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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수도 서울
서울특별시(—特別市)는 대한민국 북서부에 있는 대한민국의 최대 도시이자 수도[2]이다. 1394년 조선 왕조의 정도(定都) 이래로 600년 이상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맡고 있다. 면적은 대한민국 전 국토의 0.6%에 불과하지만 대한민국 인구의 약 1/5, 한반도 인구의 약 1/7인 약 1000만 명이 살고 있어 인구밀도가 매우 높다. 도시의 중앙으로 한강이 지나며, 경기도와 인천광역시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동서간의 거리는 36.78km, 남북간의 거리는 30.3km이며, 그 넓이는 605.27km²이다.[3]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 2002년 FIFA 월드컵, G20 정상회의가 개최된 국제적인 대도시이다.
서울 문화관광 http://www.visitseoul.net/kr/index.do
경복궁(景福宮)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83&lang=kr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17356
경희궁[慶熙宮]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189&lang=kr
덕수궁(德壽宮)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45&lang=kr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성북구 성북동
2층 콘크리트 건물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서화를 비롯해 자기·불상·불구(佛具)·전적(典籍)·와당·전(벽돌) 등 많은 유물들이 있다. 대개의 박물관이 전시를 주된 사업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전시보다는 미술사 연구의 산실(産室)로서의 역할을 주로 한다.
연구소에서는 매년 2회에 걸쳐 논문집 《간송문화(澗松文華)》 발행과 함께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간송문화》는 1971년 창간되었고 발행된 책자로 《추사명품집(秋史名品集)》 《겸재명품집(謙齋名品集)》 등이 있다. 국보급의 문화재만도 1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 전통미술품을 주로 소장하고 있는 한국 최초의 민간박물관.
겸재정선기념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01&lang=kr
겸재정선기념관은 처음 회화와 전적류 등 소장품 총 51점의 유물로 시작했다. 그 가운데 <귀거래도>, <산수도>, <청하성읍도> 등 다섯 작품이 겸재의 것이고 나머지는 심사정, 김하종, 김창협 등 겸재파 화가들의 그림 및 저서다. 앞으로 겸재정선기념관은 겸재의 작품을 161점 보유한 간송미술관이나 123점 보유한 국립중앙박물관과 협력해 겸재 연구의 허브로 자리 잡고 겸재학회도 결성할 계획이다.
기념관이 자리한 강서구는 겸재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겸재가 65세부터 70세 때까지 5년간 지금의 강서구인 양천현령으로 재직했기 때문. 그는 강서구 일대를 중심으로 한강변의 명승지를 화폭에 주로 담았는데, 이 시기는 이미 완성된 진경산수화가 더욱 원숙해진 시기로 이곳에서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등의 기념비적인 역작을 남겼다.
경교장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188&lang=kr
경복궁(景福宮)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83&lang=kr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17356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그 이름의 길한 기운 덕일까 새 왕조는 영욕의 시간 가운데 무려 600년이나 이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7,000여 칸, 500여 동).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2010년 현재 1차 복원사업이 완료된 상태다.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23호.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입니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근정勤政’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습니다. 1394년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것은 조선 말기인 1867년(고종 4) 11월에 흥선대원군이 136년만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5칸·옆면 5칸 거물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건물이다. 중국에서도 거의 없다.
하도(河圖)는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에서 길이 8척이 넘는 용마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서 ≪주역≫의 팔괘(八卦)의 근원이 된 것이고, 낙서(洛書)는 하우씨(夏禹氏)의 9년 치수(治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등에 있었다는 글로서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기원이 된 것임. <도서관>
경복궁 조산(祖山 진산鎭山)인 삼각산(북한산)에서 주산(主山)인 북쪽 백악산(북악산)에 연결되며 동쪽 낙산(타락산)이 좌청룡(左靑龍), 서쪽 인왕산(서산)이 우백호(右白虎)에 해당되고, 목멱산(남산)은 안산(案山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에 해당한다. 이 내사산이 서울 분지를 이루고 있어 이 산들을 연결해 도성(경복궁)을 쌓았다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壽(수), 富(부), 康寧(강녕), 攸好德(유호덕), 考終命(고종명))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1873년 고종이 경복궁 중건을 마무리하면서 국가 재정이 아닌 내탕금(왕의 사비)을 들여 궁궐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짓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식하고 친정을 선언하였는데, 이 때문에 건청궁 건립은 고종이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풀이되기도 한다. 고종은 1884년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정무를 처리하였다.
