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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역사·문화전쟁 어떻게 이길 것인가
21일 오후2시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제2회 미디어 리터러시 세미나 주제 발표 전문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입력 2024-11-21 14:48:37
▲ 김규나 소설가 Ⓒ스카이데일리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에서 생계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글을 쓰는 동기를 네 가지(순전한 이기심·미학적 열정·역사적 충동·정치적 목적)로 나누었다. 그중, 우리나라 모든 예술 문화 부문, 특히 한국 문단에서 가장 큰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의도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정치적 목적에 있다.
현재 한국 문단의 이념적 뿌리는 마르크스 공산주의에서 시작한 정치적 올바름이라 불리는 정치적PC이고 가깝게는 반대한민국·북한 추종·친북 정서다. 북한과 김일성에 대해 호의를 갖지 않은 작가가 없고,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에게 적의를 갖지 않은 작가도 본 적 없다.
한국 문단, 즉 작가단체 ‘한국작가회의’를 움직이는 실천적 뿌리는 사르트르의 ‘참여문학’ 정신이다. 사상가이자 소설가이며 프랑스 최고 지성으로 알려진 사르트르는 맹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의 사상적 스승으로 알려진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마르크스 추종자로서 ‘진보적 폭력’, 즉 미래 건설을 위해 필요한 폭력은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의 폭력 시위 모의한 ‘작가회의’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의 사상을 더 강력하게 계승하며 ‘문학이란 사회의 변혁을 가져오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참여문학을 주창했다. 사르트르의 참여문학, 이것이 바로 한국 문단을 광장으로 뛰어나가게 한 힘의 원천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많은 폭력 시위를 모의하고 참여한 것도 ‘작가회의’다. 사르트르는 또한 ‘6·25전쟁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한국의 도발로 벌어진 전쟁’이라고 주장했는데 한국 문단은 그의 이러한 주장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문단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한국 출판계 최고 권력을 가진 창비(창작과비평)의 실소유주, 좌파 원탁회의의 두뇌라고 알려진 백낙청이다. 창비에서 출간되는 ‘세계문학’ 발간사에는 ‘물질만능과 승자독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면서 현대사회는 더 황폐해지고 삶의 질은 크게 훼손되었다’며 자유시장경제와 현대 문명을 퇴치해야 할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창비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출판사는 창비와 백낙청이 추구하는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들은 세계적인 고전문학을 좌파적 시각·사회주의적 세계관으로 번역한다.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조차 독재정권을 비판한 작품이라는 해설서를 붙여 공산주의 사회를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 ‘배급’이라고 옮겨야 할 단어를 ‘분배’라고 번역해 독자에게 혼란을 준 민음사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뒤에는 사회주의 혁명은 이상적이지만 권력자가 부패해서 실패했을 뿐이라는 식의 해석이 붙어 있다.
실패의 원인은 타락한 독재욕이라는 것인데 ‘독재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한국인의 머리에는 독재자는 곧 이승만·박정희로 연결되도록 세뇌되어 왔다. 그렇게 얼마나 자주 독재정권을 운운하며 스탈린 공산주의 비판 문학들이 독재자 비판으로 둔갑, 유명인들의 신문 사설마다, 지성인들 칼럼마다 인용되어 왔던가.
최인훈 ‘광장’부터 정유정 ‘7년의 밤’까지
더 큰 문제는 한국문학의 흐름이 대중 독자의 사고를 어떻게 움직여 왔느냐 하는 것이다. 1960년 최인훈 ‘광장’이 발표되었다.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받고 연좌제로 미래가 막혀버린 이명준은 새로운 희망을 찾아 월북하게 되고 은혜를 만나 사랑도 하지만 결국 더 큰 환멸을 느끼다가 6·25를 맞이한다. 공산당 장교였다가 포로가 된 그는 남한에서 살래, 북한에서 살래,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그는 중립국 행을 택한다. 그러나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이 소설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북한도 문제가 있지만 남한이 더 나쁘잖아, 남한에 동조하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겠다며 남북 분단 문제를 본격적으로 왜곡하기 시작한 초창기 대표적인 소설이다. 최인훈은 2018년에 사망하기 전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재의 판결문이 ‘우리 현대사 최고의 명문장’이라고 평가했다.
