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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 말에 조국의 부산항을 떠나 일주일 간의 항해를 거쳐 월남에 도착하여 청룡부대 제 3대대
11중대 3소대 M-60 경기관총 화기반에 배치를 받아 제 1 탄약수 임무를 맡고 1 개월 정도 근무 하다가
호남출신의 화기사수 윤수병이 귀국하니 부사수로 있던 마산출신의 206기 입대동기생인 홍해병이 화기
사수를 하는 동안 나는 부사수를 하다가 한달 뒤 쯤 홍해병이 귀국하여 1970년 3월 초 부터 내가 드디어
M-60 화기사수를 맡게 되었으니 이후 5월 말에 상부의 명을 받아 월남어 교육대에 전출되기까지 만 3
개월 동안 나는 M-60 경기관총 사수로써 우리 소대의 화력을 지원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M-60 경기관총을 어깨에 매고 행군하는 청룡부대 화기사수)
월남전의 특징은 언제나 먼저 적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베트남의 작전지역의 환경이 대부분 정글
이고 키가 큰 풀들이 무성한 초원지대가 널려있기에 눈에 안보이는 적을 먼저 발견해야 먼저 쏘고 이길 수 있다.
때로는 우리가 먼저 적을 발견하고 선제사격과 공격을 가하여 사살하는 경우도 있으나 때로는 반대로 우리가
적에게 먼저 노출되어 적들로 부터 공격을 받을 때도 있다.
(월남전 때 사용하던 M-60 경기관총 / 야외작전 시는 삼발이가 제거되며 이동 시 총열 앞의
양 거치대를 90도로 꺾어 그 왼쪽의 거치대를 오른 손으로 잡고 오른 쪽 어깨 위에 올려놓고
다녔다 / 실탄은 기본적으로 200발 탄띠를 화기에 물려놓고 다녔고 상황이 발생하여 급박히
뛰어 갈 때는 총열 덮개 맨 뒤에 왼쪽으로 젖혀져있는 손잡이를 잡고 뛰었다 / 발사속도는
분당 550발, 유효사거리 1100 메터, 전장 1077 m/m, 총열길이 560 m/m 총탄 7.62 m/m
x 51 NATO 탄으로써 미군의 보병용 M14 소총탄 사용/ 제작사 미국의 SACO Defence 사)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적으로부터의 선제 공격의 양상은 일단 우리를 향해 몇발의 스나이핑을 날린 다음 우리의
대응 상태에 따라 다음의 공격을 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이해하게 된 것은 소총만을 소지하고
다니는 적들이 바로 이 M-60 기관총을 두려워하여 우리를 향해 선제사격을 가해보고는 이 M-60 사수가 등장
하여 M-60 총탄이 비오듯 쏟아내면 도주하기 위한 시험용의 총탄이었으니 만일에 그들의 갑작스런 선제공격에
이 M-60 이 없는 상태로 우리가 당황하여 전세가 무너지면 그들은 틀림없이 다음의 제 2 차 공세로 나올 것이
뻔하고 여기에도 밀리면 자칫 우리의 전멸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 예를 들어보면 내가 이 M-60 의 제 1 탄약수로 임무를 수행하던 1970년 1 - 2 월경, 우리 3소대가 주간작전을
수행하던 중 정글 속의 소로길을 따라 행군하고 있었는데 진군방향의 왼쪽이 언덕인 지형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잠시 후 언덕 위에서 적들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탄약수 시절 작전 나가서 찍은 사진은 없다 1971년 10월 초 월남전에서 귀국하자마자
제대후 집에서 탄약수 시절의 모습을 그렸던 그림을 37년이 지나 찾았는데 그림이 파손되어
머리 부분과 군화부분은 다시 그려 복원하였기에 그림의 몸통부분과 머리,군화부분에
경계선이 있고 그림의 배경색상도 다르다/ 당시 작전을 마치고 중대 방석으로 귀환하는
그림을 그렸던 것인데 양 어깨에 M-60 실탄통(각 400발)을 메었고 중대방석으로 들어
오면 먹으려고 작전지역에서 딴 바나나를 들고 행군하는 모습을 그렸다 )
적들이 사격하는 위치가 언덕이라 그들은 유리하고 우리는 그들 아래 있으니 당연히 불리하다 그들이 지형의
유리함을 이용하여 아마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어 우리에게 기습을 가한 것인데 그들의 사격지점은 소대의
가운데 위치한 M-60 화기반을 목표로 사격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소속된 화기반 주위에 천둥치는 듯한 적들의
AK-47 소총사격소리가 들리며 저들의 스나이핑이 사정없이 꽂힌다.
