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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十一回 晏平仲二桃殺三士 楚平王娶媳逐世子
제71회: 안평중은 복숭아 두 개로 세 장사를 죽이고, 초평왕은 며느리를 가로채고 세자를 쫓아내다.
話說,齊景公歸自平邱,雖然懼晉兵威,一時受歃,已知其無遠大之謀,遂有志復桓公之業。謂相國晏嬰曰:「晉霸西北,寡人霸東南,何為不可?」晏嬰對曰:「晉勞民於興築,是以失諸侯。君欲圖伯,莫如恤民。」景公曰:「恤民何如?」晏嬰對曰:「省刑罰,則民不怨﹔薄賦斂,則民知恩。古先王春則省耕,補其不足,夏則省斂,助其不給。君何不法之?」景公乃除去煩刑,發倉廩以貸貧窮,國人感悅。於是徵聘於東方諸侯。徐子不從,乃用田開疆為將,帥師伐之。大戰於蒲隧,斬其將嬴爽,獲甲士五百餘人。徐子大懼,遣使行成於齊。
한편, 제경공은 평구(平邱)의 회맹에서 돌아와서, 비록 진(晉)나라 군사의 위세에 눌려 할 수 없이 삽혈을 했으나, 진나라에는 원대한 계책이 없음을 알고, 마침내 제환공의 패업을 다시 일으키려는 뜻을 품었다. 제경공이 상국 안영에게 말하기를, “진나라는 서북을 제패하고, 나는 동남을 제패하면 되지 않겠소?” 하니, 안영이 대답하기를, “진나라가 사기궁을 짓느라 백성들을 고생시켜 제후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주군께서 방백이 되고 싶다면 백성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을 잘 돌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안영이 대답하기를, “형벌을 줄이면 백성들의 원망이 줄어들고, 세금을 적게 거두면 백성들이 은혜를 알게 됩니다. 옛날 어진 왕들은 봄에 농사를 살펴서 부족한 것을 도와주고, 여름에는 세금을 줄여서 모자란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어찌하여 주군께서는 그것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했다. 제경공이 이에 번거로운 형벌을 없애고,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에게 빌려주니, 백성들은 감격하여 기뻐했다. 이에 동방의 제후들을 초빙했다. 서(徐)나라 군주가 따르지 않자 전개강(田開疆)을 장수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서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전개강이 포수(蒲隧)에서 크게 싸워 서나라 장수 영상(嬴爽)을 참하고 무장병 5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서나라 군주가 크게 두려워하여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화친하려 했다.
齊侯乃約郯子莒子同徐子結盟於蒲隧。徐以甲父之鼎賂之。晉君臣雖知,而不敢問。齊自是日強,與晉並霸。景公錄田開疆平徐之功,復嘉古冶子斬黿之功,仍立「五乘之賓」以旌之。田開疆復舉薦公孫捷之勇。那公孫捷生得面如靛染,目睛突出,身長一丈,力舉千鈞。景公見而異之,遂與之俱獵於桐山。忽然山中趕出一隻弔睛白額虎來,那虎咆哮發喊,飛奔前來,逕撲景公之馬。景公大驚。只見公孫捷從車上躍下,不用刀槍,雙拳直取猛虎,左手揪住項皮,右手揮拳,只一頓,將那隻大蟲打死,救了景公。景公嘉其勇,亦使與「五乘之賓」。
제경공이 담(郯)나라 군주와 거(莒)나라 군주에게 통고하여 서(徐)나라 군주와 같이 포수에서 회맹하기로 했다. 서나라에서 갑보(甲父)의 솥을 제경공에게 뇌물로 바쳤다. 진소공과 신하들이 그 사실을 알았으나 감히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 제나라는 이때부터 날로 강성해져서 진나라와 나란히 패자(霸者)가 되었다. 제경공은 전개강이 서나라를 평정한 공로를 기록하게 하고, 고야자는 자라의 목을 벤 공로를 치하하여 이에 오승지빈(五乘之賓)으로 삼아 표창했다. 전개강은 다시 공손첩의 용기를 천거했다. 공손첩은 얼굴이 검푸르고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신장은 한 길이고 힘은 천균(千鈞)을 들 수 있었다. 제경공이 공손첩을 보고 특이하다고 생각하여 그와 함께 동산(桐山)으로 사냥을 나갔다. 갑자기 산속에서 눈이 치켜 올라가고 이마가 하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큰 소리로 포효하더니 날 듯이 앞으로 다가와서 제경공의 수레를 끌던 말을 덮쳤다. 제경공이 크게 놀랐다. 그때 공손첩이 수레에서 뛰어내려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 왼손으로는 호랑이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오른손으로는 주먹을 휘둘러 한 주먹에 그 큰 호랑이를 때려죽이고 제경공을 구했다. 제경공이 그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그도 역시 오승지빈으로 삼았다.
公孫捷遂與田開疆古冶子結為兄弟,自號「齊邦三傑」。挾功恃勇,口出大言,凌鑠閭里,簡慢公卿。在景公面前,嘗以爾我相稱,全無禮體。景公惜其才勇,亦姑容之。時朝中有個佞臣喚做梁邱據,專以先意逢迎,取悅於君。景公甚寵愛之。據內則獻媚景公,以固其寵﹔外則結交三傑,以張其黨。況其時陳無宇厚施得眾,已伏移國之兆,那田開疆與陳氏是一族,異日聲勢相倚,為國家之患,晏嬰深以為憂。每欲除之,但恐其君不聽,反結了三人之怨。
공손첩이 마침내 전개강, 고야자 등과 결의형제를 맺고, 자기들 스스로를 제나라의 삼걸(三傑)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공을 끼고 용기를 믿어 입으로는 호언장담을 일삼고 남을 업신여기며 여염집을 돌아다녔다. 조정의 공경들조차도 무시하고, 제경공의 면전에서도 일찍이 서로 너나들이를 하면서 전혀 예의가 없었다. 그러나 제경공은 그들의 재주와 용기를 아껴서 잠시 두고볼 뿐이었다. 그때 제나라 조정에는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신하가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을 양구거(梁邱据)라고 했다. 양구거는 오로지 제경공의 마음을 받들어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래서 제경공이 양구거를 매우 총애하였다. 양구거가 안으로는 제경공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굳게 하고, 밖으로는 삼걸들과 교분을 맺어서 그 무리의 세력을 키우려고 하였다. 더욱이 그때는 진무우(陳无宇)가 인정을 많이 베풀어 민심을 얻어서 이미 제나라의 국권이 옮겨가려는 징조가 잠복해 있던 상태였다. 이 전개강과 진씨 일족이 훗날 서로 결탁하여 나라의 우환이 될 것이라고 안영은 깊이 걱정하였다. 그래서 제거하려고 했으나, 제경공이 듣지 않으면 오히려 삼걸로부터 원한을 사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忽一日,魯昭公以不合於晉之故,欲結交於齊,親自來朝。景公設宴相待。魯國是叔孫婼相禮,齊國是晏嬰相禮。三傑帶劍,立於階下,昂昂自若,目中無人。二君酒至半酣,晏子奏曰:「園中金桃已熟,可命薦新,為兩君壽。」景公准奏,宣園吏取金桃來獻。晏子奏曰:「金桃難得之物,臣當親往監摘。」晏子領鑰匙去訖。景公曰:「此桃自先公時,有東海人,以巨核來獻,名曰『萬壽金桃』,出自海外度索山,亦名『蟠桃』,植之三十餘年,枝葉雖茂,花而不實。今歲結有數顆,寡人惜之,是以封鎖園門。今日君侯降臨,寡人不敢獨享,特取來與賢君臣共之。」魯昭公拱手稱謝。
갑자기 어느 날 노소공이 진(晉)나라와 맞지 않았던 까닭으로 제나라와 수호를 맺기 위해 친히 제나라에 왔다. 제경공이 술자리를 마련하여 노소공을 환대하였다. 노나라는 숙손야(叔孫婼)가 상례(相禮)를 맡고, 제나라는 안영(晏嬰)이 상례를 맡았다. 삼걸은 칼을 차고 계단 아래에 서 있었는데 태연자약하고 방약무인했다. 두 나라 군주들이 반쯤 취했을 때 안자가 아뢰기를, “후원에 금도(金桃)가 이미 익었습니다. 명을 내리시면 새로 익은 복숭아를 따와서 두 군주님을 축수할까 합니다.” 하니, 제경공이 허락하고 후원 지기에게 명하여 금도를 따오라고 했다. 안자가 아뢰기를, “금도는 얻기 어려운 과일입니다. 신이 마땅히 직접 가서 살펴보고 따오겠습니다.” 하고, 안영이 열쇠를 가지고 갔다. 경공이 말하기를, “이 복숭아는 선공이신 제장공 때에 동해 사람이 큰 씨를 가져와 바치면서 이름이 만수금도(萬壽金桃)라 했습니다. 그것은 바다 건너 도색산(度索山)에서 나는데, 다른 이름으로 반도(蟠桃)라고 합니다. 심은 지 30년이 넘어 잎은 비록 무성하지만, 꽃이 피어도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금년에 열매가 몇 개 열렸는데 과인이 이를 아껴서 후원의 문을 자물쇠로 잠가 두었습니다. 오늘 군주께서 왕림하셨으니 과인이 감히 혼자 맛볼 수 없어서 특별히 노나라의 현군, 현신들과 같이 맛보고자 합니다.” 했다. 노소공이 두 손을 모아 감사했다.
