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의 말씀과 구원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율법의 말씀은 형이하학(육체의 예법)이라면 구원의 말씀은
형이상학(이성.로고스)이 되겠다.
이것을 간단히 한 쌍으로 말해서 “율법”과 “구원” 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이상학(구원.이성.로고스)은 하나님의 본질이고, 형이하학(율법.육체의예법)은
하나님의 본질을 비유로 감추어서 꼭꼭 싸매어 놓은 포장지에 불과하다.
그런데 성경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두 형이하학으로, 즉 육체의
예법으로
감추어 놓았기 때문에 비유라고 하는 것이다.
신구약 모두 동일하게 비유와 상징이라면 왜 굳이 신약이니 구약이니로
구분해 놓은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 단세포적으로 보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동일한 비유일지라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본디 영이신데, 이천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 예수님으로
오셨으며
오늘날 다시 하나님이 새 이름으로 재림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람하나님으로
두 번 오시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
하나님이 두 번 사람하나님으로 오시는 일을 일컬어 “실상” 이라고 한다.
반면, 이 같은 실상을 미리 예언해 놓은 것이 구약제단이며 구약성경이
된다.
대대적인 실상의 본무대 이벤트를 벌리기 전에 그에 대해 역시
대대적인
예언이라고 하는 리허설 제단이 필요했다(구약제단).
그 이유인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패역해서 예언을 미리 해놓지 않으면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실상의 역사가 아니고, 인간 스스로
이룩한
영광스런 역사라고 자화자찬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그리 정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리허설인 구약제단이든 실상의 예수님(신약)의 때이든 모두
말씀이 육체의 예법인 형이하학이지만, 즉 비유이지만 전자는 단순히
예언으로서의 비유이고 후자는 비유이긴 해도 그 비유가 단순한
예언을
뛰어넘어 하나님(예수님)이
실제로 이루시는 실상으로서의
예언이 된다는 뜻에서다.
(실상임에도 왜 여전히 비유를 사용하게 되는
이유를 밝혀야만 하겠지만,
그리고 그것이 아주 중요하지만 서론이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함)
그러면 이제 신약성경의 예수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는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 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것은
구약제단에서 완전히 육체의 예법으로 행했던 물질의 십일조,
혹은 소득의 십일조를 행하라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을 향한 의와 인과 신이므로 하나님의 형이상학적
십일조를
바치라는 뜻이요, 후자는 물질의 십일조이므로 형이하학적 십일조를
바치라는 뜻이다.
형이상학적 십일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첫열매인 택한자 사람십일조를
뜻한다. 결코 물질이 아니다. 예수님은 왜 형이상학적인 십일조와
형이하학적인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는가? 즉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본질적인 십일조와 비본질적인 물질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는가?
예수님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자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자로 오셨으므로 형이상학적으로도
그리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음은 물론이며, 그리고 그 형이상학적이라는
것도 개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을 확연히/명백히/낱낱이 풀어주신 일은 거의 전혀 없었다.
오히려 육체의 예법을 들어 주야장창 비본질적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과 저것의 중간자로 오셨으므로 구약의 비유에서는
멍에를 가볍게 하러 오셨다고 했다. 구약은 전적으로 육체의 예법으로만
섬기는 일이므로 멍에가 이만 저만이 아니게 무거웠었다.
그 육체의 예법으로 섬겨야 하는 율법이 헤아릴 수 없이 모래알
같이
많았고, 그 육체의 예법으로 섬겨야 하는 율법을 범했을 때는
무시무시하게 무서워서 죽어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것이 인간을 고통속에 빠뜨리는 멍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의 예법으로 섬겨야 하는 이러한 구약의 멍에를
가볍게 하러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율법의
멍에를
헤아려 본다면 사실 몇 가지 되지 않음을 단박에 알게 된다.
예컨데
1)십일조,
2)물세례(예수님이
주신게 아니고 제자들이 주었지만),
3)유월절 의식,
4)금식,
5)성전예배,
6)기도 등, 참으로 몇가지 되지 않음을 알게 되는데
이는 그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해주신 결과인 것이다.
구약에서는 아주 가끔씩 형이상학적 개념이 희미하게 보이긴 해도
구약제단은 워낙 그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이 오직 육체의 예법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물질의 십일조를
바치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만약 물질십일조를 범할 시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범인이
되고
말기 때문에 아무도 물질십일조 바치는 일로 문제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또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시게 된 오늘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세대 사람들은 어떤가?
여전히 기성교단에 속해 있다면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즉 구약제단의 그 많은 멍에 중에 십일조의 멍에를
안겨주셨기 때문에 마땅히 바치는 것이 합당한데도 불구하고 특히
십일조에 대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약삭빠른 뺀질이들이 되었다.
교회에서 십일조를 바쳐야 할 일반신도들은 돈이 아까워서 내기
싫고
목자들은 십일조를 받아야 자신들의 생활비와 교회운영이 넉넉해지기
때문에 서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느니 바치지 않아도 된다느니
하는 논란이 분분함을 보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알곡을 거두는 재림주의 추수 때이다.
재림주의 추수 때는 물질의 십일조가 아니고 하나님의 첫 열매
택한자
사람 십일조를 받으시는 때이다. 돈 없이 값없이 구원받는 때가
온 것이다.
즉 아무 멍에 없이, 진리로 자유케 된 때가 온 것이다(진리로 영생).
하지만 때를 분별치 못하고 여전히 파종기인 기성교단에 속한 소경들이여,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함이 어떠한가를 생각해보라. 즉 너희가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함이 마땅하겠으니 이사야의 말처럼
[사55:1,2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물질십일조
없이 재림주의
생명의 말씀을 먹으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십일조를 바치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헛되게
십일조를 바치느냐)]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성교단에서 오늘의 재림주 제단으로
유월하여 오면
비유의 물질십일조를 더는 바치는 것이 아니다.
그 비유로 된
물질십일조가 본질적으로는 오늘의 추수철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첫열매 사람십일조가 되기 때문이다.
원문카페:https://cafe.daum.net/kkys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