소대원 전원이 급히 은폐하여 그들을 향하여 사격을 하기 시작했는데 화기사수 윤수병이 부사수 홍해병의 도움을
받아 엎드려쏴 자세로 그들을 향해 거침없이 M-60 사격을 가한다. 당시 제 1 탄약수였던 나도 메고 다니던 M-60
탄통을 부사수였던 홍해병에게 인계하고 내가 소지한 M-16 소총으로 적들이 숨어있는 위치로 수백발의 사격을
가했는데 M-60의 무차별적, 무제한적인 사격이 이어지자 스나이핑은 그치고 적들은 패퇴해 물러갔다.
(M-60 경기관총의 엎드려 쏴 자세)
이 과정에서 소총분대의 선임수병인 천수병이 응사 중에 날아온 적의 스나이핑을 맞고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
는데 다행히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의 큰 중상은 아니었고 매드백 헬기에 후송되었다. 소총탄이 관통되어 피가
흐르는 허벅지에 압박붕대를 덕지덕지 붙인채 다낭에서 날아오는 메드백 헬기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그를 잊을 수가 없다.
(다낭에서 날아오는 미해병대 매드백 헬기에 후송되어가는 해병전우)
그들의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적들은 가장 먼저 M-60 사수를 저격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M-60의 엄청난 사격이 자기들에게 가해지자 도주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예를 볼 때 M-60 화기사수는 작전시
소총수들 보다는 적들의 저격을 받아 전사할 위험도가 매우 높았으나 경기관총 M-60 의 역활은 이 같이 소대의
공격이나 방어에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적의 집중공격을 받을 때 우리 소총수들의 M-16 소총만으로는 이미 우리를 발견하고 숨어서 집중적으로 우리를
향해 막강한 화력으로 쏘아대는 저들의 AK-47 소총의 탄막을 대항 할 수 없다. 실험에서 밝혀졌는데 적들이 소지
한 개인화기인 AK-47 소총은 우리가 소지했던 M-16 소총 보다도 관통력이 훨씬 강한 소총(예를 들어 세멘트 블럭
을 적들의 AK-47 은 관통하고 우리의 M-16은 박히는 성능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AK-47은 총열 내부가 4조 회전,
M-16 은 6조 회전이므로 총알의 회전력은 M-16 이 훨씬 커서 일단 몸에 맞으면 살상피해는 M-16 이 훨씬 더 컸다)
이었고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총탄의 소리는 그 총탄들의 정면에서 듣게 되니 그야말로 천둥치는듯 하였다.
(M-60 사수 시절의 작전 나가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없다 1971년 10월 초 월남전에서 귀국하여 곧
제대후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았었는데 분실되어 2009년에 기억을 더듬어 엉성한 솜씨로 다시금
그려보았다 / 이 시절 작전지역을 기동하던 중에 적의 스나이핑이 쏟아지면 M-60 사수는 임무상 그
공격을 받은 지점으로 달려가서 적을 향한 제압사격을 해야 하는데 긴 바지 군복은 다리의 땀과 마찰
되어 빠른 주력을 방해하므로 그림과 같이 가위로 잘라 아메리칸 인디안 복식의 반바지를 만들어
입었다 / 이러한 복장불량은 한국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전쟁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 글 첫부분
, 맨 위의 흑백사진의 M-60 해병사수는 실탄을 화기에 다량 - 200발 정도 - 소지하고 다니며 어깨에
별도의 탄통은 메지 않았는데 내 경우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빨리 뛰기에 적합하도록 200발을 화기에
물리고 만일의 급박한 상황에서 부사수의 도움 없이도 200발을 더 사격할 수 있도록 200발 짜리 탄통
한박스를 꺼내어 어깨에 메고 다녔으니 조금 더 무거웠어도 마음이 저윽이 놓였다)
적은 우리를 이미 보았기에 숨어서 우리를 향해 쏘는데 우리는 아직 적을 발견치 못했으니 엄청 불리한 상황이다.
우리를 향해 우리의 정면에서 빗발치듯 쏟아지는 그들의 AK-47 소총의 총탄 소리는 우리의 고막을 찢어대듯 천둥
치는 소리로 우리 귀에 치고 들어오며 총탄이 우박 쏟아지듯 함께 날아온다.
