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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당선자 스크랩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3월호, 제161회 신인상 수상작] 이제, 훌훌 털어 버려요 - 김애숙
신아출판 추천 0 조회 91 15.03.05 23:1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라면을 먹고 나서 어머니의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푸른 나무, 울창한 숲, 아름다운 꽃과 탐스런 열매, 눈과 비바람, 폭풍과 천둥, 그렇게 그리다가 도화지 귀퉁이를 조금 남겨 두었습니다. 언제 채워질지 모르는 그 공간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으로만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참을수록 더 커지는 그 그리움을 견딜 수 없을 때쯤이면 다시 한 번 훌쩍 친정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이제, 훌훌 털어 버려요          김애숙


   서부산업도로를 달려 친정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워하는 어머니는 갑작스런 딸의 방문에 얼굴 가득 기쁨이 넘칩니다. 건강한 모습에 안심은 했지만, 그동안 자주 전화조차 드리지 못한 송구함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습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점심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어머니, 맛있는 칼국수 먹으러 가요.”
   “오랜만에 외식을 해야겠구나.”
   어머니의 표정에 생기가 돕니다. 아까 친정집에 오면서 가까운 곳에 새로 생긴 식당을 보아 두었거든요. 꽁보리밥에 열무김치를 넣어 비벼먹고 나니, 냄비 속에서는 바지락이 보글보글 끓고 있습니다. 주방장은 칼국수와 감자옹심이를 직접 넣어 주는 친절을 베풉니다. 밀가루 반죽을 냄비에 뜯어 넣어 주면서는 옛날 수제비 맛도 느껴보라고 합니다. 둘이 먹기엔 많을 것 같았던 칼국수를 국물까지 마시고 나니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에 행복이 느껴집니다. 고된 삶이 만들어 준 무성한 주름을 보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시게 될까를 걱정하다 후회가 앞섭니다.

   일제 강점기 때 고등과까지 공부한 어머니는 작달만한 키에 순박한 얼굴을 한 천상 여자였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딸이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도록, 열여덟 살에 시골 종갓집 외아들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생활은 넉넉했지만 시조부모님과 시부모님을 모시려니 고생도 많았고, 특히 고부간의 갈등은 아주 심했습니다. 아버지는 6·25 사변 후 도의원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고, 그 뒷바라지는 순전히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설상가상이라 했던가요. 할머니는 그런 어머니를 갈라놓으려고 누명을 씌웠고, 영문도 모르는 효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남매가 눈에 밟혀 떠나지도 못하고 힘든 세월 속에서 가슴의 상처만 키워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 분풀이를 며느리에게 했었나 봅니다. 이 끔찍한 일들이 울타리 밖을 넘는 일은 없었기에, 이웃들은 어머니가 이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는 사실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습니다.

   칼국수를 후루룩거리며 먹다가, 갑자기 그곳에서 살게 된 이유가 궁금하여 어머니께 여쭈었습니다. 뜻밖의 질문에 당황하는 표정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단다.”
   “혹시, 아버지를 찾아온 여자 때문에?”
   “그 일을 알고 있었냐?”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잠시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한두 방울 맺히는 듯했습니다. 얼마나 아팠으면, 구순 노인이 저런 모습을 보일까 싶었습니다. 자식에게 제 아비를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오늘날까지 숨겨온 어머니의 마음에 서귀포 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겹쳐집니다. 모른 체할 걸 그랬나 봅니다. 괜히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한두 번 헛기침을 해봅니다.

   어머니는 환갑을 넘기던 해, 마흔셋 먹은 외아들마저 하룻밤 사이에 먼 세상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가슴에 묻은 아들 때문에 오래사는 게 미안하다며 칠순과 팔순 잔치도 마다했습니다. 60여 년을 함께한 남편마저, 의료사고로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이승을 버렸습니다. 아직도 어머니의 마음 한구석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바늘들이 박혀 있을지 모르겠습니 다. 이젠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편히 여생을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집에는 매화를 심은 큰 고무화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살펴보니 화분 밑 시멘트 바닥이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화분을 움직여 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가까스로 화분을 옮겨놓자 매화나무 뿌리가 시멘트 바닥을 뚫고 땅속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뿌리의 힘이 얼마나 강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추운 겨울 모진 바람 속에서도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뿌리 때문이었습니다.
   매화나무 뿌리를 전정해주고 자리를 옮겨놓자 나무도 한결 시원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도 수십 년 묵은 비밀을 털어 놓았으니 이제 마음이 가벼워졌겠지요. 하지만 나의 가슴은 쉬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매화는 해마다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열매를 맺겠지만, 기약할 수 없는 어머니의 봄날은 빨리도 갑니다.

   며칠 뒤, 점심시간에 라면을 끓여 식탁에 올려놓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뭐 하고 있어요?”
   “심심해서 라면 먹으려고 한다.”
   “나도 지금 라면 먹으려던 중인데. 우린 통하는 게 있나 봐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이건 우연이 아닐 거라 믿습니다. 조물주께서 어머니와 나 사이를 마음의 탯줄로 다시 한 번 연결시켜 주신 게 아닐까요. 그 텔레파시의 끈을 통해서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요.
   라면을 먹고 나서 어머니의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푸른 나무, 울창한 숲, 아름다운 꽃과 탐스런 열매, 눈과 비바람, 폭풍과 천둥, 그렇게 그리다가 도화지 귀퉁이를 조금 남겨 두었습니다. 언제 채워질지 모르는 그 공간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으로만 채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참을수록 더 커지는 그 그리움을 견딜 수 없을 때쯤이면 다시 한 번 훌쩍 친정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김애숙  ---------------------------------------------------
   한국방송통신대학 중어중문과 졸업, 백록수필문학회 회원

 

 

당선소감


   매화 꽃 소식과 함께 들려온 당선 소식에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무언가 배우고 싶어 발을 디딘 수필 공부는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몇 년 동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열강을 해주시는 교수님과 나이에 상관없이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시는 문우들의 표정에서 더 큰 힘을 얻어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아직은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지만 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수필가가 되겠습니다.
   미흡한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매 강의마다 열정으로 이끌어주신 교수님께 특별한 경의를 표합니다. 백록수필 문우님들께도 고마운 말씀을 전합니다. 끝으로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가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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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3.19 17:23

    첫댓글 김애숙 선생님!

    등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 어머니! 불러도 불러도 싫지 않은 이름이지요.
    등단 작품이 마음에 울림으로 와 닿습니다..

    도반의 글벗으로서 환영~ 환영합니다.
    앞날에 문운이 창대하시고,
    영광과 행운이 늘 함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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