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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연기법(緣起法)의 깨달음에서 무아(無我), 공(空), 해탈(解脫), 열반(涅槃)의 가르침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인도의 전통사상인 브라만교의 핵심인 범아일여설(梵我一如說)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뿌리째 뒤집는
혁명적인 법설이었습니다.
붓다 이후 2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불교계내에서도 무아(無我)와 열반(涅槃) 등의 불교 최상위의
붓다 설법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논란이 뜨겁게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에 박태원 교수의 명저 '선수행이란 무엇인가?'의 부록에 실려있는 이와 관련한 심도있는 연구결과물인
'무아(無我)는 1인칭의 삭제인가, 새로운 1인칭의 등장인가?'라는 논문을 몇 차례에 걸쳐 보내드리겠습니다.
난해하지만, 이번 기회에 불교 특유의 '무아사상(無我思想)에 대한 바른 견해를 수립하기 바랍니다.
분당에서 혜원 문 창 아 드림
*<저자의 오온무아관(五蘊無我觀)의 내용 요약>
[<모든 현상은 관계와 변화 속에 상호조건적으로 발생한다>라는 연기(緣起) 법칙성은 오온(五蘊) 현상을 관통한다.
따라서 오온(五蘊)은 ‘관계와 변화에 열린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을 지시하며,
오온(五蘊) 무아의 법설은 그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을 ‘현상의 사실 그대로’ 이해하게 하는 새로운 인간관이다.
무아(무아, anatman)는 ‘아트만(atman)으로서의 자아’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펄자는 오온(五蘊) 무아(無我) 통찰을 ‘사실 그대로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인간관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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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는 1인칭의 삭제인가, 새로운 1인칭의 등장인가?]
- 화쟁(和諍)과 무아(無我) 그리고 원효(元曉)- 박태원 교수
1. 화쟁(和諍)과 무아(無我) 그리고 1인칭의 문제
쟁론(諍論)은 자기주장의 무조건적/절대적 타당성을 추구하는 언어 주체들의 상호 배제적 충돌이다. 이에 비해 화쟁(和諍)은 자기와 타자의 주장이 지닌 타당성을 조건적/연기적으로 포착하고 타당성들을 서로 어울리게 하여 더 좋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상호 포섭적 언어능력이자 태도이다. 이 화쟁(和諍)은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발생한다>라고 하는 붓다의 연기(緣起) 통찰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원효(元曉)는 ‘주장을 성립시키는 조건들의 인과계열’(門)의 식별과 상호 포섭을 화쟁(和諍)의 주요 원리로 제시하는데, 이는 연기(緣起) 통찰의 핵심을 화쟁(和諍) 문제 상황에 적용시키는 원효(元曉) 특유의 역량이다.
화쟁(和諍)은 붓다의 연기법이 지닌 합리성과 문제 해결력에 새롭게 접근하게 한다. 연기법(緣起法)에 대해 기존의 교학이 보여주는 해석학적 면모에 새로움을 추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교학적 이해는 붓다의 연기(緣起) 통찰이 추구하는 ‘삶과 세상의 연기적(緣起的) 합리화’를 제한(制限)하거나 심지어 굴절(屈折)시키는 경우도 있다. 연기(緣起) 통찰을 발원(發源)으로 하는 붓다의 모든 법설(法說)은 근원에서부터 새롭게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연기(緣起) 통찰과 직접 맞물려 있는 무아(無我) 통찰은 그 출발점이다.
모든 정신적/물질적 현상은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이 있다. 그리고 발생 원인이 되는 모든 조건은 예외 없이 변화하며, 원인 조건들의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현상 역시 그 내용이 변한다. 또 어떤 현상의 발생에 연관되는 원인 조건은 단수(單數)가 아니며, 원인 조건들과 발생 현황들 사이의 인과적 거리나 양상도 다채롭다. 아울러 인간 스스로 선택 가능한 조건들이 있고 선택 불가능한 조건들이 있다. 선택 가능한 조건들 가운데 ‘사실 그대로에 의거한 이로움’을 발생시킬 수 있는 내적/외적 조건들을 성찰하여 선택해 가는 노력과 과정이 공부(功夫)요 수행(修行)이다. 연기(緣起) 성찰과 무아(無我) 통찰 그리고 화쟁(和諍)은 바로 그런 공부와 수행의 길라잡이다.
