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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25일 목요일
[(홍)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이다. 어부였던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 가운데 하나다.
열두 사도에는 야고보가 둘 있는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대)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야고보 사도는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공경을 받고 있는데, 그곳에는 사도의 이름으로 봉헌된 유명한 성당이 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는데,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이 말씀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만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목받고 싶은 마음, 높아지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등은 교회 안에서 특별한 부르심이나 직분을 받게 되면 쉽게 찾아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쫓아가다 보면, 우리 안에 하느님을 따르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립니다. ‘하느님 일의 주인’이 되어 버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는 메말라 가고 복음적 판단도 흐려지게 됩니다. 시기, 질투, 상처, 미움, 증오, 분노, 교만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야 할 부르심 또한 자신을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려는 도구나 권력으로 써 버립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도직’이라는 엄청난 보물을 ‘질그릇’에 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질그릇’은 바오로 사도 자신을 뜻합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쉽고 보물을 담을 만한 그릇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도직이 바오로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볼품없는 그를 통하여 당신 힘을 드러내시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자리는 ‘구유’였고, 마지막 자리는 ‘십자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볼품없고 낮은 모습으로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부르심과 직분이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려면 우리 스스로가 질그릇이 되고, 주님의 거처인 구유와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잃어버린 봉사자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봉사자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봉사자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성장하려면 제대로 분노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성 야고보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있지만, 오늘의 야고보는 요한과 함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야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들의 어머니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높은 자리에 앉으려면 그만큼 고생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시게 될 잔이 온유함과 겸손의 잔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야고보는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을 것이고 그렇게 순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어디서 나올까요?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려 멸망시켜버리려고 분노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사실 열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모든 성취는 바로 ‘분노’에서 시작됩니다.
1948년 가난한 어촌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가발공장, 식당 등에서 일하였고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폭력이 심한 남편을 피해 단돈 10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식모살이를 떠난 여자.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일하며 대학을 다녔고, 76년 미 육군에 들어가 소령으로 예편, 50세가 넘은 나이에 하버드 박사과정에 다니는 여자, 서진규.
그녀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에서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반항심과 복수심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항심과 복수심, 곧 분노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야 합니다. 서진규 씨는 정말 남편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았을까요? 물론 그들로부터 당연히 무시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수심은 결국 자기를 향해야 했습니다. 참다운 복수는 자신이 그러한 처지로 살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 누군가에게 - 아마 부모 중 적어도 한 명 일 수 있을 것입니다 – 사랑받았습니다. 사랑 안에는 ‘기대’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왜 우리 몸의 회충이나 모기를 사랑하지 못할까요? 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기생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태아를 사랑합니다.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기대에 못 미칠 때 분노하는 것입니다. 만약 타인이나 세상만 탓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타인의 탓을 하며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분노는 이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데 나는 물 위로 뛰어내릴 용기조차 내고 있지 못하다면 분노가 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박차고 뛰어내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 용기가 바로 분노에서 나옵니다. 분노는 나를 사랑해 준 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솟아나는 나를 변화시킬 유일한 힘입니다.
‘그릿(GRIT)’의 저자 앤절라 더크워스는 아버지로부터 “니가 아무리 내 딸이긴 하지만, 머리가 나쁘니 성공하긴 어려울 거다. 재능이 없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기 힘들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 말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뭐랄까, 단순히 ‘내가’ 재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기보다는, 재능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성공에 관한 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10년이 넘어가는 연구에 다들 시간 낭비라고 했지만, 그녀가 43세 되던 해 전 세계 단 20명의 천재만 받는다는 맥아더 상을 받게 됩니다.
분노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살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을 기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완료하는 습관”을 만들어보라고 말합니다. 거창할 필요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지킬 수 있는 아주 작은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신에 정한 계획은 ‘무조건’ 끝까지 완료해야만 합니다. 끝까지 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지금 드는 힘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난 여기까지야.’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갈 수 있는 한계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건 재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야고보는 이러한 분노로 그리스도를 닮아갔던 사도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께서 주시는 잔을 마실 수 없을까요? 저는 특별히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제 자신에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면 나의 죄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분께 계속 아픔만 드리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저를 발전시켰고 그 길을 바로잡아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은 『하.사.시.』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내 안에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고 그것이 나를 분명 그리스도의 삶과 닮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걷는 걸 좋아합니다. 어린이 날 선물을 받겠다고, 한강 다리를 건너서 남산까지 걸어간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2시간가량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매일 걷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길’이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하는 목적지를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내비게이션은 원하는 목적지까지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합니다. 도착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도 알려줍니다. 방향이 틀렸으면 새로운 길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목적지를 안내하는 도구입니다. 다른 하나는 길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올레길’이 있습니다. 이제 길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가 목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지나온 날을 생각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을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오늘은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입니다. 어부였던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산티아고에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였던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데 그 위에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 발음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까지 가서 선교를 하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헤롯 아그리파 왕에 의해 44년에 순교했습니다.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수습해 스페인으로 향했지만 풍랑 때문에 배가 난파돼 유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814년 펠라지우스 수도자가 갈라시아 지방의 벌판에서 한밤중에 별빛이 강렬하게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가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그 장소를 콤포스텔라(Compostela)라고 불렀습니다. ‘별이 비추는 들판’이란 뜻 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야고보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하고 있습니다. 길게는 800킬로가 넘은 길을 걷기도 합니다. 짧게는 100킬로의 길을 걷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은 그 먼 곳까지 가서 순례의 길을 걸을까요? 불편한 잠자리를 기꺼이 감수하고, 벌레에게 물리면서까지 순례의 길을 걸을까요? 도시에서는 채울 수 없는 위로와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빠른 속도와 편리함으로는 채울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자본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적인 충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권력과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슬퍼하는 벗들의
슬픔에 함께하는
기쁨을 이룰
슬픔의 잔입니다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작은 벗들의
작음에 함께하는
존엄을 이룰
작음의 잔입니다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짓밟힌 벗들의
짓밟힘에 함께하는
받듦을 이룰
짓밟힘의 잔입니다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쫓겨나는 벗들의
쫓겨남에 함께하는
품음을 이룰
쫓겨남의 잔입니다
당신과 함께
내가 마실 잔은
죽어가는 벗들의
죽어감에 함께하는
살림을 이룰
죽음의 잔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야고보(James)
신분 : 사도, 순교자
활동연도 : +44년?
