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산-백양사-강천사 코스를 계획하고 10.4.fri.pm9:30 정읍에 도착했어요.
여산 휴게소를 통과한 후 in 정읍을 하는데 가슴이 철렁철렁하더라고요.
제가 고1부터 고3까지 만 2년 동안 주말이면 직행버스를 타고 왔다가 일요일
오후에 반찬 꾸러미를 들고 들락거리던 곳입니다. 그때는 진입로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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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낯설었는데 지금은 '에게' 합니다. 장명동 산부인과 앞에 토네이도를
박아두고 장명 초등학교를 찾았지만 캄캄해서 도대체가 못 찾겠다 꾀꼬리입니다.
숙소를 정해놓고 농협이 보여서 보험료를 송금해줬어요. 중앙로는 날이 밝으면
가기로 하고 상동 쪽으로 길을 잡았어요. 아는 곳이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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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하기야 기억을 소환하려 와서 기억을 못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먹자골목이 롯데마트주변으로 새로 생겼습니다. 점포가
대부분 쌘 삥인데 비해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주위를 빙빙 돌다가 '짝 태와
왕노가리집'으로 최종 선택을 하고 맥주 2병(카스&TERRA)을 시켰어요,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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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 마니아고만 이 집 단골들은 초록색 맥주를 먹더라고요. 별다른 건 없어요.
명태를 얼리면 동태, 반쯤 말리면 코다리, 바짝 말리면 북어, 여기다 소금을
살짝 뿌리면 작태, 얼리고 녹이고 반복해서 껍질이 검어지면 먹태가 됩니다.
아, 하나 빠졌네요. 얼리지 않고 가장 신선한 상태의 명태를 생태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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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미나리 넣고 프리이 팬에 끌여준 생태 생각에 침이 다 꿀꺽거립니다.
미나리가 없으면 쑥갓을 넣기도 하지만 후추는 항상 많이 넣었을 것입니다.
동태는 70년대 백 원에 4마리를 사다가 우리 8식구가 겨울을 샜을 것입니다.
코다리, 북어 찜은 왕십리, 안성에서 가끔 먹었고요, 먹대는 포천에서 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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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 서빙하면서 맛 들였는데 한 2년 동안 못 먹어보았어요. 그리고 짝
태는 처음 먹어본 맛이 먹태랑 비슷하더이다. 바짝 구운 껍질을 먼저 먹으라고
해서 일러준 대로 했습니다. 담백하고 고소합디다. 살이 통통해서 저녁은 건너
뛰기로 했어요. 21.000에 벌써 알딸딸 해지는 것 같아 일찍 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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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질방에서 난리부르스를 치며 시간을 죽이다가 am 8시에 장명동을 샅샅이
뒤졌어도 '금강여인숙'을 못 찾았어요. 아마도 도시계획으로 철거된 것 같습니다.
제게 정읍의 기억은 '금강 여인숙'과 법원, 경찰서, 그리고 역전여인숙입니다.
어머니께서 1980년도에 정읍에 금강여인숙을 오픈하시면서 저는 소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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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두 집 살림을 했어요. 금요일이면 토(土)는 결석을 하고 정읍으로 가서
어머니 일을 돕다가 일요일 오후에 직행버스를 타고 담양-정읍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당시는 논스톱 직통이 없어서 정읍-광주-담양을 경유하였어요.
학생들의 만원 버스에 껴서 말입니다. 치열했어도 그리운 내 청춘을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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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숙이 당시 방 하나에 3000원 주말이면 5000원을 했는데 방 10개가 늘
찼고, 사업 시작 1년 만에 분점(김제, 반도 여관)을 낼 만큼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81년 크리스마스로 기억하는데 우리 집에 있던 누나가 케이크를 사다가 파티를
해주었습니다. 캐럴도 들리고 최고의 화이트크리스마스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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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점에 출타 중이던 어머니에게 걸려 전화가 왔어요. 영순이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내실에 함께 누워있다고 했지요. 어머니가 노발대발하셨어요?
Why?이유를 그땐 정말 몰랐어요. "누나, 엄마가 누나는 누나 방으로 가라고 했어"
그 일 있고 1년 후에 어머니가 누나와 싸웠고, 어머니께서 소송에 휘말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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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던 여인숙을 접었습니다. 그래서 정읍에 대한 기억이, 법원과 경찰서가
문신처럼 남아있는지 모릅니다. 비가 오려고 아침이 늦게 열린 것 같습니다.