인간은 관심과 주장을 언어에 담아 논리를 갖춘 이론으로 펼친다. 논리와 이론의 양상이나 수준은 천차만별이지만, 언어를 매개로 관심과 주장을 펼친다는 점은 인간의 보편적 사태이다. 침묵이나 몸짓도 언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쟁론(諍論)과 화쟁(和諍)은 인간사를 관통하는 근본 문제이다. 쟁론(諍論)은 언어인간 특유의 문제이고, 화쟁(和諍)은 언어인간 고유의 가능성이다
쟁론(諍論)과 화쟁(和諍)은 모두 언어 주체의 문제이다. 쟁론(諍論)은 자기 관심과 주장의 조건적 발생에 무지(無知)한 비(非)연기적 언어 주체의 불합리한 태도이고, 화쟁(和諍)은 관심과 주장의 조건적 발생을 인지한 언어 주체의 합리적 역량이다. 따라서 쟁론(諍論)과 화쟁(和諍)은 공히 1인칭 언어 주체를 조건으로 발생하는 양상이다. 쟁론(諍論)은 관심과 주장의 조건성을 외면하는 1인칭의 불합리한 태도이고, 화쟁(和諍)은 관심과 주장의 조건성을 성찰하여 ‘현상 발생의 사실성’을 추구하는 1인칭의 합리적 역량이다. 그런데 화쟁(和諍)의 철학적 근거는 연기법(緣起法)이지만, 연기 통찰의 존재론적 표현인 무아(無我) 법설에 대한 붓다 후학들의 시선에서는 ‘무아(無我)와 1인칭의 문제’에 관해 혼란이 목격된다.
2) 무아(無我)는 1인칭의 삭제인가, 새로운 1인칭의 등장인가? - 붓다의 오온(五蘊)/오취온(五取蘊)과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
경험은 예외 없이 변화하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 경험 범주에서 포착되는 정신적·신체적·물질적·현상들에서 불변(不變)의 것은 목격되지도 확보되지도 않는다. 만약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가 그 시선을 불변(不變) 자아(自我)나 불변(不變) 존재(存在)로 향한다면 성공할 수 없다. 1인칭 주체에 해당하는 불변·독자의 지속적 실체나 본질은 없다. 붓다 무아(無我) 법설의 핵심이기도 하다. 아마도 붓다는 이 점을 가장 철저한 수준에서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밝혀낸 최초의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붓다의 무아(無我) 통찰은 1인칭 주체/자아에 대한 통념적 시선과 기대에 반한다. 철학적 통념과도 충돌한다. 그런 만큼 충격적이다. 이해와 수용이 어렵다. 더욱이 이 무아(無我) 통찰은, 어떻게 해서든 불변·독자·순수·절대·전능의 궁극실재(窮極實在)를 수립하려는 선행 인도 전통철학·종교의 태도와 주장을 뿌리째 전복시키는 내용이어서, 인도철학과 문명의 기득권을 장악한 주류에게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발생·유지·변화·소멸한다. 그리고 모든 조건은 관계 속에 변화한다>라는 연기(緣起) 법칙은 모든 현상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따라서 연기법(緣起法) 통찰에 의거하고 있는 <1인칭 주체/자아에 불변·독자의 지속적 실체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붓다의 무아(無我) 통찰은, 비단 자아뿐만 아니라 모든 현상에 적용해야 한다. 붓다의 계승전통에서 거론되는 <자아에 불변·독자의 본질이나 실체는 없다는 계승전통에서 거론되는 <자아에 불변·독자의 본질이나 실체는 없다는 인무아(人無我)/인공(人空)과 <모든 현상에 불변·독자의 본질이나 실체는 없다는 법무아(法無我)/법공(法空)>의 문제는 모두 무아(無我) 통찰에 속한다. 특히 붓다 법설에 대한 아비담마의 해석학에서 ‘무상한 현상들을 발생시키는 무수한 불변·실재인 자성(自性, svabhava)들’을 설정하는 비(非)연기법적 사고가 교리로 수립된 것은 ‘법무아(法無我)/법공(法空)’ 문제를 거론하게된 결정적인 교학사적 배경으로 보인다. 원효는 불교 교학/해석학 전통에서 등장한 이 문제를 주목하여 삶과 세상을 왜곡·오염시키는 두 가지 장애를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의 문제로 총괄한 후,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범주롤 구분하여 그 내용과 치유방식에 대해 상세히 논한다. 『이장의(二障議)』라는 저술은 원효(元曉)의 탐구력과 성취가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붓다의 무아(無我) 통찰은 이른바 ‘오온 무아(五蘊無我)’ 법설로 제시된다. 1인칭 주체의 구성물을 설명하는 통념적 방식은 “정신·마음·영혼[心]‘과 ’물질·신체[身]의 결합으로 설명하는 심신론(心身論)이다. 심신(心身)의 본질적 차이를 설정하는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든 신심(心身)의 상호교섭을 인정하는 심신합론(心身合論)이든, 1인칭 주체를 두 가지 구성물의 결합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일반적이다. 세속적 상식과 철학적 시선이 공유하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1인칭 주체를 ‘변화와 상호관계가 적용되는 다섯 가지 현상의 요소들의 상호결합체’로 분석하는 붓다의 오온설(五蘊說)은 관행과는 다른 특이한 방식이다.
