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 상
정 성 천
몇 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던가 보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둑해질 무렵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걷고 있었다. 그날 바빠서 하지 못했던 걷기 운동 목표를 채우기 위해 다소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던 것 같다. 저수지 연못 길을 지나칠 때였다. 길옆 풀 섶 가장자리에 제법 굵은 밧줄이 다소 길게 도로를 어느 정도 가로질러 놓여 있었다.
치우려고 지팡이 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대나무 꼬챙이로 무심코 밀쳤더니 그 밧줄 끝이 재빨리 움직이면서 꼬챙이를 공격하지 않겠는가? 밧줄이 아니라 뱀이었다. 혼비백산 놀란 나머지 나는 뒤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뱀이 서늘해진 저녁 기운에 낮 동안 따뜻하게 데워진 포장도로에서 온열 찜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마터면 뱀에게 물릴뻔한 사건이었다. 머리칼이 주뼛주뼛 곤두서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요즈음 시골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굵은 놈이니까 한 10년 이상 연륜이 묵은 놈인 것 같다. 그놈은 호들갑스럽게 서둘지도 않고 연륜이 묻어나는 강한 몸짓으로 머리를 치켜들고 아주 천천히 저수지 연못가 풀 섶으로 사라진다. 나는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여 더 이상의 걷기를 포기하고 조심스럽게 집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내가 걸어가는 길 위에 놓여 있는 기다란 끈이나 밧줄 종류를 보면 환한 대낮이라도 먼저 뱀으로 보여 과민하게 놀란다. 옆 사람은 뭘 저걸 보고 뱀으로 오인해서 놀라느냐고 의아해하지만 나는 잠시나마 두려움으로 콩닥콩닥 가슴이 뛰기까지 한다. 그 놀람의 정도가 어느 기간 동안 심하더니 차츰 수그러들고 있었는데 처음 당했던 느낌 그대로 재현되는 일이 며칠 전에 또 발생했다.
그날도 밭일 때문에 늦은 저녁을 먹고 어둑어둑해진 저수지 연못 농로를 걷다가 또 그 뱀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한 번 경험한 일이 있기에 처음처럼 그렇게 놀라진 않아도 몇 년 전에 겪었던 그 느낌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서둘러 나오느라 이번에는 지팡이가 손에 없다. 멀리서 작은 돌멩이를 던져 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역시 묵은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그놈의 배짱이 장난이 아니다. 되돌아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다가 슬며시 화가 나는 게 아닌가? 나를 이렇게 놀라게 해 놓고 저놈은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상태로 시멘트 온열 찜질을 즐겨도 되는 건가?
나의 놀란 마음에 비해 너무나도 한가한 그놈의 행태가 얄미워 그 한가함이라도 깨뜨려 복수하자는 얄궂은 마음에 적당한 도구가 없는지 주위를 살폈다. 마침 길가 자두밭에 자두나무 가지를 받히는 다소 긴 쇠 작대기를 발견했다. 그것을 들고 그 장소로 돌아가 보니 그놈은 아직도 자세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온열 찜질을 그대로 즐기고 있었다. 멀리서 쇠 작대기로 도로 바닥을 쿵쿵 두드려 위협을 가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가까스로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살며시 다가가서 쇠 작대기로 살짝 밀쳐보았다. 아,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강하게 공격하리라고 예상했던 놈이 힘없이 밀리며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는 게 아닌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라 낚시꾼이 버리고 간 밧줄 한 가닥이었다.
우리가 배우고 알아 왔던 세계관 즉 데카르트, 칸트 등에 의해서 보편적인 진리로 여기던 기계론적인 세계관이 현대 뇌과학의 발달로 그 기본 구조가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내가 직접 내 눈으로 본 거야.”라고 말하며 내 눈으로 본 것을 굳게 실체적인 진실로 확신한다. 하지만 나의 바깥에 사물이 있고 내가 눈으로 있는 그대로 그 사물을 본다. 라는 기존의 사고방식이 커다란 오류라고 현대 뇌과학자들은 주장한다. 우리는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내는 환상(幻像)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면 우리 뇌는 어떻게 환상을 만들어 내는가? 시각 정보가 눈을 통해서 들어오면 기존에 경험으로 쌓아 왔던 내적 모델을 투영하여 덮어씌우고 능동적인 예측과 오류를 반복적으로 수정한 결과가 바로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뱀을 밧줄로 밧줄을 뱀으로 인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현대과학은 말한다. 이 세상 그 어느 하나도 우리가 눈으로 인지하는 것처럼 고정되어 머무르는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에너지의 파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파동 중 매우 빠르고 뭉쳐있는 것이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고체이고 아주 느리고 흩어져 있는 것은 허공처럼 인간의 눈에 감지될 뿐이다.
