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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3 - 주장 백수호 호숫가에 자리한 연수정에 들러 주유의 적벽대전을 떠올리다.
10월 21일 장시성의 난창(南昌 남창) 에서 기차를 타고는 주장(九江 구강) 에 도착해
주장치처짠 九江汽车站 (客运总站) 에서 루산 庐山(여산) 가는 16시 02분
버스표를 구입하고는..... 택시로 양자강변에 위치한 심양루(浔阳楼) 에 도착해
수호지의 양산박 (梁山泊) 송강(宋江)을 비롯한 108명의 유협(遊俠) 들을 구경합니다.
심양루(浔阳楼) 를 내려와 도로변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타고 양수팅 煙水亭(연수정)
으로 가자고 하니 도로를 달리는데 왼쪽에 성벽 이 보이더니 별안간 택시는 성안으로
들어가서는 주장(구강) 구시가지 를 달리는데 여긴 오래된 건물들이 밀집한 번화가 입니다.
이 도시 지우지앙(九江, 주장, 구강) 은 漢(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후 성과 못을
만들어 군사요새 로 삼았으며 삼국시대에는 柴桑(시상) 이라고 불린 도시로 명나라
때 주장 九江(구강) 으로 바뀌었는데 장개석도 한때 수도로 삼을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주장 九江(구강)시 북쪽은 장강(양자강) 과 인접하여 엣날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하였으며
남쪽에 중국 최대의 '포용후(鄱阳湖 파양호)' 가 있으며 구강시를 지나는 장강엔
호북성으로 연결되는 구강 장강대교 (九江長江大橋) 2층 다리가 1992년 5월에
개통되어 철로가 다니는 아래 층이 7,675m 로 중국에서 가장 긴 2층 다리라고 합니다.
주장 九江(구강) 은 삼국지에도 나오는 도시이자 송나라 충신이자 명장 악비 가 금나라
침입을 막기위해 악전고투한 도시이며 양수팅 煙水亭(연수정) 이 볼만한데 수호지의
'송강' 이 염파석을 죽이고 유배를 온 곳이 바로 '강주' 라 불리우던 "주장"(九江) 입니다.
주장 九江(구강) 은 불교 정토종의 발원지인 东林寺(동림사) 를 비롯 '파양호(鄱阳湖)'
를 끼고있는 교통의 요지이며 시인 도연명 의 탄생지인데... 택시는 삼성전자
매장을 지나 구시가지를 빠져나와서는 호숫가 큰 도로에 이르러 멈추기로
내려서 호숫가로 내려가니....... 여기가 바로 양수팅 煙水亭 (연수정) 인 모양 입니다.
양수팅 煙水亭(연수정) 은 감당호 甘棠湖 동쪽에 있는데 한나라때 서기 208년에 장교를
검열하던 点將台(점장대) 가 세워졌으며 東吳(동오)의 수군 총사령관 주유(周楡) 가
"적벽대전" 을 준비하던 수군 수련장으로 촉의 제갈량에 맞서 전투를 지휘했던 곳입니다.
당나라 때 815년 강주 도독 백거이 가 정자를 세웠으니 白居易 의 “비파행” 중에서
" 別時茫茫江 梫月" 라는 구절로 인하여 침월정(梫月亭) 이라 명명했으며 북송때 주돈이 가
구강에 와서 강학을 하였고 아들이 누각을 지어 “연수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1972년 양수팅 煙水亭 (연수정) 을 보수하면서 곡교(曲橋) 를 세워 호반에서 구불구불하게
정자에 오르게 만들었는데 주장(九江 구강) 시와 장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로
곡교를 건너서 양수팅으로 들어가니 20위안 입장료를 받는데... 정자에서도 호수로
돌출하여 다가가 보니 여기서 오나라 도독 주유(周楡) 가 수군의 훈련을 지휘했던가 봅니다?
정자에는 황금을 입힌 실물 크기 주유의 동상 이 서있고 돛단배와 강을 배경으로 두 사람
그림이 보이는데 제갈량과 손권 이 여기 柴桑(시상, 구강) 에서 만나는 장면이라네요?
정자 안에는 양자강 중류 여기 시상(柴桑 구강) 부근의 지도가 나오는데 적벽을
중심으로 당시 위나나와 오나라 그리고 촉한의 이른바 "적벽전투도" 가 그려져 있습니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은 중국 후한(後漢) 말 삼국시대인 208년에 후베이성(湖北省 호북성)
자위현 嘉魚縣 의 북동 양쯔강(揚子江) 남안에 있는 적벽(赤壁) 에서
위나라 조조(曹操) 가 오나라 손권(孫權) 과 유비(劉備) 의 연합군과 싸웠던 전투입니다.
원소(袁紹) 를 무찌르고 화북을 평정한 조조는 유표(劉表) 가 다스리는 형주(荊州) 를
차지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서는 강릉 으로 달아나는
유비를 추격 하니 장강의 적벽에서 오나라 손권· 유비 연합군과 대치하게 됩니다.
