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은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자 예수께서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라는 말씀이 붙어있습니다.
‘진정으로 진정으로’ 이 표현이 헬라어 성경에는 ‘아멘 아멘’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 이 표현을 붙일 때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대표로 기도하는 분의 기도가 끝나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설교자의 말씀 선포 도중에도 아멘으로 화답할 때가 있습니다. 격정적인 설교자의 경우에는 설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아멘부터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부로 남용해도 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동의하는 경우에만 화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라는 내용을 설명하다가 잠시 현실 얘기를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이 본문에만 두 번 나오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요한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거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도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생의 길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한 번 태어난 것은 육적으로 태어난 것이고, 성령에 의한 새로운 태어남이 있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이 본문은 영적인 새로운 탄생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람은 기압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고 공기의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쪽으로 흐른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지만, 고대인들에게 바람이 어떻게 생성되고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는 신비의 영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태어난다는 것, 즉 성령에 의한 새로운 탄생을 바람에 비유해서 말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할까요? 교회는 오랫동안 그렇게 해석해 왔습니다. ‘영적인 탄생’은 인간의 논리로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람의 흐름이 오늘날 과학에 의해 정확히 설명되듯이, 신비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요한의 신학도 현대신학자들에 의해 다각도로 분석되고 비판도 받습니다.
요한의 신학적 논리에는, 물질적인 것은 악하고 정신적인 것은 선하다는 그리스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영향, 특히 영지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흔적이 나타난다는 것이 현대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서기 2~3세기의 교회지도자들은 요한복음이 영지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가 성서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적인 책이라는 것입니다.
2세기 교회에서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가현설’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현설이란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는 기본 전제 하에 ‘정신세계의 가장 고차원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악하고 열등한 물질로, 즉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실 수가 없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라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가현설을 부정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이 가현설을 부정한 것은 분명하지만 영지주의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지나치게 예수님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복음의 원형이 갖고 있었던 현실성과 운동성을 약화시키고, 독선과 배타의 교리가 배태되도록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저는 이 복음서에 유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가운데 16~18절을 보겠습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답니다. 심판을 받지도 않는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이 본문, 특히 3장 16절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런 독선적인 선언이 다른 종교, 다른 문화권과의 소통이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었던 중세시대까지는 통할 수 있었지만 다원화 사회가 된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는 없습니다. 이 본문은 영성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일세기 특정 교회공동체의 신앙고백이지, 시대를 초월해서 지구인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의 말씀이 아닙니다.
3장 후반부에는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시는 모습을 보고 스승에게 보고하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했다는 말을 보겠습니다. 29~30절입니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한공동체 사람들이 세례 요한의 영향력에 대해 여전히 걱정이 많았음을 읽을 수 있는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