이러한 경우 우리 소총수들은 일단 그 자리에 재빨리 엎드려 은폐를 가한다. 그러나 M-60 경기관총 화기사수
에게는 은폐라는 것이 아예 없다. 일렬종대로 행군하는 소대의 가운데 위치했던 나는 이런 경우, 그들의 선제공격
을 제압하기 위해 M-60을 쥐고 노도와 같이 적의 공격지점으로 달려가야 한다.
(작전지역에서 기동 중에 적들의 스나이핑이 쏟아지면 함께 기동하던 대원들은 일단 몸을 낮추어
엎드리므로써 은폐를 가하나 M-60 사수에게는 은폐라는 것이 존재치 않는다. 적들의 스나이핑이
쏟아지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와 사명 감에 질풍 같이 그들의 공격지점으로 달려간 후 대항
위치를 급히 잡아 적들을 향하여 사정없이 M-60 사격을 가하여 그들에게 제압사격을 가했는데
월남전에서 귀국, 제대 후 38년만에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는 이 그림을 그리고 보니 감회가 깊다.
이 그림에서 뒤따라 뛰어오는 오는 부사수와 제 1 탄약수, 제 2 탄약수들의 그림은 생략하였다)
경기관총 M-60 은 분당 550발, 즉 초당 10발 전후의 막대한 양의 7.62 m/m 구경 실탄을 부사수, 제 1 탄약수,
제 2 탄약수의 도움을 받아 무제한적으로 쏟아부을 수 있으므로 저들이 아무리 좋은 성능을 자랑하는 AK 소총
여러 정으로 협공하여 쏘아대더라도 막강한 화력을 가진 M-60 화기의 대항마가 될 수 없다.
M-60 화기사수인 나는 우리 소대가 적의 선제공격을 받아 적들이 쏘아대는 AK 소총 소리가 고막을 째듯 터지자
마자 선제공격을 받은 위치가 소대의 앞이던 뒤던 어깨에 메고 운반하고 다니는 M-60 을 번개같이 어깨에서 내려
M-60 의 상부에 있는 손잡이를 검어쥐고 스나이핑이 날아오는 위치로 질풍같이 달린다 부사수 탄약수들이 숨가
쁘게 따라온다.
이어 적당한 위치를 급박하게 잡고 감지된 스나이핑이 날아오는 위치로 제압사격을 가한다. 죽고 사는 것에 대한
관념은 이미 살아진 상태이다. 부사수는 비오듯 퍼붓는 M-60 실탄이 화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실탄을 장전
해주며 사격시 실탄이 날아가는 방향을 확인하며 탄약수들은 양어깨에 메고 다니는 M-60 실탄통을 내려 부사수
옆에서 실탄이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실탄을 공급한다.
내가 사수로써 소지한 탄알이 400발(200발은 M-60 기관총에 물려있고 200발은 탄통에 넣어 한쪽 어깨에 메고
다닌다). 내 바로 뒤의 소총을 소지한 부사수가 한쪽 어깨에 400발 짜리 강철탄통을 메고 다니고 그 뒤에 소총을
소지한 제 1 탄약수가 양쪽 어깨에 400 발 짜리 탄통 2개, 그 뒤에 역시 소총을 소지한 제 2 탄약수가 400발 짜리
탄통 2개를 소지하였으니 도합 2400 발의 총탄이 이 M-60 경기관총에 따라 다닌다.
이와같이 막대한 양의 탄막이 적들이 숨어 있다고 판단되는 위치로 소나기 뿌려지듯 연속적으로 뿌려지면 적들은
도주를 해버리고 그들의 스나이핑이 그치니 은폐했던 소총수 전우들이 M-60의 화력지원을 받는 상태에서 함께
도주하는 적들의 위치로 함께 사격을 가한다.
(적을 향하여 M-60 사격을 가하는 동안 사수인 나에게 이미 생사감각은 없다 당시 M-60 사수로써 적을 향한
분노에 찬 기세는 엎드려쏴 자세도 거부한채 몸을 낮춘 서서쏴 자세로 우리를 향해 숨어 스나이핑을 날리는
적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였으나 죽고 사는 것이 하늘에 달렸는가 ...
