis vosotros mucho mas que elias?(2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들을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
께서 기르시는데, 너희는 이것들보다 훨씬 귀하지 아니하냐.
pero vuestro Padre celestial sabe que teneis necesidad de todas estas cosas.
Mas buscad primeramente el reino de Dios y su justiela, y todas estas cosas os seran anadidas.
Asi que, no os afaneis por el dia de manana, porque el dia de manana traera su afan.
Basta a cada dia su propio mal.(32절~34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이 하루의 내게 이 보다 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성찬(sacrament)이 있는가.
내가 까미노에서 가장 많이 혼잣말로 되뇌며, 절실하게 나를 격려하고 갖은 난관을 극복하게 하는 성구들
중 한 곳도 여기임을 뜻한다.
이 밤, 이 곳에서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걱정한다고 키를 한 치라도 더 늘일 수 있느냐?(Y quien de vosotros podra, por mucho que se afane,
añadir a su estatura un codo?/27절)
내게 필요한 오늘의 양식(El pan mi de cada dia/my daily bread)은 바로 이것(탁자 위의 싼따 비블리아
/Santa Biblia)이였는가.
내게 필요한 오늘의 양식( (El pan mi de cada dia/my daily bread) (하)
'Love today'(오늘을 사랑하라)라는 시가 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Yesterday was already bueried in the past)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future hasn't come yet)
오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날(today is the day we live)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The day we can use is today)
오늘만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날이다(Today is the only day we can own.)
<中略>
Love today. (오늘을 사랑하라)
Get rid of yesterday's lingering feelings. (어제의 미련을 버려라)
Don't worry about tomorrow when you haven,t even come.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Our lives are today's continuation. (우리의 삶은 오늘의 연속이다)
It's been a month since we got together 30 times. (오늘이 30번 모여 한 달이 되고)
It's 365 times today, and it's a year. (오늘이 365번 모여 한 해가 되고)
Today we gather 30.000 times and become a lifetime. (오늘이 3만번 모여 한 생이 된다)
토머스 Carlyle의 시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유식을 자랑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Carlyle)의 시 '오늘'
(Today)과 대조하면 판이함을 직감하게 된다.
(作者未詳/Unknown 또는 Anonymous 상태인 이 시 작자의 성함을 아는 분은 本欄을 통해서 알려주시기를 요망합니다)
So here hath been dawning / Another blue day; (보라 푸르른 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
Think, wilt thou let it / Slip useless away? (생각하라, 그대는 하루를 헛되이 흘려 보내려는가?)
Out of Eternity / This new day was born; (영원에서 새 날은 이 새 날은 태어났고)
Into Eternity, / At night will return. (밤이 되면 영원으로 다시 돌아가리니)
<中略>
Here hath been dawning / Another blue day;(여기 또 푸르른 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
Think, wilt thou let it / Slip useless away?( 생각하라, 그대는 하루를 헛되이 흘려 보내려는가?)
얼핏 보아도 동일인이라고 할 수 없도록 다른 문체다.
잘 알려져 있고 많이 읽히는 그의 시는 오늘(Today)외에도 쿠이 보노(Qui Bono)와 포르투나(Fortuna)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내가 무지한 탓인가.
내 짧은 가방끈 때문이며 내가 틀렸다면 차라리 다행한 일이지만 내 견해가 맞다면 소위 전문가인 듯 설쳐
대는 자들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수치스런 일인가.
아무튼, 칼라일은 스코틀랜드의 퓨리턴(Puritan/淸敎徒)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인지 오늘을 중시했으며
오늘을 강조하는 점에는 두 시가 다 같이 성서 못지 않게 강한 어조다.
어떤 일 또는 무엇에 열중하거나 한 가지 일에 힘을 쏟아붓는(집중) 것은 보람찬 일일 수 있다.
스페인어 성서에 매달려 있는 동안은 시간이 살(矢/arrow) 같았으며 밤마다 괴롭히는 단골 고통도 잊었다.
우연이었지만, 특별한 목적 없이 펼쳤을 뿐인데 엄청난 메시지가 담겨 있는 페이지일 줄이야.
무수히 접해온 예수의 산상 설교지만 이 시간(2015년 6월의 어느날), 이 곳에서는 공복감과 피로감 따위가
감히 어쩌지 못할 엄숙하고 위엄있는 양식이였다.
