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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원문보기 글쓴이: 풍경 송은석
도산전통예절원 3기생들은 선비정신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경북안동으로 또 한번 배움의 길을 떠났습니다.. 지난번 도산서원,퇴계종택,퇴계태실,육사문학관에 이어 이번엔 농암 이현보선생 종택과 한국국학진흥원에서의 교육이 주 목적이였죠. 1박2일의 선비문화수련과정인데 잠자리는 퇴계종택 초입에 있는 열화재에서 해결을 했습니다. 물론 열화재에서도 ‘선비정신’ 강의는 계속 되었죠..
성재 금난수 선생의 孤山亭(日洞精舍)을 지나..
35번 국도를 타고 청량산을 향해 달리던 버스가 농암유적지 이정표를 보고 낙동강 쪽으로 우회전, 좁은 시멘트 길을 힘들게 지나갑니다. 좌측으로 낙동강을 끼고 있는 마을 길인데 불쑥불쑥 강 너머로 나타나는 깎아지른 절벽과 푸른 소나무를 한 가득씩 안고 서 있는 그 산세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이 곳이 바로 소나무가 아름다워 이름 붙었다는 가송리嘉松里 마을입니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좁은 길을 몇 차례 좌우로 굽어 돌다 한 순간 마치 마지막 고비를 만난 듯 힘들게 전,후진을 수 차례 반복하여 무사히 고개를 우측으로 틀자 차창 밖 낙동강 너머로 깎아지른 절벽 취벽이 나타나고 그 취벽 바로 아래로 제비 집처럼 터를 잡은 고산정(孤山亭)이 나타났습니다.. 고산정 또는 일동정사一洞精舍라 불리는 이 곳 정자의 주인은 성재 (惺齋) 금난수 (琴蘭秀) 선생(1530~1604 본관은 봉화)으로 퇴계선생의 제자였습니다. 낙동강에 의해 산 끝자락이 잘려 나갔다 하여 孤山이라 불리는데 이 곳 고산정이 들어앉은 고산 일대는 산수초목이 참으로 절묘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였죠.. 풍류를 알고 즐겼던 옛 사람들이 이렇듯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고산정을 두고 어찌 시 한 수 읊지 않았겠습니까? 고산정 주위의 풍광을 읊은 선현들의 시문을 모은 고산지(孤山志)라는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전하지는 않고 다만 소무헌 금서술이 쓴 서문만이 전한다고 하는데 고산지는 청량산에서 시작하여 도산잡영에서 끝을 맺고 있는데, 퇴계선생을 비롯하여 후인들의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만약 지금이라도 전해진다면 누정문학으로의 가치가 매우 높을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고산정을 노래한 퇴계선생의 시 한 수를 감상해봅니다. 도산서당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 서편으로 난 ‘퇴계 옛길’을 따라 청량산을 향하던 퇴계선생께서 이곳 고산정 건너편 孤山자락에 이르러 강 너머 고산정에서 공부하고 있을 제자 성재 금난수를 부르는 상황을 시로 표현한 것인데 이 시는 고산기슭의 한 바위에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고 전합니다. 또한 성재선생의 아들 금각이 쓴 일동록日洞錄에는 “퇴계선생께서 이 곳 일동정사를 다녀가시면 매양 바위에다 이름을 남기셨는데 아직도 그 글자가 남아 있다.” 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청량산 아래 낙동강을 따라 도산14곡의 이름을 손수 다 지으셨다는 퇴계선생.. ‘日洞主人’으로 시작되는 이 시 한편을 통해서도 퇴계선생의 풍류와 도산사랑의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퇴계선생의 글에 따르면 당시 고산정 부근에는 금씨와 손씨 두 집안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이 사진은 금번 답사지인 가송리 올미재 농암종택의 복원 전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사진 중앙 강 좌측으로 터를 닦아 놓은 모습이 보입니다. 가보진 못했지만 강 건너편 산에 농암 이현보 선생의 묘소가 있다는군요..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이 사진은 현재 농암유적지로 복원 중에 있는 농암종택의 원경입니다.. 농암종택은 본래 도산서원 하류 2km 쯤에 있었던 안동지역 영천이씨 집성촌인 부내(分川)마을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 수몰로 부내마을은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죠. 62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종택 긍구당을 비롯해 애일당,분강서원 등의 유적들은 이 지역 사방으로 분산 이건 되었다가 농암선생의 17대 주손인 이성원선생의 끈질긴 ‘보종’노력에 의해 부내마을이 물에 잠긴 지 어언 30여 년이 지난 지금.. 