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는 해류 이용한 천재”=고선박연구가인 마광남씨는 “거친 파도를 이겨내려면 바닥이 평평하기보다는 뾰족한 형태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먼 바다를 다니려면 현대의 원양어선처럼 뾰족한 형태일 수밖에 없다. 울산과학대학 이창억(해양조선학과) 교수는 “장보고의 무역항로는 북방항로뿐 아니라 서해 남부 항로도 다녔다”며 “이런 곳을 다니기 위해서는 밑바닥이 평평한 배로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신라 배도 한국 고유의 배 형식과 같은 밑바닥이 평평한 모양”이라고 주장한 고 김재근 서울대 명예교수 등을 반박하는 논리다. 일본의 구법승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신라 배는 작지만 날렵하고 강하다’고 표현했다. 또 신라 배는 동남풍과 서남풍을 이용해 남쪽으로 항해하는 역풍항해까지 했다고 기록했다.
마광남씨는 “역풍항해를 하려면 지그재그 방식으로 이동해야 하고, 능숙한 돛 조절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의 항해각도는 목표지점을 향해 50도에서 60도 정도로 움직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장보고 선단은 항법도 앞서 있었다.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은 “장보고 선단 항해사는 지문항법·천문항법·수문항법 등을 모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지문항법은 육상이나 섬의 모양과 목표물을 보고 항해하는 것이고 천문항법은 해와 별자리 등 천체를 활용하는 것이다. 수문항법은 물의 깊이나 색깔을 파악해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다. 장보고는 이들 항해술로 해류와 바람이 다른 한반도 남해와 서해, 남중국해 등을 자유자재로 다녔다. 1992년 완도 일대를 답사한 동서교역사 권위자인 휴 클라크(미국 얼시누스 대학) 교수는 장보고의 동북아 해상 장악을 아라비아인들의 남해무역 지배와 비교하면서 “지형과 해류를 잘 이용한 장보고는 천재”라고 평가했다.
◆파손돼도 침몰은 안 돼=고선 전문가들은 신라 배는 한쪽이 바위 등에 부딪쳐 파손돼도 가라앉지 않도록 앞부터 뒤까지 칸막이를 여러 개 한 것(수밀격벽구조)으로 보고 있다. 엔닌의 기록에 선체의 밑바닥이 모두 부서지고 찢어진 가운데 밀물이 밀려왔지만 계속 항해했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선체에 물이 차도 한번에 침몰하지 않고 긴급항해가 가능했다. 이원식 소장은 “2006년 중국 산둥성 펑라이시에서 발견된 고려 선박이 이런 구조인 것으로 보아 원양항해를 했던 신라 배 역시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신라 배는 튼튼했다. 강상택 전 한국해양대 교수는 “신라 배는 배 측편을 만들 때 판끼리 겹치는 방식으로 한 뒤 참나무 쐐기를 박아 고정시켰을 것”이라며 “일본 배는 판자들을 수평으로 이은 뒤 못으로 고정시켜 약했다”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
▶팀장=김시래 산업경제데스크
▶취재=김문경 숭실대(역사학) 명예교수, 천인봉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김창규·염태정·이승녕·문병주·강병철 기자
▶사진=안성식·오종택·변선구 기자
도움말 주신 분들(가나다순)
▶ 강봉룡 목포대 교수(역사문화학)▶권덕영 부산외국어대 교수(역사학)▶김용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김종식 완도군수▶김재철 동원그룹 회장▶김진숙 박사(성균관대 강사, 차학)▶김호성 서울교대 교수(전 총장, 윤리교육학)▶김희문 전 완도문화원장▶마광남 고선박 연구가▶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정보실장▶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역사학)▶윤명철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역사학)▶이승영 동국대 교수(국제통상·전 한국무역학회장)▶이원식 한국해양대 명예교수(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이주승 완도군청 학예연구사▶이창억 울산과학대 교수(해양조선학과)▶정준영 전 삼성재팬 사장(고 이병철 회장 전 비서팀장)▶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조범환 서강대 박물관 교수(역사학)▶최장현 국토해양부 제2차관▶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황상석 뉴시스 광주전남취재본부장
신라 무역선- 교관선 항해술
평저선이냐 첨저선이냐?
