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迷宮]
2-2. 미스테이크.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하고 있는 작업이 뭔가에 꽉 하고 막혀버려 도저히 앞으로 진행이 되어지지 않는 까닭에, 작정하고 술을 퍼부어 마셔 버린 참담한 결과다. 심한 갈증에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벌컥벌컥 들여 마셨다. 그리고, 소파에 털썩하고 주저앉아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를 켰다. 채널을 뉴스에 맞추고 최근 이슈였던 연쇄 실종사건에 관한 뉴스가 나오나 아무 생각 없이 한동안 화면을 쳐다 보았다.
아래층 세입자가 집을 비운 지도 어느덧 한달이 다되어 가고 있다. 그녀를 본 것은 바바리맨 사건 당일 오전 빌라 계단에서 마주친 것이 마지막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세계약서에 적힌 연락처로 몇 번인가 전화를 연결해 보았지만, 핸드폰은 계속하여 꺼져있는 상태다. 정말 연쇄 실종사건과 관련 되어 진 것인가?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하며 TV를 꺼 버렸다.
그날 늦은 오후. 스페어 키를 찾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잠시 주저하였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건 무단 침입 아닌가! 나는 지금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여러 의구심들이 내 머리 속을 강하게 때려 댔지만, 용기를(?) 내어 스페어 전자 키를 디지털 도어락에 갖다 대었다. 내 마음속 망설임의 크기와는 상관 없이 문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손 쉽게 열려 버리고야 말았다. 더 이상 주저함은 없었다. 주인 없는 집을 향하여 실례합니다 하고 인사를 올리며 나는 집안으로 살포시 들어갔다.
집안은 대체적으로 깨끗한 상태를 유지 하고 있었다. 물론 정리 정돈이 완벽히 잘 되어있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벽증 적이었던) 나의 기준일 뿐이다. 여성 혼자 사는 집안의 대체적인 수준이 어쩔지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냥 저냥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 아니겠냐는 나 나름의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지적질을 하자면 침실 쪽이 문제였는데, 뭔가 급하게 집을 비우고 나간 것처럼 옷가지가 어지럽게 침대 위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사감의 자격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어서 빨리 (그녀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찾아야해. 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나의 시선을 확 끌어 당기는 것이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아마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의 가녀린 핑크 빛 속옷이 바로 그것이었다.
속옷을 아무데나 함부로 널 부러 놓는 스타일 이었나? 역시나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들 군. 이런 저런 생각에 (차마 눈길을 떼지못하고) 팔짱을 끼고서 가만히 그것을 바라 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이나 체모는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어떤 벌레의 털 같아 보이는 것이 속옷 여기 저기에 붙어 있었다. 하필이면 (다른데도 아니고) 팬티에 왜 이런 정체 불명의 털들이 기분 나쁘게 붙어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침을 한번 꿀꺽하고 삼킨 뒤 그녀의 속옷에 붙어 있던 털 한 가닥을 조심이 집어 들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조심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뭐지 이것은? 고개를 한번 갸웃거린 뒤 아예 팬티를 집어 들어 코에 가져가려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집안에 초인종이 크게 울려 퍼졌다.
난데없이 울려 퍼진 초인종 소리에 순간 너무도 당황하여 나는 그만 바닥에 납작하니 엎드리며 그녀의 팬티를 빛과 같은 속도로 빠르게 바지춤에 넣어 버렸다. 그건 정말이지 순식간에 벌어진 의도치 않은 불행한 일 이었다. 절대로 나는 그녀의 팬티를 탐하지 않았으며 탐 한적도 없었다. 그건 단지 긴박했던 상황에서의 무의식 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그것은 명백한 나의 mistake 였다.