1978년에 나온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산업화·자본주의는 악이라고 문학적으로 규정하는 데 성공한 소설이다. 국민 모두가 도시로 나와 공장에서 가발 만들고 신발 만들고 남의 나라 전쟁터와 사막과 광산을 뛰어다닐 때였다. 그러니 오죽 고생이 많았을까. 그래도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에 의한 빈부 차, 그로 인해 소외된 빈민층에 대한 연민을 확대시키고 자본주의는 악이다, 물질주의는 혐오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을 지른 소설이 바로 난쏘공이다.
1986년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12·12 그리고 5·18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가 독재정권 프레임을 넘어 민주화 투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던 때였다. 그 가운데 ‘태백산맥’은 반공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던 대한민국의 사고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공산당은 나빠’에서 ‘전쟁이 나쁜 거야’로, ‘공산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형제끼리 싸워야 하는 전쟁이 슬픈 거야’라고 사고의 방향을 바꿔 놓은 것이다. 같은 민족이라는 주장으로 친북 정서를 확장시키고 한 핏줄을 갈라놓았다며 반미감정을 보편화시켰으며, 반공에서 반전으로 사고 체계를 바꿔놓으며 반공사상을 낡고 부끄러운 것으로 폐기 처분 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작가는 ‘아리랑’으로 반일 감정을, ‘한강’으로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지성인의 상식이라는 틀을 탄탄히 구축했다.
1990년대 한국소설은 과거는 무자비한 독재 시대, 현재는 민주화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한민국을 집요하게 부정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였다고 끌어내린다. 산업화에 소외된 개인과 피해의식을 키우는 동시에 은희경·전경린·신경숙·공지영 등 여성 작가의 소설들이 나오면서 △가부장제 비판 △전통 가정 파괴 △페미니즘이 본격 태동한다.
2000년대는 황병승 시인의 ‘여장 남자 시쿠코’가 상징하듯 신선하다는 풍조 위에 기존의 전통을 본격적으로 파괴하는 시기였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처음부터 대놓고 들여온 건 아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기본 정·기존 문·보편적 개념·긍정적 가치관 등을 천천히 파괴해 갔다. 그즈음부터 소설 문법의 해체 작업도 본격화되었다. 서사가 있고 문법이 맞고 논리 정연한 인과를 통해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소설은 한물간 구시대적 작법이라고 문단에서 철저히 배척되었다.
인과와 기승전결을 가진 스토리를 배재하고, 문법과 서사를 파괴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 거짓과 진실을 뒤섞어 놓은 상태에서 오직 부정적 감성만을 채워 넣은 한국문학이 가져온 가장 큰 해악은 개인의 사고 능력 상실이다. 문법이 없으니 술술 읽히지 않고, 인과나 기승전결이 없으니 추리할 수 없으며, 스토리가 없으니 재미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소설이나마 읽었던 독자의 수를 현저히 감소시켰고, 책을 읽는다 하는 독자들조차 자기 생각 없이 작가의 주장과 평단의 해설을 따라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2010년대에는 철거민의 고통을 그린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정유정의 ‘7년의 밤’이나 ‘28’처럼 사회 불안·공포·분노를 집요하게 이야기하는 소설들이 주목받았다. ‘너, 무섭지? 화나지? 널 그렇게 만든 게 자본주의야. 독재 보수정권이야. 그러니 분노해. 우리 함께 부숴버리자!’ 라며 피해자의 분노 정서를 키웠고 세월호·촛불 집회의 불씨를 지폈다.
분노와 불안에 장악된 한국소설
분노와 불안으로 장악된 한국소설을 꾸준히 읽어왔든 읽지 않게 되었든, 그 결과는 참담하다. 독자는 소설 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삶에 대한 이해와 사고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 결과 문학을 통해 개인이 저마다 세울 수 있었던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졌고,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포용, 사회적 규범의 중요성과 거짓을 혐오하고 진실을 존중하는 마인드를 모두 상실했다.
‘김일성이 을지문덕·세종대왕보다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한 황석영은 1989년부터 1991년 사이에 북한으로 밀입국하며 김일성을 일곱 차례나 만나 25만 달러의 격려금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으나 김대중정부 때 특별 사면되었다.