이같이 살아돌아온 것이 꿈만 같기도 하다 )
M-60 경기관총 사수를 하는 동안 우리소대에 소총수로 전입해온 월남전 신병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나이가 군에
들어오기에는 다소 늦은 이십대 중후반으로써 무슨 사유인지 몰라도 해병대에 지원입대한 것이 아니고 육군이
입대영장을 받고 입대하듯이 해병대에 입대영장을 받고 입대한 후임 해병이었다.
당시 그와 같이 입대영장을 받고 해병대에 입대한 사병들이 해병대에 드물게 있었는데 그는 동작이 다소 느린
편이었고 우리 소대에 전입온 몇달 뒤 어느날 나와 같이 있던 시간에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왔다.
"김수병님은 어째 그리 잘 뛰십니까 총 소리만 났닥하믄 그 무거운 그 M-60을 들고 어째 그리 빠르게 뛰십니까
정말 잘도 뛰시데요"
나는 빙긋이 웃기만하고 대꾸는 안했다. 나는 그저 내 할일을 하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월남전 교육대로
전입 명령을 받기 전 까지 수개월동안 M-60 화기사수를 하면서 내게 주어진 임무에 생사감각 없이 최선을 다했던
시간은 내게 후회없이 싸웠던 기간이었다.
(M-60 경기관총의 측면도 / 2차대전시 독일의 우수했던 MG42 기관총을 모델로 개발하였다고
한다 / 1957년 1월에 미군에 정식으로 채택되었고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우정밀에서 계속
생산하고 있으며 월남전 당시 내가 사용했듯이 보병용으로도 사용했으나 미군들 보급용 헬기의
양옆에서 엄호사격용으로도 사용하였다 / 월남전 당시 내가 사용하였던 이 M-60 경기관총은
성능이 워낙이 우수하고 막강하여 AK-47 소총을 들고 다니던 베트콩과 월맹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그 이유는 적들이 소지한 AK-47 소총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30발 단위의 탄창을
갈아끼우는 번거로운 작업으로 인해 연속사격이 불가능하였고 사거리도 짧았으나 이 M-60은
탄띠 공급방식으로 수천발의 탄알을 무제한적으로 퍼부을 수 있었고 사거리도 길었으므로 이
M-60 기관총 한대로 일기당천의 힘을 발휘하였으니 적들이 우리를 향해 사격을 가하다가도
당시 사수였던 내가 이 M-60을 소지한채 질풍같이 달려가 그들을 향해 소나기 같은 사격을
퍼부어대면 그들이 겁을 먹고 달아나곤 하였던 것이 바로 M-60의 이 막강한 화력 때문이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나이로써 나라를 위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사나이로써 당연하다고 생각하였었다. 어린 시절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였고 그 분과 같이 훌륭한 해군제독이 되기를 희망하여 고교시절 부터 해군사관학교 입학을
준비하였으나 초등학교 1 학년 시절 걸린 축농증이 만성으로 되어 해사 입학시험 몇달 전에 치료를 해보았지만
당시 지금 보다 취약한 의료 수준으로 인해 치료를 잘 끝내지 못하여 마침내 해사입학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젊은 혈기는 비록 해사에 입학은 못했을지라도 무언가 나라를 위해 싸워보겠다고 마음 먹었던 웅지는 포기
가 안되었고 당시 시절이 월남전이 한창인 때라 나이가 차서 입대해야하는 육군을 기다릴 수 없고 만 17세 이상
이면 입대가 가능한 해병대에 입대하여 월남전에 참전하여 꼭 싸워보겠다고 나 자신을 재촉하였으니 고교를 졸업
한 그해 1967년 3월에 고향의 인하공과대학에 입학하자 마자 고향 인천의 해병대 모병부대에 달려가 입대지원서를
쓰고 입대를 지원했는데 그때가 해병대 기수로 아마도 188기 쯤 되는 때였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월남전이 한창인 때임에도 불구하고 입대하면 자동으로 파월되는 해병대에 입대하고자
지원들을 하고 있었는데 10명 씩 한줄로 나란히 세워 각종 체력 테스트를 한 바 남들 보다 뒤지지 않는 체력을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입대지원에서 낙방을 하였다.