오온(五蘊)의 내용물인 ‘색깔과 모양을 지닌 신체적 현상들’[色蘊]·‘느김 현상들’[受蘊]·‘개념적 지각 현상들’[想蘊]·‘의도적 선택작용 현상들’[行蘊]·‘의식현상들’[識蘊]은 모두 1인칭 주체의 고유한 정체성[人格]이나 ‘타자와 구별되는 자기’를 성립하는 핵심 현상들이다. 인간은 신체에 해당하는 ‘색깔과 모양을 지닌 현상들’[色蘊]의 개별적 특성을 근거로 삼아 ‘자기 감각’을 경험한다. 또 ‘느낌 현상들’[受蘊]을 통해 대상과 환경에 대한 호감[끌림과 긍정]·비호감[거부와 부정]·‘쏠리지 않는 느낌[안정감]들을 매개로 ‘반응 주체인 자기’를 확인하고, ‘언어로 분류된 개념적 차이에 대한 지각 현상들’[想蘊]을 통해 ‘구분된 범주에 의한 ‘지각 주체인 자기’를 확인하고, ‘언어로 분류된 개념적 차이에 대한 지각 현상들’[想蘊]을 통해 ‘구분된 범주에 대한 지각 주체’인 ‘자기’를 경험한다. 아울러 여러 선택지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특정한 것을 선택하는 의도들[行蘊]을 매개로 ‘선택 주체인 자기’를 확인하고, ‘기억·비교·분석·판단·평가·추리·반성하는 의식작용’(識蘊)을 통해 ‘관점적 주체로서의 1인칭 자기’를 경험한다. 그런데 이들 오온(五蘊) 현상 그 어떤 것에도 불변(不變)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독자적 본질이나 실체는 없다. 심신(心身) 현상을 통제하거나 주관하는 불변(不變)의 단독자(單獨者)도 없다. ’나‘ 및 ’나의 것‘은 그에 속하는 그 어떤 불변(不變)·실재(實在)도 없이 역동적·관계적으로 형성되는 ’차이 정체성(正體性)‘이다. 오온(五蘊) 구성물의 의미를 이렇게 보면 오온(五蘊) 법설의 수립 취지가 분명해 진다. 오온(五蘊) 법설은 ’1인칭 자아감(自我感)을 형성하는 인간 몸의 핵심 조건 다섯 가지‘에 대한 연기적(緣起的) 성찰로서 ’사실 그대로의 1인칭 주체‘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동시에 1인칭 자아감(自我感)에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를 부여하는 ’1인칭 주체에 대한 허구(虛構) 관념‘을 비판하기 하기 위한 이론 장치이다.
그런데 붓다의 연기(緣起) 통찰에 따르면, 오온(五蘊)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현상 범주는 모두 내적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유지·변화되는 동시에, 오온(五蘊) 각각의 현상은 타인·대상·사회·환경 등 외부세계와의 상호관계·상호작용을 통해 역동적으로 형성·유지·변화된다. 인간의 경험구성과 경험 범주를 ’내부감관 능력과 외부 대상세계의 상호관계·상호작용‘을 통해 설명하는 ’오온(五蘊)·12처(十二處)·18계(十八界) 이론‘은 그러한 통찰을 담고 있다. 12처(處)는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몸의 ’6가지 감관능력(六根,육근)/육내처(六內處-눈·귀·코·혀·신체·의식의 능력)과 각각의 감관능력에 상응하면서 상호작용하는 ‘6가지 대상세계’[육경(六境)/육외처(六外處)-‘유형적 대상’(色)·소리(聲)·냄새(香)·맛(味)·감촉(觸)·‘개념화된 현상’(法)]을 합한 개념이다.] 내부 감관능력과 외부 대상세계는 언제나 연결하면서 상호관계·상호작용하고 있다는 통찰의 표현이다. 그리고 18계(界)는 12처(處)에 ‘눈 능력을 매개로 발생하는 의식현상’[眼識]·‘귀 능력을 매개로 발생하는 의식현상’[耳識]·‘코 능력을 매개로 발생하는 의식현상’[鼻識]·‘혀 능력을 매개로 발생하는 의식현상’[舌識]·‘신체 능력을 매개로 발생하는 의식 현상’[身識]·‘의식 능력을 매래로 발생하는 의식현상’[意識]의 ‘6가지 의식적 현상’[六識]을 더한 것이다. 즉 감관능력과 감관대상이 관계 맺을 때는 언제나 ‘의식능력’(識)이 결합되어야 인간의 경험현상이 발생한다는 성찰이 18계(十八界)설이다.
‘오온(五蘊)·12처(十二處)·18계(十八界) 이론’에서는 두 가지 의미가 주목되어야 한다.
첫 번째 의미는, 세계 경험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경험현상은 몸(五蘊)의 내부 능력(六根)과 외부세계(六境)의 연접(連接)과 상호관계 및 상호작용에 의한 발생·형성·유지·변화·소멸된다는 것이다. ‘신체 현상들’(色蘊)을 유지하려면 내부 오온(五蘊)들과 외부세계의 연결·상호관계·상호작용이 ‘모두 그리고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눈 능력’(眼根)과 ‘눈을 매개로 한 경험’(眼識)의 발생에는 여러 ‘신체 현상들’(色蘊)과의 상호관계·상호작용이 있어야 하며, 환경·타인·사회 등 외부세계와의 접속과 적절한 상호관계·상호작용이 동시에 필요한다. ‘느낌 현상들’(受蘊)· ‘개념적 지각 현상들‘(想蘊)·‘의도적 선택작용 현상들’(行蘊)·‘의식 현상들’(識蘊)의 형성과 유지 및 변화 역시 마찬가지다.