놀랍게도 읽기는 다음 장(7장)으로 계속해 갔다.
외국어는 물론, 우리 글 서책도 막히는(難解) 부분이 잦으면 중도 포기가 흔한 일인데 막힘 없이 읽혀갔다.
No juzgueis, para que no seais juzgados(노 후스게이스,, 빠라 께 노 세아이스 후스가도스)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7장1절)
결국, 스페인어 산상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게 되었다.(5장 1절 ~ 7장 끝/29절까지)
능력이 전혀 없는데도 하려는 열정 때문에 더러 겪는 곤고와 달려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비유될 만큼 청결
해진 이 심야(까샤리아스 봄베이루스의)에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외국어 학습에 한 격언이 있다.
"하숙집 여주인과 키스할 정도라면 하녀는 거들떠보지 마라"
어렵사리라 해도 원서(외국어)를 읽을 정도가 되면 번역본은 멀리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번역에 신뢰가 간다면 문장 위주의 단편 소설과 시, 수필, 평론 등의 텍스트(text)를 통독한 후
원어본을 대하면 독해력 향상과 획기적 학습 효과를 거두게 됨은 내 와국어 학습 체험의 산물이다.
히브리어와 희랍어 등으로 된 원전 외에는 모두 번역본인 성서의 외국어판 역시 우리 글 성서의 통독(通讀)
정도에 따라 수월한 외국어 여부가 판별된다.
Pedid, y se os dara; buscad, y hallareis; llamad, y se os abrira.
(뻬딛 이 세 오스 다라; 부스칻 이 아야레이스; 야맏 이 세 오스 아브리라./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7장7절)
Porque todo aquel que pide, recibe; y el que busca, halla; y al que llama, se le abrira.
(뽀르께 또도 아껠 께 삐데; 레씨베; 이 엘 께 부스까 아야; 이 알 께 야마 세 레 아브리라/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7장8절)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9절, 10절)
주인은 없고 노랑 화살표만
시장기라는 느낌이 전혀 없는데도 문득 생각이 났다.
안시앙 축제장에서 받아온 바게트와 맥주가 백팩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먹은 기억이 없으니까)
내가 구입한 것들은 모두 남김 없이 먹고 마시지만 그저 받아와서 백팩의 어디에 넣어둔 것은 때가 지났기
때문에(부패해서) 버리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하마터면 이번에도 그 경우에 해당할 뻔한 빵이다.
자정이 넘은 때, 유효기한이 없는 맥주(1927년에 태어났다는, 뽀르뚜갈 대표 맥주 Super Bock)와 함께 이
바게트를 먹었다.
여느날 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잤고 의외의 야식도 했다.
많이 잤다는 겻은 몸이 괴롭힘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적에 다름아닌 일이며 그래서 몸도 마음도 편한 밤이 가고 있다.
파띠마 날의 새 새벽을 향해 간단없이 매진하는 시간을 타고 있지만 오카리나를 잡느라 내려놓았으며 난데
없이 쏟아진 초저녁 잠에 중단되었던 볼펜을 다시 들었다.
안락을 느끼고 있는 밤과 아침 사이에서는 원인이 분명치 않은 하루의 고역을 반추해 보는 여유도 가졌다.
무엇을 위한 고역이었으며 어떤 부채였기에 기필코 치뤄야만 했는가.
어떤 답도 찾지 못한 채 밤의 종료를 알리는 먼동이 터옴으로서 전일의 체력 저하 현상은 불가사의 중 하나
로 남게 될 것이다.
직전일 점심과 저녁에 비프스틱으로 포식했고 다음 날(어제)에도 양껏 먹었는데도 그같은 현상이었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지.
봄베이루스의 새 아침에도 전일의 일을 상상할 수 없도록 말짱했으니 말이다.
꽤 늦은 시각인 아침 8시 15분(뽀르뚜갈시간7시 15분)에 소방서를 나왔다.
까미노 상의 봄베이루스와 달리 아침 시간에 엄격하지 않은 곳이라 몸에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주려고.
봄에이루스 볼룬따리우스 길(R. dos Bombeiros Voluntarios)을 따라서 동진한 후 남하와 동진을 하여
교회(Igreja Matriz de Caxarias) 앞까지 1.1km를 내려갔다.
오랜 세월의 굳어진 습관인 아침식사 건너뛰기를 깨고 식사(음식점 매식)를 해보려는 첫날.