바로 사진 속의 모습처럼 가송리 올미재 지역에 다시 복원되고 있는 것이죠.. 우연인지는 몰라도 부내마을을 떠나 종택이 새롭게 자리 잡은 이곳 가송리 올미재 강 건너 편 산에 종택의 원 주인인 농암선생의 묘소가 있다고 합니다.. 金體形금체형 요대수腰帶水가 종택을 감싸 안는 명당 풍수에는 지리오결地理五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生氣를 잘 갈무리하고 있는 이른바 명당 진혈처를 찾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지리오결에 의거해 그 조건들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산의 맥을 뜻하는 용龍, 생기가 뭉쳐 있는 곳인 혈穴, 그 혈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나 인공구조물 등을 뜻하는 사砂, 혈 주변의 물을 뜻하는 수水, 방향을 뜻하는 좌坐가 바로 그것들 입니다. 지리오결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농암 종택의 경우라면 개인적으로는 水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고 싶네요. 풍수에서는 산은 움직이지 않으니 정적인 것으로 보아 陰으로, 반대로 물은 움직임이 있고 동적인 것으로 보아 陽으로 취급을 하는데 음과 양은 서로 교합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잉태하듯 산과 물이 서로 아름다운 형국으로 교합을 해야 그 결과물로 명당이 만들어 지고 그 명당 안에 진혈이 응결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곳 가송리 농암종택의 물은 어떠한가? 기본적으로 풍수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취급하는 물은 명당을 활이나 허리띠를 두른 듯 유정하게 감싸 안고 돌아 나가는 물이며 반대로 명당지를 배반하고 반대쪽으로 달아나는 물을 凶水로 보죠. 참고로 풍수용어로는 전자의 경우를 요대수,금성수金星水라 하고 후자의 경우를 반궁수反弓水라 합니다.. 사진 속 농암종택의 물을 한번 보세요.. 태극의 형태로 농암종택을 감싸 안고 흘러가는 물이죠? 이런 형국을 두고 ‘산태극,수태극’이라 했거늘.. 산과 물이 서로 유정하게 교합하는 이 곳 농암종택 터를 두고는 길지,흉지에 대한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풍수에서는 물을 보고 재물을 가늠하는데 이 곳처럼 맑고 깨끗한 물이 터를 천천히 감싸 안고 흘러가면 재물이 쌓인다고 보며, 반대로 직선 또는 반궁수 형국으로 빠르게 달아나며 흘러가는 물은 있던 재물조차도 흩어지게 한다고 보죠.. ‘음.. 水는 得한 터로 봐야겠다..’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물에는 나성羅星을 쌓았고 북쪽에는 방풍림을 조금 남겨두었으나 종택 뒤 주산자락은 왜 깎았을까?? 나는 이 사진 한 장 속에서 몇 가지 풍수학의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물의 중간쯤에 보이는 돌로 쌓은 낮은 보에 시선이 머물렀습니다.. 물론 좀더 하류 쪽인 학소대 앞의 물 위로 머리를 내민 바위들이 더 좋기는 하나 강물 가운데 인위적으로 낮게 쌓아 놓은 보 역시 풍수의 관점에서는 吉水를 더욱 좋은 吉水로 만드는 비보裨補를 정확히 처방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물의 흐름을 늦추고 완만하게 만든다는 것은 명당 안으로 들어온 재물을 좀 더 붙들어 놓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최근 농암종택의 경우 종택체험프로그램이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는데(이미 올해 7,8월은 예약이 끝난 상태) 찾아온 손님들의 여름철 물놀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보를 쌓아 유속을 늦추고 유량을 늘이는 편이 좋겠죠. 종택 바로 앞 강물이 물놀이 하기 좋다는 것은 그만큼 손님을 끌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니 이것이 바로 재물을 붙드는 것 아닐까요?? 두 번째는 북쪽의 방풍림에 대한 것입니다.(사진 좌측 미류나무처럼 보이는 나무군락) 이곳 농암종택은 특이하게도 서향을 하고 있습니다. 卯坐로 건물이 놓여 있는데 이는 이 곳에 터를 잡을 때 좌향보다는 물을 먼저 고려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하여튼 방위를 잘 생각하시고 위 사진을 보세요.