고종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齎)는 전통 한옥이 아닌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집옥재 옆에는 전통 시계인 자격루 대신 서양식 시계탑이 들어섰다. 또 장안당 뒤쪽의 관문각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는데, 완전한 서양식 건물로 지어져 양관(洋官)이라고도 불렀다. 1887년에는 조선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궁정 설비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경회루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처마는 겹처마지붕이며, 용마루 끝에는 취두(鷲頭)가 설치되었고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이 설치되었다. 잡상이 설치되어 있는 건물로는 궁궐의 정전, 왕의 침전, 궁궐의 정문, 도성의 성문, 궁궐안의 누정, 왕릉 왕비릉의 정자각, 종묘, 성균관, 동묘 등에 한정되며 민가, 사원, 서원, 지방향교 등에는 잡상을 설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경회루가 청나라 사신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청나라 사신들은 자신들을 위해 연회를 베푸는 장소의 처마마루 잡상의 수가 적으면 자신들을 홀대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생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경복궁 내에서 가장 많은 잡상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잡상(雜像)은 중국 송나라 시대부터 등장한 것으로 화재와 액운을 방지한다는 일종의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궁궐의 건축물들도 그 위상이나 중요도에 따라 잡상의 수가 달랐다. <사진 : 경회루의 11개 잡상>
경봉궁 내 교태전 옆 '어처구니' 를 만들지 않은 궁궐 집이 있습니다. 목수가 실수로 '잡상'을 만들지 않고 완공하였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궁궐이 타서 재만 남게 되어 "어처구니가 없어서 기가 막힌 재앙과 같다"하여 '어처구니 없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처구니 없다'라는 말의 유래입니다. 맷돌에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말합니다.
경회루의 네모난 바깥기둥과 원형으로 된 안쪽 기둥
경회루의 전체 기둥 중 절반인 24개는 바깥쪽에 세워지고 나머지 24개는 안쪽에 세워져 있다. 경회루 바깥 돌기둥이 네모지고 안쪽 기둥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드러내고 있다'
2층 기둥은 외진주만 사각기둥이고, 내진주는 모두 원기둥이다.
외진-내진-내내진 3겹으로 구성된 2층 평면의 제일 안인 내내진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이 세 칸을 둘러싼 여덟 기둥은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제일 안 세 칸을 둘러싼 다음 겹인 내진은 12칸인데 1년 12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16칸에 달린 64문짝은 64괘를 상징한다. 가장 바깥을 둘러싼 24칸은 1년 24절기와 24방(方)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는 당시 유가의 세계관을 건축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단종이 세조에게 전위한다는 교지와 함께 옥새를 넘겨준 곳도 경회루라고 한다.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정문으로,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방에서 함께 합방하였고, 그 이유는 오른쪽은 양, 즉 임금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 합니다.
교태전은 옆으로 전각이 더 이어져 있습니다. 동편으로 원길헌이, 서편으로는 함흥각이 있습니다. 이곳은 상궁, 나인들이 거처하며 중궁전의 시중을 들던 곳이라 추정된다
왕과 비의 침전은 용마루가 없습니다. 만약 용마루가 있다면 용은 왕을 상징하는데, 방바닥에 누운 왕을 지붕의 용마루가 올라타 누르는 격이 되기 때문에 무량갓(용마루가 없는 양식)으로 지은 것 입니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기 때문에 왕이 있는 곳은 왕 자신이 용마루가 되는 것이어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강녕전에 용마루고 없고, 교태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은 '용마루'가 하늘과 땅의 경계를 상징하고 있어 용마루를 두게 되면 왕 위에 또 다른 왕이 있는 형상이 되어 '용마루'를 없앴다.