少頃,晏子引著園吏,將雕盤獻上。盤中堆著六枚桃子,其大如碗,其赤如炭,香氣撲鼻,真珍異之果也。景公問曰:「桃實止此數乎?」晏子曰:「尚有三四枚未熟,所以只摘得六枚。」景公命晏子行酒。晏子手捧玉爵,恭進魯侯之前,左右獻上金桃,晏子致詞曰:「桃實如斗,天下罕有﹔兩君食之,千秋同壽!」魯侯飲酒畢,取桃一枚食之,甘美非常,誇獎不已。次及景公,亦飲酒一杯,取桃食訖。景公曰:「此桃非易得之物,叔孫大夫,賢名著於四方,今又有贊禮之功,宜食一桃。」
조금 지나자 안자가 후원 지기를 데리고 조각 쟁반에 복숭아 6개를 담아 바쳤다. 큰 것은 사발만 하고 붉기가 타오르는 숯불 같으며 향기는 코를 찔렀다. 참으로 진기한 과일이었다. 제경공이 묻기를, “복숭아가 이것뿐이오?” 하니, 안자가 말하기를, “아직 서너 개 덜 익은 게 있습니다. 그래서 여섯 개만 따왔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안자에게 명하여 술을 따르게 했다. 안자가 옥잔을 받들어 공손히 노소공에게 올렸다. 좌우의 시종이 금도를 바치자 안자가 치사하여 말하기를, “복숭아가 말[斗]만하니 천하에 드문 과일입니다. 두 분 군주님들께서 잡수시고 함께 천세를 누리십시오!” 했다. 노소공이 술을 마신 후에 복숭아 한 개를 집어 먹었다. 아주 달콤하고 맛이 좋아 찬탄해 마지않았다. 제경공의 차례가 되자 역시 술을 한잔 마시고 복숭아를 집어 먹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이 복숭아는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숙손야(叔孫婼) 대부께서는 천하에 어진 이름이 드러났고, 오늘 또한 상례를 맡은 공이 있으니 마땅히 복숭아 한 개를 드시지요.” 했다.
叔孫婼跪奏曰:「臣之賢,萬不及相國。相國內修國政,外服諸侯,其功不小。此桃宜賜相國食之,臣安敢僭?」景公曰:「既叔孫大夫推讓相國,可各賜酒一杯,桃一枚。」二臣跪而領之,謝恩而起。晏子奏曰:「盤中尚有二桃,主公可傳令諸臣中,言其功深勞重者,當食此桃,以彰其賢。」景公曰:「此言甚善!」即命左右傳諭,使階下諸臣,有自信功深勞重,堪食此桃者,出班自奏,相國評功賜桃。公孫捷挺身而出,立於筵上,而言曰:「昔從主公獵於桐山,力誅猛虎,其功若何?」
숙손야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신의 어짊은 상국(안영)에 만 번 미치지 못합니다. 상국께서는 안으로 국정을 바로 잡으시고 밖으로 제후들을 복종시켰으니 그 공이 작지 않습니다. 이 복숭아는 마땅히 상국이 드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분에 넘치게 그것을 먹겠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숙손 대부께서 상국에게 양보를 하시니 각각 술 한 잔씩에 복숭아 한 개를 내리겠소.” 했다. 두 신하가 무릎을 꿇고 술과 복숭아를 먹고 감사의 말을 올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안자가 아뢰기를, “쟁반에 아직 복숭아 두 개가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여러 신하 중에서 공로가 큰 사람을 말하게 하고 이 복숭아를 먹게 하여 그 어짊을 표창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그 말이 아주 좋습니다.” 하고, 즉시 좌우에 명하여 계단 아래의 여러 신하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공로가 크다고 생각하여 그 복숭아를 먹고 싶은 사람은 반열에서 나와 스스로 자기의 공을 말하면 상국이 공로를 판단해서 복숭아를 하사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공손첩이 몸을 세우며 나가서 연회석 앞에 서서 말하기를, “소신은 전날 주공이 동산(桐山)에서 사냥하실 때 따라가 힘으로 맹호를 죽였으니, 그 공이 어떠합니까?” 했다.
晏子曰:「擎天保駕,功莫大焉!可賜酒一爵,食桃一枚,歸於班部。」古冶子奮然便出曰:「誅虎未足為奇。吾曾斬妖黿於黃河,使君危而復安,此功若何?」景公曰:「此時波濤洶湧,非將軍斬絕妖黿,必至覆溺,此蓋世奇功也!飲酒食桃,又何疑哉?」晏子慌忙進酒賜桃。只見田開疆撩衣破步而出曰:「吾曾奉命伐徐,斬其名將,俘甲首五百餘人,徐君恐懼,致賂乞盟。郯莒畏威,一時皆集,奉吾君為盟主,此功可以食桃乎?」晏子奏曰:「開疆之功,比於二將,更自十倍。爭奈無桃可賜,賜酒一杯,以待來年。」
안자가 말하기를, “하늘을 붙들어 어가를 보호했으니 그 공은 참으로 큽니다. 술 한 잔과 복숭아 한 개를 먹고 반열에 돌아가시오.” 했다. 고야자(古冶子)가 분연히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호랑이를 잡은 것은 기이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일찍이 요사스러운 자라를 황하에서 참하여 주군을 안전하게 모셨습니다. 이 공이 어떻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그때 파도가 높게 일어 장군이 요사스러운 자라를 죽이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배가 뒤집혀서 우리 일행은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오. 이것은 세상을 덮을 만한 큰 공로라! 술 한 잔을 마시고 복숭아를 먹는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했다. 안자가 바삐 고야자에게 술잔을 내리고 복숭아를 주었다. 그러자 전개강이 반열에서 나오며 위통을 벗어부치고 성큼성큼 걸어 나와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주군의 명을 받들어 서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그 장수의 목을 베고 무장병 5백여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서나라 군주가 두려워하여 뇌물을 바치고 동맹하기를 청하게 했습니다. 담나라와 거나라의 군주도 우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일시에 모두 모여 우리 주군을 맹주로 받들었습니다. 그 공이라면 복숭아를 먹을 만하지 않습니까?” 하니, 안자가 아뢰기를, “전개강 장군의 공은 앞의 두 장군과 비교하면 열 배나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줄 복숭아가 없으니 술을 한 잔 내리고 내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했다.
