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목. 고비, 육지플라나리아, 톡토기
나는 능선보다 계곡이 좋다. 조망이야 능선을 따라갈 수 없지만, 계곡에서 다양한 동식물을 만날 수 있기도 하려니와, 시원한 물소리 속을 걷는 기분과 바위들의 다채로움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하는 매력이 있다. 비 온 아침은 더욱 그렇다. 비 온 아침 계곡은 언제나 힘차고 설레임이 가득하다.
오늘은 내원사 물통골로 올랐다. 뭔가 여름산 특유의 향기나 나는데 이것이 어떤 나무에서 나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역시나 계곡의 입구는 명징하고 상쾌하다. 바위도 바위지만 곳곳에 꿩고비와 관중의 새잎들이 피고 있었다. 비온 날 고사리 새 잎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랍과 인도의 넝쿨무늬, 당초무늬, 페이즐리 무늬 등 시간만 있다면 고사리는 시선을 붙잡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패턴(질서)과 섬세한 변화의 힘 때문일 것이다. 기본 패턴이 무수히 반복되면서 작아지고 커진다. 한 잎의 작은 갈래 안에 다시 갈라진 잎이 나오고 그 안에 다시 전체의 모양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러면서 그것은 부드러운 곡선을 만든다. 마침 꿩고비잎 끝에 이슬거미가 앉아 있다. 간혹 예쁜 풀잎을 보려고 자세히 보다보면 연둣빛 이슬거미가 풀줄기나 잎에 숨어 있는 게 보인다. 이슬거미는 정말 이름처럼 예쁘다. 어찌 제 몸빛에 꼭 맞는 식물의 잎과 줄기에 이렇게 잘 앉을까? 그러고 보면 거미들은 모두 제게 맞는 자리가 있다.
이침 숲에서 매일 하는 의례가 있다. 마로 거미줄 끊기다. 등산로에는 밤새 거미들이 집을 지어놓는다. 얼굴에 팔에 몸에 다리에 거미줄이 닿아 끊어진다. 그래 어떤 거미들인가 사진을 찍어 찾아보니 대체로 북왕거미였다. 북왕거미는 7미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거미다. 직경 1미터 정도의 가지와 잎들 사이에 수직의 둥근 거미줄을 짜고 그 가운데 제가 마치 우주의 중심이라는 듯 턱 버티고 앉아 있다. 그리고 초파리나 나방, 각다귀 따위를 기다린다. 그러다 위기를 느끼면 재빨리 윗줄을 타고 조르르 가지 끝이나 잎에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붙어있다. 봄날 텅 빈 가지 사이에 접시거미들이나, 길바닥의 늑대거미들처럼, 잎 돋은 여름 가지 사이에 북왕거미는 삶터를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자연에는 저마다의 적소(適所)가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명들이 모두 저마다의 적소를 가지고 있다.
산길에서 만난 또 다른 친구는 바로 육지플라나리아이다. 처음엔 기생충처럼 생겨서 무슨 거머리 종류인가 싶기도 했다. 30센티미터 정도의 검은 줄이 그어진 노란 고무줄 모양으로 생겼는데, 머리 모양이 망치상어처럼 부채모양으로 튀어나와 앞을 탐색하며 가고 있었다. 온몸이 축축하고 반짝이는 것이 달팽이와 습성이 비슷했다. 나름 육식성인지라 달팽이나 지렁이 같이 비온 뒤 돌아다니는 동물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비 온 뒤 계곡에 온 보람이 있었다.
은수고개 지나 비탈을 오를 때는 톡토기가 대발생한 것을 보았다. 처음엔 길에 검은 진흙같은 것이 잔뜩 깔려 있어서 비에 이탄층이 쓸려와 고였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은 벌레들이 톡톡 계속 튀며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 작아 육안으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다. 1밀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이 후라이팬에 팝콘 튀듯 토독토독 튀고 있었다. 비 온 뒤 썩은 땅에서 나와 저들은 저들의 한때를 저렇게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숲은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깃들어 산다는 게 실감났다.
낮에는 하루 종일 운무가 끼었다. 아침 일기예보에 오후에는 개어 더울 거라고 해서 반팔에 셔츠 하나 입고 왔더니 추웠다. 법화경을 졸며 읽다 말다 했다.
저녁에 내려갈 땐 고비와 꿩고비 구경을 더 하다갔다. 첫봄의 소식을 알리며 검은 가지가 쪽하고 갈라지는 쪽동백나무의 이파리 모양을 나는 좋아한다. 둥글고 잎가가 톱니모양으로 생겼는데, 불규칙하다. 잎도 꼭 둥근 것이 아니라 길쭉한 것도 있다. 즉 때와 상황과 위치에 따라 저마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더구나 일찌감치 벌레의 먹이가 된 탓에 군데군데 구멍이 나기도 했다. 잎들도 한 장 한 장 같으면서 저마다 다른 사연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예쁘다.
내려온 길 숲에는 노루가 풀을 뜯다 도망쳤다. 내원사의 저녁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늘은 찬 중에 초피무침과 더덕 튀김이 곁들어져 있었다. 내원사에서 일하시는 덕원처사님은 좀 크게 자란 더덕은 데치면 가시가 더 질겨져 아픈데, 튀겨먹으면 가시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스님들이 처사님으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은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