두 번째 의미는, 인간의 경험은 모든 감관능력에 예외 없이 ’의식능력‘(意根)이 결합되어야 발생한다는 점에서 주관적/관점적 속성을 지닌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모든 것을 관점적/주관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현상들의 차이를 분류·기억·비교·판단·평가·분석·추리·반성하는 의식능력을 발전시킴으로써 고도화된 의식 주체인 언어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이 언어적 의식능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모든 현상을 ’관점적 시선‘ 아래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감관능력의 작용에 의식능력을 결합시킨다는 것은, <모든 것을 관점적으로 경험한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관점적‘이라는 개념을 ’주관적‘이라는 개념과 호환시켜 사용한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관점적/주관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온(五蘊)으로 설명되는 인간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오온(五蘊) 인간에서는, 몸 내·외부의 조건들이 상호관계 맺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오온(五蘊) 현상의 발생·형성·유지·변화·소멸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오온(五蘊) 인간은, 특유의 의식능력으로 인해, 그 현상들을 ’관점적/주관적 경험‘으로 처리한다.> 이러한 오온(五蘊) 주체들의 상호 개방과 접촉, 상호관계 및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전개되는 ‘다층·다체계적 열린 역동체’가 인간 개인이자 인간 세상이다. 따라서 오온(五蘊)이라는 연기적(緣起的) 인간관은, ‘독자·불변·단수·단층의 닫힌 개체’로 보는 인간관을, ‘관계·역동·다층·다체계·복합의 열린 주체’로 보는 인간관으로 대체하고 있다.
또한 오온(五蘊) 인간의 이러한 의미는 무아(無我)·깨달음·해탈·열반과 관련해서는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인간은 고도화시켜 온 언어적 의식능력을 포기하거나 삭제할 수 없다. 죽음이 아니고서는 포기나 삭제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언어적 의식능력에서 물러나려는 퇴행적 방식으로는 의식능력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의 선택은 의식능력을 더 고도화시키는 것, ‘의식능력의 새로운 진화’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무아(無我)·깨달음·해탈·열반은 그런 선택이다. 따라서 무아(無我)·깨달음·해탈·열반은 ‘관점적 1이칭 주체/주관성의 삭제’가 아니라 ‘새로운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구현’이다.>
다섯 가지로 분류된 오온(五蘊) 현상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상호작용하면서 각자의 특징을 발현한다. 어느 하나라도 변하지 않거나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1인칭 주체의 생명 활동과 정체성 형성·유지는 어렵다. 게다가 그 상호작용의 범주는 개인의 몸 내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 및 세계를 포함한다. 내·외부세계에 모두 접속하여 상호작용 속에 역동적으로 구성·전개되는 ‘오온(五蘊)’은, 타자 및 세계와 연접하면서도 경계 지어지는 ‘관점적 1인칭 범주’에 관한 지칭이다. 오온(五蘊)은 자아감의 영역이고, 타자의 인격과는 구별되는 자기 인격이나 자기 정체성을 지칭한다. 오온(五蘊) 가운데서도 특히 ‘의식 현상들’(識蘊)이 지닌 통합작용은 오온(五蘊)을 ‘통합된 자아 감각’으로 경험하게 하는 구심점이고, 관찰자로서의 ‘관점적 자아 감각’을 발생시키는 원심점이다.
현대철학이 주목하는 ‘서사적 자아 구성’ 역시 이러한 오온(五蘊)을 매개로 삼아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현존 자아는 자신이 속한 사회문화적·언어적 공동체의 선행(先行) 서사에 의해 구성된다.>라는 측면을 주목하는 것이 ‘서사적 자아’ 담론의 초점이다. 나의 자기 이해는 자기가 속한 사회 문화적 그물망의 자아 스토리텔링에 의해 구성된다는 ‘이야기로서의 자아’는, 자아가 불변의 본질을 지닌 지속적 실체 자아가 아니라 사회·문화·언어적 관계망과 상호작용하면서 역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밝히는 통찰이다. 그런 점에서 무아(無我) 통찰의 현대적 유형이다. 서사적 자아 담론에도 <자아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고/말했던 아야기로만 엮어진 것>이라는 주장과, <자아는 다양한 서사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며, 서사와 관련되지만 서사 이전의 어떤 종류의 전(前) 서사적 자아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으로 갈라지지만, 모두 ‘역동적/관계적으로 구성되는 자아’를 주목한다. 그런데 사회·문화· 공동체의 자아 관련 스토리텔링이 개인 자아의 구성에 개입할 때, 그 매개로 오온(五蘊)을 주목하게 된다. ‘신체적 현상들’(色蘊)·‘느낌 현상들’(受蘊)·‘개념적 지각 현상들’(想蘊)·‘의도적 선택작용 현상들’(行蘊)·‘의식 현상들’(識蘊)에 관한 다향한 스토리텔링이 서로 엮이어 ‘자아 감각’과 ‘자기에 대한 이해’를 역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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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는 1인칭의 삭제인가, 새로운 1인칭의 등장인가?]