景公曰:「卿功最大,可惜言之太遲,以此無桃,掩其大功。」田開疆按劍而言曰:「斬黿打虎,小可事耳!吾跋涉千里之外,血戰成功,反不能食桃,受辱於兩國君臣之間,為萬代恥笑,何面目立於朝廷之上耶?」言訖,揮劍自刎而死。公孫捷大驚,亦拔劍而言曰:「我等微功而食桃,田君功大,反不能食。夫取桃不讓,非廉也﹔視人之死而不能從,非勇也。」言訖,亦自刎。古冶子奮氣大呼曰:「吾三人義均骨肉,誓同生死,二人已亡,吾獨苟活,於心何安?」亦自刎而亡。景公急使人止之,已無及矣。
제경공이 말하기를, “경의 공이 가장 큰데 애석하게도 말하는 것이 너무 늦어 하사할 복숭아가 없으니 그 공로를 표창할 수 없게 되었소.” 하니, 전개강이 칼을 만지면서 말하기를, “자라의 목을 베고 호랑이를 주먹으로 때려잡은 것은 작은 일입니다. 나는 산 넘고 물 건너 천 리 밖에서 피 흘리며 싸워 공을 이루었는데, 도리어 복숭아를 먹지 못하고 두 나라 군주와 신하들 사이에서 욕만 당했으니 이것은 만대의 웃음거리라 하겠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조정의 높은 자리에 서 있겠습니까?” 하고 말을 끝내자 칼을 들어 스스로 목을 찔러죽었다. 공손첩이 크게 놀라 역시 칼을 빼 들고 말하기를, “나는 하찮은 공을 세워 복숭아를 먹었는데, 전장군은 큰 공을 세우고도 도리어 복숭아를 먹지 못했다. 무릇 내가 복숭아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그를 따를 수 없다면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그 역시 칼로 목을 찔러죽었다. 그러자 고야자가 분연히 큰 소리로 소리치기를, “우리 세 사람은 의리가 골육에 나란하여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했는데 두 사람이 이미 죽고, 나만 홀로 구차하게 살면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하고, 역시 칼로 목을 찔러죽었다. 제경공이 급히 사람을 시켜 막으려 했으나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魯昭公離席而起曰:「寡人聞三臣皆天下奇勇,可惜一朝俱盡矣。」景公聞言嘿然,變色不悅。晏嬰從容進曰:「此皆吾國一勇之夫,雖有微勞,何足掛齒?」魯侯曰:「上國如此勇將,還有幾人?」晏嬰對曰:「籌策廟堂,威加萬里,負將相之才者數十人﹔若血氣之勇,不過備寡君鞭策之用而已,其生死何足為齊輕重哉!」景公意始釋然。晏子更進觴於兩君,歡飲而散。三傑墓在蕩陰里。後漢諸葛孔明《梁父吟》,正詠其事:「步出齊東門,遙望蕩陰里。里中有三墳,纍纍正相似。問是誰家塚?田疆古冶子。力能排南山,文能絕地紀。一朝中陰謀,二桃殺三士!誰能為此者?相國齊晏子。」
노소공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기를, “과인은 세 신하가 모두 천하에 보기 드문 용사라고 들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두 죽어 버렸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제경공이 듣고 아무 말 없이 얼굴색을 붉히며 기뻐하지 않았다. 안영이 조용히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한 용기 있는 사내들입니다, 비록 작은 공로가 있지만, 어찌 말할 거리가 있겠습니까?” 했다. 노소공이 말하기를, “상국에는 이같이 용기 있는 장수가 또 몇 사람이나 더 있습니까?” 하니, 안영이 대답하기를, “조당에 앉아서 계책을 마련하여 나라의 위엄을 수천 리 밖까지 떨칠 수 있는 장상의 재주를 갖춘 인물들은 수십 명이고, 저런 혈기에 찬 용사는 우리 주군께서 매질해서 부리는 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의 생사가 어찌 족히 제나라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했다. 안영의 말에 제경공의 마음이 비로소 풀렸다. 안자가 다시 두 나라의 군주에게 술잔을 따라 올리니 즐겁게 마시고 헤어졌다. 세 호걸의 무덤은 탕음리(蕩陰里)에 있는데, 후한의 제갈공명이 ‘양보음(梁父吟)’을 지어서 그 일을 읊기를, “제나라 동문을 걸어 나가서, 멀리 탕음리를 바라보면, 마을 가운데 세 무덤이 있는데, 아주 비슷한 모습으로 나란히 있다. 묻노니 누구의 무덤인가? 전개강, 고야자, 공손첩의 무덤이라. 힘은 능히 남산을 밀어낼 만하고, 문장은 능히 지기(地紀 ; 땅을 매단 줄)를 끊을 만했는데, 하루아침에 음모에 떨어져, 복숭아 두 개로 세 용사를 죽였도다! 누가 능히 이렇게 했는가? 제나라의 상국 안자였다.” 했다.
魯昭公別後,景公召晏嬰問曰:「卿於席間,張大其辭,雖然存了齊國一時體面,只恐三傑之後,難乎其繼。如之奈何?」晏子對曰:「臣舉一人,足兼三傑之用。」景公曰:「何人?」曰:「有田穰苴者,文能附眾,武能威敵,真大將之才也!」景公曰:「得非田開疆一宗乎?」晏子對曰:「此人雖出田族,然庶孽微賤,不為田氏所禮,故屏居東海之濱。君欲選將,無過於此。」景公曰:「卿既知其賢,何不早聞?」晏子對曰:「善仕者不但擇君,兼欲擇友。田疆古冶輩血氣之夫,穰苴豈屑與之比肩哉?」景公口雖唯唯,終以田陳同族為嫌,躊躇不決。
노소공과 헤어진 후에 제경공이 안영을 불러 묻기를, “경은 연회석에서 큰소리를 쳐서, 우리나라의 체면을 세웠지만, 다만 세 호걸이 죽은 후에 그들을 이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를 어찌해야 되겠소?” 하니, 안자가 대답하기를, “신이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그는 족히 세 사람을 겸하여 쓸만할 것입니다.”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입니까?” 하니, 안자가 말하기를, “전양저(田穰苴)라는 사람인데, 문장은 능히 사람들을 따르게 할 만하고, 무예는 능히 적을 위압할 수 있으니, 진실로 대장의 재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설마 전개강의 일족은 아니겠지요?” 하니, 안자가 대답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전씨 문중의 사람이나 서얼의 미천한 출신이라 전씨들이 대단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해의 바닷가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대장을 고르신다면 이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경이 이미 그 어짊을 알았다면 어찌하여 일찍이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하니, 안자가 대답하기를, “벼슬살이를 잘하는 사람은 군주를 가릴 뿐만 아니라 친구도 가립니다. 전개강이나 고야자 같은 무리는 혈기만 믿는 사내들인데, 양저가 어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습니까?” 했다. 제경공이 입으로는 비록 ‘예, 예’했지만, 끝내 전(田)씨와 진(陳)씨는 동족임을 싫어하여 주저하며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忽一日,邊吏報道:「晉國探知三傑俱亡,興兵犯東阿之境﹔燕國亦乘機侵擾北鄙。」景公大懼。於是令晏子以繒帛詣東海之濱,聘穰苴入朝。苴敷陳兵法,深合景公之意,即日拜為將軍,使帥車五百乘,北拒燕晉之兵。穰苴請曰:「臣素卑賤,君擢之閭里之中,驟然授以兵權,人心不服。願得吾君寵臣一人,為國人素所尊重者,使為監軍,臣之令乃可行也。」景公從其言,命嬖大夫莊賈,往監其軍。苴與賈同時謝恩而出。至朝門之外,莊賈問穰苴出軍之期,苴曰:「期在明日午時,某於軍門專候同行,勿過日中也。」言畢別去。
갑자기 어느 날 변방의 관리가 보고하기를, “진(晉)나라가 세 호걸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탐지하여, 군사를 일으켜 동아(東阿) 지역으로 쳐들어오고, 연(燕)나라도 역시 이 틈을 타서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크게 놀랐다. 이에 안자에게 명하여 비단 예물을 가지고 동해 가에 가서 양저를 초빙하여 조정에 데려오게 했다. 양저가 조정에 들어와 병법에 대해 진술하니 제경공의 마음속에 쏙 들었다. 그날로 양저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전차 5백 대를 거느리고 북쪽에서 연나라와 진(晉)나라의 군사를 막게 했다. 양저가 청하여 말하기를, “신은 본디 비천한데 주군께서 민간에서 발탁하여 갑자기 병권을 맡기셨으니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주군께서 나라 사람들이 평소에 존중하는 총신 한 명을 감군(監軍)으로 삼아서 신의 명령이 행해지게 해 주십시오.” 하니, 제경공이 그 말에 따라 총애하는 대부 장가(莊賈)를 명하여 군영으로 가서 군사를 감독하게 했다. 양저와 장가가 함께 감사를 드리고 물러 나왔다. 조문 밖으로 나오자 장가가 양저에게 출병하는 날짜를 물었다. 양저가 말하기를, “날짜는 내일 오시(午時;정오)입니다. 내가 군문에서 대부를 기다렸다가 같이 출병할 것이니 정오를 넘기지 마시오.” 했다. 양저가 말을 마치고 가 버렸다.
至次日午前,穰苴先至軍中,喚軍吏立木為表,以察日影﹔因使人催促莊賈。賈年少,素驕貴,恃景公寵幸,看穰苴全不在眼。況且自為監軍,只道權尊勢敵,緩急自由。是日親戚賓客,俱設酒餞行,賈留連歡飲,使者連催,坦然不以為意。穰苴候至日影移西,軍吏已報未牌,不見莊賈來到,遂吩咐將木表放倒,傾去漏水,竟自登壇誓眾,申明約束。號令方完,日已將晡。遙見莊賈高車駟馬,徐驅而至,面帶酒容。既到軍門,乃從容下車,左右擁衛,踱上將臺。穰苴端然危坐,並不起身,但問:「監軍何故後期?」莊賈拱手而對曰:「今日遠行,蒙親戚故舊攜酒餞送,是以遲遲也。」
다음날 오전에 양저가 먼저 군중에 이르러 군 사무관을 부르더니 나무를 세우고 표시하여 해의 그림자를 살피게 하였다.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장가를 재촉했다. 장가는 나이가 어리고 평소에 신분이 높다고 교만했으며, 제경공의 총애를 믿고 양저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는데, 하물며 자기가 감군이 되어 권세가 양저에 미치지 못할 것이 없으니 완급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날 장가의 친척과 손님들이 전별연을 열어 장가를 붙들고 즐겁게 술을 마셨다. 사자가 와서 계속 재촉했지만 편안히 시간이 늦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양저가 해그림자가 서쪽으로 옮겨갈 때까지 기다렸지만 군 사무관은 이미 미시(未時 ; 오후 2시)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장가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양저가 막대기를 치워 버리고 물시계의 누수(漏水)도 쏟아 버리라고 분부했다. 곧 양저가 단상에 올라 군사들에게 맹세를 하고 약속을 밝혔다. 명령하기를 끝내자 해는 이미 신시(申時 ; 오후 4시쯤)가 되었다. 멀리 보니 장가가 네 필의 말이 끄는 높은 수레를 타고 천천히 도착했는데 얼굴에 술기운을 띠었다. 군문에 이르자 장가는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수레에서 내려 장대(將臺)로 올라갔다. 양저가 단정히 앉아서 몸을 일으키지 않고 단지 묻기를, “감군은 무엇 때문에 약속한 시간에 늦었소?” 하니, 장가가 두 손을 모으며 대답하기를, “오늘 원정길에 나선다고 친척과 옛 친구들이 술을 가져와 전송하기에 이렇게 늦었습니다.” 했다.
