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둘람공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단순 막무가네 성령파에서 부터 신학박사까지.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하지만 어떤 의견이라도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한다. 즉 차이와 다름은 인정하고 서로 배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신앙이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하는 더러운 성향이 있지만 아둘람에서는 은사파에서 유물론적 신앙고백까지 다양한 신앙이 공존한다.
아둘람의 다음 단계는 다원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 다른 모습을 가지는 것을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차원 자체가 다를 경우는 다원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물은 각기 적절한 차원 속에 존재한다. 아마존 정글에 사는 사람과 고도의 산업사회에 사는 사람이 같은 사고를 가질 수가 없다. 이처럼 자신이 물질적으로는 후기산업사회에 살고 정신문화적으로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을 느끼는 사람과 그런 현실을 체감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같은 사고의 틀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차원은 높고 낮음의 의미가 아니다. 즉 dimension 은 位階가 아니고 層次인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적 사고와 공동체적 사고는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고 차원의 문제이다.
한 번은 장애인 학교 운동회를 참관하게 되었는데 달리기를 하는 동안 보통 학교 운동회처럼 서로가 남보다 빨리 달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아들이 연실 뒤를 돌아 보면서 뒤에 쳐진 친구에게 “빨리 와! 빨리!”를 독촉했다.
그 모습을 보고 많은 학부모들이 배꼽을 잡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죽자고 앞만 보고 달려도 자칫하면 경쟁에 뒤쳐질 수가 있는 각박한 세상에서 그들은 뒤에 쳐진 친구들을 걱정하는 천사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경쟁의 의식이 없는 세상인 것이다. 차원은 바로 이런 것이다.
비대면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대면 모임 보다 오히려 효과적으로 인간성을 알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얼굴만 보고 하는 말만 듣기 때문에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다른 것, 내가 모르는 것, 내게 낯선 것과 만나고 소통할 때는 반드시 일정한 길이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봐야 하고, 시간을 두고 어떻게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비대면이 대면 보다 오히려 더 능률적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모니터를 통해서 보는 것일지라도 누구의 얼굴을 1년 이상 1 주일에 한 번씩 몇 시간 동안 볼 수 있다면 그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의 구조나 성격 등이 들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히 자기 주장을 많이 할수록 자기를 더 많이 들어내게 되어 있다. 그가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을 이야기를 함으로써 듣고 알게 된다.
그런데 자기가 말하는 것에 의하여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들어나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자기가 옳다는 생각으로 이야기 할 때인 것이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잘못 생각하고 주장하는 증세가 나타나면 그 사람을 회피하게 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비대면 모임을 통하여 짧은 시간에 상대방에 대하여 빨리 파악하게 되고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위에서 말한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