입학했던 공과대학에 들어가려고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하여 합격하였건만 해병대는 유명대학 보다 입학(?)하기
가 더 어렵다. 대학을 일년 반 다니다가 해병대에 입대하고자 일반휴학을 하고 1968년 10월 가을에 해병대 206기
로 다시 지원할 때는 또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지원서를 제출하고 체력 검정을 받은 후 모병관을 찾아가
뵈었다 해병대에 입대하려고 휴학까지 했는데 또 떨어지면 안된다 하는 강박관념이 나로 하여금 당돌하게도 모병
관을 찾아뵙도록 한 것 같다.
모병관께서 찾아온 나에게 몇가지 대화 끝에 나의 학력을 묻는다 대학재학 중이라고 대답드렸더니 나의 지원서를
찾아 지원서에 기록된 모공과대학 재학중이라고 기록된 나의 학력을 확인하시더니 좀 이상한 대답을 하시는데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해병대에 입대하려는 사람은 해병대가 잘 안받아준다고 하신다.
작년이나 올해나 나는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입대하면 자동으로 입대휴학처리가 되는 것을 그 분이 모를리가 없
을텐데 내가 대학을 중퇴하고 지원입대하는 것이 아니니 꼭 합격시켜달라고 간청을 드렸는데 그것이 통했는지는
모르나 드디어 해병대 입대가 허락되었다.
세월이 흘러 당시를 생각해 보니 당시 해병대에는 월남전도 수행 중이었고 해병대 군복무가 타군 보다 어렵다고
소문이 나서 대학 재학중인 청년들이 해병대 입대를 기피하던 시절이었으니 아마도 그 모병관께서는 대학 재학
중인 네가 해병대와 월남전 복무를 제대로 하겠는가 하는 노파심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쨌던 희망하던 대로 해병대에 입대도 되었고 원하던 대로 월남전에도 왔으니 사나이로써 주어진 임무에 충실
하여 해야할 일에 조금도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력을 다해 싸웠던 그 시절은 내게 이 땅에 태어난 사나이로써
마땅히 해야 할일을 하고 간다는 보람으로 와 닿는다.
나는 해병대 전역증에 기록된 귀절을 좋아한다. 전역증 앞면에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해병대 사령관 명의로
<귀하는 해병대에서 정직하고 충성스런 현역복무를 명예롭게 마쳤기에 이 증서를 수여함> 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나의 해병대 전역증의 전면 - 前面)
나는 이 명예증서의 기록된 말과 같이 해병대에서 정직하고 충성스런 복무를 잘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렇게 해보려고 나의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하여 후회없음을 감사히 여기며 조국과 해병대가 나에게 젊은
시절의 귀중한 한 때를 조국을 위하여 싸울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해병대를 같이 전역한 입대 동기생들을 수년 전에 서로가 찾아서 만나 보니 월남전 참전 중 당한 고엽제의 후유
증으로 인해 보상을 받은 수명의 동기생들이 나보고도 울산의 모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 서류를 제출하여
국가유공자로써 등록도 하고 보상을 받으라고 권한다. 얼마전 뉴스에도 보도가 되었는데 우리 청룡부대가 주둔
했던 쾅남성 일대는 월남전 당시 고엽제가 가장 많이 뿌려졌던 지역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나는 국가를 위해 젊음과 생명을 바쳐 싸운 것만으로 만족하며 그것을 통해 국가
로 부터 어떤 보상을 받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나아가 해병대 전역증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내 일생을 살면서 <인간으로써 하늘 아래 마땅히 해야할 일에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행한다면 이 보다 더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생각하며 그 같이 하늘 아래 옳바른 목적을 가지고
살도록 월남전을 통해 나의 갈길을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오직 감사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월남전을 통해 받은 나의 보상이며 나는 이러한 하늘의 보상만으로도 크게 만족하며 감사를 드린다.
월남전은 오래 전에 끝났고 M-60 사수의 임무도 월남전과 함께 오래 전에 끝났으나 그 때 주어진 임무에 대하여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행하고자 했던 그 정신과 자세는 지금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하여 하늘 아래 마땅히 해야
할 내 모든 할일에 언제나 그 같이 충실하고자 한다.