穰苴曰:「夫為將者,受命之日,即忘其家﹔臨軍約束,則忘其親﹔秉枹鼓,犯矢石,則忘其身。今敵國侵淩,邊境騷動,吾君寢不安席,食不甘味,以三軍之眾,託吾兩人,冀旦夕立功,以救百姓倒懸之急,何暇與親舊飲酒為樂哉?」莊賈尚含笑對曰:「幸未誤行期,元帥不須過責。」穰苴拍案大怒曰:「汝倚仗君寵,怠慢軍心,倘臨敵如此,豈不誤了大事!」即召軍政司問曰:「軍法期而後至,當得何罪?」軍政司曰:「按法當斬!」莊賈聞一「斬」字,纔有懼意,便要奔下將臺。穰苴喝教手下,將莊賈捆縛,牽出轅門斬首。唬得莊賈滴酒全無,口中哀叫討饒不已。
양저가 말하기를, “무릇 장수된 자는 군명을 받은 날부터 곧바로 가족을 잊고, 군대에서 약속을 하면 친척과 친구를 잊어야 한다. 북채를 손에 잡고 시석을 무릅쓸 때는 자기 몸을 잊어야 한다. 지금 적국의 침략으로 변경이 소란스럽고 주군께서 잠을 편히 주무시지 못하며 음식도 맛을 느끼지 못하여, 삼군의 군사들을 우리 두 사람에게 맡기어 아침저녁으로 공을 세워 거꾸로 매달린 백성들의 위급함을 구하라고 부탁하셨다. 그런데 그대는 어느 겨를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겠는가?” 하니, 장가가 아직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어쩌다 약속 시간을 어기게 되었으니 원수께서는 너무 책하지 마시오.” 했다. 양저가 탁자를 치며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주군의 총애에 의지하여 군심을 태만하게 하니 만약에 적군을 앞에 두고 이렇게 한다면 어찌 대사를 그르치지 않겠느냐?” 하고, 즉시 군정사(軍政司)를 불러 묻기를, “군법에 약속 시간이 지나서 오면 어떤 죄에 해당되는가?” 했다. 군정사가 말하기를, “군법에 의하면 마땅히 참수해야 합니다.” 했다. 장가가 ‘참(斬)’이라는 말을 듣자 그때서야 두려운 생각이 들어 문득 달아나려고 장대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양저가 수하들에게 고함쳐서 장가를 붙들어 결박하고 원문 밖으로 끌고 나가서 참수하도록 했다. 장가가 크게 놀라 술기운이 달아나며 입속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용서를 빌어 마지 않았다.
左右從人,忙到齊侯處報信求救。連景公也吃一大驚,急叫梁邱據持節往諭,特免莊賈一死﹔吩咐乘軺車疾驅,誠恐緩不及事。那時莊賈之首,已號令轅門了。梁邱據尚然不知,手捧符節,望軍中馳去。穰苴喝令阻住,問軍政司曰:「軍中不得馳車,使者當得何罪?」答曰:「按法亦當斬!」梁邱據面如土色,戰做一團,口稱:「奉命而來,不干某事。」穰苴曰:「既有君命,難以加誅﹔然軍法不可廢也。」乃毀車斬驂,以代使者之死。梁邱據得了性命,抱頭鼠竄而去。於是大小三軍,莫不股栗。穰宜之兵,未出郊外,晉師聞風遁去。燕人亦渡河北歸。苴追擊之,斬首萬餘。燕人大敗,納賂請和。
장가를 따라온 자들이 황급하게 제경공에게 달려가 장가의 처지를 보고하고 구원을 청했다. 제경공도 크게 놀라 급히 양구거(梁邱據)를 불러 부절을 가지고 특별히 장가의 죄를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군주의 뜻을 전하게 했다. 제경공이 양구거가 시간에 늦어 장가의 목숨을 구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그에게 작고 빠른 수레를 타고 빨리 달려가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미 장가의 머리는 원문 앞에 걸려 있었다. 양구거가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손으로 제경공의 부절을 받들고 군중을 바라보고 달려갔다. 양저가 소리쳐 수레를 멈추게 하고 군정사에게 묻기를, “군중에는 수레를 달리지 못하는 법이다. 사자는 어떤 죄에 해당하는가?” 하니, 군정사가 대답하기를, “군법에 역시 참수형에 해당합니다.” 했다. 양구거의 얼굴이 흙색으로 변하더니 몸을 한번 떨더니 말하기를, “군주의 명을 받들어 온 것이지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하니, 양저가 말하기를, “이미 군명이 있으니, 죽일 수는 없겠지만, 군법을 폐할 수도 없다.” 하고, 양구거가 타고 온 수레를 부숴버리고, 수레를 끌던 말을 목 베어 사자의 죽음을 대신하게 했다. 양구거가 목숨을 구하여 머리를 싸안고 쥐새끼 같이 달아났다. 이에 대소 삼군의 군사들이 다리를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양저가 군사들을 이끌고 교외에 나가기도 전에 진(晉)나라 군사들은 소문을 듣고 달아나 버렸다. 연나라 군사들도 역시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양저가 그 뒤를 추격하여 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연나라 군사가 대패하여 뇌물을 바치면서 화의를 청했다.
班師之日,景公親勞於郊,拜為大司馬,使掌兵權。史臣有詩云:「寵臣節使且罹刑,國法無私令必行。安得穰苴今日起,大張敵愾慰蒼生。」諸侯聞穰苴之名,無不畏服。景公內有晏嬰,外有穰苴,國治兵強,四境無事,日惟田獵飲酒,略如桓公任管仲之時也。一日,景公在宮中與姬妾飲酒,至夜,意猶未暢,忽思晏子,命左右將酒具移於其家。前驅往報晏子曰:「君至矣!」晏子玄端束帶,執笏拱立於大門之外。景公尚未下車,晏子前迎,驚惶而問曰:「諸侯得無有故乎?國家得無有故乎?」景公曰:「無有。」
양저가 회군하는 날에 제경공이 친히 교외에서 위로하고, 양저를 대사마(大司馬)로 삼아 병권을 맡겼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총신도, 부절을 지닌 사자도 형을 당하니, 국법은 개인 사정이 없어 반드시 행하였다. 어째서 전양저는 오늘 일어났을까, 적개심을 크게 일으켜 창생을 위로했기 때문이다.” 했다. 제후들이 양저의 명성을 듣고 모두가 두려워했다. 제경공이 안에는 안영이 있고, 밖에는 양저가 있어 나라는 잘 다스려지고 군사들은 강력해졌다. 사방 변경에 일이 없어 제경공은 날마다 오로지 사냥과 음주를 즐겨, 대략 제환공이 관중에게 나랏일을 맡겼던 때와 같았다. 하루는 제경공이 궁중에서 희첩들과 술을 마시다가 밤이 되어도 마음이 오히려 흡족하지 않았다. 갑자기 안자를 생각하고 좌우에 명하여 술 그릇을 챙겨서 술자리를 옮기라고 명했다. 사자가 앞서 달려가 안자에게 알리기를, “주군께서 오십니다.” 하니, 안자가 검은 관복에 허리띠를 매고 홀(笏)을 받쳐 들고 대문 밖에 섰다. 제경공이 미처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안자가 앞으로 나가 맞이하며 황망한 태도로 묻기를, “제후들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아무 일도 없소.” 했다.
晏子曰:「然則君何為非時而夜辱於臣家?」景公曰:「相國政務煩勞,今寡人有酒醴之味,金石之聲,不敢獨樂,願與相國共享。」晏子對曰:「夫安國家,定諸侯,臣請謀之。若夫布薦席,陳簠簋者,君左右自有其人,臣不敢與聞也。」景公命回車,移於司馬穰苴之家,前驅報如前。司馬穰苴冠纓披甲,操戟拱立於大門之外,前迎景公之車,鞠躬而問曰:「諸侯得無有兵乎?大臣得無有叛者乎?」景公曰:「無有。」穰苴曰:「然則昏夜辱於臣家者何也?」景公曰:「寡人無他,念將軍軍務勞苦,寡人有酒醴之味,金石之樂,恩與將軍共之耳。」
안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주군께서 무슨 일로 야심한 때에 신의 집에 오셨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상국께서 번거로운 정무에 노고가 많으니 오늘 과인만 좋은 술과 즐거운 음악을 혼자 즐길 수 없어 상국과 같이 즐기러 왔소.” 했다. 안자가 대답하기를, “무릇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제후들을 안정시키는 일이라면 신과 의논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자리를 깔고 술상을 준비하는 일은 주군의 좌우에 그것을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신이 감히 그 일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제경공이 수레를 돌리라고 명하여 사마양저의 집으로 갔다. 시종이 먼저 달려가 앞에서와 같이 알렸다. 사마양저가 관을 쓰고 갑옷을 입고 손에는 극을 잡고 대문 밖에서 손을 모아 제경공의 수레를 맞이했다. 양저가 몸을 굽혀 묻기를, “제후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까? 아니면 대신 중에 반란을 일으킨 자가 있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없소.” 했다. 양저가 말하기를, “그런데 밤에 신의 집에 오신 것은 무슨 일이십니까?” 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다름이 아니라 장군이 군무에 노고가 많음을 생각하여 과인에게 좋은 술과 즐거운 음악이 있어 장군과 함께 즐겨 볼까 하고 왔소.” 했다.