경복궁 아미산[景福宮 峨嵋山] 태종 때 조성된 경복궁의 후원이며 경회루(慶會樓)를 건립할 때 연못을 만들기 위해 파낸 흙으로 만들었다. 장대석으로 4단의 석축을 쌓았으며 각 단에는 흙을 채우고 나무와 화초를 심어 조경했다. 또한 교태전의 굴뚝을 이곳에 설치하여 장식하였다. 아미산(峨嵋山)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산이며 도교와 불교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따라서 당시 교태전(交泰殿)에 거주하였던 왕비가 불교를 신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른 하나는 굴뚝이 건물 가까이에 있으면 연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또 굴뚝 그을음이 건물에 묻어날 수도 있다
경복궁 자경전[慈慶殿] 자경전은 경복궁의 침전이며 대왕대비가 거처하였던 대비전이다. 1865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건립되었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년)에 중건되었다. 자경전(慈慶殿)이라는 명칭은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덕궁에 자경전을 건립하면서 유래된 것이다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은 자경전 뒤꼍 담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여 놓았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와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였던 것이 첫째 목적이고 두번째는 굴뚝의 갯수도 여러개(교태전의 경우 5개로 기억함)로 이루어져 각 굴뚝마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경복궁 자선당[資善堂] 세종(世宗) 9년인 1427년 세자인 문종(文宗)의 거처로 건립되었으며 세자와 세자빈이 함께 거처하는 동궁(東宮)이었다. 동쪽에 있는 세자의 궁이라는 의미로 동궁전(東宮殿)이라고도 불렀으며 이때문에 세자를 동궁마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선당(資善堂)이라는 이름은 자비로운 성품을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회랑을 지나 우측에 위치하며 세자가 업무를 보는 비현각(丕顯閣)과 나란히 위치한다
경기감영터
경기관찰사가 민정·군정·사법 업무를 보고, 관하의 수령을 지휘·감독했던 관청이었던 경기감영은 1393년(태조 2) 설치되어 1896년(건양 원년) 수원으로 옮겨갈 때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경기감영은 기영(畿營)이라고도 했는데 소속 노비가 450명이었고, 감영의 유지비용을 대는 토지로 관둔전 20결, 늠전 20결, 공수전 15결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다.
경희궁[慶熙宮]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189&lang=kr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사늑약(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궁궐 내의 건물을 철거했고 이를 위해 땅의 지형도 바꿨다. 또한 경희궁 터의 8만2500㎡에는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전각들도 대부분 팔아버렸다. 초창기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화재(1829 순조 29년)로 소실되고 나머지 전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숭정전과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각각 옮겨졌다. 1988년 복원 작업에 착수한 후에야 몇몇 전각의 이전 작업이 추진됐다. 경희궁의 흥화문도 이때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과 똑같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한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동에 지으며 절문으로 흥화문을 옮겨 사용한 탓이다.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쓰이다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고희동 가옥[高羲東家屋] 종로구 원서동 16번지
고희동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해인 1918년 직접 설계해 지은 목조 개량 한옥이다. 그가 41년간 살았으며 후학들에게 서양화를 가르치면서 작품 창작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대지 540㎡에 연면적 250㎡ 규모로 ㄱ자형 구조를 이루는 4동의 단층집이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기도 했던 고희동이 일본에서 귀국하던 해인 1918년 서양 주거 문화와 일본 주거 문화의 장점을 조화시켜 한옥에 적용, 실용적인 주택으로 지은 이 가옥은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폐가 상태였던 것을 ㈜한샘에서 구입, 복원했다.
광장시장
광장시장은 1904년 고종 즉위 41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일본의 경제침략정책으로 남대문시장 경영권이 장악 당하자, 경제 국권회복의 취지에서 동대문 광장시장의 설립에 착안 김종한 외 3인의 발기인이 토지와 현금 100,000원으로 발족을 하였습니다. 1905년 7월 5일 시장의 명칭을 동대문시장으로 확정하고 1905년 7월5일 한성부의 시장개설 허가로 법원의 등기를 필하였다고 합니다.
2000년 2월에는 동대문 인근 현대적 상권이 다수 나타나면서 광장시장 상인들은 상인총연합회를 결성하여 사장활성화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종로광장전통시장'으로 명칭을 바꾸고 청계천 복원과 종로, 청계 관광특구 지정과 함께 '토리존'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시장 환경개선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으로 세계적인 시장으로까지 발돋음을 꾀하고 있습니다.