- 화쟁(和諍)과 무아(無我) 그리고 원효(元曉)- 박태원 교수
붓다는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현상들의 무더기’인 오온(五蘊, pancakkhandha)과 ‘집착에 물든 오온’인 오취온(五取蘊,pancupadanakkhanda)
이라는 개념을 구분한다. 오온(五蘊)은 ‘변화와 관계의 오온(五蘊) 현상들’로서 ‘사실 그대로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이고, 오취온(五取蘊)은 ‘불변·동일·독자적 본질/실체 관념을 덧씌운 오온(五蘊)’으로서 ‘무지(無知)로 왜곡된 허구적 자아’이다. 붓다의 오온 무아(五蘊無我) 법설은 ‘무지(無知)가 세운 허구적 1인칭 자아’(五取蘊)을 ‘사실 그대로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五蘊)으로 바꾸려는 새로운 인간 이해이다. <현재의 현상적 주체에서 열반(涅槃)이 구현된다>라는 니까야/아함의 현법열반(現法涅槃) 개념은 이 ‘사실 그대로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五蘊)이 구현되는 새로운 지평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인과적 연속은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허구적 불변자아(不變自我)를 수립하는 무지(無知)’를 조건으로 삼아 전개되는 ‘1인칭 자아의 인과적 연속’>[五取蘊의 인과계열, 輪迴,윤회]가 하나이고, <‘현상의 연기적 발생에 대한 사실 그대로의 이해’를 조건으로 삼아 펼쳐지는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인과적 연속’>[오온의 무아(無我)적 인과계열, 진여법계(眞如法界)]가 다른 하나이다.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인과적 연속성을 이렇게 구분하면 이른바 ‘무아윤회(無我輪迴)’ 논란의 난점을 해소하는 길도 열린다. 이 점은 다시 후술한다.
고유대명사로 호명되는 ‘1인칭 자아’에 대한 통념은 본질/실체론의 다양한 변주들이다. 인도 전통의 아트만을 비롯하여 데카르트의 자아에 이르기까지, ‘1인칭 대명사’에게는 불변의 동일성을 지닌 본질이나 실체가 내재적 혹은 초월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되었다. 고유대명사나 인칭대명사로 지칭되는 1인칭 자아는 개별 자아들의 특징적 차이들을 명확히 구분하여 문제를 해결해 가는 유용한 언어 용법일 수 있다. 오온 무아(無我)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에도 그러한 인칭대명사의 효용과 필요는 유효하다. 이에 관한 붓다 자신의 직접적 언명도 확인된다. 다만 통속적 인칭대명사 용법이 대명사에 해당하는 불변·독자의 본질이나 실체를 상정하는 것과는 달리, 오온 무아(無我)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은 본질/실체를 부여하지 않고 차이 구분의 실용적 필요에 따라 인칭 언어 기호를 사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오온 무아(無我)는 새로운 언어 용법과 언어 주체를 등장시킨다. 언어에 본질/실체를 상정하지 않고 실용적 필요에 응하여 사용하는 이 새로운 언어 용법과 언어 주체는 비단 인칭대명사 용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이 명사이거나 서술적 기술이거나 간에,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유형의 내용규정(개념화)을 본질화/실체화 없이 펼쳐낸다. 필자가 보기에, 선종 선불교에는 이 새로운 언어 용법과 언어 주체를 창발적으로 드러내는 통찰과 사례들이 널려 있다. 선불교를 언어 초월적 신비주의의 깨달음의 체계로 읽어내는 시선으로는 이 면모가 포착되지 않는다.1)
그런데 무아(無我)에 대한 붓다 후학들의 이해 가운데는 혼란이 목격된다. 크게 두 유형의 혼란이 있다. (‘혼란’이라 표현한 것은 그런 현상이 오해나 일탈이라고 보는 필자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하나는, 오온 무아(無我) 법설을 ‘1인칭 주체의 완전한 해체나 삭제’로 간주하는 시선이다. 무아(無我)에 대한 환원론적 이해와 허무주의적 이해가 이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오온 무아(無我)를 ‘변화와 관계에서 벗어난 불변·독자의 궁극 자아에 관한 소식’으로 보는 시선이다. 인도 전통 아트만 관념의 연장선에서 ‘참 자아’(眞我)를 추구하는 시선이다. 불교 내부의 변형 아트만 사상이다.
붓다는, 자아(自我)를 비롯한 모든 존재나 현상을 ‘전혀 없음(無)’의 측면에 치우쳐 이해하는 관점과 ‘항상 있음(有)’의 측면에 치우쳐 이해하는 관점을 각각 ‘단견(斷見)/무견(無見) 및 상견(常見)/유견(有見)의 오류’라고 비판한다. 전자는 허무주의의 오류이고, 후자는 초시간적 영원주의의 오류이다. 이 두가지 관점은 모든 ‘불변의 본질/실체에 대한 기대’에 연루되어 있으며 <조건에 따라 발생·유지·변화·소멸한다>라고 보는 연기적 이해에 어긋난다는 것이, 붓다가 비판한 이유이다. 붓다 이후에는 이러한 통찰이, ‘단상(團常)/유무(有無) 2견(二見)의 변견(邊見)’과 ‘비단비상(非團非常)/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中道)’를 대비시켜 존재와 현상의 ‘허구’와 ‘사실 그대로’를 거론하는 사유방식의 원형이 되어 다양한 논리 방식으로 계승된다.
