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회사의 재산이라기보다 가난한 나라의 어려운 달러로 사드린 배. 비록 일인(日人)들이 쓰던 중고선이지만 우리에겐 더 없이 귀중한 재산인 것이다. 하지만 버리고 돌아서는 길 뿐이었다. 선원들만 구조한 채 서서히 남하하면서 본국의 양 회사와 전보(電報)로 교신이 계속되었으나 신통한 답신이 얼른 오지 않았다.
(당시 301화영호는 일본에서 수입하여 한국으로 와서 통관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바로 어장으로 직행, 어로작업를 하여 귀국하고자 했던 것이므로 일종의 편법인 셈이었다)
역시 이런 점에서는 우리 한국인의 어떤 공통적인 결점이랄까 원칙을 지키지 않는,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개선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 어쩔 수 없었다.
26인용의 침실과 선내 생활도구를 51명이 함께 쓰야했다. 날씨는 추운데 해수마져 0.3도이다. 조난구조 선원들은 처리실 바닥에 긴급 준비한 모포와 이불 1장에 입은 옷 그대로 모여 밤을 세워야했다. 우리 선원들이 여분의 옷들을 나누어 쓰기도 했다. 주부식도 충분하질 못했다. 기어이 귀항키로 하고 코스를 남으로 꺾은 것이다. 그 동안 본사로부터 어떤 지시가 있으리라 믿고 -. 결국 구시로항에 입항하라는 것이었다.
홋카이도 북동부의 구시로
우리 본사 윤 사장이 왔었다. 반가웠다. 그의 얘기로는 양사간(兩社間)에 합의는커녕 아무 대책도 없었다고 했다. 이곳에 입항하게 된 것도 결국 윤 사장이 답답해서 외무부를 거쳐 Sappolo(札幌)영사관에 긴급 연락. 겨우 입항허가를 얻었다는 것이다.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구조된 25명의 선원들의 처지와 이미 싸늘하게 유해로 변한 체 갑판 위에서 얼어붙은 고(故) 김 선장의 입장과 또 그들이 속해 있은 화영수산의 태도. 또한 윤 사장의 사고방식. 결국 자기들만의 손익을 따져 생각하고 주장하며 처신하는 Owner(선주)들 속에서 억울하게 취급당하고 마는 것이 일선의 선원들 뿐이니 Seaman이 된 나 자신부터가 한스러워 지는 듯 했다. 무척 우울하고 무거운 마음이었다.
그 후의 일기는 이렇게 이어졌다.
「71년 2월 1일(월) 밤. 다시 거센 파도를 뚫고 북상중이다. 낮 12시 35분 부족한 연료와 식량, 식수 그리고 조난선 구조 덕분으로 얻은 작업복 한 벌과 내의 한 벌씩을 받고 조업장으로 다시 올라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궂은 날씨다. 먼저 전선원들의 마음부터 궂다. 더욱 지루한 생각이 앞선다. 조타실 좌현 Hand Rail(손잡이)이 찌그러진 것을 보면 더욱 서글픈 생각이 앞선다. 301호 조난 구조 당시 부딪쳐 입은 상처인 것이다. 마치 그들 선원들이나 우리들의 마음이 저같이 찌그러지고 우그러든 것처럼 -.
계속 몸이 쾌하지 못하다. 이번 항해는 왜 이럴까? 이 기록마져 마음은 앞서도 제때 쓰질 못한다. 의욕이 없다. 몸의 Condition이 그런데다 배의 요동이 또한 너무 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기압 속에서 마치려는지? 」
"다시 어장으로 되돌아 가 아직 다 채우지 못한 어창(魚艙)을 모두 채워 만선(滿船)으로 귀항하라"는 사장의 지시로 어장으로 향했다. 진짜로 발걸음이 무거운 항해길이었다.
301화영호 조난구조 사건이 구시로(釧路) TV방송에도 방영됐었다. 고(故) 김 선장은 결국 화장(火葬)해서 귀국키로 했다. 선원들은 선장의 유해를 직접 운구하겠다고 했지만 당시로선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영사관과 구시로 민단(民團)의 중재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직접 통역과 여러 가지 일을 보아주던 민단(民團)구시로지부 간부들이 고마웠다. 같은 핏줄의 동포라는 점에서 유별하게 정(情)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은 유명을 달리한 고(故) 김 선장만 너무나 허무하게 된 것이다. 그의 건장한 체구와 믿음직스럽던 인상이 진하게 남았다. 누구보다 먼저 ‘살았다’며 굳게 악수하고 얘길 나누었었는데 -. 처음 조난 당시부터 이미 자기는 선체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했지만 그의 뜻과는 너무나 의미없는 죽음이었다.