꼭두 박물관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420519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 이에 왕세자와 더불어 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 사건이 바로 아관파천이다.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기까지 만 1년 가까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며 정사를 돌봤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공간의 자취나 보존 상태보다는 그 역사성으로 인해 가치가 큰 공간이다.
국립고궁박물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16&lang=kr
국립극장
대한민국 대표 공연장답게 국립극단을 비롯해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의 4개 전속 단체가 특성에 맞게 한국 전통 예술과 세계화에 걸맞은 우수한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국립극단 <태>, 국립창극단 <청>, 국립무용단 <춤, 춘향>, 국립국악관현악단 <네 줄기 강물이 바다로 흐르네> 등의 작품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429&lang=kr
3개의 상설 전시관에서는 한민족생활사, 한국인의 일상, 한국인의 일생을 살펴볼 수 있다. 한민족생활사에서는 우리 삶의 터전을 일군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일상에서는 조선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한국인의 일생에서는 관혼상제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며 겪는 생애의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외 전통 복식이나 지역별 민속 문화, 전통 악기 등 우리나라 민속에 관해 더 폭넓게 다루는 기획전시전도 갖는다.
국립 4.19민주묘지 http://419.mpva.go.kr/
4ㆍ19민주혁명은 자유를 위해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과 국민들이 혼연 일체가 되어 불의를 물리치신 자유 민주정의에 대한 열망의 결과였고, 나아가 글로벌 시대에 세계사적 민주정신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 http://www.snmb.mil.kr/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330&lang=kr
국립현대미술관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273&lang=kr
국회의사당 http://www.assembly.go.kr/
여의도의 총 면적 80만평 중에서 국회의사당 부지는 10만평을 차지하고 있다. 건물면적은 2만 4636평으로,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로 단일 의사당 건물로는 동양에서 제일 크다.
국회의사당에는 앞쪽과 뒤쪽 각 8개와 양 옆 4개씩 모두 24개의 기둥이 있다. 기둥의 비율과 외형은 경복궁의 경회루 석주(石柱)를 본뜬 것으로 24개는 곧 24절기를 의미하고 우리나라 전국을 상징하는 전국 8도(道)에 맞춰 전면에 기둥 8개를 배치하도록 설계됐다. 국회의사당의 국회의원들이 1년 24절기 내내 항상 전국 8도의 국민들을 생각하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24개의 기둥 위에 얹힌 원형 돔 지붕은 각기 다른 의견들이 대화와 토론을 통해 원과 같이 하나의 결론으로 통합된다는 의회정치의 본질을 상징한다.
국회의사당 기둥에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고려시대 대표건물인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배흘림' 건축양식이 사용됐다.
해태상의 밑에는 포도주가 있는데 1975년에 양쪽 해태상에 36병씩 72병을 묻어 100년뒤에 개봉한다고 하였다
원래 해태는 암수가 없는 것인데 국회 해태상은 암수 구별해 만들었다고 한다. 국회 의사당 이라고 적힌 해태상(수컷), 국민의 문이 적힌 해태상(암컷)
화강암 팔각기둥 24개가 건물을 받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24절기를 뜻하며, 가운데에는 밑지름 64미터의 돔 형태의 지붕으로 덮여 있는데, 이것은 국민의 다양한 의견들이 찬반토론을 거쳐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는 의회민주정치의 본질을 상징한다고 한다.
금호미술관[錦湖美術館]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미술관.
1989년 관훈동에 개관하였다가 1996년 경복궁 동쪽 신축미술관으로 이전하였다. 지상 4층, 지하 3층이며 지하 1층과 2층에 3개 전시실이 있고 리사이트홀·세미나실·자료실·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이 중 지하 1층의 제1전시실은 주로 기성작가 초대전 및 기획전으로 쓰이고 제2전시실은 초대전 및 기획전, 제3전시실은 젊은작가들의 개인전 장소로 쓰인다.