穰苴對曰:「夫禦寇敵,誅悖亂,臣請謀之。若夫布薦席,陳簠簋,君左右不乏,奈何及於介冑之士耶?」景公意興索然。左右問曰:「將回宮乎?」景公曰:「可移於梁邱大夫之家。」前驅馳報亦如前。景公車未及門,梁邱據左操琴,右挈竽,口中行歌而迎景公於巷口。景公大悅,於是解衣卸冠,與梁邱據歡呼於絲竹之間,雞鳴而返。明日,晏嬰穰苴同入朝謝罪,且諫景公不當夜飲於人臣之家。景公曰:「寡人無二卿,何以治吾國?無梁邱據,何以樂吾身?寡人不敢妨二卿之職,二卿亦勿與寡人之事也。」史臣有詩云:「雙柱擎天將相功,小臣便辟豈相同?景公得士能專任,嬴得芳名播海東。」
양저가 대답하기를, “무릇 적군을 막고 모반자를 죽이는 것은 신에게 의논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자리를 깔고 술상을 준비하는 일은 주군의 좌우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적지 않은데 어찌하여 갑옷을 입은 무사에게 시키려 하십니까?” 했다. 제경공은 흥취가 사라져 버렸다. 좌우의 시종이 묻기를, “장차 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양구거(梁邱據)의 집으로 가자!” 했다. 시종이 앞서 달려가 양구거에게 제경공의 행차를 알렸다. 제경공의 수레가 미처 양구거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양구거가 왼손에는 비파를 들고 오른손에는 피리를 들고 노래를 크게 부르며 골목 입구에서 제경공을 맞이했다. 제경공이 크게 기뻐하여 이에 어의와 관을 벗어버리고 양구거와 함께 음악을 듣고 환호하며 닭이 울고 나서야 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안영과 양저가 같이 입조하여 제경공에게 지난밤의 일을 사죄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경공이 밤에 신하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신 일은 부당하다고 간했다. 제경공이 말하기를, “과인에게 두 경이 없다면 어찌 내가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소? 또한 양구거가 없다면 과인에게 무슨 즐거움이 있겠소? 과인은 두 경의 하는 일을 간섭하지 않을 터이니 두 경들도 과인의 일에 간섭하지 마시오.” 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두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장군과 상국의 공이니, 어찌 소신(小臣)이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과 서로 같겠는가? 제경공은 어진 신하에게 능히 나랏일을 맡길 수 있어, 그의 아름다운 이름을 해동에 떨치게 되었다.” 했다.
是時中原多故,晉不能謀,昭公立六年薨,世子去疾即位,是為頃公。頃公初年,韓起羊舌肹俱卒。魏舒為政,荀躒范鞅用事,以貪冒聞。祁氏家臣祁勝,通於鄔臧之室,祁盈執祁勝。勝行賂於荀躒。躒譖於頃公,反執祁盈。羊舌食我黨於祁氏,為之殺祁勝。頃公怒,殺祁盈食我,盡滅祁羊舌二氏之族,國人冤之。其後魯昭公為強臣季孫意如所逐,荀躒復取貨於意如,不納昭公。於是齊景公合諸侯於鄢陵,以謀魯難,天下俱高其義。齊景公之名,顯於諸侯。此是後話。
그때 중원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났으나 진(晉)나라가 능히 해결할 수 없었다. 진소공이 재위 6년 만에 죽고 세자 거질(去疾)이 즉위하였다. 이가 진경공(晉頃公)이다. 진경공 원년에 한기와 양설힐이 모두 죽어서 위서가 상경이 되었다. 순력(荀躒)과 범앙(范鞅)이 권력을 남용하고 재물을 탐하여 소문이 퍼졌다. 그때 기씨의 가신인 기승(祁勝)이 우장(鄔臧)의 처와 간통하다가 기영(祁盈)이 기승을 붙잡았다. 기승이 순력에게 뇌물을 바치자 순력이 경공에게 기영을 참소하여 도리어 기영을 잡아들였다. 양설식아(羊舌食我)가 기씨들과 힘을 합하여 기승을 잡아 죽였다. 경공이 노하여 기영과 양설식아를 죽이고, 기씨와 양설씨 종족들을 모조리 죽였다. 진나라 백성이 그것을 원통하게 생각했다. 그 후 노소공은 권신 계손의여(季孫意如)에 의해 쫓겨났다. 순력이 다시 계손의여에게 뇌물을 받고 노소공을 복위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경공이 언릉(鄢陵)에 제후들을 모이게 하여, 노나라의 내란을 평정하려고 했다.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제경공의 의기를 높이 샀다. 제경공의 이름이 제후들 사이에 드러났다. 이것은 후일의 이야기다.
卻說,周景王十九年,吳王夷昧在位四年,病篤,復申父兄之命,欲傳位於季札。札辭曰:「吾不受位明矣!昔先君有命,札不敢從,富貴於我如秋風之過耳,吾何愛焉?」遂逃歸延陵。群臣奉夷昧之子州于為王,改名曰僚,是為王僚。諸樊之子名光,善於用兵,王僚用之為將。與楚戰於長岸,殺楚司馬公子魴,楚人懼,築城於州來,以禦吳。時費無極以讒佞得寵。蔡平公廬,已立嫡子朱為世子,其庶子名東國,欲謀奪嫡,納貨於無極。無極先譖朝吳,逐之奔鄭。及蔡平公薨,世子朱立。無極詐傳楚王之命,使蔡人逐朱,立東國為君。
한편, 주경왕 19년(기원전 526년)에 오왕 이매가 재위 4년에 병이 위독하여, 다시 부왕과 형들의 유언대로 계찰에게 왕위를 전하려고 했다. 계찰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내가 왕의 자리를 받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옛날에 부왕께서 내린 명령도 제가 감히 받들지 않았습니다. 부귀는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지나가는 가을바람과 같을 뿐인데 제가 어찌 그 자리를 아까워하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연릉(延陵)으로 도망가듯 돌아가 버렸다. 여러 신하가 이매의 아들 주우(州于)를 받들어 오나라 왕으로 세웠다. 주우가 이름을 요(僚)로 개명하였는데, 이가 오왕 왕료(王僚)다. 제번의 아들은 이름이 광(光)이고, 용병에 능했다. 왕료가 그를 장군으로 삼아 장안(長岸)에서 초나라와 싸워서 초나라의 사마 공자 방(公子魴)을 죽였다. 초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주래(州來)에 성을 쌓아 오나라를 방어했다. 그때 초나라에서는 비무극이 아첨하는 말로 초평왕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채평공 려(廬)는 이미 적자인 주(朱)를 세자로 삼았는데, 평공의 서자인 동국(東國)이 세자의 자리를 뺏으려고 모의하여 초나라 비무극에게 뇌물을 바쳤다. 비무극이 먼저 조오(朝吳)를 초평왕에게 참소하여 정나라로 쫓아냈다. 이어서 채평공이 죽자 세자 주(朱)가 뒤를 이었다. 비무극이 거짓으로 초평왕의 명이라고 전하여 채나라 사람들을 시켜 주(朱)를 쫓아내고 동국을 채나라 군주로 세웠다.
平王問曰:「蔡人何以逐朱?」無極對曰:「朱將叛楚,蔡人不願,是以逐之。」平王遂不問。無極又心忌太子建,欲離間其父子,而未有計。一日,奏平王曰:「太子年長矣,何不為之婚娶?欲求婚,莫如秦國。秦,強國也,而睦於楚﹔兩強為婚,楚勢益張矣。」平王從之,遂遣費無極往聘秦國,因為世子求婚。秦哀公召群臣謀其可否。群臣皆言:「昔秦晉世為婚姻,今晉好久絕,楚勢方盛,不可不許。」秦哀公遂遣大夫報聘,以長妹孟嬴許婚。(今俗家小說稱為無祥公主者是也。公主之號,自漢代始有之,春秋時焉有此號哉?)