장명 초교 옆 향교 투어를 하고 있는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아크 &
나이키 켄셉을, 몬츄라&나이키로 교체하고 캡 모자 위에 후드를 덧입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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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간지가 나는 것 같습니다. 정읍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요.
인구 부족(11만)때문에 지역구도 단독으로 못 갖고 '고창, 정읍'을 묶어 쓰고
있으니 안성보다 더 낙후된 것입니다. 이 지역 출신의원이 발톱이 빠진 이유
중에 중요한 하나일 것 입니다.안성, 정읍, 담양의 공통점은 공자 님의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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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받고 내륙에 위치했다는 점인데, 그중에 담양이 가장 많이 발전을 한 걸
보면 제 생각으론 이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동의해 주시라. 정읍 여고쯤
왔을 때 비가 제법 굵게 내리기 시작했는데 금방이라도 뭔가 나타날 것 같아서
비를 맞고 경찰서까지 왔어요. 법원이 보이지 않았어요. 편의점에 들려 아메리카노
한 잔 사면서 물어봤더니 이전했다고 합디다. 그러면 그렇지. 빛바랜 '쌍화차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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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이 40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어요. 오던 길을 되돌아가긴 개 풀어져서
택시를 탔어요. 기사분이 일흔 살쯤 보였어요. "금강 여인숙을 아세요?" "암, 알지,
내가 집사람이랑 연애할 때 자주 갔거든"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가
저절로 떠올랐어요. 나비가 내장산까지 10분 걸린다고 했어요. 팔로 미! 요새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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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이 재미있더라고요. 차승원, 유해진, 배정남의 케미가 특급입니다. 역시 나영석
PD리스펙트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편을 딱 한 번 봤는데 대박을 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40년 전에 숙박업을 하신 저희 어머니가 상당히 앞서간 것 같아요.
물론 돈을 지키지 못했지만 혹시 알아요? 제가 대기만성해서 그 공을 우리 어머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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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릴지.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내장산은 10년 전에 한번 다녀가긴 했어도 편하게
오지 못해서 40년 만의 방문인 셈입니다. 많이 변했더라고요. 시설은 더 좋아졌어요.
입구에 '전봉준 동상과 조각 공원'이 있었고, 이렇게나 큰 호수가 왜 전혀 기억이 나질
않을까요? 날씨가 궂으니 호수 길을 포기하고 조각 공원을 선택했어요. 방부목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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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누구 아이디어인지 몰라도 큰돈 안 들이고 만든 좋은 시설이었어요.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제가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네요. 여우비때문에 운무가
신비감을 더해 주는 것 같아요. "운-무 데리고 고향에 살리리앗다"상수리나무를 키
높이로 마주 대하는 이 느낌은 뭘까요? 호수를 좌측 편에 두고 새길 이 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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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만난 상가가 생각보다 휑해 보여 물었더니 더 가야 하다네요. 2 km 쯤 차를
타고 갔더니 40년 전 추억이 한 방에 되살아났어요. CU가 버스 정유 장 자리이고,
위쪽이 민박촌이었어요. 저는 방 7개짜리 '광주 민박'을 했는데 그때는 손님들이 꼭
캠프파이어를 했어요. '효리민박'처럼 신나게 보냈습니다. 광주 항쟁이 있고,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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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삼청교육대(순화 교육대)을 실시 했는데 정읍 사는(목마) 재식이라는 친구가
동기였을 것입니다. 민박장사 할 때 그 친구 덕을 보았어요. 내 생애 가장 치열했던
질풍노도입니다. 내장산은 4개절 관광객이 찾긴 하지만 피크 철인 10-11월을 뺀 나머지
날들은 호객을 해야했어요. 이때 둘째 누나와 둘이 호객하느라 죽을 똥 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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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호객을 하다 다른 업소 업주랑 정류소에서 대판 싸우고 난 후에 친해졌고
지금 '송원 식당' 아들들을 주축으로 열 명 정도가 축구도 하고 술도 마시고 친해졌을
것입니다. 우리 집 호객을 하던 '마카오'와' '얄비'는 지금 뭘 하고 살까요? 아침을 해결
할 겸 '한국관'에 들어가 산채비빔밥을 주문했어요. 목에 금줄을 3개나 찬 이모가 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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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해서 물어 더니 하얀 옥수수를 쪼개며 40년을 타임 슬립했어요. 부군인지우리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25년 되었다고 해서 우린 40년 전이야기라고
했더니 꼬리를 내립디다. 장사가 전만 못하다고 했습니다.아직 빌딩을 못 샀나 봅니다.
