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 달린 빨간 양귀비
내가 캐나다 서부, 빅토리아에 도착하던 시기는 8월 중순이었다. 언어도 다르고 모든 것이 낯선 환경에서 적응해가는 그 당시 내 모습은, 마치 여름 햇빛에 물오른 싱그러운 초록 나뭇잎과 다를 바 없었다. 천천히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가는 단풍처럼 꼭 다문 입술이 조금씩 열리며 길 안내 표지판도 눈에 서서히 익어 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일상은 배어드는 가을 향에 스며들며 선뜻 두 달을 내어줬다. 거리마다 가을 색이 짙어 갈수록 그리움 또한 흥건해 저 그날도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장을 보던 내 눈에 빨간 꽃 하나가 시선을 붙잡았다. 그것은 학창 시절에 크리스마스 시기가 되면 내 옷깃에도 꽂혀있던 빨간색의 ‘사랑의 열매’와 흡사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가슴 한쪽에 앙증맞게 꽂혀있는 붉은 꽃은 그 뒤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하던 그 꽃의 이름이 양귀비이며, 숭고한 이야기에 얽힌 애절하고 애잔한 감동적인 시. 그리고 가슴에 달게 된 연유를 듣게 되었지만, 몇 차례의 가을이 오고 가는 동안에도 정작 단 한 번도 내 가슴에 그 꽃을 달아 놓은 적은 없다. 올해 가게를 열기까지.
지난 2월 중순, 집 가까이에 있는 제법 넓고 큰 유리 벽이 마음에 드는 컨비니언스 스토어를 인수했다. 리모델링하는 과정에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말 힘들게 오픈했다. 빅토리아의 특성상 한인도 별로 없는 곳에서 한국 사람이라고 믿고 맡긴 일에 공사비 전액 선불을 요구해서 큰돈을 선 듯 주었는데, 공사는커녕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돈도 돌려주지 않아 시작부터 마음고생 또한 얼마나 컸던지… . 급한 마음에 간판 디자인이며 전기 공사에 바닥과 화장실, 페인트칠이며 선반 자재들까지 직접 알아보고 내부와 외부에 정말 많은 공을 들였다. 내가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곳이라서 쾌적하고 보기에도 좋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그 덕분에 후에 들어오는 손님들로부터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말을 곧잘 들었다. 심지어 신발을 벗고 들어 오는 손님도 있어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역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실릴 만큼 가게는 또 다른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금전적인 손해와 사람으로 인한 정신적인 상처까지 얻은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한 번도 이런 일을 생각해 보거나 경험 역시 없었기에 모든 것이 낯설어서 두렵기만 했다. 요일마다 각기 다른 물건이 들어오고 꽃과 꽃 화분도 들어오니 생명이 있는 식물을 돌보아야 하는 심리적인 부담감까지 얹어야 했다.
가게에 들여놓은 피아노를 치며 찬송가를 흥얼거릴 만큼 여유도 생긴 지금도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이지만, 9개월 전인 오픈 하던 그때는 가지각색의 다양한 물건들의 이름과 용도를 알아가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수많은 담배 이름을 머리에 저장하기도 쉽지 않았다. 특히 나를 곤혹스럽고, 당황하게 하는 것 중엔 로또 복권과 얽힌 일이 가장 많다. 복권의 종류도 많지만, 기계를 사용해서 원하는 가격에 맞추는 방법 또한 뭔 수학 공식처럼 까다롭게 여겨져 쩔쩔맬 때마다 되레 손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가르쳐주는 진풍경도 벌어지곤 했다. 게다가 영어로 소통까지 해야 하니 누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이없는 바람이 생기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후회 속에 쏟아지는 눈물을 섞으니 한숨이 쉼 없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가도록 도무지 손에 익지 않아 좌충우돌 매일 실수투성이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한가한 시간 때마다 시험 보는 학생처럼 브랜드마다 몇 종류로 나뉜 담배를 구분해서 이름을 열심히 외워가던 때에 문 위에 달아 놓은 모빌이 울리며 자전거 헬멧을 쓴 여성이 들어 왔다. 뜨거운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서 내게로 쏟아지며 활기찬 여름의 싱그러움을 전해준다. 넓고 기다란 카운터에 장갑과 헬멧을 벗어 얹어 놓으며 알파벳 ‘V’로 시작하는 담배를 주문했다. 단박에 알아들은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여성이 원하는 담배를 찾아 냉큼 내어주었다. 그런데 내 발음이 틀렸다며 담배의 이름을 다시 말한다. 본인이 원하는 담배는 이미 손에 쥐고 있었음에도 마치 ESL 선생님과 학생처럼 발음을 소리 내어 따라 해보라는 것이었다.
