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차 생활이 역사만큼 우리 역사 속에는 수많은 차인들이 있습니다. 특히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차인이라고 할 만큼 차 생활은 상류층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습니다. |
차 생활의 상식으로 그들의 삶과 다시(茶時) 한 편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은 일인 듯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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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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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는 승려로도 유명하지만 차인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한 분입니다. 32살에 승려가 되었고 661년(45살)에 의상대사(義湘大師)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당항성의 옛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유학길에서 그냥 돌아온 원효대사는 분황사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하여 불교의 보급에 헌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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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석공주?만나 설총을 낳은 후 파계하여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師)를 자처하여세속에 얽매이지 않고초연히 자연을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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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는 '금강삼매경'을 풀이하며 참선과 저술로써 세월을 보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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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으로서 원효대사의 모습은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속에 있는 원효방(元曉房)의 설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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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庚申年, 1200년) 8월 20일 부령(扶寧, 지금의 부안) 현령(縣令) 이군(李君)과 다른 손님 6~7인과 함께 도착하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를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뜨락과 창과 문이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이따금 호랑이와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려다가 결국 올라 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사포성인(蛇包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원효가 와서 살자 사포가 따라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하를 달여 효공에게 드리려 했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물이 바위 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다. 물의 맛이 매우 달아 젖(乳)과 같으므로 이 물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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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법사(地壯法師, 705~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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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덕왕의 아들로 24살에 중국 안휘성(安徽省) 구화산(九華山)에 들어가 도를 깨달아 99세에입적하였습니다. 중국의 차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는데, 당시 구화산에 심은 차를 '공경차(空梗茶)'라고 했으며 맛이 특별하였다는 기록이 청나라의 '다사(茶史)'에 전해져 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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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가는 동자를 보내며
절이 적적하니 너는 집이 그리워
여기 구름방을 떠나 구화산을 내려가려는구나
네가 지난날 대난간에서 죽마타던 것을 그리워하여
금지에서 금사를 모으는 데는 싫증이 났구나
칠병 속의 시내에 달을 불러오는 것 그만두고
차 달여 잔 속에서 꽃졸이하는 것도 그만두리
진리를 사랑하여 쓸데없이 눈물을 자주 흘리진 않으리
노승은 안개와 노을을 짝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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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 1168~1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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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의 명문장가(名文章家)로서 이름을 날렸던 분입니다.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발탁되었던 그는 걸출한 문장가였으며, 호탕, 할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도연명(陶淵明)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등에는 50여 편에 이르는 주옥 같은 다시(茶時)가 실려 있습니다. |
차를 끓여 마시어 샘물을 말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차를 좋아한 그는 '차 한 잔은 바로 참선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차의 맛은 도(道)의 맛'이라고 하여 '다도일미(茶道一味)'를 주장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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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차(孺茶)
인간이 온갖 맛을 일찌기 맛봄이 귀중하니
하늘은 사람을 위하여 절후를 바꾸네
봄에 자라고 가을게 성숙함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에 어긋나면 기이한 일이건만
근래의 습속이 이 기이함을 즐기니
하늘도 인정의 즐겨함을 따르는구나
시냇가의 찻잎을 이른 봄에 싹트게 하니
황금 같은 노란 움 눈 속에 자라났네
남쪽 사람은 맹수도 두렵지 않아
험난함을 무릎쓰고 칡넝쿨 휘어잡고
간신히 채취하여 불에 말려 단차 만드니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리려 하네
선사는 어디에서 이처럼 귀한 것을 얻었는가
손에 닿자 향기가 코에 가득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에 손수 차를 달여
꽃무늬 자기에 따라 그윽한 색을 자랑하누나
입에 닿으니 달콤하고 부드러워
마치 어린 아이의 젖내음과 같구나
부귀한 가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데
우리 선사 어지 이를 얻었는가 알 수 없네
남쪽의 아이들 선사의 처소를 알지 못하니
찾아가 맛보고 싶은들 어이 이를손가
아마도 깊은 구중궁궐에서
높은 선사 예우하여 예물로 보냈음이라
차마 마시지 못하고 아끼고 간직하였다가
임금님의 그 봉물을 신하를 시켜 보내왔다네
세상살이를 모르는 쓸모없는 이 나그네가
더구나 좋은 혜산천의 물까지 감상하였네
평생의 불우함을 만년에 탄식했는데
일품을 감상하기는 오직 이뿐일세
귀중한 유차를 마시고 어이 사례가 없을손가
공에게 맛있는 봄술을 빚어놓고 권하노니
차들고 술마시며 여생을 보내면서