(나중에 다른 사진을 참고할 수 있음) 북서쪽으로 강물이 흘러나가는데 물이 흘러나간다는 것은 그 방향으로 바람이 들고 나는 길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따라서 농암종택은 강물이 흘러나가는 북서쪽 물길(바람길)을 통해 겨울철에는 매서운 북서풍이 그대로 치고 들어오는 형국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바닷가 마을의 방풍림을 생각해보세요. 안동 화회마을의 소나무 숲. 가까이는 대구 화원읍의 남평문씨세거지의 화원쪽 방향에 조성되어 있는 소나무 숲을 생각해 보시구요. 실제 대규모로 조성된 방풍림은 훌륭한 바람막이 역할을 할 수 있으나 사진 속의 방풍림처럼 몇 그루의 소규모 방풍림은 실질적으로는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종택에서 바라볼 때 북서쪽 바람 길쪽에 놓여 있는 큰 키의 미류나무 몇 그루는 시각적,심리적으로 방풍림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생각 같아선 현재 남아 있는 방풍림을 분강서원 앞쪽까지 연장 조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인데 이는 분강서원 앞쪽까지만 나무가 있어도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인 종택에서 바라볼 때는 시각적,심리적으로는 북서쪽 바람 길은 완전히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죠.. 맨 위 종택 복원 이전 사진을 보면 최초 이 지역에는 방풍림이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세 번째는 종택 뒤 주산 자락을 ‘왜’ 저렇게 넓게 손을 댔느냐는 것인데 금번 답사를 갔을 때는 종택 사당 바로 뒤편 일부를 제외하고는 나무와 풀들이 자라 표시가 잘 나지는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양택이든 음택이든 주산자락은 손을 대지 않거나 또는 최소로 하는 법인데..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언제 인연이 닿으면 주인어른께 주산자락을 넓게 손을 댄 연유를 한번 여쭤보아야겠다..’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사진 중앙의 방풍림이 보입니까? 조금 더,,조금만 더 방풍림을 조성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는데.. 풍수학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곳 농암종택의 경우는 철저히 풍수이론에 따라 터를 잡은 곳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복원이 진행됨에 따라 언젠가는 반드시 저 자리에 더 많은 나무들이 심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복원된 종택 문간채입니다..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종택의 옛 모습입니다.. 문간채 우측 뒤로 사랑채가 보이고 그 뒤 산 쪽으로는 사당도 보입니다.. 눈을 감고 답사 당시를 한번 떠올려 보니.. 건물의 배치는 옛 모습 그대로 정확하게 복원이 되어 있었네요..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어느 나무가 구인수(九印樹) 인가??
옛 사람의 집에는 늘 그렇듯 보기 좋은 나무 한 그루 서 있기 마련이죠.. 농암종택 홈페이지 사진자료에 따르면 바로 위 사진 속의 나무를 농암 당시부터 있어 왔다는 회나무‘구인수(九印樹)'라 이름 붙여 놓았는데..( 회나무가 아니라 學者樹라 불리는 회화나무를 말하는 듯..) 그런데 홈페이지 사진자료를 살펴보던 중에 구인수와 관련해 의문 나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구인수 나무는 위 두 사진 중 아래쪽 나무가 아니라 위쪽 나무일 가능성이 있어 보였기 때문인데…(홈페이지에는 아래쪽 나무를 구인수라 설명)구인수의 유래에 대해 농암종택 홈페지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당시 농암 집안에서는 이 두 사위를 '두 서방'이라 했고, 종택 마당에는 거목의 '회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구인수九印樹'라 불렀다. 이는 당시 농암의 아들, 사위 등 9남매가 벼슬을 하여 수연을 하기 위해 모이면 이 나무에 9개의 관인 끈을 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 틀림없이 구인수는 종택 마당에 있었다고 되어 있거든요.. 사견입니다만 1. 종택마당(실은 대문 밖이지만)에 서 있는 나무라면 위 첫 번째 사진이라 볼 수 있고 2. 또한 농암 당시부터 있어 왔다면 최소로 잡아도 수령이 사진을 찍을 당시만해도 40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인데 첫 번째 사진 속 나무는 400년 老巨樹로 볼 수 있지만 아래 사진은 몇 개의 나무를 모아 심기를 한 형태로 도저히 400년 수령으로는 볼 수 없을 것 같기에… 구인수 문제도 언젠가 인연이 닿는다면 한번 주인어르신을 찾아 뵙고 또 여쭤 봐야겠네요…