“Vogue”
아예 입술에 이빨을 올려놓고 드러난 하얀 치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Vogue” 그녀의 입 모양을 흉내 내며 가르쳐 준 대로 소리를 내어보았지만, 고개를 연신 가로 저으며 다시 해보라는 거였다. 사실 ‘V’ ‘R’ ‘Q’ ‘Z’ 같은 음은 대다수의 한국인에겐 까다로운 발음이다. 발음 교정을 원한 건 아니지만 부끄러움을 잊은 채 진지하게 임하니 너 같은 일본인에겐 어려운 발음이다. 하면서 이번엔 일본인으로 나를 단정한다.
“한국 사람인데요.” 은근히 무례한 여인에게 단호하게 대답하니 의외라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찬찬히 올려다보는 여성. 내가 서 있는 카운터 안쪽은 홀보다 높고 제법 넓고 길어서 편한 사무용 의자를 비롯하여 작은 원형 차탁과 서넛의 지인이 방문해도 잠시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에 바닥엔 마루를 깔아 놓아 편안한 응접실처럼 꾸며 놓았다. 카운터 앞의 손님은 대체로 키가 작은 나를 올려다보게 되어있지만, 가끔 엄청 키가 큰 사람이 오면 나와 눈높이가 얼추 비슷할 때도 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빤히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담뱃값을 내고 갈 생각은 안 하고, 그럼 남쪽이냐고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곧바로, “우리 아버지는 군인이셨는데,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남의 이야기 하듯 생각지도 않은 말을 무심히 툭 던진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전개가 뻘쭘했지만, 정말 안됐다는 듯이 “그랬느냐고…” 나지막한 소리가 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런데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너의 나라 전쟁 때 참전하셨다가 돌아가셨다”라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거였다. 자신이 초등학교 때라며… … .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비록 6.25 한국 전쟁 세대는 아니지만, 나 자신이 그녀에게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특히 내 영어 실력으로 그녀에게 전할 수 있는 말 또한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잠재되어 있던 그동안의 그리움과 설움이 그녀의 말 한 마디로 썰물처럼 밀려 가버리고 울컥 치밀어 오르는 또 다른 눈물샘 하나가 터지는 거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의 아버님 덕분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알아주는 컴퓨터와 핸드폰을 만드는 나라가 되었고,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을 모르는 민족이 없을 만큼 한국의 놀라운 성장은 당신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 덕분입니다.” 자신에게 발음 교정을 받을 만큼 유창하지 않은 영어 실력이지만, 그녀조차 생각지 못한 나의 돌발적인 말과 모습에 머쓱한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카운터 너머로 잡아끌며 말을 이어가는 내게 맡긴다.