‘허무주의(斷見, 無見)와 초시간적 영원주의(常見, 有見)의 오류’는 ‘변화에 대한 인간의대응’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능적 자아감각은 ‘불변자아(不變自我)’로 치우쳐 있다. ‘자아감의 인정’은 생물학적 본능이자 요청인데, 변화로 인한 상실과 좌절은 안정적 자아감을 상시적으로 훼손하고 위협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보는 일관되게 ‘자아감 안정을 위협하는 변화의 훼손과 불안에 대응하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언어·종교·철학·관습·제도·문화의 발달 과정을 일관하는 것은 ‘변화의 자아 위협에 대한 대응’이다. 그리고 이 대응의 본능적·일반적 방식은 ‘불변 주소지의 확보를 통한 변화 위협의 방어’이다. 안정적 자아감이 변하지 않고 지속하기를 희구하는 본능적 기대는, ‘시간을 초월한 불변 자아/세상/존재의 주소지 설정’으로 이어진다. 초시간적 영원주의(常見, 有見)의 오류는 그렇게 발생한다. 반면, ‘불변 거주지’를 희구하다가 그 부재(不在)만 확인할 뿐 새로운 대응을 확보하지 못하면, 모든 현상과 존재의 ‘허무 심연’에 빠져들곤 한다. 허무주의(斷見, 無見)의 오류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안정(安定)을 위한 불변(不變)’을 추구하는 본능적·일반적 방식은 세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 번째는 ‘경험의 발생 구조’에 관한 무지(無知)의 오류이다. 모든 경험은 반대항들의 상호 지지에 의해 발생한다. 불안·고통·불만·불행을 경험하지 못하면 안정·즐거움·만족·행복의 경험도 없다. 모든 경험은 반대항들과 운명적으로 짝지어 있다. 반대항들과의 동거와 상호의존은 경험 구조의 ‘본래 그러함’(本然)이다. 따라서 ‘안정 경험’만의 독자적 불변과 영속을 추구한다면, 안정 경험의 발생 구조 자체가 허물어져 어떤 안정 경험도 불가능하다. ‘안정을 위한 불변·독자의 추구’가 오히려 안정 경험을 박탈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두 번째는 ‘변화의 의미’에 대한 편향적 파악의 오류이다. 변화는 삶과 자아감의 안정을 위협하고 박탈하기도 하지만, 훼손하거나 불안한 삶과 자아감을 복구하거나 치유하기도 한다. 삶·세상·자아감들의 실체는 그 어느 시·공간에서도 완전하게 안정적이거나 만족한 상태가 아니다. 안정과 불안, 만족과 불만, 즐거움과 고통, 행복과 불행이 언제나 짝지어 있고 동거한다.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해로움의 비중은 줄이고 이로움의 비중은 늘려가려는 노력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생물학적 본능이다. 그리고 그 노력을 성공시키는 조건 가운데 하나는 바로 ‘변화’이다. 모든 현상이 예외 없이 변하기 때문에 ‘해로움의 감소와 이로움의 증대’가 가능하다. 인간의 경우, 변화는 모든 희망의 근거이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는 것도 변화 때문에 가능하고, 악인을 성인으로 변신시키는 것,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도 변화가 주는 선물이다. 붓다가 무상(無常)을 고통의 문제로 연결시켜 자주 언급하는 것은, 변화하는 현상을 불변(不變)의 것으로 움켜쥐고 그것에서 안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반성시키기 위한 언어적 수단이지 변화(變化)를 버리고 불변(不變)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변화(變化)로 인한 불이익과 해로움’만을 주목하여 그 대안(代案)으로 ‘불변(不變)’을 추구하는 것은 편향의 오류이다.