종택 사랑채입니다.. 참고로 농암유적지를 복원하면서 종택,명농당,강각,임강사는 옛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되살려 새롭게 복원을 했고, 긍구당,애일당,분강서원,신도비,농암각자는 예전 것 그대로 이건을 했다고 합니다. 농암(1467-1555)보다는 28세 연하였던 신재 주세붕(愼齊 周世鵬)선생은 아래와 같이 농암종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의 거처는 비록 협소했으나 좌우로 서책이 차 있으며, 마루 끝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담 아래에는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마당의 모래는 눈처럼 깨끗하여 그 쇄락함이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積善之家 必有餘慶 종택 사랑채 마루에 걸려 있는 선조임금 어필입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했거늘.. 저에게 사주를 가르쳐주신 스승(??)께서 사람이 타고난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시며 적선,기도,풍수,독서,사주라는 다섯 가지 방법을 일러 주신 적이 있었는데 이 중 제일 첫 번째가 적선이라 하셨습니다.. 풍수공부를 할 때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얘기가 바로 積善之家라야 천하명당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였죠.. 농암선생은 선조임금으로부터 직접 ‘적선’이라는 어필을 받았으니 이는 적선지가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라.. ‘팔자도 고치고, 천하명당도 얻게 되리라…..’
조상의 위업을 소홀히 말고 이어 받아 성취하라는 620여년의 역사를 지닌 門中의 家寶 긍구당 농암선생 이전부터 있어온 별당건물인 긍구당肯構堂입니다.. 농암 당시에 건물이 너무 낡아 몇 번의 중수를 했다지만 62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죠.. 긍구당이라는 당호는 영천자 신잠의 전서체 글씨로 서경의 한 구절에서 채용을 한 것인데 ‘조상의 위업을 소홀히 하지 말고 이어 받아 성취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네요.. 종택과 문중의 大小事가 바로 이 곳 긍구당에서 논의 되었다 하니.. 600여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해.. 분강촌 시절과 이제 새롭게 자리잡은 가송리라는 공간을 초월해 영천이씨 예안파 문중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는 자랑스런 가보家寶라 할 수 있겠죠..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옛 긍구당의 모습입니다.. 답사 당시 보았던 낙동강을 바라보고 석축 위에 놓여 있는 긍구당은 사진 속 옛 모습과 상당히 비슷합니다만,, 알고 보니 뒤쪽으로 딸린 부속건물들이 없었군요… 어쩐지 뭔가 허전하고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싶었는데… 옛 사진자료 속에 그 비밀이 숨어 있었네요..
개인적으로 전서체 글씨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더라구요.. 글자를 알고 보면 ‘아차’ 싶을 정도로 한 눈에 들어오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도무지 무슨 글자인지… 전서체에 얽힌 부끄러운 이야기가 하나 떠오릅니다..
사진은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하빈면 묘골 박황가옥이라 불리는 삼가헌 사랑채에서 만난 미수 허목 선생의 전서체입니다.. 글자가 쉬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만 정말이지 한자도 못 읽었습니다.. 나중에 글자를 알고는 기절할 뻔 했죠.. 그 글은 다름아닌 우리 집 가훈이였습니다… ‘예의염치효제충신’ 기가 차더군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던… 전서체에 얽힌 부끄러운 사연..