(1970년 말쯤에 찍은, 참으로 추억의 사진이다 내가 소총중대인 3대대 11중대를 만 5 개월만에 떠나 청룡여단본부
안에 있었던 청룡여단본부 월남어교육대에서 월남어 교육을 받고 그 후 청룡여단본부 민사참모실에 근무할 때 찍은
사진으로써 내가 3대대 11중대 3소대에서 M-60 경기관총 화기 사수로 근무할 때 당시 나의 부사수로써 함께 전우애
를 불태우며 적과 싸웠던 후임자 박해봉 해병이 이제 월남근무 일년이 다 되어 귀국준비를 한다며 청룡여단본부에
있는 PX 에 물건을 사러 외출나왔다가 나를 찾아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 나는 맨 왼쪽에 있고 박해병은 가운데 서
있고 그 옆은 같은 11중대 3소대에서 소총수로 근무하던 해병이다 배경의 왼쪽 큰 건물이 당시 청룡여단본부 식당이다.
/ 박해병.... 그는 나의 소총중대 시절 내 부사수로 따라 다니며 고생도 많이 했다 적들의 총탄이 빗발치듯 우리에게
쏟아져 오면 나는 M-60 기관총을 들고 질풍 같이 적들에게 달려가 그들에게 사격을 퍼붓는 동안 소총을 소지한 그는
400 발짜리 탄통을 메고 숨이 턱에 닿도록 헐떡이며 나를 따라와 내가 쏘아대는 기관총탄이 떨어지기 전에 총탄을
재빨리 연결해주었고 때로는 내가 쏘아대는 총탄의 방향이 달아나는 적들의 방향에서 빗나가면 소나기 같이 쏘아대는
M-60 총탄 사격의 소음 가운데서 나에게 고함을 지르며 사격해야 할 방향을 수정해 주기도 했다. 모두가 이제는 시냇물
흐르듯 흘러가 버린 과거의 시간이나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그때의 모든 시간들을 추억한다)
첫댓글 용감했던 월남 파병을 감동 깊게 읽고 있습니다. 하늘이 내게준 사명-조국을 위해서 싸울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마음...사랑과 애국은 말로만 하는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저도 이제 기회가 주어진다면 교회서 봉사를 할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여러가지 기회를 주시면 정말 묵묵하게 행함으로 충성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활동 많이 부탁합니다. 훈풍님의 곧은 정신과 마음이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설은 잘 쇠셨는지요? 봉사라는 것은 좋은 것인데 옳바른 길에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늘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람보영화에서 그런 광경을 많이 봤는데 실전에서도 그렇군요. 어깨에 기관총과 탄통을 메고 뛰어 가고 사격하고 생명의 위협이 있는 전쟁터에서 만 할 수 있는 정신력 인것 같습니다. 람보 영화를 상상하며 훈풍님이 그린 그림과 글을 봅니다. 그당시 월남전을 눈에 보는 듯 실감이 나는군요. 총탄의 세례를 받으며 자신의 임무를 다 하고 귀국한 청룡부대원들에게, 국군 장병 아저씨들에게 엄숙한 마음으로 고개 숙입니다. 그 시대에는 바나나가 귀하던 때인데 님은 전쟁통에 간식으로 드셨군요. 맛 있었지요? 그건 부럽네요.ㅎㅎㅎ 좋은 날 되십시요.*^^
이 같이 당시의 파월장병들을 성원해주신 진솔 시인님 같은 분들에게 제가 오히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실전에 참전한 저로써는 람보 같은 엉터리 영화는 안보았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실베스타 스텔론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가공적인 장면을 많이 삽입했겠지요. 실제로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는 탄약을 연속적으로 공급을 해주어야 하므로 사수 혼자 절대로 싸우지 못하고 부사수와 두 사람의 탄약수의 도움을 받아야 제대로 싸울 수 있습니다. 영화에 그런 장면이 없을테니 그 람보 영화는 엉터리입니다.
그 당시 바나나는 정글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먹을 수도 있었으나 전투 중에는 그런 것에 눈길도 못돌렸고 그림의 저 바나나는 전투 상황이 끝나고 중대진지로 돌아올 때 중대 진지 근처에서 따온 것입니다. 보기는 흔해도 먹은 기억은 별로 없어요^^ 감사합니다^
명예증서가 정말 자랑스럽게 보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그 시절을 추억하며 지금도 감사하는 훈풍님의 글을 읽으며 주어진 상황속에서 책임을 다하는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작은 마음 이라는것을 배워 봅니다.고운 날 되십시요.
그렇습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꼭 전쟁터에서 싸워야만 하는것이 아니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진정 애국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과향기님께서도 오늘 충실한 하루를 보내시며 나라사랑에 힘쓰셨을줄 믿습니다. 좋은 답글 감사드리며 언제나 건강하시고활기찬 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