그리고 헤아릴 수없이 많은 에너지 파동 중 하나가 빛에너지인데 그 빛에너지 중에서 인간이 볼 수 있는 주파수의 빛에너지를 우리는 가시광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가시광선은 빛에너지 중 아주 극히 적은 일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의 극히 일부분만 눈으로 보며 그것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않고 자기가 만들어 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시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감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눈으로 아니 오감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그대로 판단하며 살아가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정보들이 우리의 감정과 생각들로 해석될 때 개인의 몸과 마음에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둔 의도를 가지고 행동할 때 인간관계에 문제가 발생한다. 수만 년 동안 인간으로 진화해 오면서 인간의 뇌에는 생존과 번식에만 유리한 해석 방식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대전제인 자연선택은 유전자 상속에 유리한 기재로 작동하도록 인간 두뇌를 만들어 왔다. 이는 인간의 행복과는 전혀 무관한 해석 방식이기에 인간 사회가 발전하여 더 편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도 인간의 행복은 더 멀어져 간다. 고 진단한다. 인간은 자기 종족을 오늘과 같이 보전시켜 온 대가로 평생토록 불편함과 불행을 안고 살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이 세상 모든 것이 환상이니 손 놓고 무기력에 빠져 체념하며 그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다가 가라는 말인가? 아니면 어차피 환상인 세상 아무렇게나 막무가내로 살다가 마지막에 회개하면 만사가 다 오케이라는 말인가? 체념과 막무가내는 둘 다 삶이 불행으로 점철되고 결말난다는 점에서 현명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불교는 이 환상을 깨고 세상의 진짜 면목을 볼 수 있는 상태로 깨어나라고 즉 깨달음을 달성하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깨달음을 이루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보통 사람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먼저 이 세상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항상 인정하고 염두에 두는 삶이 되어야 한다. 내가 보는 세상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 무엇에든 확고하게 집착하는 생각과 행동이 줄어든다. 아무리 좋은 것도, 아무리 굳게 믿는 것도, 아무리 싫은 것도, 아무리 하찮은 것에도 항시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집착이 아니라 선호의 삶, 즉 ‘하되 함이 없이 하는 삶’을 살지 않을까? 그리되면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인정해 주고 기꺼이 받아드리는 수용의 삶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우리의 뇌가 환상을 만드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만드는 환상은 뇌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틀에다가 들어오는 정보를 맞추고 오류수정으로 만들어 낸다. 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그 틀을 인간 행복에 바람직하게 즉 긍정적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그 틀은 태어날 때부터 쌓아 온 경험으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또 변화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매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습관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서 감사, 용서, 사랑, 수용, 연민, 존중 등 긍정적인 마음 쓰임에 좀 더 친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뇌의 본능적인 작동방식 즉 유전자 상속에 유리한 작동방식을 인간 행복에 유리한 작동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그 마음 본바탕은 신성한 것으로서 행복 그 자체였다고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본래 면목’, 기독교에서는 ‘내면의 하나님’, 현대 영성가들은 ‘순수의식(우주 의식)’, 현대 뇌과학자들은 ‘배경 의식’이라고도 부른다. 마치 원래 하늘은 파랗게 늘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나 온갖 구름의 형태가 하늘을 가리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발생한 온갖 분별이 행복 그 자체인 배경 의식을 가리고 있다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이 배경 의식에 좀 더 친숙한 마음 상태를 갖는 것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배경 의식에 친숙해지려는 노력이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보는 행위 즉 명상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서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환상이라는 것을 바르게 알고 모든 집착을 놓고 현실을 기꺼이 수용하며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남을 대하고 또한 자신이 누구인가를 꾸준히 찾아보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다.
첫댓글 깊이 있는 성찰의 글에서 중수필의 모습에 빠진다오.
조금 시간 지나서
다시 재정독하면서 글의 깊이를 다시 새기겠소.
너무 과분한 평을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집필 의욕을 격려해 주시는 걸로 여기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김작가님의 물맛처럼 담담하지만 마음을 적시는 수필 항상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