농암 홈페이지에는 긍구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는데 ‘농암은 긍구당 마루에서 85세인 1551년 7월 29일 생일을 맞이하여 '금서띠(金犀帶)' 두른 굽은 허리로 자제들로부터 수연을 받고 그 회포를 국문시조 '생일가生日歌' 한 수로 표현한 바 있다. 공명이 끝이 있을까 수요는 하늘에 달린 것 문득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는 모이라이3자매 여신이 떠오릅니다.. 맏이인 클로토 여신은 인간의 운명의 베를 짜서 명을 만들어 주고, 둘째인 라케시스 여신은 미래의 실마리를 풀어가며 삶의 은혜를 나누어주고 막내인 아트로포스 여신은 가위를 들고 있다가 ‘내가 때가 되면 너의 명줄을 잘라 운명을 거두어 가리라’ 한다는 세 여신 말입니다.. 아마도 아트로포스 여신의 가위가 농암선생의 명줄 앞에서는 망설였나 봅니다.. 평생에 걸친 효행, 적선 그리고 부귀공명을 버리고 산촌에 은거하며 신선처럼 살았던 농암선생.. 그 고귀한 명줄은 '거역할 수 없는 여신의 가위'로도 쉽게 자를 수 없었나 봅니다..
종택의 사랑채,안채,사당,긍구당 그리고 저 멀리 맨 끝에 보이는 분강서원과 농암 신도비는 이미 이건과 복원을 마친 상태였고 명농당은 복원 중에 있으며, 애일당은 현재 터만 닦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사진 속 멀리 분강서원 옆에 하얀 비닐을 덮어 놓은 공간이 보이는데 바로 이곳에 애일당이 이건 되어진다네요.. 사진 좌측에 짙은 검푸른 색의 절벽이 하나 보입니다.. 바로 먹황새 서식지 천연기념물200호로 지정된 학소대(鶴巢臺)입니다.. 옛날 분강촌 시절 애일당 역시 낙동강 가의 기암절벽 귀먹바위 옆 자연암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데 아마 사진 속 학소대 옆에 애일당을 이건해 온다면 분강촌 시절 애일당 못지 않은 운치 있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벽력암이 곧 농암이였고.. 벽력암 병풍 아래엔 生,死를 通하는 石門이 있었다. 사진은 종택마당에서 낙동강 쪽으로 바라본 전경입니다.. 가뭄 끝이라 수위가 많이 낮았지만 참으로 운치 있는 모습이었죠.. 사랑채에서도.. 긍구당에서도,, 고개만 살짝 돌리면 만날 수 있는 풍경. 눈앞의 검푸른 빛을 띤 단애는 '벽력암'(霹靂巖)이라 불립니다. 이 곳 농암종택의 17대 주손이신 이성원선생의 글에 의하면 옛 문헌과 구전을 살펴보아도 종택 앞에 서 있는 저 벽력암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벽력암 단애 위에 84세의 김태기 옹 내외와 병든 딸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후 김 노인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이때 이성원 주손께서 벽력암에 살고 계시는 김태기 옹으로부터 벽력암의 유래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데.. 주손께서는 다음과 같이 글로 옮겨 놓으셨더군요.. “노인은 벽력암에 대해서도 2번을 말했는데, 각기 다른 날 다른 말로 했다. 하나는 절벽의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벼락치듯 하여 벼락소라 했고, 하나는 강원도의 뗏목들이 여기에 오면 벼락치는 소리를 하며 절벽에 부딪치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신선의 말씀이기에 이치에 합당했다.” 큰 홍수가 났을 때 계곡 주변에 있다 보면 섬찟한 소리를 들을 수 있죠.. “쿠르릉,,쿠르릉..” 큰 물에 쓸려 돌 굴러가는 소리 말입니다.. 밤이면 그 소리가 더욱 커져 계곡일대를 무겁게 뒤 흔들어 놓는 그 무시무시한 돌 굴러가는 소리.. 이현보선생의 자호가 된 농암의 유래는 다들 아시는 것처럼 분강촌 시절 종택 앞의 큰 바위 곁을 지나가는 물소리가 너무 커 귀가 먹을 정도였다 하여 그 바위의 이름이 귀먹바위로 불렸고 이 귀먹바위에서 농암이라는 자호가 나온 것이죠.. ‘음….’ “ 농암선생 당신께서는 참으로 복도 많은 분이십니다.. 