아침 식사가 가능한 음식점에 가기 위함이었다.
전일의 악몽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특단의 조치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실행하는 것
인데 아무쪼록 좋은 반응으로 응답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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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아침식사인 이 아침의 메뉴는 교회 월편 패스트리집(Pastelaria Vida Nova II)의 빵과 음료수였다.
풍성했던 백팩 안의 먹거리들은 모두 소진되었기 때문에 점심거리까지 준비하여 길 떠난 아침의 파띠마 길
은 삐종이스 길(R. dos Pisões)에서 시작했다.
EN356도로를 따라 남하하다가 철길을 입체 횡단한 후 남하를 계속하는 파띠마 길.
역 방향 까미노 뽀르뚜게스에서 자주 보던 파띠마 길 안내판과 블루 애로(blue arrow /파란화살표)가 등장
하고 순 방향 까미노의 안내표지인 옐로 애로도 눈에 띄는 길이다.
노란 화살표는 전적으로 의외였다.
온 종일에 걸쳐서, 이 예로(yellow)가 필요한 주인공(순방향 뽀르뚜게스)과의 만남이 전혀 없었으니까.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아직.
엄격한 자로 재면 이 파띠마 길은 까미노가 아니다.
뻬레그리노스가 없는 것이 당연하며 눈에 띄는 것이 되레 이상한 일일 것이다.
있다 해도 모두 각종 교통승용구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아다.
파띠마와 함께 축복이 강림한 길이건만
EN356도로는, 차량의 왕래가 뜨음하여 한가로운 안시앙 ~ 까샤리아스의 N348이나 N350과 달리, 때로는
차량의 지 정체 구간이 생기는 도로다.
도로 주변에 판매와 수리 등 차량 관련 업체가 먹고 마시는 집 보다 많은 이유의 답이 되는 현상일 것이다.
편편한 길인데도 도로의 양편으로 있는 우거진 유칼립투스 숲들은 이 일대의 과거도 높지 않은 산이었거나
거대한 구릉지대였음을 의미하리라.
파띠마 길은 EN356도로를 따라 벤다스(Vendas), 아바디아(Abadia) 등 프레게지아 까샤리아스의 루가르
(lugar/작은 마을)를 지나고 프레게지아 세이사(Seiça)의 루가르 모스케이루(Mosqueiro)도 지난다.
프레게지아 노싸 세뇨라 다 삐에다지(Nossa Senhora da Piedade)의 까잘 두스 끄레스뿌스(Casal dos
Crespos)와 까잘 두 까스따녜이루(Casal do Castanheiro) 등 루가르도 지나는 파띠마 길.
IC9도로와 입체 교차하여 서진하는 EN356도로를 따라서 삐녜이루(Pinheiro)의 초등학교(Escola do Pin
heiro e Cabiçalva) 까지의 9.3km 지점에 당도한다.
까샤리아스에서 20.5km로 되어 있는 파띠마의 절반에 육박하는 지점이다.
까미노와 같은 위엄을 느끼지 않으므로 중압감이 없는 길이며 신중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긴장하지 않고 가볍게 걷기 때문인지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 길.
까미노처럼 잘못 들으면 회귀해서 다시 걷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니까.
많이 걷고 싶다면 우회하고 어떤 이유로 단축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길이며 어느 호사가가 파띠마 길이라
명명은 했지만 연 이틀에 걸쳐서 단 한명의 보행 순례자도 만나지 못한 길이기 때문이다.
모든 도로가 그러하지만 EN356도로에도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길 이름들이 있다.
긴 도로에 붙여진 별칭들이지만 실은 직선화 도로 이전에 있던 길들이며 이름들이다.
부분적 지역 개발이 이뤄질 떼 우선적 필수인 길에 편의를 위해 붙여진 이름들이니까.
거미줄처럼 늘어난 길들을 망라해서 직선 도로를 신설했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익혀진 길 이름들이 함께
사용되었으며 새 도로 외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단독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름들이다.
IC9도로와 교차한 후 로터리에서 시작되는 쁘린시뻘 길(R. Principal)이 초등하교 이후에는 노싸 세뇨라
두 호사리우 길(R. Nossa Sra. do Rosário)이 되어 남하한다.(쁘린시뻘길은 서진을 계속하고)
이스뜨라다 다 그라비아(Estr. da Gravia)가 되어 해발 244m의 산간마을 그라비아(Gravia)를 지난다.