초평왕이 말하기를, “채나라 사람들이 어찌하여 주를 쫓아냈는가?” 하니, 비무극이 대답하기를, “주가 장차 초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했기 때문에 채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원치 않아서 주를 쫓아냈습니다.” 했다. 초평왕은 마침내 묻지 않았다. 비무극이 또 태자 건(建)을 꺼리어 부자간을 이간시키려 했으나 아직 계책이 없었다. 하루는 비무극이 초평왕에게 아뢰기를, “태자의 나이가 장성하였는데 어찌하여 혼처를 구하지 않으십니까? 구혼을 하자면 진(秦)나라 만한 데가 없습니다. 진은 강국이며 우리나라와 화목합니다. 두 강국이 혼사를 맺으면 초나라의 세력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했다. 초평왕이 그 말을 쫓아 곧 비무극을 진(秦)나라에 보내 세자를 위해 구혼하게 했다. 진애공(秦哀公)이 여러 신하를 불러 가부를 의논하니,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예부터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대대로 혼인을 맺었습니다. 지금은 진(晉)나라와 우호 관계가 끊어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초나라의 세력이 바야흐로 성하게 되었으니 청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했다. 진애공은 즉시 대부 한 사람을 초나라에 답례 사절로 보내고 그의 큰 누이동생인 맹영(孟嬴)을 초나라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지금의 통속소설에 무상공주(無祥公主)라고 부르는 여인이다. 공주라는 칭호는 한나라 시대에 비로소 사용했으므로 춘추시대에 어찌 이런 호칭이 있었겠는가?)
平王復命無極領金珠彩幣,往秦迎娶。無極隨使者入秦,呈上聘禮。哀公大悅,即詔公子蒲送孟嬴至楚,裝資百輛,從媵之妾數十餘人。孟嬴拜辭其兄秦伯而行。無極於途中,察知孟嬴有絕世之色﹔又見媵女內有一人,儀容頗端,私訪其來歷,乃是齊女,自幼隨父宦秦,遂入宮中,為孟嬴侍妾。無極訪得備細,因宿館驛,密召齊女謂曰:「我相你有貴人之貌,有心要抬舉你,做個太子正妃,汝能隱吾之計,管你將來富貴不盡。」齊女低首無言。無極先一日行,趨入宮中,回奏平王,言:「秦女已到,約有三舍之遠。」
초평왕이 다시 비무극에게 명하여 황금과 구슬과 오색 비단 등을 가지고 진(秦)나라에 가서 맹영을 모셔 오라고 했다. 비무극이 진나라 사자를 따라 진나라에 들어가 예물을 바치는 예를 드렸다. 진애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공자 포(公子蒲)에게 명하여 맹영을 초나라에 보내주고 오라고 했다. 예물을 실은 수레가 백 대에 달했고, 딸려 보낸 잉첩(媵妾)이 수십 명이었다. 맹영은 그의 오라버니 진애공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초나라로 갔다. 비무극이 도중에서 맹영이 절세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잉첩 중에 자태가 제법 단아한 여인이 한 사람 있었다. 비무극이 몰래 그 출신을 알아보니 그 여인은 곧 제나라 출신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 진(秦)나라에서 벼슬을 살게 된 부친을 따라왔다가 마침내 궁중으로 들어가 맹영의 몸종이 되었다고 했다. 비무극이 제나라 여자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 후 역관에 묶게 되었을 때 비밀리에 제나라 여자를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너의 관상을 보아하니 귀인의 풍모가 있다. 너를 천거하여 태자비를 만들어 주려 하니 너는 나의 계책을 숨겨야 한다. 그리하면 반드시 너는 장차 부귀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하니, 제나라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무극이 앞서 길을 달려 하루 먼저 궁중에 달려 들어가서 평왕에게 아뢰기를, “진나라 여자가 이미 도착하여 도성 밖 약 3사(90리)의 거리에 묶고 있습니다.” 했다.
平王問曰:「卿曾見否?其貌若何?」無極知平王是酒色之徒,正要誇張秦女之美,動其邪心,恰好平王有此一問,正中其計。遂奏曰:「臣閱女子多矣,未見有如孟嬴之美者。不但楚國後宮,無有其對,便是相傳古來絕色,如妲己驪姬,徒有其名,恐亦不如孟嬴之萬一矣!」平王聞秦女之美,面皮通紅,半晌不語,徐徐嘆曰:「寡人枉自稱王,不遇此等絕色,誠所謂虛過一生耳!」無極請屏左右,遂密奏曰:「王慕秦女之美,何不自取之?」平王曰:「既聘為子婦,恐礙人倫。」無極奏曰:「無害也。此女雖聘於太子,尚未入東宮,王迎入宮中,誰敢異議?」
초평왕이 묻기를, “경은 진나라 여자를 이미 보았는가? 그녀의 용모가 어떠하던가?” 하니, 비무극은 초평왕이 주색을 밝히는 위인이라는 것을 알고, 진나라 여자의 아름다움을 과장하여 초평왕의 나쁜 마음을 충동질하려고 하던 참에, 때맞춰 초평왕이 이런 질문을 하여 자기의 계책에 맞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뢰기를, “신이 많은 여자를 봤지만 맹영과 같이 아름다운 여인은 보지 못했습니다. 초나라 후궁 중에 그녀의 미모에 비견할 수 있는 여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 오는 달기나 여희 같은 절색이라도 한갓 이름뿐이지 맹영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했다. 초평왕이 진나라 여자의 아름다움을 듣자 얼굴에 홍조를 띠며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더니 천천히 한탄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헛되이 왕이라고 칭할 뿐이지 그와 같은 천하의 절색도 만나지 못하니 참으로 일생을 헛되이 보냈다고 하겠다.” 했다. 비무극이 좌우의 시종들을 물리게 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아뢰기를, “대왕께서 진나라 여자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시면 어찌하여 스스로 취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초평왕이 말하기를, “이미 며느리로 데려왔으니 인륜에 거리낄까 두렵다.” 했다. 비무극이 아뢰기를,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비록 태자의 부인으로 데려왔지만, 아직 동궁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대왕께서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한들 누가 감히 이의를 말하겠습니까?” 했다.
平王曰:「群臣之口可鉗,何以塞太子之口?」無極奏曰:「臣觀從媵之中,有齊女才貌不凡,可充作秦女。臣請先進秦女於王宮,復以齊女進於東宮,囑以毋漏機關,則兩相隱匿,而百美俱全矣。」平王大喜,囑無極機密行事。無極謂公子蒲曰:「楚國婚禮,與他國異。先入宮見舅姑,而後成婚。」公子蒲曰:「惟命。」無極遂命軿車將孟嬴及妾媵,俱送入王宮,留孟嬴而遣齊女。令宮中侍妾扮作秦媵,齊女假作孟嬴,令太子建迎歸東宮成親。滿朝文武及太子,皆不知無極之詐。孟嬴問:「齊女何在?」則云:「已賜太子矣。」潛淵詠史詩云:「衛宣作俑是新臺,蔡國奸淫長逆胎﹔堪恨楚平倫理盡,又招秦女入宮來。」
초평왕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의 입은 비록 막을 수 있겠지만 태자의 입은 어떻게 막겠는가?” 하니, 비무극이 말하기를, “신이 진나라 여자를 따라온 잉첩을 살펴보니 그중에 제나라 여인이 재주와 용모가 범상치 않으니 그녀를 진나라 여자로 채워 넣으면 됩니다. 신이 먼저 진나라 여자를 왕궁으로 들이고 다시 제나라 여자를 동궁으로 보내면서 그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해 놓으면, 양쪽이 서로 숨겨서 모두에게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했다. 초평왕이 크게 기뻐하여 비무극에게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도록 당부하였다. 비무극이 진(秦)나라 공자 포에게 말하기를, “초나라의 혼례는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먼저 왕궁으로 들어가 시부모를 뵙고 그다음에 혼례를 치릅니다.” 하니, 공자 포가 말하기를, “명에 따르겠습니다.” 했다. 비무극이 곧 좌우에게 명하여 맹영과 그 잉첩들을 휘장을 친 수레에 태우고 모두 왕궁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어서 맹영은 왕궁에 남게 하고 제녀는 동궁으로 보냈다. 궁중의 시첩들을 진나라 잉첩으로 분장하고 제나라 여자는 거짓 맹영으로 분장하여, 태자 건으로 하여금 맞이하여 동궁으로 데려가 성례를 치르게 하였다. 조정의 문무 대신들과 태자 모두가 비무극이 꾸민 속임수를 알지 못했다. 맹영이 묻기를, “제나라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곧 말하기를, “이미 태자에게 주었습니다.” 했다. 잠연(潛淵) 선생의 영사시(詠史詩)에 이르기를, “위선공이 신대(新臺)에서 나쁜 선례를 만들었고, 채경공은 며느리와 간통하여 반역을 배태(胚胎)시켰고, 통탄스럽게도 초평왕이 패륜을 저질렀으니, 며느리로 데려온 진나라 여자를 궁중으로 끌어들였다.” 했다.