살아 생전엔 분강촌 귀먹바위와 애일당을 벗삼아 신선처럼 사시더니,, 당신 떠나신 지 400여 년이 지나 분강촌 귀먹바위가 물에 잠겨 사라지는가 했더니만 당신의 17대 주손께서 어찌 이렇게 좋은 터에다 당신의 종택을 새롭게 일으켜 세웠을까요??.. 귀먹바위도 벽력바위도 다 농암이였습니다..그려..” 잠시 풍수 이야기를 하나 해보죠.. 풍수에서는 사진 속 벽력암처럼 터의 앞쪽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산을 안산案山이라 하거든요.. 안산은 터에서 바라보았을 때 높이가 얼굴 높이 정도가 가장 적당한 것으로 보고 산의 모양은 바르고 안정된 모습이라야 吉格으로 친답니다.. 사진 속 벽력암의 경우는 우측으로 멀리 가면서 기울어지는 형상입니다만 종택 바로 앞쪽의 모습은 일자형에 가까운 관모형,병풍형 또는 곳간에 쌓여 있는 곡식더미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단정하니 일단 느낌이 좋죠.. 절벽 단애임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적당하니 위험스레 깎아지른 듯한 느낌보다는 종택 앞쪽으로 거대한 자연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형상입니다.. 제 눈은 벽력암을 병풍바위 즉 병암屛巖으로 인식을 했습니다.. 한 폭 산수화가 멋 떨어지게 그려져 있고 풍류를 읊은 시 한 수 새겨져 있을 병풍바위 말이죠.. 잠시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가운데 바위 아래쪽에 문이 하나 보인다..그 문은 관직으로 나아가는 문일까?, 곳간으로 들어가는 문일까?? 아님 풍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일까???.’
산태극,수태극 종택을 한 바퀴 크게 감싸 안고는 학소대 앞으로 유유히 꼬리를 감추며 빠져나가는 물입니다.. ‘그렇다.. 물은 저렇게 빠져나가는 것이지..’ 풍수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파구破口(물이 빠져나가는 곳)의 모습을 하고 있는 농암종택의 파구입니다.. 물이 빠져나가는 방향은 절대로 열려 있으면 안되죠. 사진처럼 물이 꼬리를 감추듯 산으로 닫혀 있어야 하죠.. 이곳 종택의 물은 정방丁方(태괘兌卦) 得水에 임방壬方(리괘離卦)破口입니다.. 다시 말해 남에서 물이 들어와 북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는 뜻인데 풍수 九星法 중 坐에서 물의 得破를 보는 후천괘법으로 보면 득수는 淨陰坐에 정음득수, 파구는 정음좌에 정양파구로 길하다고 볼 수 있는 물이죠.. 포태법胞胎法을 한번 돌려보았으면 참 좋았을 것을 시간관계로 용맥을 확인치 못해 아쉽네요.. 참고로 풍수에서는 파구에 사진 속 학소대 같은 바위들이 양쪽에 서서 마치 수문장 같은 형국을 이루고 있는 것을 한문捍門이라고 하여 매우 길하게 친답니다.. 농암종택의 경우는 건물의 坐를 정할 때 물을 첫 번째로 고려했고 벽력암 안산을 두 번째로 고려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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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재克復齋 공자는 仁을 물은 제자 안연에게 “자기를 이겨 禮에 돌아가면 仁이 되는 것이니 하루 동안이라도 자기를 이겨 禮에 돌아가면 천하가 곧 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셨죠..克己復禮
경서재敬恕齋 공자는 자신의 도는 곧 仁이라 하셨고 증자는 자신의 도를 忠과 恕로 보았는데 ‘恕는 如心爲恕’라 하니 如心은 곧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 이니…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옛 분강서원의 모습입니다.. 현재 이건 복원된 분강서원과 똑 같죠.. 동,서재, 강당,사당의 위치와 모습이 말입니다.. 종택도 그러했지만 여하튼 옛 모습 그대로의 정확한 복원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이 터에 들였을까??