올리브농원을 비롯해 여러 농장들을 개간한 소교구(Freguesia) 노싸 세뇨라 다 삐에다지(Nossa Senhora
da Piedade)의 새마을(新村/lugar)이다.
그라비아 길(Estr. da Gravia)을 이탈, 우측의 농로를 따라 남서진해 상 로렌수 길(R. de Sao Lourenço)
에 합류하는 파띠마 길.
그 길(Rua 상 로렌수)에서 직각으로 우회전, 마리아 두 까도이수 길(R. Maria do Cadoiço)과 모이따 다
비지(Moita da Vide) 등의 길로 바뀌며 짧지만 서진과 남하를 계속한다.
이어서 까뻴라 길(R. da Capela)을 따라서 알케이당(Alqueidão/Nossa Senhora da Piedade의 마을)의
예배당(Capela de Nossa Senhora das Mercês)을 지난다.
대개의 교회(Igreja)보다 더 여유로운 공간(건물에 비해서)과 역내에 공동묘지(Cemitério de Alqueidão)
까지 있는 예배당이다.
뽀르뚜갈의 예배당 수준에서는 최초로 본 부설(?) 묘지니까.
남동진하며 예배당을 지난 까뻴라 길은 남서진과 남하를 하여 쁘린시뻘 이스뜨라다(Estrada Principal)를
건넌 후 남서진과 남하를 되풀이 하는 까르따샤 길(R. da Cartaxa)이 된 파띠마 길.
쎄리모니아 길(R. da Cerimónia)을 따라 남동진과 남하를 계속해 우회전, N113도로에 진입한다.
이스뜨라다 지 레이리아(Estr. de Leiria)가 되어 남서진하는 길 우측 코너에 안내판이 서있다.
프레게지아 아또기아(Atouguia) 내방을 환영한다(seja bem vindo)는 입간판이다.
루가르 삐녤(Pinhel/간판)과 로터리를 통과하는 1km 미만의 서진 후 N113 도로를 떠나는 파띠마 길.
좌회전하어 꾸부 길(R. do Cubo)을 따라서 1km 이상 서진과 남서진을 하다가 이스뜨라다 지 파띠마(Estr.
de Fatima)를 건넌 후 플로리스 길(R. das Flores)이 된다.
2km 이상 남서진과 서진, 다시 남서진하여 당도한 곳은 파띠마의 다운타운이 2.5km쯤 남은 외곽.
산뚜아리우 지 파띠마(Santuário de Fátima/파띠마 성지)에 가는 도보 뻬레그리노스가 걸어서 온 포장로
(R. das Flores)를 버리고 산길에 진입하는 처음이며 마지막 지점이다.
까샤리아스에서 이 지점을 거쳐 파띠마 까지의 순례길이 성모 마리아가 3목동 앞에 발현한 1917년 이후에
선정된 것은 명명백백하지만 길 자체의 생성 시기를 나는 모른다.
필요하면 까샤리아스 당국(토목 건축)에 의뢰하면 어렵잖게 알아내겠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디민, 파띠마의 축복이 없었다 해도 1c의 세월이기 때문에 개간과 개발, 새 마을의 형성 등으로 대소의 변화
가 불가피했을 텐데 하물며, 축복이 파띠마와 함께 이 길에도 내렸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 없지 않은가.
성지(Fatima)에의 순례길(Pilgrimage) 선정 자체가 축복이며, 그래서 관리에 한층 더 열성적일 것이건만
순례자(Pilgrim)가 보이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차량을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어느 분의 귀띰이 목의 가시처럼 걸려왔다.
순례자란 순례하는 사람을 말하며 순례는 걷는 것을 전제로 하는 행위다.
각종 승용구(차량)가 등장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걷는 행위를 일컬었을 뿐 편리한 도구의 생활화로 차량을
이용하는 탐방도 순례의 한 축이라고 강변한다면 유구무언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행보는 단순히 걷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형극의 고행도 포함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관광여행이나 여가선용의 탐방 또는 기분의 전환을 위한 드라이브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려가 현실이 된 링반데룽
파띠마 다운타운까지 남은 거리는 산길 1.5km를 포함하여 2.5km정도다.