같은이름 : 대야고보, 야고버,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자크, 장야고보, 제임스
성 야고보(Jacobus)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형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였다. 그들은 부친과 함께 겐네사렛 호수에 배를 띄워 고기잡이로 살던 사람들이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가 5,10-11).
그들은 예수와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Andreas)의 집에 갔을 때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예수께서 낫게 해주신 현장에도 있었다(마르 1,29-31). 그들은 또 자기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태 20,20-28) 하고 청했던 사람들이다.
또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둘 다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얻었고(마르 3,17), 예수께서 사마리아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54)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에는 베드로(Petrus)와 그들 형제만 따라오게 하셨으며(마르 5,37),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 순간에도 베드로와 그들 형제만 함께 자리하게 하셨고(마태 17,1-8), 게세마니(Gethsemane)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러하셨다(마태 26,36-46).
성 야고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사도 12,1-2).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그는 순교하기 전에 에스파냐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지방으로 옮겨져 모셔졌고, 후일 이곳에 대 야고보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유럽의 3대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이다.
성 크리스토포로(Christopher)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3세기경
같은이름 : 크리스또뽈, 크리스터퍼,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포루스, 크리스토폴
성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또는 크리스토포로, 크리스토폴)는 시리아에서 출생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주교 바빌라(Babylas)에게 세례를 받고 소아시아 리키아(Lycia) 지방에서 선교하던 중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전해온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이름에 따르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무성하다.
그는 사람들을 어깨에 업고 강을 건너다 주는 일로써 생계를 꾸려나간 거인이었다.
그는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알고 섬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악마는 구세주를 겁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최고 힘센 장사일 것이라고만 추측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손님 가운데 조그마한 어린이가 있었는데, 그가 강을 건너려고 물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무거워져서 성 크리스토포루스는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인데” 하며 혼자 중얼거리는데 그 어린이가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이야기는 수세기를 통하여 전해오는 전설로, 끝부분은 전설적이지만 대체로 사실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크리스토포로스'(Christophoros)는 원래 그리스어로서, '그리스도를 어깨에 업고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의 원래 뜻은 신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업는다기보다는 영성적으로 '그리스도를 가슴에 간직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알아듣고 있다.
450년 에울라리우스(Eulalius) 주교가 칼케도니아(Kalcedonia)에 성 크리스토포루스를 기념하는 성당을 세웠다. 그는 여행자와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성인들중 한 사람이다.
복자 프란치스코 아라나(Francis Aranha)
활동년도 : 1551?-1583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쿤콜림(Cuncolim)
같은 이름 :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루돌푸스 아콰비바(Rudolphus Aquaviva)는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왕국 아트리(Atri)의 공작 아들로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Aloysius Gonzaga, 6월 21일)와 친척간이다. 또 그는 예수회의 제5대 총장인 클라우디우스 아콰비바(Claudius Acquaviva)의 조카로서, 1568년 18세의 나이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동인도 선교를 위해 파견되어 1578년 9월 13일에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하였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서 하느님을 늘 의식하며 지냈다. 1579년 그는 아그라(Agra) 인근의 모굴 아크바르(Mogul Akbar)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살세테(Salsette) 섬 선교단의 원장이 된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Alfonsus Pacheco), 안토니우스 프란치스코(Antonius Franciscus), 프란치스코 아라나(Franciscus Aranha), 베드로 베르노(Petrus Berno), 이 다섯 명의 예수회원들은 당시 힌두교도들의 정면 도전을 받던 쿤콜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선교를 결정하고 진출했는데 무장한 주민들과 정면 대치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때 포르투갈 출신 평신도인 로드리게스가 발포함으로써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1583년 7월 25일 루돌푸스 아콰비바와 알폰수스 파체코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살해되어 우물 속에 던져졌다. 그들은 모두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쿤콜림의 순교자들로서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