공지영은 20명을 연쇄 살인한 유영철이 반젤리스의 ‘콜럼버스’를 틀어놓고 시체를 훼손했다며 그가 예술적 재능이 무척 뛰어난 사람이라고 호감을 드러낸 글을 쓰기도 했다.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트통령(트위터상에서 대통령처럼 큰 인기가 있는 사람)이라 불리던 이외수 모두 좌파 세계관을 가진 작가들이다. 김진명의 대표작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반미·반일을 기반으로 남과 북이 힘을 합쳐 핵을 개발한다는 이야기다.
좌·우 구분 없이 많은 독자가 좋아하는 김훈은 세월호 희망 버스를 추진했고 촛불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말했던 작가다.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은 배고픈 시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깎아내렸는데 그가 가장 존경한다는 작가는 조정래와 황석영이다. 작가와 작품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작품은 곧 그 작가의 정신세계·이념·가치관을 그대로 담아낸다. 글 속에 99가지 좋은 이야길 했어도 한 문장 안에 반대한민국 정서나 사회주의·공산주의 시각을 넣는다면 그건 맑은 물에 먹물 한 방울, 건강한 몸에 독극물 한 방울의 효과를 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진보로 가장한 종북·좌파가 점령한 문단은 꾸준히 스타를 키운다. 가장 큰 힘을 가진 출판사는 물론 창비다. 그들이 처음 키운 스타가 신경숙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2011년에 맨아시아상을 받으며 백만 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창비가 외국에서 상을 받으면 대박이 난다는 걸 실감한 첫 사례였다. 그런데 2015년, 많은 작품에서 표절한 것이 드러나 ‘신도리코’라는 별명이 붙었다. 백낙청이 나서서 진화 작업을 했는데도 결국 스피커 역할에서 탈락했다.
그다음 키운 작가가 광주의 딸 한강이다. 2016년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는데 번역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본상을 받은 것처럼 대대적으로 언론홍보를 했다. 그해 맨부커상 수상자는 미국의 흑인 작가 폴 비티였다. 맨부커라는 이름이 붙은 상을 타자마자 한강은 바로 뉴욕타임즈에 글을 실어 ‘미국이 전쟁을 말하면 한국은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6·25는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 주변국의 대리전이다’라는 이상한 내용의 칼럼을 발표했다.
이후 한강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두 편의 소설을 썼다. △국가와 군대가 선량한 시민을 학살했다는 주장을 담은 소설 ‘소년이 온다’ △국가와 경찰이 선량한 제주 양민을 학살했다는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두 책 모두 문재인이 광고해 주었다. 그는 한강 외에도 △빨치산을 미화한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제주 4.3 사건을 다룬 현기영 ‘순이 삼촌’ △반일 정서를 담은 신한균 ‘신의 그릇’ △김성동 ‘국수’ △김훈의 ‘하얼빈’ △사회적 소수자·소외계층·페미니즘을 주로 다루는 김초엽의 ‘파괴자들’를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홍보해 주었다.
베스트셀러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베스트셀러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좋은 예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다. 이 책은 2016년에 출간되었는데 노회찬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던 문재인에게 선물하면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또 한 번 언론에 홍보하고 영화 개봉이 이어지자 결국 100만 부 판매를 넘어섰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 성인 1년 독서량은 3.9권이다. 이에 반해 일본 월평균 독서 권수는 6.1권. 미국은 6.6권이다. 우리나라 성인 둘 중 한 명은 일 년간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그나마 3.9권 속에 소설책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책을 사겠다고 서점이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을 섰다. 수상 직후 베스트셀러 1위부터 10위까지 한강의 책들이 점령했고 △‘채식주의자’는 696배 △‘소년이 온다’는 784배 △‘작별하지 않는다’는 3422배나 판매량이 늘었다. 소설가는 이 나라에 한강 한 명뿐이고, 책이라곤 한강 책밖에 모르는 기현상, 그 결과 일반 출판사는 다른 때보다 더 불황이라고 한다. 코미디 같은 현실이다.