平王恐太子知秦女之事,禁太子入宮,不許他母子相見。朝夕與秦女在後宮宴樂,不理國政。外邊沸沸揚揚,多有疑秦女之事者。無極恐太子知覺,或生禍變,乃告平王曰:「晉所以能久霸天下者,以地近中原故也。昔靈王大城陳蔡,以鎮中華,正是爭霸之基。今二國復封,楚仍退守南方,安能昌大其業?何不令太子出鎮城父,以通北方?王專事南方,天下可坐而策也。」平王躊躇未答。無極又附耳密言曰:「秦婚之事,久則事洩。若遠屏太子,豈不兩得其利?」平王恍然大悟。遂命太子建出鎮城父,以奮揚為城父司馬,諭之曰:「事太子如事寡人也!」
초평왕은 태자가 진나라 여자의 일을 알까 걱정하여 태자가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모자의 상면도 허락하지 않았다. 초평왕은 조석으로 진나라 여자와 후궁에서 잔치를 벌여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궁궐 밖에서는 여론이 비등하여 많은 사람이 진나라 여자의 일을 의심했다. 비무극은 태자가 그 일을 알게 되어 혹시라도 변란의 화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여 곧 초평왕에게 고하기를, “진(晉)나라가 오랫동안 능히 천하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땅이 중원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초영왕께서 진(陳)나라와 채나라에 큰 성을 쌓아 중원을 진압하려 했던 것은 바로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기초였습니다. 지금 두 나라를 다시 봉하여 초나라는 예전처럼 남방으로 물러나게 되었기 때문에, 어찌 능히 패업을 펼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태자에게 명하시어 나가서 성보(城父)에 진을 쳐서 북방으로 통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대왕께서는 남방의 일에 전념할 수 있게 되어 가히 앉아서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계책입니다.” 했다. 평왕이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비무극이 귓속말로 말하기를, “진(秦)나라 혼사 일은 시간이 지나게 되면 탄로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태자를 멀리 보내신다면 나라를 위해서나 대왕 자신에게나 어찌 이롭지 않겠습니까?” 하니, 초평왕이 문득 크게 깨닫고 즉시 태자 건에게 명하여 군사를 데리고 가서 성보를 지키도록 했다. 분양(奮陽)을 성보의 사마로 삼아 당부하기를, “태자를 나를 모시듯 하라!” 했다.
伍奢知無極之讒,將欲進諫。無極知之,復言於平王,使伍奢往城父輔助太子。太子行後,平王遂立秦女孟嬴為夫人﹔出蔡姬歸於鄖。太子到此,方知秦女為父所換,然無可奈何矣。孟嬴雖蒙王寵愛,然見平王年老,心甚不悅。平王自知非匹,不敢問之。踰年,孟嬴生一子,平王愛如珍寶,遂名曰珍。珍周歲之後,平王始問孟嬴曰:「卿自入宮,多愁嘆,少歡笑,何也?」孟嬴曰:「妾承兄命,適事君王。妾自以為秦楚相當,青春兩敵。及入宮庭,見王春秋鼎盛,妾非敢怨王,但自嘆生不及時耳!」
오사(伍奢)가 비무극의 속임수를 알아채고 장차 나아가 간언하려고 했다. 그러나 비무극이 그것을 알고 다시 평왕에게 말하여 오사도 성보로 가서 태자를 보좌하게 했다. 태자가 성보로 간 후에 평왕은 마침내 진나라 여자 맹영을 부인으로 삼고, 태자의 생모인 채희(蔡姬)는 운(鄖) 땅으로 돌려보냈다. 태자는 성보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나라 여자가 부왕에 의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맹영이 비록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초평왕을 보니 늙었기 때문에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 초평왕도 스스로 짝이 아님을 알았으나 감히 맹영에게 이유를 묻지 못했다. 1년이 지나자 맹영이 아들을 낳았다. 초평왕이 귀중한 보물처럼 사랑했으므로 이름을 진(珍)이라고 했다. 진이 다시 돌이 지난 후에 초평왕이 비로소 맹영에게 묻기를, “그대는 궁에 들어온 후로 늘 수심이 많고 웃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오?” 하니, 맹영이 말하기를, “첩이 오라버니의 명을 받들어 군왕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첩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진(秦)나라와 초나라는 서로 비슷하니, 저도 젊은 나이의 상대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궁정에 들어와 보니 대왕의 춘추가 혈기 왕성한 것을 보고, 제가 감히 대왕을 원망하지 못하고, 다만 대왕과 같은 때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할 뿐입니다.” 했다.
平王笑曰:「此非今生之事,乃宿世之姻契也。卿嫁寡人雖遲,然為后則不知早幾年矣。」孟嬴心惑其言,細細盤問宮人,宮人不能隱瞞,遂言其故。孟嬴淒然垂淚。平王覺其意,百計媚之,許立珍為世子。孟嬴之意稍定。費無極終以太子建為慮,恐異日嗣位為王,禍必及己,復乘間譖於平王曰:「聞世子與伍奢有謀叛之心,陰使人通於齊晉二國,許為之助,王不可不備。」平王曰:「吾兒素柔順,安有此事?」無極曰:「彼以秦女之故,久懷怨望。今在城父繕甲厲兵有日矣。常言穆王行大事,其後安享楚國,子孫繁盛,意欲效之。王若不行,臣請先辭,逃死於他國,免受誅戮。」
초평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된 것은 현세의 일이 아니라 전생의 인연으로 맺어진 것이오. 그대는 과인에게 너무 늦게 시집왔지만, 왕후가 된 것이 몇 년이나 앞당겨진 것을 모르는구려.” 했다. 맹영이 마음속으로 그 말에 의혹이 생겼다. 그래서 궁녀들에게 자세히 캐물어 보니, 궁녀들이 숨기지 못하고 마침내 그 까닭을 말했다. 맹영은 쓸쓸하게 눈물을 흘렸다. 초평왕이 그 마음을 알고서 백방으로 그 비위를 맞추려고 애쓴 나머지 공자 진을 세자로 세우기로 허락했다. 그제야 맹영의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비무극은 끝내 태자 건이 염려되어, 후일에 태자 건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화가 반드시 자기에게 미칠 것임을 두려워하여, 다시 틈을 타서 초평왕에게 참소하기를, “세자가 오사와 모의하여 반역을 꾀하고 몰래 사람을 제나라와 진(晉)나라에 보내어 도움을 허락받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왕께서는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초평왕이 말하기를, “내 아들은 원래 유순한 아이인데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는가?” 했다. 비무극이 말하기를, “태자는 진나라 여자의 일로 원망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성보에서 무기를 정비하고 병사들을 훈련하며, 항상 입으로 초목왕이 대사를 행한 후에 초나라는 안정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고 하면서 그것을 본받겠다고 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믿지 못하신다면 신이 먼저 벼슬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면해야겠습니다.” 했다.
平王本欲廢建而立少子珍,又被無極說得心動,便不信也信了,即欲傳令廢建。無極奏曰:「世子握兵在外,若傳令廢之,是激其反也。太師伍奢是其謀主,王不如先召伍奢,然後遣兵襲執世子,則王之禍患可除矣。」平王然其計,即使人召伍奢。奢至,平王問曰:「建有叛心,汝知之否?」伍奢素剛直,遂對曰:「王納子婦已過矣!又聽細人之說,而疑骨肉之親,於心何忍?」平王慚其言,叱左右執伍奢而囚之。無極奏曰:「奢斥王納婦,怨望明矣。太子知奢見囚,能不動乎?齊晉之眾,不可當也。」
초평왕도 원래 태자 건을 폐하고 어린 아들 진을 세우려고 하던 참에 또 비무극의 설득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서 비무극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결국 믿고 말았다. 그래서 초평왕이 즉시 태자 건을 폐하려는 명령을 전하려 했다. 비무극이 아뢰기를, “세자가 나라 밖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 만약에 세자를 폐한다는 명령을 내린다면 그 반역을 격동시킬 것입니다. 태사 오사는 태자의 모사입니다. 왕께서 먼저 오사를 부른 뒤에 군사들을 보내어 세자를 습격하여 잡으면 대왕의 근심거리는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초평왕이 그 계책을 옳게 여겨 즉시 사람을 시켜 오사를 불렀다. 오사가 이르자 평왕이 묻기를, “건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데 그대는 그 일을 아는가?” 하니, 오사는 원래 강직한 사람이라 곧 대답하기를, “왕께서 며느리를 가로챈 것이 이미 잘못입니다. 또 간사한 자의 말을 듣고 골육의 지친까지 의심하시니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초평왕이 오사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좌우에게 소리쳐 오사를 잡아 옥에 가두도록 했다. 비무극이 아뢰기를, “오사가 왕께서 며느리를 차지했다고 책하니 왕을 원망하는 마음이 명백합니다. 오사가 잡혀 옥에 갇혔다는 것을 태자가 알게 되면 군사를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제나라와 진(晉)나라의 군사를 우리가 당할 수 없습니다.” 했다.