남은 포장 도로 역시 비슷한 거리다.
산길과 도로, 양자 택일의 이 지점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돌연한 체력 이상과 비 내리기를 애타게 바랄 정도로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여러 날
걷지 못한 산길의 갈증도 여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매력(산길)과 안전성(도로) 중에서 택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뭇거려진 것이다.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고, 곧 전자를 택했다.(산길로 들어선 것)
까미노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산길이 오리지널이며 까미노의 갈림길에서는 예외 없이 전자(산길)를 택해
왔지만 이 선택은 뻬레그리노스가 걸어야 하는 까미노 또는 그에 준하는 길이라는 생각과는 무관했다.
평생을 통해서 굳어진 산길 선호가 이유였으며 한 세기 이내에 일어났고 이뤄져 가고 있는 현실(Fatima)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좋은 위치에서 확인하려는 욕심때문이었다 할까.
또한, 이 시각이 오후 3시를 막 지나고 있으므로 치명적인 돌발사태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당초의 예상대로
해 안에 파띠마의 다운타운에 당도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으니까.
걱정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왠지 분지형 지형이 눈의 가시처럼 걸렸고 과식하지 않았는데도 소화가 되지 않아 거북한 속처럼 답답하여
물을 마시기도 했지만 막연한 걱정이 최악의 현실이 될 줄이야.
산길의 지형이 분지형이라는 이유로 기상 이변의 가능성을 점치면서도 왜 그 길을 택했는가.
이미 언급한 것이 이유였으며 가장 심각한 이변을 링반데룽으로 가정하고 결과까지 예상했다.
"좁은 지역이기 때문에 방향을 잃고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흐른다 해도 곧 탈출하게 된다.
1.5km의 짧은 산길이기 때문에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해도 알바(徒勞) 거리는 3km 안팎일 것"이라고.
한데, 마치 어떤 기구에 의해 백팩을 멘채 하이잭(hi-jack)되어 민둥산에 버려진 형국이 되었으니.
돌연한 소나기를 맞은 듯 온몸이 후줄근하게 젖어있고, 불볕 햇살을 형벌처럼 받으면서도 피하려 하기는
커녕 고통이 의식되지 않는 듯 비스틈히 앉아있는 상태였다.
경과된 1시간쯤(3시를 막 지났던 시계의 현재시간이 4시니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넋 없이 헤맸
으리라 짐작될 뿐 도무지 기억이 없다.
최악의 링반데룽(Ringwanderung/環狀彷徨)에 걸려들었는가.
독일어 링반데룽이라는 단어는 다람쥐가 체바퀴 도는 장면을 크게 확대해서 보면 설명이 될까.
링반데룽에 걸려들어 애먹은 이야기는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하면서도 자신도 믿지 못하겠다는데 남이 믿어주겠는가.
거짓말 같은 사실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사실이다.
지난 1시간여도 그랬다.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거짓이 되어버리는 사실.
국지적 기상 이변에 따르는 것이 링반데룽이기는 해도, 이같은 경우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매우 희소한 돌발사태로, 다소 방황하는 정도는 있으나 기억이 송두리째 없어지기는 내게는 상상마저도 해
본 적 없는 초유의 일이다.
결사적으로 애써서 찾아낸 기억이란 갑자기 압박해 오는 암무(暗霧)에 허둥대기 시작했다는 것 뿐인.
그러나, 좁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이변쯤은 능히 물리칠 수 있을 만큼 단련되어 있다는 자신감 외에도 어떤
자만심에 의해서 이같은 걱정이 무시되었을 것이다.
백두대간, 9정맥과 심산, 고산을 홀로 누비는 동안에 체험하며 단련은 되었으나 자만심을 다스리는 훈련은
잘 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선한 사마리아인
평탄한 토산의 산봉에서 완만하게 내려오는 능선의 한 지점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앉혀져 있는 나.
혼미해진 상태에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듯 했다.
사물이 어슴푸레하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휘청거리는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보았다.
아득하게 눈에 잡혀 오는 도시가 파띠마라고 가정해 보며 컴퍼스로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늘 앞 가슴이 제 자리인 컴퍼스기 없어졌다.
집 떠날 때 목에 걸면 귀가하여 목을 떠날 때까지는, 샤워할 때도 목에서 떠나지 않는데 어찌된 일인까.