옛 분강서원내 사당(자료출처, 농암종택)
필봉의 어깨가 기울어져 있다 좌측으로 보이는 봉우리처럼 산이 붓끝처럼 삼각형으로 뾰족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경우를 풍수에서는 필봉(문필봉)이라 부르죠.. 음택,양택을 막론하고 혈처에서 바라보아 모양이 바르고 잘생긴 필봉이 있으면 그 필봉의 정기를 받아 문장가가 난다고 하죠.. 또한 이 곳 필봉은 풍수의 성수오행으로 보면 비견比肩이 되어 형제를 잘 되게 만드는 기운을 지닌 형제봉이라고도 칭할 수 있죠.. 그런데 필봉의 어깨가 조금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학문을 의미하는 붓끝 형상의 필봉(형제봉), 강건함과 부귀를 의미하는 솥을 뒤집어 놓은 듯한 형상의 노적봉 ,그리고 또 다른 봉우리들… 각 봉우리에서 물을 향해 달려 내려오는 맥이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산의 지맥을 용이라고 보고 용들이 어디를 향해 내려오고 있나요?? 좌측으로 현재 복원 중에 있는 명농당이 보입니다.. 옛 자료에 따르면 명농당 앞에는 '영금당(影襟塘)'이라는 연못도 있었다는데… ‘필봉이 기울어져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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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이 벌채되어 속살을 들어내고 있는 종택 영역 사당 뒤편의 터… 뭔가 건물이 들어서겠죠??
농암선생 신도비..
옛 농암신도비(자료출처, 농암종택)
옛 농암선생 신도비 사진입니다..
땅이 내려 앉았다. 과연 행주형行舟形일까??
이런.. 복원한지 일년도 채 아니 되었을 건데… 장마철도 시작되기 전에 .. 바닥까지 갈라진 것으로 보아 터다지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나 봅니다..
농암종택이 들어선 터는 안동 화회마을 같은 전형적인 행주형行舟形 형국이라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만 여하튼 뻘,모래 등의 세립질이 퇴적이 되어 형성된 지형으로 난개발에 아주 약하고 지하수에 탄산칼슘이 많아 물이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죠..
행주형 형국의 경우를 두고.. 풍수에서는 두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죠.. 하나는 우물을 많이 파면 배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다 하여 매우 꺼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터의 가장 기준이 되는 지점에 배의 돛대 역할을 하는 바위,나무,사당 등을 둔다는 점입니다.. 실재로 행주형국의 경우는 지하수 개발 등에 의해 지반이 내려앉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하며,, 행주형국 돛대의 경우 해인사의 돛대바위, 하회마을의 양진당 옆 느티나무 등을 예로 들 수 있죠..
그렇다면 농암종택에서는 어디가 돛대자리일까??
愛日堂애일당이 세워질 자리입니다…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옛 애일당愛日堂 모습입니다.. 농암 선생께서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지은 정자로 어버이의 늙어감에 대한 두려움과 어버이에 대해 효도할 수 있는 하루하루의 날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에서 붙인 당호입니다..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농암종택 홈페이지에는 애일당에 대해 아래와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농암종택 홈페이지에는 애일당에 대해 아래와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1519년 9월 9일(음), 농암은 이날 안동부사의 신분으로 '남여귀천'을 막론하고 안동부내 80세 이상 노인을 함께 초청한 실로 파격적인 잔치를 열었다. 이를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이라 했다. 그리고 은퇴를 전후하여, 고향(도산)에서 70세 이상 노인을 초청했는데, 마침 그 숫자가 아홉이고 '애일당'에 모였기에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했다. 농암은 이런 경로잔치 때마다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노인들과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렸다. '애일당구로회' 근세까지 450여년을 이어와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당시 농암가문에는 유난히 장수자가 많았는데, 농암은 89세, 아버지는 98세, 어머니는 94세, 조부 84세, 증조부 76세, 고조부인 입향조 84세이며, 삼촌(鈞, 직장) 96세, 외삼촌(權受益, 문과급제, 호조참판)92였다. 그리고 아들 6형제도 문량 84세, 희량 65세, 중량 79세, 계량 82세, 윤량 74세, 숙량 74세를 살았다.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런 광경을 유추해보면 농암가문의 경로전통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구로회'에 대한 농암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우리 고향은 늙은이가 많았다고 했다. 가정 계사 가을 내가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내려와 성친하고 수연을 베푸니 이때 선친의 연세가 94세였다. 내가 전날 부모님이 모두 계실 때 이웃을 초대하여 술잔을 올려 즐겁게 해드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만 계시는지라 잡빈은 제외하고 다만 향중에 아버지와 동년배인 80세 이상의 노인을 초대하니 무릇 8인이었다. 마침 향산고사에 '구로회九老會'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날의 백발노인들이 서로서로 옷깃과 소매가 이어지고, 간혹은 구부리고 간혹은 앉아있고 편한 대로 하니 진실로 기이한 모임이 아닐 수 없다....이런 연유로 '구로회'를 열고 자제들에게 이 사실을 적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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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의 몇 부분을 보면, 1569년 봄 퇴계는 나이(70세), 회원정족수(9명), 형(李澄)의 참여관계로 사양했으나 가을부터는 참여했다.