작가 회의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추진하는 또 하나의 주요 사업은 친일 작가를 선정하고 퇴출하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을 제작해서 노천명·모윤숙·서정주·김동인·최남선·주요한 등을 친일작가 42인으로 선정, 문학사에서 축출하고 그 빈자리를 월북작가·북한 작가·친북 작가 등으로 채우고 있다.
특히 남한 작가 중에서는 200만 명을 죽여 사회혁명을 완성하자던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 전선) 활동을 하다 체포·수감되었던 김남주를 거의 신격화하다시피 하며 기념하고 있다.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는 제목만 들어도 어떤 작가인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이유로 과열된 한강 신드롬은 어제오늘 갑자기 벌어진 현상이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문학이 △페미니즘 △동성애 △백인 악마화와 같은 인종차별 △낙태 찬성 △기후변화 공포 △육식 금지 채식 권장 △전통 가족 해체 등 ‘정치적 PC’의 스피커가 된 지 오래다. 한국 문단도 일찍부터 그 선봉에 섰지만 여기에 ‘5·18’ ‘4·3’ ‘친북·종북’의 성역화 과제가 더해진다.
한국 문단·한국문학·한국 작가들은 좌파 이념에 매몰되어 있다. 자유·경쟁·전통가정·보수의 가치 등 기존 세계의 덕목과 전통 파괴를 목적으로 하며 정치적 도구로 정착된 것이다. 소설 문학, 그들이 원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 결과 한국문학은 재미와 감동을 상실했고 독자를 잃었다. 문학이 죽은 사회에선 자기개발서와 거짓말 가득한 정치인들의 회고록만 팔린다. 반일한다면서 일본 책은 더 열심히 번역해서 출판한다.
좌파 이념에 매몰된 한국문학
이 이야기를 수년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해왔다. 그때마다 나라가 무너지게 생겼는데 문학이 뭐가 중요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코앞의 이슈만 집중하는 사이 저쪽 진영은 국민 눈치 안 보고 수십 년, 장기전을 세우고 문화예술을 이용해 꾸준히 대한민국을 무너뜨려 왔다. 그리고 노벨문학상으로 최고 정점에 올라 책 읽지 않는 독자의 축하와 지지까지 받고 있다.
작가의 모든 활동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조지 오웰의 말은 옳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과 정치 선동에 앞장서는 것은 다르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깊이 독자의 의식과 우리 사회를 부패시켜 온 현재의 문학 권력은 스스로 정화할 수 없다.
독자는 어떤 작가가 어떻게 정치 선동을 하는지 알고 외면하고 비판해야 한다. 소수자·피해자 권력을 주장하며 세상을 뒤집자고 말하는 작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적 나팔수가 되는 작가 대신 어떤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소설, 인간의 척추를 꼿꼿이 세운 대견한 주인공을 그린 작품, 그러한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를 찾아 격려하고 성장시켜야 한다.
물론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나야 하고 좋은 작품을 써야 하겠지만 아무리 좋은 책을 써도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책을 내줄 출판사가 없다. 출간해도 판매할 길이 없다. 명예도 없고 생계도 막막한 진영에 어느 작가가 줄을 서겠는가.
오늘의 혼란과 붕괴는 언론과 정치판이 해 온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결과일 뿐이다. 이 모든 사태는 그들의 거짓을 사실로 오해하고 진실로 착각하고 그들의 주장을 선의와 정의로 알고 동조한 우리 보통 사람들의 슬픈 작품이다. 사회의 총체적 붕괴는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면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도덕과 윤리와 양심의 문제이며 정신과 영혼의 문제인 것이다. 그 뿌리는 물론 철학과 인문학의 부재, 아니 철학과 인문학을 다루는 지성인들의 조작과 사기이며 문학 또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눈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들이 문학으로 어떻게 세상을 파괴해 왔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옳은 소리를 내는 작가가 무릎 꿇지 않도록 해야 한다. 펜을 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길을 찾아야 문학이 더 이상 정치권력의 노예, 이념과 사상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 길을 만들었을 때 더 많은 작가가 거짓을 거짓이다, 진실을 진실이다, 외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람 본연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고 자신을 믿을 수 있으며 우리 사회도 바로 설 수 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