“남의 나라를 아니, 우리나라를 지켜주시러 가신 동안, 그리고 순국하신 아버지를 잃어버린 당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정말 미안합니다.”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눈앞에 아버지 없이 엄마와 단둘이 힘들게 살았을 그녀의 학창 시절의 모습이, 외로웠을 그녀의 시간이 보이는 것이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정말 멋지고 훌륭한 분이십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들으며 그녀의 눈가 역시 벌겋게 사랑의 감정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나, 사실 이와 똑같은 이야길 한국 사람을 만날 때마다 했었어. 그런데 모두 아~ 그랬냐, 안됐다. 그저 건성으로 이야기해서 솔직히 한국 사람에게 상처받았고, 초등학교 때와 사춘기를 겪던 그 당시 아버지를 무척 원망했었어. 엄마랑 너무 어렵게 살아서 남의 나라에 왜? 가서 죽었냐고. 그것 때문에 엄마 속도 많이 아프게 했었는데… 오늘 비로소 우리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고마워. 네 덕분에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이제야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 정말 고마워.” 하면서 소리를 동반한 울음을 터뜨리는 거였다. 되레 고맙다며 내 손을 꼭 쥐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와 정말 미안합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나와 세대와 국적을 넘어 뜨거운 사랑의 교감이 자연스럽게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머리 하나 훌쩍 키가 큰 그녀였지만, 토닥이는 나의 손길에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는 그녀의 움직임이 마치 쌓아두었던 원망과 슬픔을 떨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빨간 장미꽃 한 다발과 분홍색 카네이션 한 다발, 그리고, 풍성한 안개꽃 한 다발과 하얀 백합 한 다발을 정성껏 포장해서 그녀에게 안기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당신의 아버지와 어린 시절의 당신에게 드린다며 한 손에 쥐어지지 않는 꽃다발을 두 손으로 품 안의 아기 안 듯 전하니 가늘고 긴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춤을 춘다. 담뱃값도 받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몸에 해로운 담배를 선물하고 싶진 않아서 카운터에 놓인 담뱃값은 돌려주지 않았다.
그 일 이후로 그녀는 우리 가게의 단골이 되었고, 캘거리로 이사를 간 후에도 빅토리아에 올 때면 반드시 방문하는 귀한 인연이 되었다. 게다가 지난주 리멤브란스 데이(Remembrance Day) 때는 그동안 쑥스러워서 달지 못했던 빨간 양귀비꽃을 하나도 아닌 둘 셋, 넷을 내 가슴에 달고 미처 준비하지 못한 손님의 옷깃에도 직접 달아주는 세심한 마음마저 지니게 되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는 아름답고 숭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상. 그 세상에 내가 서 있다. 교과서에서나 접하던 6.25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파란 눈의 유족이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은 꿈엔들 생각해 봤겠나… . 한국 전쟁이 남긴 상처가 이 땅, 캐나다에 존재한다는 것에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 역시 죄인 아닌 죄인이 된 전쟁의 상흔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 공동의 몫이란 걸 처음 느껴봤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새삼 우리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뒤늦었지만, 넋을 달래는 감사의 기도도 하게 되었으니 내겐 모든 만남과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엔 그다지 나와 상관없는 일엔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그녀를 만난 후로 내가 사는 캐나다가 새롭게 다가왔다. 뭔가 나도 캐나다를 위해 보답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골똘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무모하고 거창한 계획보다는 꾸준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간단하고 쉬운 일이 즐비했다. 세금을 정확하게 내는 일, 떨어져 있는 종이와 낙엽을 열심히 주워들고 치우는 일, 가게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문을 나설 때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 들도록 반갑고 친절하게 대하자고. 차가운 음료수나 끈적한 아이스크림에 예쁜 냅킨을 싸서 건네자 귀한 대접을 받는 듯한 기분이라며 모두 엄지를 치켜세우며 감사를 전한다. 오고 가는 감사가 넘쳐나고 전해지는 세상. 정말 살맛 나는 세상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나로 인해 감사가 시작되고 나로 인해 즐거움이 기쁨으로 전해질 수 있다면 나와 같은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셋 넷으로 늘어갈수록 더불어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 아니겠는가! 결국, 살맛이 나는 즐거운 세상은 그 누구도 아닌 나부터라는 것을. 내 가슴에 달린 빨간 양귀비에 담긴 고마움 역시 기억하고 그 고마움을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로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더 많아지길 기도한다.
-2012년 11월 21일
내 가슴에 달린 빨간 양귀비꽃을 보며 꽃을 달게 된 감사한 인연이 생각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