길상사[吉祥寺] http://www.gilsangsa.or.kr/default.asp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333&lang=kr
고급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대원각을 송광사에 시주하여 탄생하였다.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였으며 1997년에 길상사로 사찰명을 바꾸어 창건하였다. 사찰 내의 일부 건물은 개보수하였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대원각 시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난지도[蘭芝島]
1977년 제방이 만들어진 후 그 동안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로 이용되었으나, 1993년 2월 완전히 폐쇄되어 생태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난지도 매립지 부지는 2020년까지 안정화 작업에 돌입했으며,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메탄가스 등은 인근 월드컵 공원과 경기장 시설의 열 에너지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월드컵 공원은 평화의공원,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천공원, 난지한강공원 등 5가지 테마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이는 여의도공원의 15배 규모로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비슷한 크기다.
남산공원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740&lang=kr
또한 국립중앙극장, 도서관, 기념관 등 다양한 볼거리도 많다. 시설의 규모가 말해주듯 남산공원을 하루 만에 모두 돌아보기는 힘들다. 테마를 잡고 떠나는 것이 좋다.
팔각정 1959년에 이승만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우남정을 지었다가 1960년 4.19의거 때 철폐되었으며 그 뒤 1968년 11월 11일 다시 건립되었다. 이 팔각정도 남산 정상에 세워져 있어 1천백만의 세계적인 도시인 서울시가 눈아래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N서울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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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서울타워는 외관만 바뀐 것이 아니다. 내부도 최첨단을 자랑한다. 로비(P0) 공간, 휴식과 전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시설 등 기존에 없던 공간들을 새롭게 선보였다.
남산 봉수대(목멱산(木覓山) 봉수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남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봉수란 근대적 통신수단이 발달되기 전까지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국가적 통신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제도이다.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모두 남산 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는데, 남산 봉수대는 중앙 봉수소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국의 경우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였다.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 중이면 다섯을 올리도록 하였다.
낙성대(落星垈) 별이 떨어진 자리
대각사(大覺寺)
대학로(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이곳은 옛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법과대학 시절부터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많이 모였던 곳으로, 1975년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관악산 아래로 이전함에 따라 그 자리에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되고 연극·영화·콘서트·뮤지컬 등의 문화예술 단체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문예진흥원 앞 도로광장에는 야외공연장과 풍류마당이 있어 각종 야외음악회·시낭송회·연극공연 등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덕수궁(德壽宮)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45&lang=kr
조선조의 무수한 역사적 사건이 덕수궁에서 일어났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 이른다. 덕수궁은 원래 그의 개인 저택이었다. 그가 죽은 지 104년이 지나 임진왜란(1592, 선조25)이 일어났다. 제14대 선조는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란했고 한성의 궁궐은 모조리 불타버렸다. 선조가 돌아와 머물 곳을 찾다가 월산대군의 집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이라 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궁궐의 역사가 시작됐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행궁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해 이전하면서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했다. 후에는 계모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서궁(西宮)이라 했다. 1623년에도 경운궁을 무대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인목대비와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仁祖)를 왕으로 추대한 인조반정이다. 인조 역시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왕이 된 지 8일이 지나 창덕궁으로 다시 이거했고 그 후로는 별궁으로 점점 노쇠해갔다. 1773년 영조 49년에 선조를 회상하며 사배례(四拜禮)를 치른 적이 있지만 궁궐로서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
덕수궁미술관
보통 덕수궁미술관은 석조전 서관을 말한다. 서관은 동관이 완공된 지 27년 뒤인 1937년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개관했다. 미술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물이다. 8·15광복 후에는 동관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다가 1998년 12월 이후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인 덕수궁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동관과 서관을 함께 아우르는 전시도 종종 진행되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도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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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에는 안창호 선생의 기념비, 어록비, 기념 조형물,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망우리 공동 묘지에 있던 선생의 묘소를 이장해 미국에서 옮겨온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와 합장해 두 분의 묘소를 함께 모셨다
독립공원[獨立公園]
건립 당시에는 감방 480평,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으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국에 있는 8개 감옥의 총수용인원이 300명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어 있던 이곳은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구치소 위치로는 적당하지 않아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이때 서울시가 법무부로부터 이곳을 매입하여 1988년 조성공사를 시작하였고, 1992년 8월 15일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이하여 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독립문[獨立門]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떠서 서재필(徐載弼)이 스케치한 것을 근거로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하였다. 공역(工役)은 건축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고 노역(勞役)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고용하였다. 공사비는 주로 기부금으로 충당, 1897년에 준공하였다.