그리 먼 것 같지는 않으나 자력으로 움직여서 갈 정도가 되지 못하다는 것만이 확실해 제 자리에서 한바퀴
돌며 주위를 살펴 보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능선상의 이 주변에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 분탕질을 한 자국이 역력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심히 몸부림 친 흔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니까.
다시 놀라게 한 것은 모래에 살짝 묻혀 있는 검은 끈을 발견했는데 이 끈은 내 컴퍼스 줄이 분명했으며 줄을
당겼을 때 줄에 달려 올라온 것이 바로 내 컴퍼스였다.
아마도 딩굴고 몸부림친 듯 한데 백팩은 가슴띠와 허리띠로 몸에 단단히 묶여 있었기 때문에 흙칠을 했을뿐
무사했으나 컴퍼스는 몸이 딩구는 중에 몸에서 떨어져 나가 모래에 파묻혔을 것이다.
압박해 오는 암무에 허둥대기 시작했다는 기억을 끝으로 능선에 앉아 있기 까지 1시간여는 어떤 일이 벌어
졌으며 어떻게 대처했는지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채 고역을 치룬 자국만 있으니 이럴 수가?
정녕 나의 그 분은, 안전한 길을 두고 스스로 무덤을 찾아가게 한 어떤 힘, 나로서는 무력할 수 밖에 없는 그
힘의 각본을 미수로 끝나게 수정했는가.
달리 여하한 설명도 이해도 할 수 없게 종료된 1시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기진맥진 상태지만 최악의 고비를 넘겼는데도 말 타면 경마잡히고 싶어진다는 격인가.
까미노에서 종종 대하는 사망자 표지판(비석, 비목)이 이 능선상에도 서있게 될 뻔한 사건을 미수로 마무리
한다면 하루의 종지부도 유종의 미(happy ending)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볼맨 소리로 중얼대고 있으니.
일진 광풍을 겪은 몸으로는 기복이 심한 능선을 내려가기가 용이한 일아 아니다.
하지만, 굴러서라도 내려가게만 된다면 불평해서는 안되련만 능선 좌우로 나있는 차 바퀴의 흔적들을 보며
어떤 차량의 도움(hitch-hike)을 받게 되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 것이다.
바로 그 때, 기적같은 일이 내 눈 앞에서 전개되었다.
검은 고급 승용차(Benz) 1대가 내 옆에 불쑥 나타난 것.
능선을 오르내리려면 요란한 소리가 불가피한데도 아무 소리 없이, 마치 나비가 꽃잎에 내려앉듯이 살짝.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운전자가 무슨 말을 내게 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빠라 파띠마'(para Fatima) 두 단어뿐이었지만 아마도 파띠마 쪽으로 가려면
타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산길을 달리는 이 사람도 이베리아 반도인이다.
병자에게는 극진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이를 데 없이 냉담한 그들인데도 내게 자발적 도움을 주려 했다면 내
가 절대적 도움이 필요한 병자로 보였으리라.
무수히 되풀이하고 있지만 이베리아 반도 사람들(에스빠뇰과 뽀르뚜게스)의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은 치하
를 거듭하고 또 해도 모자랄 정도다.
아무튼 일진광풍은 일과했다.
내 넋을 빼내어 가버린 듯 공동(空洞)의 상태는 서서히 벗어났지만 일체가 일시에 해결되고 한 순간에 원상
복구가 완료되는 등 바라는 대로 된 셈이다.
체력을 포함해 링반데룽 이전 상태로.
파띠마의 다운타운에 진입할 때까지 차 안의 두 초로남은 차창으로 산세와 지형을 살피는 듯 했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단어 '벤다'(venda/賣物)와 '이모벨'(Imóvel/不動産)이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벤다는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서 건물과 토지 등 부동산이 매물임을 알리는 표지판의 단어다.
부동산업 종사자로 짐작되는 그들은 자발적 편승 제공 외에도 냉 음료수까지 권하는 후한 호의를 베풀었다.
까미노의 뻬레그리노스와 파띠마 순례자는 동일인이다
나는 파띠마 다운타운의 북쪽 한 지점에 내려졌다.
넓게 차지한 파띠마의 묵주 성모 교회(Basílica de Nossa Senhora do Rosário de Fátima) 앞이다.
너른 광장의 한 돌벤치에 멍청히 앉았다.