1569년 가을 애일당속구로회 회원성명과 나이
琴憲77,
內禁 南應箕72, 察訪 李澄72, 察訪 李文樑72,
學生 禹希信71, 學生 權矩70, 學生 金璜70, 李滉69
(사진자료출처, 농암종택홈페이지)
종택 뒤편 농암선생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입니다..
농암각자 (자료출처,농암종택)
청량산 낙동수 산태극,수태극 감아 흐른 곳에
소나무 아름다운 마을 있어
600여 년 터를 다시 짓는다.
積善之家 必有餘慶 이라 했던가
농암선생 생전에 무슨 積善 그리 많이 하셨기에
귀먹바위 聾巖 닮은 벽력암이 병풍처럼 펼쳐 있고,
애일당 품을 학소대도 여기 우뚝 서 있다.
강 건너면 저승이고 병풍 뒤도 저승이라
강 너머 병풍 뒷산
농암의 천년유택 거기 있다지 않던가
벽력암 병풍 아래 石門 하나 있어
生과 死가 그 門으로 通하는 것을
석문을 향하는 배의 돛대여..
긍구당
아…
농암의 물건인가 조물주의 물건인가
有情한 낙동수야 긍구당을 휘어 감아라.
(옛 사진 및 자료 등은 농암종택 홈페이지에서 참고를 했습니다..)
도산예절원 선비문화체험과정 중 농암종택방문을 답사기 형식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내용 중에 혹시라도 농암종택에 폐를 끼치는 부분이 없었을까? 하고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그리고 농암 17대 주손이신 이성원 선생님의 각별한 보종 노력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주손을 비롯한 문중원 모든 분들이 조상의 음덕을 입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가뭄 끝에 내리기 시작한 단비는 도산 열화재의 밤을 적시는데.. 우린 한잔의 술과 차로 마음을 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뒷정리를 해주셨던 세 분 여 선생님들…
밤 12시 정각까지라는 약속을 지켜주셨던 마지막 술좌석의 선생님들..
열화재의 마지막 순간...
아침체조 퇴계의 활인심방 日日是好日 나의 생명에 대한 감사의 말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과 천지 만물과 이 우주 虛空界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心身을 깨끗이 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이 좋은 날을 맞이 합니다..”
안동호를 배경으로 한 국학 진흥원의 案山과 안대
국학진흥원의 우백호
좌청룡
끝으로 금번 행사를 준비해주신 도산전통예절원,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국학진흥원 관계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1박2일 전 과정 동안 수련생들을 통솔해주신 문윤근선생님과 채종목 선생님, 비까지 내리는 밤늦은 시간 자신께서 손수 준비하신 떡(기지떡,인절미)과 수박 외에 고기,음료수,술 등 많은 양의 장을 흔쾌히 봐 주신 안동의 김진희 선생님. 역시 김진희 선생님과 함께 수박을 준비해주신 강신혁 선생님, 비 오는 밤 대구에서 안동까지 격려차 방문을 해 주신 일천 선생님, 박영순 선생님, 송미화 선생님 그리고 첫째 날 밤까지 하루 꼬박 수련생과 함께 하셨던 안상근 선생님….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가뭄 끝의 반가운 단비를 맞으며 대구로 돌아오는 길.. 역동 우탁 선생 유허비를 지나칠 쯤 물안개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동호 어느 소나무 섬에 수 많은 백학들이 군락을 이뤄 마치 흰 도포자락을 매달아 놓은 듯 소나무 가지 마다 하얗게 앉아 있었다… 안개비 속 안동호는 내게 그렇게 말한다..
선비처럼 살라… 풍경….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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