세 번째는 ‘경험 불가능한 불변(不變) 자아/삶/세계를 경험 가능한 것으로 설정하고 추구하는 오류이다. ’변화와 관계 및 반대항들과의 상호지지‘는 경험의 본연(本然)적 범주이자 구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변·독자의 완벽한 안정과 절대 행복의 영속‘이라는 유령(幽靈) 거주지를 찾아 헤매는 행렬은 길게 이어진다. 현세에서의 영생불사를 꿈꾸는 신비주의 깨달음 추종자들, 불변의 순수 행복만으로 가득한 사후 영생의 세계를 꿈꾸는 추종자들은 여전히 진지한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이 반(反) 경험주의적 오류와 공허한 열정을 철학 이론으로 옹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변함’은 곧 ‘작용함’이고 ‘살아있음’이며, ‘변하지 않음’은 ‘작용의 그침’이고 ‘죽음’이다. 모든 생명은 작용하고 변해야만 한다. 변할 수 있어야 내적/외적 상호작용이 가능하며, 작용해야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명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기에 ‘변화와 상호작용’은 오온(五蘊)을 관통하는 생명현상이다. 붓다 법설에 대한 해석학의 하나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현상분류법에서, 무위법(無爲法, asankata)으로 분류한 열반(涅槃)을 ‘변화와 무관한 비(非)시간적 현상으로서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면, 일종의 ‘초시간적 영원주의’(常見, 有見) 및 ‘인과 초월적 절대주의’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런 시선은 붓다의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해석학적 일탈이다. 그런 열반(涅槃)은 변하는 경험 범주에서는 실현되지 않는 ’부동의 무덤‘이자 ’비(非)생명의 사막‘이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불변과 정적의 허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종의 허무주의 오류에도 빠져든 것이다. 그런 열반(涅槃)은 ’변하는 경험의 관점적 주체인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그 어떤 성찰과 수행, 깨달음과 행복도 변화와 접속한 채 이루어지며, 변화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이 맞딱뜨리는 모든 유형의 문제는 예외 없이 번하는 현상과 접속에 있고, 그 풀이 역시 변화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일체 번뇌의 소멸‘, ’궁극적 깨달음‘, ’영원한 행복‘ 등의 수사를 덧붙여가면서 열반(涅槃)을 불변 주소지로 간주하고 비(非)시간적 영역으로 처리한다면, 불교가 지닌 문제 해결력은 원천에서부터 박탈된다. 해탈(解脫)·열반(涅槃)을 경험이 닿지 않는 저 높은 곳에 올려놓고 숭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은 성공할지 몰라도, 불교의 생명력을 뿌리째 뽑아 버리는 일이다.
열반(涅槃)을 불변의 주소지로 간주하여, 시간성과의 접속을 끊는 것처럼, 무아(無我)나 열반(涅槃)의 경지를 ’1인칭의 완전한 소거(消去)‘로 간주하는 시선도 불교 내/외부에서 목격된다. 열반(涅槃)이나 무아(無我) 깨달음을 몰자아(沒自我)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비(非)시간적 해석과 마찬가지로, 붓다 법설의 문제 해결 방식과 범주에서 일탈하여 문제 풀이 능력을 원천에서 거세시켜 버린다. 인간세계는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들의 내적·외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집적소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인간 특유의 언어·개념적 경험과 관점적 자기의식에서 발생하고 또 귀결된다. 세간의 개인적·사회적 문제뿐 아니라 깨달음·해탈·열반과 같은 궁극적 문제의 해결도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을 원점으로 한다. 따라서 무아(無我)를 ’1인칭 주체의 완전한 소거(消去)‘로 이해하여 추구하는 자는, 1인칭 주체들이 빚어낸 인간사 모든 문제에 근원적으로 무관심(無關心)하다. 무아(無我)나 열반(涅槃)을 읽는 비시간(非時間)/몰자아(沒自我)의 해석학이 보여준 ’무관심의 도피 행각‘은 도처에 역력하다.
붓다는 오온(五蘊)과 오취온(五取蘊)의 ‘발생 조건들’(緣起)을 밝혀 ’오취온의 주체인 중생 인간‘이 ‘새로운 1인칭 주체인 오온’으로 바뀔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오온(五蘊)이 ‘1인칭 자아’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거론하지는 않는다. 인칭대명사에 해당하는 불변자아(不變自我)를 상정하는 것이 일상언어의 지배적 경향이며, 그 불변자아(不變自我)를 철학과 종교의 핵심과제로 설정한 아트만 전통이 오랫동안 인도인들의 사유를 장악해 왔기에, 1인칭 주체에 대한 어떤 방식의 명시적 긍정기술(肯定記述)도 기존의 아트만 관념과 결합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을 것이다. <인칭대명사에 해당하는 불변자아(不變自我)가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는 관계와 변화를 속성으로 하는 여러 심신(心身) 조건들의 ‘계열화된 인과적 응집’>이라는 연기적(緣起的) 자아관은 결코 쉽게 이해되거나 수용되기 어려운 새로운 인간관이다. 붓다의 언어 전략은 이런 것들을 충분히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온 무아(五蘊 無我)가 1인칭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연기적(緣起的) 통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은 후대의 과제로 이월되었다. 무아(無我)·열반(涅槃)을 ‘비시간적 불변실재(不變實在)나 범주’로 보는 변형 아트만론 및 플라톤주의 류(類)의 초시간적 영원주의(常見, 有見), ‘1인칭의 삭제’로 읽는 허무주의(斷見, 無見)가 등장한 것은 그 이월된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관계 속에서 변하는 역동의 세계와 접속을 유지한 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붓다의 경험주의적 진리관이다. 붓다의 문제 풀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성 내에 있다.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붓다의 법설은 그것을 충분히 입증한다. 그런 붓다 법설의 최상위 위상인 열반(涅槃)을 불변의 비시간적 주소지로 간주하는 것은, 불교 내부의 변형 아트만론이고 불교적 플라톤주의다. 아트만 사유전통이 설정하는 불변·절대·독자·순수의 궁극실재(窮極實在)는 시간성에서 벗어나려는 공허한 초월이다. 변화와 관계의 시간적 경험현상과 접속한 채 문제를 푸는 해법을 찾지 못한 도피 행각이다. 관건은 <관계·변화의 현상세계와 접속한 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에 있다. 붓다 법설과의 대화는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탐구 여정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파도타기(surfing)의 비유가 적절하다고 본다.
