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발원과 본래부처론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김선우 작가의 소설 발원이다. 이 소설이 불교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알고 있었고 지난번 100인대중공사에 갔을 때 이 소설을 선물받게 되었지만 선 듯 읽어 보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요며칠 몸살감기를 심하게 앓아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책에 관심이 갔다. 처음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다가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이틀만에 두권을 다 읽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짓기 위해 역사와 불교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원효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크다는 것이 느껴졌다. 때때로 만나는 아름다운 문장과 이야기들은 이 책을 빠른 시간에 다 읽게 만들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혜공스님, 대안스님, 보현랑, 김준후등 작가의 손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모두 매력적이다. 황룡사 구층석탑에 올라가 떨어져 죽은 단이는 크레인에 올라가서 300일을 넘게 농성을 하고 내려온 김진숙을 떠올리게 하는등 시대의 아픔을 소설속에 녹여놓기도 하였다.
그런데 책을 읽는 도중에 언듯 언듯 도법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믿기지 않을 만치 도법스님의 평소 주장이 고스란히 소설속에 들어가 있었다.
“본래 천한 존재란 없습니다. 오리는 모두 본래부처이므로 당장부처로 살면 된다고 석가모니 께서는 가르치십니다.” “궤....궤변이 심하구나!” (1권p.243)
나는 도법스님이 추진하고 있는 화쟁위원회 활동의 근거가 되는 ‘붓다로 살자’운동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반박하는 글도 신문에 기고하였고 도법스님과 직접 만나서 토론도 한바도 있다. 그러니 이런 목소리들이 반가울리 없다. 이 독후감을 쓰는 이유도 그런 불만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도법스님과는 달리 현재에 불교가 일반대중들에게 다가서려면 어떤 전제조건도 없는 가르침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성’ ‘붓다로 살자’라는 방법으로는 이시대의 사람들에게 가가서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 효과가 없을 뿐아니라 ‘붓다로 살자’는 고타마 부처님이 가르치신 방식이 아니다. 당장 다음과 같은 인용구절 “그대는 본래 부처니이니 즉각 부처의 행동을 하십시오!. 부처의 행동을 하면 부처가 되고 도둑의 행동을 하면 도둑이 됩니다!”(2권p.151) 에서도 모순이 발견된다. 본래 천한 존재가 없다면 본래부처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부처의 행동을 하면 부처가 되고 도둑의 행동을 하면 도둑이 된다. 그무엇도 아니어야 그무엇이 되는 것이다. 본래부처를 상정해놓고 부처도 되고 도둑도 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 지난번에 나는 본래부처에 대한 비판을 4가지 관점에서 하였다.
첫째 우리가 본래부처라면 우리는 저절로 붓다의 말과 행위를 하게 될 것인데 왜 그렇치 못하고 다시 죽을 힘을 다해서 노력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부처의 생각이며, 부처의 말이며, 부처의 행위인가? 또 누가 그것들을 규정하는가?
둘째 자기 목숨이 최고로 소중하므로 자신이 붓다라고 말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통하는가?
셋째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부처라면 착한부처와 나쁜부처를 인정하는 것이고 살생하고 도둑질하는 부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넷째 ‘붓다’와 ‘불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제 조건없는 가르침을 협소한 종파의 울타리에 가두는 것이며 ‘불성’과 ‘본래부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와서 보라’고 가르친 부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대승불교가 ‘불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그런 가능성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는 그분이 이미 당신의 성취로 보여주셨기에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필요가 생겼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우리는 다종교의 사회속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 환경속에서 원효스님이 살던 시대처럼 ‘불성’ ‘본래부처’를 강조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불교를 믿음의 종교로 떨어뜨리는 위험성이 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계정혜, 사성제와 8정도의 가르침에 어느곳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가? 불교는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어느 곳으로 전파되든지 충돌이 없었고 현지의 지성인들에게 환영받으며 받아들여진 것이 아닌가? 본래부처를 이야기하는 원효를 황룡사스님은 “궤....궤변이 심하구나!”라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지금은 본래부처를 이야기 하지 말자는 나의 이야기를 두고 작가도 “궤변이 심하구나!”라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본래부처뿐만아니라 무엇이 부처의 말씀인가에 대해서도 나와 이견이 있다. 작가는 佛說善設이라니라 善設佛說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여 경전이 시대가 갈수록 늘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천축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진경, 중국이나 그밖의 곳에서 만들어진 것은 위경이라하여 가치를 무시하려는 경향은 참된 불교도의 자세가 되기엔 매우미흡하다 아뢰옵니다.”(p.219)
그런데 善設佛說이라는 관점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佛說善設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여야 하고 정확하게 부처님이 말하신 가르침이 왜 어떻게 善設인지 알아야한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善設佛說을 받아들인다면 나중에는 정법과 사법의 기준이 모호해져서 사자의 몸에서 나온 벌레가 사자를 갉아 먹듯이 스스로 훼불의 존재가 될런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불성과 본래부처를 이야기 하던 사성제와 8정도를 이야기 하던 모두 나름대로 불교를 잘하자고 하는 노력들이다. 이것은 각자의 불교관에 따른 차이일 것이다. 이러한 불교관의 차이를 나는 요즘 여러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현응스님이 제기한 깨달음의 이해문제도 그렇고 탈종을 서두르고 있는 선학원의 문제도 그렇고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를 해종언론이라고 낙인찍은 것도 그렇고 100인대중공사에서 여러스님들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지금은 모든 시기의 불교가 만나고 다양한 지역의 불교가 만나고 있는 혼돈의 시기다. 이러한 시대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우리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정말 제대로된 불교관은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해야한다. 그러고 나서 역사속에서 나타났던 다양한 불교를 어떻게 현대에 맞게 응용하여야 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독후감을 쓴다고 해놓고 나의 주장만 하고 끝내기가 미안하니 다시 소감을 적어본다. 작가가 원효와 요석이 만난이야기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만들어 놓은 것은 이 시대에 젊은 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 작가가 말하는 자유와 사랑의 두길을 잘 헤쳐나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의 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강신주의 해제에서 김춘추는 마침 임신하고 있던 요석의 방에 원효를 들여보냈고 원효는 임신한 아이가 자기자식이 아니란 것을 한번도 변명하지 않았다는 추론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오히려 강신주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김선우나 강신주나 원효가 역사속에서 모함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 억울함을 벗겨주려는 노력을 했다는 데서 충격을 받는다. 나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