오며 가며 풍류졸이를 시작하여 보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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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1328~1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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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묵은(牧隱)이며 14살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수재로 20대에 원나라에서 잠시 벼슬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귀국하여 국정에 참여하여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 김구용 등과 함께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던 분입니다. |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해골을 옛산에 묻을 뿐이라며 거절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문하인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은 모두 차인이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
'차를 끓여 마시니 생각에 그릇됨이 없다'는 말로 유명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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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량이 보낸 편지와 찾종
편안하다는 소식 더욱 기쁘고
찻종 대하니 아답하여 삿됨이 없네
계룡산 아래엔 인가가 드물고
긴긴 강물에는 달빛이 젖어드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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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鄭夢周, 1337~1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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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포은(圃隱)이며 고려말의 정치가요 뛰어난 성리학자로 동방이학의 시조로도 추앙되고 있는 고려 충신입니다. '단심가(丹心歌)'는 그의 이름만큼이나 유명 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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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향교(鄕校)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매명륜을 참작하여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부패한 불교의 폐단을 없애고 윤리행활의 지상표준인 '중정인의(中正仁義)'를 실현하려 하였으나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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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솥에 차 끓이다
보국에 공이 없는 늙은 서생
차 마시기 버릇되니 세정을 모르노라
눈보라 휘날리는 밤 그윽한 서재에 홀로 누워
돌솥의 솔바람 소리 즐겨서 듣는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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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 1435~14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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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면모를 지닌 조선 초기의 인물로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한국소설의 비조(鼻祖)이자 시인이며 정치적으로는 단종 복위 사건에 관련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당대의 출중한 선비였으며, 동시에 승려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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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을 가꾸며 농사를 짓기도 하고 차밭을 가꾸고 차실을 지어 차를 다루는 차인이기도 했던 그는 많은 다시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김시습의 차세계와 교류한 인맥은 매우 광범위하여 당대의 명인은 물론 일본의 승려인 준(峻)과의 교류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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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끓이다
솔바람에 가겹게 날리는 차 끓이는 연기
그 연기가 하늘거리며 빗겨서 시냇가에 흩어지네
동창에 달이 높이 솟았건만 아직 잠 못 이루고
이어이 병을 당겨 차가운 샘물을 길어 온다
진정 기이한 것은 태어나면서 세속을 싫어함이라
불문에 들어 봉황을 그리노라니 벌써 청춘이 지났도다
차 끓이는 노란 잎을 그대는 아는가
이젠 시 쓰는 것도 잊고 게을리 숨어 지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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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李穆, 1471~1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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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한재(寒齋)로 19세에 진사로 합격하여 1495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습니다. 일찍이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웟으며 그의 천도책(天道策)은 율곡보다 앞서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피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전적(典籍)으로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였으며 이어 평안남도 평사가 되었다가 1498년 무오사화 때 윤필상의 모함으로 처형되었습니다. |
차에 관한 기록으로 '다부(茶賦)'를 썼는데 그의 스승인 김종직도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부'에서 "내가 차에 대해서 전에는 알지 못하였는데 육우의 '다경'을 읽고서 점점 그 차의 성품을 깨닫고 마음 속으로 보배롭게 여겼다"라고 하며 차의 산지와 이름, 차 달이기, 차의 여석 가지 덕성과 다섯가지 공로들을 열거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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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여섯가지 덕성(六德)
1. 오래 살게 한다.
2. 병을 낫게 한다.
3. 기운을 맑게 한다.
4.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5. 신선과 같게 한다.
6. 예의롭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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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다섯가지 공로(五功)
1. 책을 볼 때 갈증을 없애준다.
2. 울분을 풀어준다.
3. 손님과 주인의 정을 화합하게 한다.
4. 기생충으로 인한 고통을 없앤다.
5. 취한 술을 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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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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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가장 훌륭했던 선승(禪僧)의 한 사람으로 법명은 휴정(休靜), 법호는 청허(淸虛)입니다. 묘향산에서 오래 살아 서산이란 별호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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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무 재배의 본고장인 지리산 화개동천(化開洞天)에서 출가하면서 다도를 익히기 시작, 뒷날 금강산과 묘향산 북쪽에 살면서도 항상 작설차를 구하여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선(禪)과 차(茶)의 합일된 일미(一味)를 구가한 대사는 임종에 이르러서도 문하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유품을 차의 본고장인 두륜산의 대둔사(大屯寺)에 보관토록 함으로써 차에 관한 각별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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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의 내은적 암자