아무일 없었던 듯 당초의 예상대로 해 안에 당도하여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늙은이는 감개무량할 뿐이었다.
기력은 많이 회복된 듯 하지만 충격이 큰 일 직후가 늘 그러하듯이 공허하기 때문에 남은 일과를 알베르게
찾아가는 일로 한정하고 일어섰다.
아꼴리멘뚜 S. 벤뚜 라브리(Santuário de Fátima Acolhimento S. Bento Labre).
바실리까의 북서쪽, 직선거리는 지호지간이지만 한참을 돌고돌며 묻고물어서 도착한 파띠마의 알베르게다.
나이 들어보이는 오스삐딸레라(Hospitalera)는 친절했다.
당일을 포함하여 이틀 숙박을 허용해 달라는 내 요청에 그녀가 물어왔다.
도보 뻬레그리노가 아니냐고.
1박으로 제한하고 있으나 도보 뻬레그리노스에게는 3박을 허용하는 숙박 규정 때문에 물었단다.
'뻬레그리노스'냐는 이 물음에서 알게 된 사실은 파띠마 순례자(도보)와 뻬레그리노스(까미노 도보 순례자)
를 동의어(동일인)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뻬레그리노스만이 파띠마를 걸어서 순례한다는 단정에 다름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파띠마만을 목표로 하는 순례자는 100% 차량을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안시앙에서 나는 파띠마 순례를 위해 뻬레그리노의 신분을 잠시 내려놓는다고 한 내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까미노의 뻬레그리노스 신분과 파띠마 순례자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인데도 정황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한
내 무지만 까발린 꼴이 되었으니까.
안시앙 ~ 파띠마의 보행 루트와 과정을 들은 그녀는(Ringwanderung을생략했는데도) 경이롭게도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고행을 했다며 2박+1박을 허용하겠단다.
휴식을 충분히 하고 떠나라는 배려일 것이다.
내 끄레덴씨알(Credencial/순례자여권)에서 나이(81세)를 확인한 그녀는 무거운 백팩을 2층의 룸(room)
까지 옮겨주고 배졍한 베드(bed)를 취소하고 선택권을 내게 주는 등 극진했다.
싱글 나무베드 몇 개(3 ~ 5개씩?)가 나란히 있는 방의 입구에서 창쪽으로 옮기도록.
홀로 걷는 것은 내 요지부동의 지론이다.
이것이 백번 옳다 해도 이따금 외로움을 타게 됨은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사람의 온기(情)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특히, 몇시간 전에 겪은 링반데룽 같은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는 더욱 그러한데 이 오스삐딸레라야 말로 내
갈증을 풀어주는 오아시스였다.
갈증이 일시에 풀린 듯 상쾌한 기분이 된 밤이 왔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깊고도 긴 잠에 빠지고 싶을 뿐인 때 오스삐딸레라가 파띠마의
시내지도를 들고 내게 왔다.
저녁식사에 대해 물으며 클로즈(close/영업종료) 시간이 아직 남은 슈퍼마켓을 소개한 그녀.
그러나 적극적이지 않은 내 반응의 의미를 눈치챘는가.
잠자리를 보고 있을 때 또르띠야(tortilla) 몇개의 접시와 밀크커피잔을 들고 또 왔으니까.
멕시코에서 많이 먹었으며 스페인에서도 빰쁘로냐의 나바라대학교 동문회 파티에서 먹은 음식이다.
지난 5월 초, 2번째의 까미노에 들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 것은 쉥겐조약(EU의 Schengen Agreement)에
따른 장기 체류(90일 이상) 문제였다.
내 계획이 6개월 동안 계속 걷는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나바라대학교 동문회(alumni)가 나섰다.
해결하여 줌(6개월이 아니라 forever라고)은 물론 동문들은 업무를 중지하고 모여서 환영 파티를 열어주었
는데, 이 떼 먹은 또르띠야가 이 파티를 위해 동문들이 손수 만든 것이라는 부언이 나를 감격하게 했었는데.
또르띠야는 스페인어권 음식이라 뽀르뚜갈에서는 메뉴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의아했다.
오스삐딸레라는 매우 센서티브(sensitive)한 여인인가.
감(感)으로 나를 압도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에스빠뇰(español/스페인 사람) 파띠마 순례자들이 주고 간 것을 냉동실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녹여왔다고
설명하며 먹기를 권했으니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