평저선은 근해 운항용, 첨저선은 원양 무역용? 2가지 전체를 건조할 수도 있는 문제?
통일신라시대의 무역선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장보고의 무역선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를 ‘교관선’이라고 불렀다. 당시 해상왕 장보고가 탔던 교관선은 활발한 해상무역 활동을 전개했던 통일신라시대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
두목(杜牧)은 <번천문집> 제6권 장보고/정년전(張保皐/鄭年傳)에서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 신라로부터 서주(徐州)로 와서 무령군(武寧軍) 소장이 되었다”라 하였으며 “후에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가 왕을 찾아뵙고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전역에 걸쳐서 신라인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청해의 진을 얻는다면 적들이 사람을 잡아 서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겠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청해는 바닷길의 요충이다. 신라왕은 장보고에게 많은 사람을 주어서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고 신당서(新唐書)에 쓰고 있다.
장보고가 서주와 산동 해안지방에서 활동한 시기는 대체로 816년에서 826년 사이다. 위의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장보고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하여 왕명을 받들어 청해진의 대사(大使)가 되었다. 그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서남해를 지키면서 신라, 당, 일본 간의 해양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양무역 대상 지역은 신라의 청해진(완도)을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의 문등, 회강지구의 연수/양주, 강남 지구의 명주(지금의 영파), 대마도를 지나서 일본 규슈(九州)의 하카다(博多) 등이었다.
교관선의 특징과 추정근거
교관선은 갑판 위에 선실이 여러 개 있는 평저구조선(平底構造船) 형식으로 돛대를 여러 개(3개) 세운 선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추정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장보고의 무역선이 갑판 위에 선실을 구비한 누선형(樓船形)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원양 항해선이었던 만큼 비바람 등을 막고, 함께 내왕했던 하주나 상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선실을 구비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본래 누선은 중국에서 군선으로 발달한 배이다. 그런데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적마다 누선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신라인들도 당연히 누선형의 배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누선은 군용뿐 아니라 사신선이나 교역선 같은 배에도 점차 쓰이게 되었다.
둘째, 장보고가 활동하던 9세기는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당시 중국의 누선은 전형적인 반저선(半底船)으로서 현재 정크선의 모체가 된 사선(沙船)을 초기시대에 개발하여 국내에서는 조운선(漕運船)으로, 대외적으로는 원양무역선 또는 사신선 등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사선은 특히 양쯔강 이북의 북양에 적합한 선형인데, 선저가 평탄하므로 황해연안 등 수심이 얕은 지리적 조건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장보고 해상무역 항로 또한 이러한 지리적 조건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볼 때, 장보고가 중국배를 그대로 사용했든 절충식 선박을 만들어 사용했든 그 구조가 평저구조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신라의 해상 운송로를 유추해 보면 북항해로, 서해횡단해로, 남방횡단해로가 있었으며, 원양횡단은 대비한 대형 첨저선을 위주로 낙동강, 한강, 금강, 대동강 같은 경우는 평저선을 위주로 사용하였으며, 신라 선박 제조 기술의 우수성으로 많은 신라 조선기술자들이 상해 양자강에서 종사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셋째, 당시 문서를 보면 장보고는 탁월한 항해술을 체득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항해술은 천문기상지식과 선박조종술에 의해 좌우되었다. 특히 조종술은 돛의 구사능력에 달려 있었고, 그것은 곧 역풍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선은 일찍이 돛을 여러 개씩 달아 역풍을 잘 이용하였는데, 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그곳의 문물에 밝았던 장보고가 당연히 돛을 2개 이상 장착한 다외선을 사용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