“경험 주체도 변하고 경험 대상도 변하면서 양자의 관계에서 주체가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마치 파도를 타고 즐기는 서핑(surfing)과도 같다. 서핑하는 사람(주체)이 부침·생멸하는 파도에 빠지지 않으려면, 변화하는 파도에 맞추어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정신 상태를 변화시켜야 한다. 서핑 능력자는 자신이 변하면서도, 변하는 파도와 접속한 채 자유와 평온을 즐긴다. 부침하고 변화하는 파도를 버리지도 않고 뻐져들지도 않으면서, 역동하는 파도를 타고 자유와 즐거움과 평안을 누리고, 파도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동시에 이루어 내는, 그런 능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는 ’파도가 잔잔한 상태‘나 ’파도에서 아예 떠난 평온‘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파도를 타고 가면서도 파도에 빠져들지 않아 자유와 평안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능력’, ‘파도를 있는 그대로 만나면서도 파도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여 파도에 빠지지 않는 능력’은, 깨달음의 내용과 흠사하다. 생멸·변화하는 파도와 같은 현상과 세계에 몸담을 수밖에 없는 인간, 파도를 떠나면 삶도 없어지는 인간 – 그런 인간이 세계 속에서 추구해야 할 힘은 ‘파도타기의 능력’이고, 누려야 할 안락은 ‘파도 타고 노는 유희’이다.”2)
‘의식능력’(意根)은 인간이 진화적으로 발현시켰고 언어능력을 장착함으로써 고도화시킨 것이며, 오온(五蘊)의 ‘의식 현상들’(識蘊)은 ‘의식능력’의 작용이다. ‘의식능력’을 통해 인간 특유의 문화·문명을 지속적으로 고도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의식능력에 장착된 언어능력의 ‘개념적 분류 능력’ 때문이다. ‘언어능력과 결합한 의식’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상들을 개념적으로 분류하여 그 차이를 분명히 구분해 주었고, 이로써 차이들의 관계·비교·분석·판단·평가·추리·기억·성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의식은 언어능력과 결합함으로써 문제 해결력을 비약적으로 고도화시켰지만, 동시에 자아와 세계에 ‘불변·독자의 본질/실체 관념’을 부가하였다. 선명한 빛에 동반한 짙은 그늘이었다. 언어적 의식의 양지(陽地)에서 인간은 먹이사슬의 최강자가 되어 화려한 외양을 뽐냈지만, 불변·독자의 본질/실체 관념 그늘(陰地) 속에서 인간 특유의 개인적·사회적·환경적 고통과 재앙에 신음하게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그늘(陰地)의 어둠에서 탈출해야 하는 새로운 과업을 안게 되었다. 언어적 의식능력을 갖추어 차원 다른 진화적 변신을 했던 인간은, 또 한 번의 차원 도약적인 향상 진화에 나선다. 붓다가 그 선봉에선 인간이다. 노자·장자도 그길에 동참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원효(元曉)가 우뚝하다. 목표는 분명하다. 언어능력 때문에 발생한 ‘본질/실체 관념’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 탈출 방법과 탈출하면 펼쳐질 세상에 대한 통찰을 마련하여 제시하는 것이 과제이다. 그런데 이 과제는 인간의 언어능력으로 가능할까? ‘언어능력과 결합한 의식‘의 역량에 의거해야 한다. 언어적 의식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는 이유로 이 능력을 억제하거나 제거하려는 퇴행적 방식으로는 실패한다. ’언어능력과 결합한 의식‘의 역량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여 구현해야 한다. 붓다를 위시하여 이 문제 풀이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선택한 방식이다. 그리고 ’언어능력과 결합한 의식‘이 지닌 마음의 면모에서 그 새로운 가능성이 확보된다. 마음은 ’이해(理解) 사유와 재인지(再認知) 사유의 역동적 상호작용‘으로 그 내용이 형성된다.3) 또 인간 최고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방법이 수행론(修行論)인데, 그 수행에 관한 붓다의 법설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육근수호의 법설’이다.4) ‘육근수호’에 의해 이 최고의 가능성을 구현하려면, ‘이해 사유와 재인지 사유의 역동적 상호작용’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면모를 의지대로 계발할 수 있는 심신과 환경의 적절한 조건들이 필요하다. 다복한 조건이라 해서 꼭 유리한 것도 아니고, 박복한 조건이라 해서 반드시 해로운 것도 아니다. 변화·관계의 현상세계와 접속한 채 변화·관계의 물결에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는, 그 파도타기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어 항상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실로 희유(稀有)한 지복(至福)이다. (無我 2 끝)
* 다음은 [무아3-무아 해석학/교학과 1인칭 주체·주관성 그리고 원효]를 보내드리겠습니다. - 혜원 문창아
1) 필자는 이 문제를 석사 논문(『불교의 언어 이해와 불립문자』)에서 다룬 이후 꾸준히 관련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2) 『원효의 통섭철학』(박태원), pp, 218~219)
3) 같은 책, pp233~314.
4) 같은 책, pp367~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