차가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다고 팁을 줘서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차를 타고 왔습니다.
주차비 포함 3.000원 밖에 받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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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은 제가 훤 합니다. 막내 희정이가 열 살 무렵 이곳에서 허슬로 상한가를
쳤을 것입니다. 그 밝고 영리한 아이가 이렇게 어둡고 눌려 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인생 별것 없는데 하루빨리 막내가 생을 사랑하고 즐겼으면 소원이 없을 것입니다.
나의 태양, 희블리 리스펙트! 이럴 땐 케이블카를 타면 딱인데 제가 고소공포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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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니 그림에 떡입니다. 내장산에서 백양사로 넘어간 생각을 하고, 가판 이모에게
물어 더니 미쳤냐며 말리는 바람에 차 타고 백양사로 왔어요. 백양사는 사명대사,
내장사는 서산대사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 절이 그 절이긴 한데 내장산 물이
더 얕고 맑아 보이는 것은 상류와 하류 차이일 것입니다. 백양사가 내장사에 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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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 때문에 큰 집 같은 느낌이 나지만 역사성은 백양사가 더 보존이 잘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내장사는 6.25 때 불에 다 타버렸고 증축을 수없이 한 것으로 압니다.
저는 백양사에 '약수리의 추억' 말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 5년 전에 제가 데리고
있던 친구가 열이라는 녀석인데 00파 보스입니다. 장례식장 때문에 백양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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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초상 치르고 말린 감을 잘 먹은 기억이 있어요. 건달과의 관계가 늘 그렇듯이
흐지부지 좋지 않게 끝났습니다. 백양사도 내장사처럼 보도블록 대신에
방부목을 깔았더라고요. 입구는 백양사가 약간 밀리지만 고기는 확실히 백양사가
많을 것입니다. 입구에 뭔가 했는데 스님들 무덤이었어요. 내장사도 입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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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어요. 그제는 천주고 성지에 갔을 때 보니까 재다 무덤을 다듬고 만들어서
순교자 성지라고 비석을 세워놨어요. 종교인들이 명에 욕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절, 성당, 교회 다 똑같아요. 100년도 못 살아서 그럴까요? 가톨릭의 십자군
전쟁의 명분이 뭔 줄 아세요? 성당 세우고 성지 회복하려는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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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교회도 똑같아요. 불교는 제가 잘 몰라서 예를 들지 못하지만
법정같은 스님은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위인이에요. 우리 개신교는 인물이
없어요.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성전 건축으로 사람 많이 모이게 해서 자신들의
명예를 높이려는 것이에요.말로는 주의 뜻인데 실은 내 제자를 만들어서 자자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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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하고 싶은 거예요. 지금도 날라리 신자지만 만약 먼저 교회사를 공부했다면
저는 교회 다니지 않았을 거예요. 성한 교회가 없고, 존경할 지도자도 없어요. 세상
천지에 마땅히 갈 교회가 없다니까요. 물론 교회에서도 저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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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얻는 것 중에 '피톤치드'라는 것이 있는데 요놈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
하게 해주고 피곤을 풀어준다고 하더이다. 저 꽃은 원추리인 줄 알았더니만,
'백양화'라고 하더이다. 예쁘지요? 당산나무가 바깥 당산이 있고, 안 당산이
있더리고요. 헐. 진달래같이 생긴 꽃 무덤이 국화입니다. 나무에 물린 여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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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시나요? 사천왕은 우리 시대 조폭들 문신으로 인기였어요.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이렇게 사천왕이랍니다. 지국천왕이 무슨
뜻이냐고요? 조폭이 그만하면 됐지 더 알려고 하면 다칩니다.
2019.10.5.sat.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