스님 대여섯 사람이
내 안자 앞에 집 지었네
새벽 종 울리면 함께 일어나고
저녁 북 울리면 함께 잠자네
달빛 비친 시냇물을 함께 길어
차 달여 푸른 연기 나누네
날마다 무슨 일 논하다가
염불인가 참선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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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각 서씨(令壽閣 徐氏, 1753~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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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사위로 초의에게 다도를 물어 '동다송'을 집필하는 동기를 만들었던 홍현주(洪顯周, 1793~1865)의 어머니 입니다. 관찰사 서형수(徐逈修)의 달로 태어나 뒷날 우부승지(右副承旨)을 지낸 홍인코(洪仁模)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습니다. |
200편에 가까운 시를 남긴 대시인으로 단아하면서도 속세를 벗어난 선비적 기풍의 시세계를 이루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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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에 차를 달임
여러 해 동안 은근한 불로 작은 다로에 차를 끓였으니
신기하고 영묘한 공덕이 틀림없이 조금은 있으리
차 한 잔 마신 뒤 거문고를 어루만지다가
밝은 달을 바라보니 누군가를 부르고 싶네
봄날 다반의 푸른 잔에 붉은 옥같은 차를 올리느라
오래된 벽은 연기가 서려 얼룩져 있네
잔에 가득한 것이 어찌 꼭 맛있는 술이어야 하리
답청 가는 내일에는 또 다병을 가져 가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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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 1762~1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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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법제, 지리, 경학에 걸친 대학자이며 문신으로 호는 다산(茶山)입니다. 그는 어릴 때 이미 신동임을 인정받고 성장하여 순탄하게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1800년을 전후하여 천주교에 상관,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더불어 강진으로 유배되고 맙니다. 그는 그곳에서 산록에 서실을 짓고 이를 '다산서실(茶山書室)'이라 이름하고 시작(時作)과 저술에만 전념하며 18년 도안 살았습니다. 그때 나온 저술들로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비롯한 수많은 역작이 있습니다. |
정약용은 43살때 10살 아래인 대둔사의 아암 혜장(兒庵 惠藏, 1722~1811) 스님을 만나고부터 차 생활에 심취하게 됩니다. |
아암에게 주역을 가르쳐 주고 차를 얻어 마시며 서로의 정분을 쌓았습니다. 또한 정약용은 48세(1809) 때 24살 초의(草衣)와 만났는데, 초의는 다산 덕업이 나라 안에서 으뜸가고 문질(文質)이 빛나는 스승이라 일컫었습니다. 다산은 초의에게 유학(儒學)과 시도(時道)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
다산은 차나무를 재배하고 관리하여 차를 중국의 말과 바꾸어 나라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다마(茶馬) 무역을 주장했고 중국의 차세와 전매제도를 역사적으로 고찰한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차에 관한 전문서적인 '동다기(東茶記)'를 비롯하여 다시와 차에 관한 글 40여편을 지어 우리차의 중흥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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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상인에게 차 얻기를 바라다
듣자니 설름골에는
옛부터 좋은 차가 난다네
보리이삭 팰 철이 오면
한 잎 두 잎 새싹이 자란다오
궁하게 사는 사람 채식에 버릇되니
노린내 비린내 나는 고기 먹을 뜻 없노라
돼지고기와 닭죽같은
호사스런 음식 먹기 어렵도다
현역병의 고통이 있고
때때로 술을 마셔 깨지 않기 때문이라오
바라오니 스님의 숲에 있는 차
육우의 차솥에 조금만 채워 주소서
베풀어 주시면 내 병 물리치려니
나룻배로 건너줌과 어찌 다르리오
법대로 불에 쪼여 말리어
물에 넣으면 그 차빛맑기도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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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1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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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문인, 금석학자로써뿐만 아니라 차인의 풍모와 선학자의 면모를 간직했던 인물로서 서화에 능했던 예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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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차에 심취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4살 때 아버지인 이조판서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갔을 때, 운귀총독(雲貴總督)인 원운태(院芸台)의 집을 방문하여 명다(名茶)인 요단승설(龍團勝雪) 차를 마시고 승설학인이라는 호를 쓰게 되면서부터라고 전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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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는 30세에 정약용의 아들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의 소개로 동갑인 초의를 만나 특히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의로부터 해마다 차르 얻어 마셨습니다. 특히 김정희가 제주도에 귀양갔을 때 초의는 직접 찾아가 같이 지내며 차나무도 심고 참선도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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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에서 차 마시기
천하에서 두째번의샘
진소연과 홍치존도 소중히 하였네,
마실 샘물은 지금도 얻을 수 있으나
두 가지의 절묘함은 화합하기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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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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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은 의순(意恂). 15살에 운흥사에서 출가하였습니다. 30세(1815)에 처음으로 한양에 상경하여 각계의 명사들과 사귀게 되었고, 이때 추사 감정희를 만나 이후 42년간 우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추사는 초의로부터, 초의는 추사로 부터 서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두 사람의 선배격인 다산으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다산의 아들 유산과도 교우가 돈독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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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1823) 때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10년간 선과 다도 경전에 전념하였고, 당시 순조의 부마였던 홍현주의 헝을 받아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지어 우리나라 다도사상 처음으로 '동국다도(東國茶道)'를 정립시켜, 한국의 다성(茶聖)이라고 숭앙받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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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샘물로 차 끓이다
하늘빛은 물과 같고 물은 이내 같도다
이곳에 와서 논 지 이미 반 년
명월과 함께 누워 지내던 좋은 밤이 몇번이던고
맑은 강에서 지금 백구를 마주하고 조네
남을 시기하는 것은 본래 마음에 없으니
좋다 굿다하는 말이 어찌 귀에 들어오리
소매 속에는 아직도 경뢰소가 남아 있으니
구름에 의지하여 두릉천으로 또 차를 끓이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