301호 조난 선원들의 함께 항해 중 있었던 일들이 심심찮게 들렸다. 처음 이선(移船)해 올 때는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던 생각 이외엔 다른 잡념을 가질 수 없었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고 보니 무엇보다. 남겨두고 온 밀수품(?)들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선박 인수차 일본에 갈 때 급전(急錢)을 내서 산 중고 TV랑 마누라 줄 선물들이 버리고 온 배보다 더 아까워했다. 침실 전체를 몽땅 불태워 버린 갑판부 사람들보다는 전혀 피해가 없었던, 침실이 뒤쪽에 있었던 기관부 선원들이 더욱 그랬다. 하기야 그 같은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도 ‘내 봇다리 갖고 오소’하고 부르짓는 사람도 있었고 겨우 우산 3개만 가지고 결사적으로 넘어온 사람도 있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 일인지-. 당시 일본에서 중고 TV 한 대 사 오면 몇 갑절의 이익을 보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겨울철이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구시로항
그보다 더 고약한 사람이 있었다. 조난선원이 아닌 우리 선원이었다. 결사적으로 가져온 것이라고는 몸뚱이와 그 걸친 옷 외에 우산 3개인데 그놈의 우산을 쓸쩍 훔쳐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벼룩이 간’을 꺼내 먹을 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갑판부 선원 전원을 집합시킨 다음 갑판장에게 조사를 해보라고 했더니 자수하는 자가 있었다. 장xx. 선장의 친구라 얌채였기에 말들이 많았던 자다.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욕을 무더기금으로 냅다 퍼 넘겼다. 개새끼들이 아니냐고-.
다시 일기로 돌아가 본다.
「2월 8일 (월) 22:00시. 열 사흘째 달이 교교히 바다 위에 흐르며 부서지고 반짝인다. 좋은 날씨다. 무엇인가 아쉽고 그리움이 마음속에 가득한 느낌의 밤이다. 지난날 이런 달빛속에 가졌었던 각가지 일들이 가끔씩 생각키우곤 한다. 만선(滿船)한 배는 육중한 몸체를 물속 깊이 잠그고 무겁게, 그러나 힘있게 달린다. 약간 강한 북서풍이 분다. 바깥 날씨는 몹시 차다. 0도에 가까운 해수가 튀어 갑판에 오르자 곧 얼어붙는다. 갑판 위에는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채 둔 약 10톤 가까운 고기에 살얼음이 낀다.
구시로(釧路)항을 출항 후 연 3일간 마주쳐 오는 바람과 시달리며 어장에 도착한 것이 4일 자정(子正), 불과 3일이지만 모두를 몹시 치쳤다. 너무도 지루한 것 같았다. 드디어 시작된 작업, 그러나 다소 생기가 돈다. 마침 물때가 좋았다. 초아흐레 달이 간간이 보이기도 했다. 앞서 25명의 생명을 구한 좋은 일을 해서 그런지 초반부터 호조를 보였다. 모두들 그래서 고기가 잘 잡힌다고 했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 했지않았던가. 지루했고 어두웠던 마음들이 날씨와 함께 맑고 밝아져갔다. 대어를 외치는 고함소리와 함성이 저절로 튀어나오고 고기덤이 위에서 덩실 춤을 추는 자도 있었다.
