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핀 구례에서의 며칠
섬진강변에 피어난 벚꽃들 무사한지 보러 갈 꿈을 꾸고 있는데 인호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례군 마산면 상사마을에 둥지를 튼 인호 형이 어느새 마산면민이 되어서 마산면민 체육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마산면에서 토지면으로 이적한 터라 대충 뭉개려고 했지만 새내기 마산면민의 요청도 있고 해서 차를 몰고 청천초등학교에서 열리고 있는 마산면민 체육대회에 가서 막걸리 몇 잔을 마셨다.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사위는 온통 꽃세상이다. 그러나 이 풍경도 금세 자취를 감추고 우리는 꽃이 떠난 세상에서 꽃을 만나던 기억도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허위허위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꽃 떠나기 전에 꽃 만나러 다시 차를 몰고 동해마을로 갔다.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지점에서 벚꽃이 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꽃들이 눈발처럼 날리고 있는 이 세상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도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차를 버리고 자전거를 타고 왔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내 자전거는 오봉산을 돌아 토금마을의 유산각에 잠시 머물러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꽃나무들의 옆에 서 있었을 텐데. 동해마을의 주막집에 막걸리 외상값 12,000원이 있어 갚으러 갈 겸 들렀더니 ‘쉽니다’라고 써놓고 자취도 없다. 그러면 나는 섬진강 흐르는 물에 지전을 띄워 흘려보내고 나는 외상값 다 갚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구례에 살면서 빚지고 있는 것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저 순정하게 흐르는 물살과 내 등 뒤를 받치고 있는 지리산의 산등성이에게가 아닐까.
내 차가 토금마을을 지날 무렵 광석에게 전화가 왔다. 광석에게 전화가 오면 항상 인태 형이 옆에 있는 것이다. 내가 인태 형하고 술 마실 때에도 인태 형은 항상 “광석이에게 전화해 봐”라고 채근을 하는 습성이 있었으니 광석이가 혼자 술 마시면서 내게 전화할 일은 없는 것이었다. 차는 간전 다리를 건너 다시 하사 마을의 인태 형 집에 도달했다. 인태 형의 방에는 소주 네 병이 제 몸의 수액을 다 비우고 꽃 다 떨군 나무처럼 우세두세 서 있었다. 광석이는 우리집 마루에 쌓아둔 신문더미가 필요했나 보다. 채 읽지 못하고 쌓아둔 한겨레신문이 벼모판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 다 줄게. 한때는 글자 한 자 빼놓지 않고 읽던 그 신문이 이제는 가난한 농부의 모판 만드는 데 들어간다면 그것도 좋을 일 아니겠는가. 집에 와서 신문을 넣은 박스 세 개를 차에 싣고 광석이 집에 실어다 주었다. 그리고 일손 없다고 작물 심을 일 무서워 말고 다 심으라고 했다. 일손은 내가 있지 않으냐고 말하면서. 광석이는 내가 준 나의 시집을 다 읽었다고 했다. 술 마시고 온 저녁에 드러누워서 다 읽었다고 했다.
김치찌개 끓여서 저녁 먹을 준비를 하는데 주인집 여자가 밥 한 공기와 잡채 한 접시를 들고 왔다. 그런데 목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세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내가 집세 낼 기한이 두 달이나 남지 않았냐고 하니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내가 작년에 이 집에 이사와서 집세를 오만 원짜리 현금으로 바꿔서 주는데도 무슨 계약서 한 장 쓰자고 하지 않았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 밥 공기와 잡채 한 접시에 손도 대지 않고 고양이 밥으로 줘 버렸다. 순정한 마음. 내 사는 누옥에 금은보화가 없다 할지라도 그 순정한 마음 한 조각 채워 넣고 살고 싶다.
저녁 늦어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덩이가 산벚꽃처럼 피어올랐다. 온통 꽃천지로 불타오른 세상은 인간의 실존이 아닌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언제 꽃이 저렇게 피었는지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은 망각의 위에 세우는 표정 없는 일상의 탑일까. 어릴 때 가난한 동무들의 얼굴에 피어난 버즘처럼 낮은 산 이곳저곳을 물들여 놓은 산벚들을 떠올리면서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별빛이 춤을 추는데 엊그제 내린 비 때문이었는지 제 광채에 자신이 있는 별 몇몇만 성글게 빛나고 있었다.
첫댓글 올핸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오후에야 한참을 달려 사성암 꽃길에 닿았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하다 했더니
차를 세운곳이 동해 마을이었네요^^ 주막집도 봤어요.
혹시 시인님과 스쳤을지도~~
가보진 않았지만
귀에 익은 동네 이름들. 아저씨?들을 상상해봅니다 ..
예, 저도 동해 마을 주막집 앞에 차를 세우고 벚꽃 지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스쳤을 것도 같군요 ㅎㅎ
인제 갚았구나
봄날은 간다 곧 등나무꽃 피겠다
오늘 오후부터 내일 오전까지 비 온대.
벚꽃들이 장렬히 산화하겠군...
그날 고냥이들
잔치했겠네~~^^
이곳 서울에 있는 안산에도 꽃들은
지천으로 피어 어지러운데
지금 내리는 비 그치면
하얗게 산길을 덮겠네.
화무십일홍..................
섬진강 눈 처럼 지는 꽃
보러 떠날 채비를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