재료는 주로 화강암을 사용하였는데, 구조는 중앙에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문 앞에는 구(舊)영은문의 주초(柱礎)였던 두 돌기둥이 있다. 1979년 성산대로를 개설하면서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 복원하고 예전자리에는 독립문지라는 표지판을 묻어놓았다.
롯데월드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614&lang=kr
은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와 문화유산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탄생된 역사, 문화의 산 교육장이다. 롯데월드 민속박물관은 단순하게 유물을 전시해 오던 종래의 박물관과는 달리 디오라마 연출, 각종 모형과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전시와 함께 매직비전 상영관, 상설 공연장을 마련하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특별한 전문지식을 갖지 않아도 친근감을 갖고 보다 재미있고,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모화관[慕華館]
청일전쟁 뒤 폐지되었으며, 1896년(건양 1) 독립협회(獨立協會)에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이를 독립관이라 고쳐,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사진 :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옛 모화관 건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복원된 독립관 건물>
독립관[獨立館]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은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모화관의 명칭을 고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독립관으로 명명하고, 그 건물을 독립협회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모화관 옆에 세운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는데, 이것 역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명동성당
몽촌토성 http://www.visitseoul.net/kr/gallery/gallery.do?_method=movie&art_id=513&lang=kr
특히 인근의 풍납토성과 더불어 한성 백제시대 위례성으로 짐작되기도 했다. 근래 들어서는 풍납토성이 위례성이요, 몽촌토성은 그 외성이라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그 기능을 수행했으며, 이후 고구려의 영역에 속했다. 475년 이후에는 토성의 용도를 상실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몽촌역사관은 2천년 고도의 역사적 중심지 서울의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고대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 박물관이다. 사적 제297호로 지정된 몽촌토성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2년 1월 개관하여 전시와 역사교육 학습장으로서 몽촌역사관과 움집터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박종화 가옥[朴鐘和家屋]
백범김구기념관 용산구 효창동 255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 1위(2009년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등의 설문조사 결과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범은 1946년 6월 26일 안두희가 쏜 세 발의 총알에 목숨을 잃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경교장은 이런 백범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장소다. 일제강점기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진 일본식 화강암 석조 건물로 본래 금광재벌 최창학의 집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에는 백범의 직무실로 쓰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도 개최한 유서 깊은 장소다. 1949년 백범이 서거한 후에는 다시 최창학의 집으로, 타이완 대사관저로, 미군특수부대의 거처로도 쓰였다. 옛 이름은 죽첨장이라 했으나 김구 선생이 집무실로 이용한 후에는 경교장이라 불렀다. 1968년 고려병원이 인수한 후에는 지금까지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1년 비로소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그 중요성이 재평가되어 2005년 국가 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되었다. 백범기념실도 생겨나 조금은 유적다운 모습을 갖추게 됐지만 2층 기념실을 제외하고는 지금도 강북삼성병원의 일부로 사용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벽제관[碧蹄館]
그리하여 벽제역의 객사를 곧 벽제관이라고 불렀음. 벽제관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세종 때 크게 개축하였음. 한편 벽제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거느린 명 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치열한 싸움을 벌여 명 나라 군대가 크게 패한 격전지로도 유명함.
구파발[舊把撥洞] 은평구 구파발동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시대 벽제관으로 통하는 길목에 파발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파발[擺撥] 조선 전기 이후 변경(邊境)의 군사정세를 중앙에 신속히 전달하고, 중앙의 시달사항을 변경에 전달하기 위해 설치한 특수 통신망.
파발은 말을 사용하여 보다 신속히 전달하는 기발(騎撥)과 사람의 도보에 의해서 전달하는 보발(步撥)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인 1597년(선조 30)부터 조직하여 시행되었다. 그리고 기발에는 25리마다, 보발에는 60리마다 각각 참(站:撥所·停留所)이 설치되어 파발이 교대하였는데, 기발의 참에는 발장(撥將) 1명과 군정(軍丁) 5명, 색리(色吏) 1명 및 말 5필을, 보발의 참에는 발장 1명과 군정 2명을 두어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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