平王曰:「吾欲使人往殺世子,何人可遣?」無極對曰:「他人往,太子必將抗鬥。不若密諭司馬奮揚,使襲殺之。」平王乃使人密諭奮揚,曰:「殺太子,受上賞﹔縱太子,當死!」奮揚得令,即時使心腹私報太子,教他:「速速逃命,無遲頃刻!」太子建大驚。時齊女已生子名勝,建遂與妻子連夜出奔宋國。奮揚知世子已去,使城父人將自己囚繫,解到郢都,來見平王,言:「世子逃矣!」平王大怒曰:「言出於余口,入於爾耳,誰告建耶?」奮揚曰:「臣實告之。君王命臣曰:『事建如事寡人。』臣謹守斯言,不敢貳心,是以告之。後思罪及於身,悔已無及矣!」
초평왕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시켜 세자를 죽이려 하는데 누구를 보내면 되겠는가?” 하니, 비무극이 대답하기를, “다른 사람이 가면 태자가 반드시 저항해 싸울 것입니다. 사마 분양을 몰래 시켜서 세자를 습격하여 죽이라고 하는 게 낫습니다.” 했다. 초평왕이 즉시 사람을 보내어 분양에게 몰래 시키기를, “태자를 죽이면 후한 상을 내릴 것이지만, 태자를 놓아 보내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했다. 분양이 명령을 받고 즉시 심복을 시켜 몰래 태자에게 알리고, 그에게 지시하기를, “빨리 도망치십시오. 경각이라도 지체하지 마십시오.” 했다. 태자건이 크게 놀랐다. 그때 제나라 여자는 이미 아들 승(勝)을 낳았다. 즉시 건이 그의 처자와 함께 밤을 틈타 송나라로 도망쳤다. 분양은 세자가 이미 달아난 것을 알고, 성보의 관리들을 시켜 자기를 잡아 함거에 가두어 영도(郢都)로 압송하도록 했다. 압송되어 평왕 앞에 선 분양이 말하기를, “세자는 도망쳤습니다.” 하니, 초평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말은 내 입에서 나와 너의 귀로만 들어갔다. 누가 건에게 알렸느냐?” 했다. 분양이 말하기를, “신이 사실대로 고했습니다. 왕께서 저에게 명하기를, ‘건을 나를 모시듯이 모셔라!’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그 말씀을 삼가 지켜서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알려드렸습니다. 뒤늦게 제가 죄를 지은 것을 생각하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했다.
平王曰:「爾既私縱太子,又敢來見寡人,不畏死乎?」奮揚對曰:「既不能奉王之後命,又畏死而不來,是二罪也。且世子未有叛形,殺之無名,苟君王之子得生,臣死為幸矣。」平王惻然,似有愧色,良久曰:「奮揚雖違命,然忠直可嘉也!」遂赦其罪,復為城父司馬。史臣有詩云:「無辜世子已偷生,不敢逃刑就鼎烹﹔讒佞紛紛終受戮,千秋留得奮揚名。」平王乃立秦女所生之子珍為太子,改費無極為太師。無極又奏曰:「伍奢有二子,曰尚曰員,皆人傑也。若使出奔吳國,必為楚患。何不使其父以免罪召之?彼愛其父,必應召而來﹔來則盡殺之,可免後患。」
초평왕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태자를 몰래 풀어 주고, 또 감히 과인을 찾아왔으니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하니, 분양이 대답하기를, “제가 이미 왕께서 나중에 내린 명령을 받들지 못했는데, 다시 죽음이 두려워 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두 가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또한 세자는 반역할 뜻이 없는데 죽인다면 명분이 서지 않습니다. 진실로 대왕의 아들이 살 수 있다면 저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했다. 초평왕이 측은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기색도 있는 듯하더니 한참 후에 말하기를, “분양이 비록 왕명을 거역했다 하나 그 충직함은 가상하다.” 하고, 즉시 그의 죄를 용서하고, 다시 성보 사마로 복직시켰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무고한 세자가 이미 목숨을 구해 달아나자, 감히 도망가지 않고 끓는 가마솥 앞으로 왔다. 분분한 참소와 아첨으로 끝내 죽을 뻔했지만, 천추에 분양의 이름은 남아있도다.” 했다. 초평왕은 이에 진나라 여자의 소생인 공자 진을 태자로 세우고 비무극을 태사로 삼았다. 비무극이 또 아뢰기를, “오사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상(尙)과 원(員)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인걸인데 만약 그들이 오나라로 도망친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 우환이 될 것입니다. 어찌 그 부친을 시켜 죄를 면하여 준다면서 부르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 부친을 사랑하여 틀림없이 부름에 응하여 올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모두 죽여서 후일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했다.
平王大喜,獄中取出伍奢,令左右授以紙筆,謂曰:「汝教太子謀反,本當斬首示眾﹔念汝祖父有功於先朝,不忍加罪。汝可寫書,召二子歸朝,改封官職,赦汝歸田。」伍奢心知楚王挾詐,欲召其父子同斬。乃對曰:「臣長子尚,慈溫仁信,聞臣召必來。少子員,少好於文,長習於武,文能安邦,武能定國,蒙垢忍辱,能成大事。此前知之士,安肯來耶?」平王曰:「汝但如寡人之言,作書往召﹔召而不來,無與爾事。」奢念君父之命,不敢抗違,遂當殿寫書,略云:「書示尚員二子:吾因進諫忤旨,待罪縲絏。吾王念我祖父有功先朝,免其一死,將使群臣議功贖罪,改封爾等官職。爾兄弟可星夜前來。若違命延遷,必至獲罪。書到速速!
초평왕이 크게 기뻐하여 옥중에서 오사를 꺼내오게 하여 좌우에게 명하여 종이와 붓을 내어 주며 말하기를, “너는 태자가 모반하게 시켰다. 그래서 본디 참수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너의 할아비와 아비가 앞서 조정에 세운 공로를 생각하여 차마 죄를 더할 수가 없다. 네가 글을 써서 두 아들을 조정으로 부르면 그들에게 관직을 바꾸어 주고 너는 죄를 용서하여 전원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했다. 오사는 마음속으로 초평왕이 자기를 속여 두 아들들을 불러 같이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대답하기를, “신의 큰아들 상은 자애롭고 따뜻하며 어질고 신의가 있습니다. 신이 부른다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 원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무예를 오래 익혀서, 학문은 능히 한 나라를 안정시키고, 무예는 능히 나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온갖 더러움과 치욕을 참고 능히 대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는 앞일을 내다보는 선비인데 어찌 기꺼이 오겠습니까?” 하니, 초평왕이 말하기를, “너는 다만 과인이 말한 대로 글을 써서 부르면 된다. 불러도 오지 않는다면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했다.
伍奢寫畢,呈上平王看過,緘封停當,仍復收獄。平王遺鄢將師為使,駕駟馬,持封函印綬,往棠邑來。伍尚已回城父矣。鄢將師再至城父,見伍尚,口稱「賀喜!」尚曰:「父方被囚,何賀之有?」鄢將師曰:「王誤信人言,囚繫尊公,今有群臣保舉,稱君家三世忠臣,王內慙過聽,外愧諸侯之恥,反拜尊公為相國,封二子為侯,尚賜鴻都侯,員賜蓋侯。尊公久繫初釋,思見二子,故復作手書,遺某奉迎。必須早早就駕,以慰尊公之望。」伍尚曰:「父在囚繫,中心如割,得免為幸,何敢貪印綬哉?」將師曰:「此王命也,君其勿辭。」伍尚大喜,乃將父書入室,來報其弟伍員。
오사가 쓰기를 마치고 초평왕에게 드리니 평왕이 언장사(鄢將師)를 사자로 삼아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함에 넣은 인수를 가지고 당읍(棠邑)으로 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때 오상은 이미 성보에 돌아가 있었다. 언장사가 다시 성보에 이르러 오상을 만나 말하기를, “축하드립니다!” 했다. 오상이 말하기를, “부친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데 어찌하여 축하한다고 하십니까?” 하니, 언장사가 말하기를, “왕이 다른 사람의 말을 잘못 듣고 부친을 옥에 가두었는데 지금은 여러 신하가 보증하여 공의 집안은 삼대에 걸친 충신이라고 칭송하여, 왕이 참소를 잘못 듣고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오히려 부친을 높여 상국으로 삼고 그대들 두 아들을 후(侯)를 봉하여 그대 상(尙)에게는 홍도후(鴻都侯)를, 동생 원(員)에게는 개후(盖侯)에 봉하였소. 부친께서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 두 아들을 보고 싶어 하여 다시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어 모셔 오라고 했소. 빨리 수레를 타고 부친의 보고 싶은 마음을 위로해야 될 것이오.” 했다. 오상이 말하기를, “부친께서 감옥에 갇혀서 나의 마음은 찢어지듯 했으나 풀려났다니 다행입니다. 어찌 감히 인수를 욕심내겠습니까?” 하니, 언장사가 말하기를, “이것은 왕명이니 그대는 사양하지 마시오.” 했다. 오상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부친의 편지를 가지고 내실로 들어가서 동생 오원에게 알렸다.
不知伍員肯同赴召否,且看下回分解。
오원이 거꺼이 함께 부름에 응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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