이때 조조군은 손권의 장수 황개(黃蓋)가 화공(火攻) 계략 을 세워 전선(戰船) 이 불타는
대패를 당하고 화북으로 후퇴하는지라 결과적으로 손권의 강남 지배 가
확정되고 유비도 형주(荊州) 서부에 세력을 얻어 천하 3분의 형세가 확정되게 됩니다.
적벽대전을 두고 다양한 이견 이 존재하는데, 적벽대전의 전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고... 원말 명초 인물인 나관중 이 집필한 "삼국지연의" 에서는
실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지어낸 이야기 가 대부분이라는 주장이 있으니
그 때문에 당시에 장강의 적벽에서 벌어진 전투를 두고 오해 가 생기가 되었습니다.
적벽대전네 대해 정사에 남은 기록이 짧고 모호 하여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내용과
이견을 보이는 점이 여럿이니, 첫번째 적벽대전은 조조가 유비를 죽이기 위해 기병
5천으로 추격하다 벌어진 소규모 전투 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반대로 조조는 유비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손권을 치고 오나라를 차지하려고 벌인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적벽대전이라지만....실제 전투를 벌인 시간과 장소 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며 네번째 조조의 군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누구인가?
이런 점들이 현재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이견이 존재하는 상태라고 합니다.
한편 일부 중국의 학자들은 적벽대전은 적벽이 아닌 후베이성 오림(烏林) 에서
벌어진 오림대전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데 이는 적벽 보다는
오림이 당시의 전투들이 벌어지기에 더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진수가 쓴 三國志(삼국지) 정사에서 추측하면 조조가 강릉으로 달아나는 유비를 추격하는
목적 이외에 손권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였으며, 군사는 100만 대군이 아니라
20만 명의 군사 였을 것이라 보는데 조조 진영의 참모 장간이 손권의
진영으로 왔다가 계략에 빠져 상황을 오판하게 되었다는 점도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짚풀을 실은 배 를 보내 조조군의 화살을 모두 가져오게 했다는 점도 나관중이
지어낸 것이고... 배송지가 주석을 단 강표전 (江表傳) 에 의하면 조조가
주유에게 보낸 편지에 군영에 전염병이 돌아 조조가 스스로 역병을 방지하기
위해 배에 불을 지른 것 인데 주유가 화공으로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조조의 군대는 피로가 누적되었고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 전력이 약해진 상태 였으니
주유와 유비 연합군과 첫 해전에서 패해 물러나 강의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고 주유의
군대는 강의 남쪽에 주둔했으니 조조의 주둔지가 오림 인데 후베이성 훙후(洪湖) 입니다.
해전에 약했던 조조는 배를 묶어서 정박했고 겨울 북풍이 세차게 불 때 주유의 군대가
화공을 펼쳐 조조의 전함과 군영에 불이 나게 하였으니 “오주전(吳主傳)”에는
조조가 철수하면서 남아 있는 배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퇴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우월한 전력과 배경을 가진 조조의 패배 원인은 상대를 무시하고 전쟁의 목표가
뚜렷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니 즉, 손권과 유비의 연합을 막아
유비를 없애고 형주땅을 목표로 했다면 조조는 충분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고 본답니다.
그리고 한 모퉁이를 돌아가니 거기에는 이 정자를 찾은 문사들의 그림과 이름이
적혀 있으니 첫 번째 그림은 왕양명(王陽明) 이고 두 번째 그림은 주돈이
(周敦頤) 이며 세 번째는 백거이 고 네 번째는 이협 그리고 마지막은 도연명 입니다.
주돈이(周敦頤) 는 1017년 호남성 영주에서 태어났는데 염계(濂溪) 라는 호는 1072년에
장시성(江西省) 루산(廬山 여산) 개울가에 살면서 지었으며 푸젠성(福建省 복건성)
난안 사리참군일때 정호(程顥) 와 정이(程頤) 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광동전운판관(廣東轉運判官)을 거쳐 루산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집을 짓고 은거했습니다.
주돈이 는 중국 성리학의 틀을 만들고 기초를 닦은 인물로... 도가(道家) 와 불교의 주요
인식과 개념을 받아들여 우주의 원리와 인성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새로운 유학 이론을
개척했으니... 그의 사상은 정호ㆍ정이 형제와 주희 등을 거치며 정주학파(程朱學派)
라고 불리는 중국 유학의 중심을 형성했으니 바로 조선에 들어온 주자학(朱子學) 입니다!