1일 2000-3000여상자씩의 어획이 올라왔다. 명태의 어체도 좋았다. 마침 산란기라서 알들을 한 배(腹) 가득씩 품었다. 미쳐 냉동처리가 따르질 못한다. 밤낮도 없고 휴식도 없다. 그래도 고된 줄을 몰랐다. ‘대어 만선’의 꿈이 바로 눈앞에서, 손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2일반만에 조업을 마쳐야 했다. 구시로항에서 보충한 연료량이 많아 더 이상 적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Over Load(과적)는 우리들 항로에 있어서 무엇보다 안전을 저해하는 위험한 요소이다. 얼마인지 숫자도 파악하지 못한 체 처리실을 가득 채우고 또 한차례 예망, 약 10톤가량의 고기를 그냥 어망 속에 둔 체 갑판 위에 묶어두고, 7일 오전 11시 30반 뱃머리를 귀항 코스로 돌렸다. 역시 욕심의 대가리가 고개를 쳐든다. 더 잡자는 의견이 많다. 아쉬운 발걸음이다. 다시 여기까지 오려면 20일은 걸려야 하는데-. 다음을 약속하며 항해를 시작, 의외로 날씨도 해상도 좋다. 짐을 가득 실은 배는 전속(全速)이다. 검푸른 물결을 헤치는 모습이 마음 든든하다 왠만한 파도엔 꿈쩍도 않고 물결을 튕겨내는 것이 바로 우리 26명과 전 가족들의 생과 삶을 짊어지고 굳세게 세상을 헤쳐가는 것 같기도 했다.
조용히 창밖을 내다본다. 앞뒤에서도 같은 코스로 귀항 길에 오른 배가 두어 척 보인다. 모두들 제각기 부푼 꿈과 향수에 젖어있을 것이다. 문득 생각키우는 귀절이 있다. ‘도리원, 원양파도에 넘실대는 우정아!’ 이것은 내가 교단을 떠나고 지기(知己) 남X호군도 교단을 버렸을 때 Mr. 류. Mr. 양 넷이서 허름한 시장터 막걸리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새로운 길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류X덕 군이 즉석에서 읊은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 그놈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미 밤은 깊었는데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누라를 불끈 껴앉고 한차례 작업(?)에 여념이 없을런지도 모를 시간이다. 몹시도 그들과의 대화가 그리운 밤이다. 모여 앉으면 펼쳐졌던 대화들! 그것이 조금씩 모자람을 느낄 땐 술잔으로 대신했었다. 지금은 모두들 제각기 살길에 바쁘겠지만 가끔 즐거운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고 있을 거다.」
고(故) 김x수 선장! 나와는 처음 만난 분이었다. 나 보다는 한 두 살 연상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강(姜) 선장과는 수고(水高)의 선후배관계로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 했다. 후에 부산항에 입항했을 때 강 선장의 부탁을 받아 명태 한 상자를 들고 초량동의 어디쯤인가 301화영호 김 선장 집을 찾아갔다. 여전히 망연자실, 실감을 갖지 못하고 있는 부인에게 내가 곁에서 보고 겪은 일들만을 상세히 얘기해 주었다. 흐느끼는 부인을 두고 조용히 물러 나왔다. 내 자신도 언제라도 이런 운명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이 사고를 실무자의 입장에서 가장 가까이서 처리했고 보아온 내 자신으로서 느낀점도 많았고, 일시적으로 물길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 사고는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현재도 미치고 있다. 그 후 20여년간 오대양 · 육대주를 다니며 크고 작은 숱한 사건 · 사고들을 겪고 당하면서도 지금까지 용케 살아 있는 그 자체가 기적(奇績)이라는 생각으로 매시간, 매일을 겸허하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신(神)에게 감사드리며 열심히 맞고 보낸다.(계속)
첫댓글 [만선(滿船)한 배는 육중한 몸체를 물속 깊이 잠그고 무겁게, 그러나 힘있게 달린다.]
[왠만한 파도엔 꿈쩍도 않고 물결을 튕겨내는 것이------- 전 가족들의 생과 삶을 짊어지고 굳세게 세상을 헤쳐가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장면에서 난 가슴을 활짝 펴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가슴 조이며 화재와 선장의 시체 인양을 바라보았는데
아~~ 내 친구의 안위가 걱정입니다. 아마 다른 선원보다 지인이라는 것이 피가 물보다 진한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어려운 난관이 있었기에
작은 만족에도 감사하며 또다시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늑점이님은 문장 구사력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탈자 오자도 없이 술술 잘도 기록했군요.
대단한 실력파니까 항해사가 된 것입니다.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남의 힘겨운 수기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ㅋㅋ
걸 기대.ㅎㅎㅎㅎㅎㅎㅎ
고맙소. 꼼꼼히 읽어 주셔서.... 오늘도 건강하소. ㅎㅎㅎ 부산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