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읍상리 387-1 소재. 1930년 3월 20일 풍수원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천지의 모후.
횡성 지역에는 183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에는 강원도에서 가장 교세가 성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체포되어 교우촌은 와해되었고, 다시 공소가 설정된 1880년대 이후에는 풍수원 본당의 관할하에 있다가 1930년 3월 풍수원 본당 2대 주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 의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정규하 신부는 횡성 본당을 위해 대지와 건물을 마련해 두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신부는 그 건물을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본당 설정 당시 신자수는 약 400명이었고, 관할 지역은 횡성군의 횡성면 · 우천면 · 둔내면 · 청일면 · 갑천면 · 공근면과 서원면의 금대리 · 유현 3리, 원주군의 고산리 · 영산리였으며, 관할 공소는 모두 17개소였다. 설립 당시부터 횡성 본당은 비교적 넓은 지역을 담당하였는데, 현재도 교구 내에서 가장 많은 공소를 관할하며 공소 사목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초대 주임 양덕환 신부는 본당 설립 3년 후인 1933년 5월 현 사제관 자리의 초가집을 매입하여 성당으로 개축하고, 4년 과정의 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2대 주임 이보환(李普煥) 요셉 신부도 1933년 11월 곤의골 공소에 야학을 설치하여 교육을 통한 전교 활동을 추진해 나갔다. 이후 1939년 4월 춘천 지목구가 신설되면서 서울 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로 횡성 본당의 소속이 바뀌고 1939년 8월부터는 골롬반 외방선교회에서 강원도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자, 골롬반회가 교구에서 철수하는 1980년대 초반까지는 거의 외국인 신부들이 횡성 본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하게 되었다.
1948년 횡성 본당은 성당 옆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였고, 그해 4월에는 마옥 공소 강당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1950년에는 우천 공소를 신설하였으며, 1953년에는 성당 뒷산을 매입하였다. 그해 5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박양운(朴養雲) 바오로 신부와 선종완(宣鐘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7, 8대 주임 신부로 잠시 사목 활동을 하였으나, 1954년 11월부터 다시 골롬반회 소속 신부들이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중 맥마흔 신부는 1955년 4월에 미군의 도움을 받아 한국 전쟁 때 파손되었던 성당을 신축하기 시작하여 그해 가을 현재의 성당을 완공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아울러 이 해에는 정금과 안흥 공소의 강당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으며, 1958년 9월에는 청일 공소, 1962년 9월에는 둔내 · 추동 공소, 1965년에는 가곡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59년에는 횡성 본당의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65년에는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6개의 쁘레시디움으로 구성된 ‘종도의 모후’ 꾸리아를 설립하고, 공근 공소도 신설하였다.
1969년 교구 간 관할 구역 조정으로 횡성 본당은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로 소속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되었다. 1970년 4월에는 본당 사목회를 조직하여 본당 운영의 체계화를 꾀하였고, 1972년에는 전교 회장의 사택을 매각하여 횡성읍 내지리에 교회 묘지(7,347평)를 조성하였다. 아울러 1976년에는 본당 사목회의 명칭을 사도직 협의회로 개칭하였으며, 12월에는 횡성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함과 동시에 공근 공소 강당을 신축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1980년 4월에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 수녀들이 둔내 공소에 진출하여 둔내 요셉 어린이집을 개원하였고, 1981년 8월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거행하는 한편, 한마당 잔치 행사를 펼쳐 본당 설정 60주년을 기념하였다. 이어 1992년에는 둔내 공소의 부지를 확장하였고, 1993년 9월에는 도곡 공소 강당을, 10월에는 둔내 공소의 어린이집을 신축하였다. 둔내 공소는 1994년 2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었는데, 이에 따라 둔내면, 안흥면, 강림면 전역과 현천 · 안흥 · 강림 공소를 둔내 본당으로 이관하였고, 1994년 10월에는 우천 공소 강당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6년 2월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철수하고 대신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가 들어와 전교 활동을 이어갔다.
2000년 1월에는 본당 설정 70주년을 맞이하여 교육 복지관 건축을 위한 헌금 봉헌 운동을 전개하였고, 10월에는 장례식장과 주방, 강당을 갖춘 교육 복지관을 준공하였다. 또한 대희년을 맞이하여 묵주 기도 백만 단(1,313,083단)을 봉헌하였고, 2002년 3월에는 성모유치원 보수 공사를 시행하였으며, 9월에는 성당 뒷동산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였다.
횡성 본당은 1970년대 가톨릭 농민회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농촌 본당으로서의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하였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자연 환경 보존과 생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무공해 작물과 유기농 재배법 등을 보급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젊은 층의 이농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청년 신자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본당 사목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본당에서는 청년 신자들에 대한 재교육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다. [출처 : 김가람,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2권, 2006년]
1955년 맥마흔 신부 때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5월 봉헌식을 거행한 횡성 성당은 폭 11.5m, 길이 38m, 높이 10.5m(종탑 18.5m), 건축면적 364㎡(110평)의 화강석 석조 건물이다. 6ㆍ25 전쟁 직후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감안해 서양 로마네스크 양식을 간략화시키고, 성당 가운데 종탑과 함께 주출입구를 배치했다. 원주교구 원동 주교좌성당(1954년 완공)보다 2년 늦게 건립된 횡성 성당은 종탑 위에 돔을 설치하고 외관을 석재로 마감한 점에서 원동 성당과 유사하다. 반면 원동 성당은 석재 표면을 매끄럽게 마감한 데 비해 횡성 성당은 석재 표면을 거칠게 다듬어 고풍스러운 멋을 더했다.
건축 당시 프랑스에서 수입한 종과 천장 상부 목조 트러스 구조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사각형 평면 위에 팔각형 공간을 설치한 뒤 그 위에 돔을 얹어 구성한 종탑이 매우 특징적이다. 내부 바닥은 마루이며, 1984년 제대 양측 창에 유리화를 설치했다. 건물 폭과 높이에 비해 길이가 매우 길며, 천장이 가운데는 평평하고 양쪽으로 경사진 형태를 하고 있다. 부속 건물에는 변화가 많았으나 본당은 외형이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이유로 횡성 성당은 2008년 2월 2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71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평화신문, 2008년 4월 6일, 남정률 기자,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