주돈이 는 한(漢)나라 때 훈고학(訓詁學) 을 거치며 끊어졌던 성(性)과 도(道) 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되살려 유학을 새롭게 부흥시킨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저서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인성과 우주의 원리를 태극도(太極圖) 를 중심으로 설명하니
그와 정호 형제 및 주희는 조선 유학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먼 스승 이 되는가 봅니다.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이 하나 이며 태극이 음양(陰陽)으로 나뉘고 여기에서 다시 화(火)
ㆍ수(水)ㆍ목(木)ㆍ금(金)ㆍ토(土)의 오행(五行) 이 생겨나며 이를 근거로 인간의
선(善)ㆍ악(惡) 과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 의 오상(五常) 을 설명합니다.
“태극도설”에는 "무(無)에서 유(有)" 가 비롯된다는 도가와 불교 사상 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기(理氣) 철학 의 기본형식을 제시해 성리학 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주희는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를 지어 자신의 주된 이론적 근거로
삼는등“태극도설”의 해석은 후대의 유학 논쟁들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 집니다.
왕양명(王陽明) 은 명나라 유학자로 지배적 위치에 있던 주자학(朱子學) 에 대해 독자적
인 유학 사상을 내세웠으니 “지행합일'(知行合一)” 을 원리로 하는데... 그의 사상은
'물(物)의 이(理), 바로 우리 마음이며 우리의 마음 이외의 곳에서는 그것을 찾을수
없다'고 하는 말에서 보는 것처럼... '심즉리'(心卽理) 라는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입니다.
"지행합일" 은 지(知)와 행(行)이 모두 마음의 활용으로 하나 이니 주자가 지(知)에 중점을
두어 얘기한 '선지후행'(先知後行) 에 대립하는 것이며... 우리 마음의 양지(良知) 는
천리(天理)이고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선악을 직각(直覺) 하는 마음이 갖추어져 있는데
이것이 양지로 '지식을 넓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다'(致知格物) 는 실천도덕이 논해집니다.
도연명(陶淵明) 은 동진(東晋) 말기인 365년에 여기 주장의 시상 에서 태어났는데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 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로부터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이름이 높아졌으니...
도연명의 주요 작품으로는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및 “귀거래사” 등이 있습니다.
도연명은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 의 좨주(祭酒) 가 되었지만 얼마 안가서 사임
하는데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수 없이 진군참군
(鎭軍參軍) 등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 을 달래지 못해
41세 때 누이의 죽음을 핑계삼아 펑쩌현 현령을 사임한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때 퇴관성명서 라고도 할수 있는 “귀거래사(歸去來辭)” 를 지었으며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出迎)을 거절하고“나는 5두미(五斗米) 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小人)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하는데.... 향리의 전원에 퇴거해 괭이를 들고 농경
생활을 영위해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 에 도달했다 합니다.
민간생활 자체를 노래한 문학을 했으니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 가 있으며 고담(枯淡)의
풍이 서려 있으니 형식면으로는 대구적 기교 등은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과 매우 대조적이었으니“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 의 종(宗)”이라 평가를 받습니다.
도연명( 陶淵明) 은 노년기의 작품 8수와 장년기의 작품 4수 합쳐서 12편의
잡시(雜詩) 를 썼으니 도연명집(陶淵明集) 에 수록되었는데 그중
제1편이 人生無根蔕(인생무근체) 이고 12편이 裊裊松標崖(요요송표애) 입니다.
人生無根蔕(인생무근체) 삶이란 뿌리도 꼭지도 없이
飄如陌上塵(표여맥상진) 길위의 먼지처럼 떠 다니는 것.
分散逐風轉(분산축풍전) 나뉘고 흩어져 바람 좇아 돌다보니
此已非常身(차이비상신) 이미 변함 없는 나 자신이 아니로다.
落地爲兄弟(낙지위형제) 땅에 떨어지면 모두 형제거늘
何必骨肉親(하필골육친) 어찌 혈육만을 육친이라 하는가?
得歡當作樂(득환당작낙) 기쁨을 얻거면 반드시 즐거워 하고
斗酒聚比隣(두주취비린) 한 말 술이라도 이웃과 어울려 마셔야지.
盛年不重來(성년부중래) 젊음은 다시 오지 않으며
一日難再晨(일일난재신) 하루에 아침이 두 번 오지 않는다.
及時當勉勵(급시당면려)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라.
歲月不待人(세월부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裊裊松標崖(요요송표애) 하늘하늘 벼랑 끝에 소나무
婉孌柔童子(완련유동자) 어여쁜 모습이 연약한 동자 같구나.
年始三五間(연시삼오간) 십오 년이 지나고 나면
喬柯何可倚(교가하가의) 높은 가지 어디에 기댈 수 있겠는가?
養色含津氣(양색함진기) 외양을 가꾸고 진기(津氣)를 머금으면
粲然有心理(찬연유심리) 마음에 품은 뜻 밝게 빛나리라.
첫댓글 주유의 적벽대전로 완전히 진실은 아닌것 같습니다.
꾸며낸이야기일수도 있군요.
길거리에서 이발을 하는 모습이 다소 생소합니다.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이 많이 나오네요
진수의 삼국지 기록은 간략하니.....
좀 과장된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