나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주위를 살피며 최대한 낮은 자세로 살금살금 거실로 나갔다. 거실 벽에 걸려있는 인터폰을 바라보니 문 밖으로 경찰 제복을 입고있는 건장한 두 남자가 보였다. 뭐지? 누가 신고를 한 것일까? 왜? 어떻게? 문을 열어줘야 하나?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질문들이 긴박하게도 나를 향해 물어왔지만, 내가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한가지 뿐 이었다. 존(나) 버(티기). 바로 그것이었다.
다행히도 경찰은 초인종을 몇 번인가 더 눌러보고 난 후에 서로 쑥덕거리며 조용히 물러갔다. 이집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해!!!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내쉰 뒤)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고자 지금까지 나의 동선을 차분히 되짚어 가며 집안 곳곳 나의 흔적을 꼼꼼하게 지워 나갔다. 그러다 식탁 위에 놓여진 구겨진 명함 한 장과 주소가 적혀있는 메모장을 보게 되었고,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어 저장시켰다.
위층(나의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땀으로 뒤범벅이 된 옷가지를 훌러덩 벗어 세탁기 안에 집어 던진 뒤 욕실로 들어가 한바탕 샤워를 하였다. 온 몸에 차있던 열기가 가시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샤워를 마치고 타월로 물기 만을 닦아낸 뒤 나체의 상태 그대로 세탁기로 가 타월을 집어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어있는 캔맥주를 꺼내어 시원하게 들이켜 마셨다. 왠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긴장이 풀어지며 피곤함이 밀려 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어 5초만에 시체처럼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깊은 꿈을 꾸었다.
산 깊은 골짜기 희미한 달빛이 비추는 조그마한 연못에 아름다운 선녀 한 명이 백옥 같은 피부를 드러내며 알몸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풀 숲에 숨어서 그 모습을 몰래 바라 보다가 연못 큰 바위 위에 놓여진 선녀의 속옷을 발견하게 되었다. 왠지 저 속옷을 훔치면 선녀가 하늘위로 달아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속옷을 훔치기로 결심하고 큰 바위로 몰래 다가 가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지니고 있던 도끼(?)를 풍덩 하고 연못에 빠뜨려 버렸다. 헉!! 나는 나무꾼 이었던가? 언제 이런 도끼를…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녀가 펑 하고 신선으로 변신 하더니 양손에 각각 금도끼와 은도끼 쌍 도끼를 쥐고 휘두르면서 네 이놈!!! 이게 뭐하는 짓이여~ 하고 소리 높여 외쳤다. 나는 너무나도 놀라 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선녀의 속옷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한손에 꽉 움켜쥔채로 훔쳐 달아 나는데, 그 뒤를 신선이 바짝 쫓으며 내 팬티 내놔라 이 놈아~~~ 하고 외쳤다. 순간 나는, 뭐여? 이것이 선녀 속옷이 아니었던 거여? 하고 생각하는데, 분명 옷을 꽉 쥐고 있던 손 안에 뜬금없이 물컹한 뭔가가 잡혀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달아나는 것을 멈추며 급히 손을 펼쳐 보고는, 너무나 깜짝 놀란 나머지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잠에서 깨어 버렸다.
그것은 분명 벌레의 털 이었다. 다만, 실제와 다르게 손에 쥐어질 정도로 커지고 물컹물컹해진 벌레의 털. 여전히 손에는 꿈속에서 느껴졌던 물컹물컹한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실제로도 뭔가를 꼬옥 쥐고 있었던 것과 같은 살아있는 느낌이 아직까지도 온전히 손안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벌거벗은 몸 아래에서 바짝 발기되어 있던 성기가 쑥스러운 듯 껄떡거리며 움찔움찔 거렸다. 설마… 그것이 바로.... 너?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정수기에서 냉수 한잔을 내려 마셨다. 그리고 (여전히 졸렸기 때문에) 그대로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또 다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며 잠이 들 무렵, 세탁이 다되었음을 알리는 종료 음 소리가 나의 귓가에 나지막이 들려왔다. 또 다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만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나는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