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3]
지상강좌
용담할매, 근수당 최윤(謹守堂 崔潤)에 대한 소고 (3)
이상임_경희대후마디스칼리지교수
2-2. 최윤은 오랜 수련으로 도력이 높았다.
최윤의 도력과 관련된 일화 중 첫 번째는
대신사의 묘소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포덕 72년(1931) 최윤은
대신사 태묘에 대한 진위 논란이 일어나자 고심하면서
현재의 태묘에 엎드려서 비상한 각오로
특별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대신사께서 대구 장대에서
역적의 누명을 쓰시고 참형을 당하신 사흘 후에
해월신사님의 매부되시는 임익서(林益瑞) 선생 외에
다섯분이 대구에서 대신사님의 시신(屍身)을
가정리로 운구해서 현재의 묘소 건너 산등성이에
매장을 했읍니다.
그 후 기록에 보면 1908년 쯤이라고 되어 있는데,
대신사님의 양사위되시는 정울산(鄭蔚山)이라는 분이
시천교의 주관으로 대신사님의 묘소를
현재의 위치로 이장을 하였읍니다.
그런데 한동안 현재의 묘소가
대신사님의 묘소니 아니니 하여 시비가 분분하자
덕성이 높은 최윤 사모님깨서
영험으로 그 진부를 가려보겠다고 하시면서
이 묘소가 대신사님의 묘소이면
증표를 해 주십사하고 묘소 앞에서 정성을 드렸읍니다.
이렇게 여러날을 정성드렸는대
어느날 가지고 갔던 하얀 손수건에
피처럼 빨간 물이 베었어요.
그래서 사모님은
대신사님의 묘소가 틀림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어요.
돌아와서 그 수건을 빨았더니
빨간 물이 모두 지워졌다고 하더군요.
이 이야기는 가정리 교인들한테서 들은 이야기예요.
홍창섭, 「그때 그 이야기 용담할머니 <대담>」,
『신인간』 통권 357호, 71-72쪽.
위의 인용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최윤은 기도의 결과로 증표를 받았으며
이 기도의 응답이 있은 후에
태묘가 “진묘(眞墓)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시시비비가 잠재워졌다고 한다.
두 번째로 최윤의 도력과 관련된 일화는
미래 예측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최윤이 1945년 해방이 될 것과
6․25 사변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카 며느리 이원임의 증언에 따르면
최윤은 1945년 1월에
“금년 여름에는
반드시 일제가 패망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금년 추석에는
찹쌀로 떡도 하고 고깃국도 먹을 수 있겠다.’”고
예언을 하였는데 그 예언은 적중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최윤은 6․25가 발발할 것을 미리 알아맞혔는데
“조카며느리 이원임이 간장을 담그려고
1949년 가을에
메주를 쑤자 그는 한사코 말렸다고 한다.
내년에는 북쪽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온통 아수라장이 될 것이니
간장 된장 먹을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다.
위에 소개된 것과 같은 큰 사건에 대한 예측 외에
최윤은 또한
일반적 생활상의 변화에 대한 예측을 하였다.
용담 교구의 송암 이원용(1931년 생)은
어린 시절에 용담정 근처로 나무를 하러 다니다 보니
용담정에도 자주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최윤은
변화될 세상에 대해 말해주었다고 한다.
“이제 머지않아 이 용담정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오솔길도 큰 길로 변하고
천도교에 입교하여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
병도 낫고, 죽을 운을 당하여도 죽지 않으며,
군자 사람이 되고
무한한 복록을 받으며 무병장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 612쪽.
또한 용담교구인 정신당 정선이(1930년 생)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도가 높으신 어른이고, 위대하신 분이셨지요.
제가 22살인가 23살 때인가,
마을에 내려오셔서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앞으로 세상에 공기가 변하고
곡식에도 벌레가 가득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벌레가 많으면 어떻게 삽니까 하니까,
그에 맞는 약이 다 나올 것이라고 하셨어요.
앞으로 어떤 세상이 된다는 이야길 들으면서
감동이 되었지요.
내려오셔서 오래 계시진 않으셨는데,
미래 세상에 대한 이야기, 대신사님 말씀,
경전에 대한 말씀을 조곤조곤 해주시곤 했지요.
그게 아직까지도 가슴에 남아 있어요.”
『천도교 시원포: 90년의 발자취』, 636쪽.
위의 인용들에서 공통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점은
최윤은 미래의 변화상을 예측하면서 동시에
동학의 중요성을 전함으로써
조용한 포덕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녀의 미래예측은 자신의 능력의 과시나 예측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덕을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최윤은
비록 용담 산골에 살았지만 그녀의 도력은
서울 중앙총부의 천도교 원로들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최윤의 오랜 도력은 상대방에게
무언의 감화를 주었다는 일화가 한 가지 더 있다.
정문화 옹에 의하면
6․25 직전에 빨치산들이
산을 타고 용담정에 내려온 적이 있는데 그 때 최윤은
“주무시고 가시라”고 했다고 한다.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그들은
“여기는 우리가 올 필요 없다”고 하면서 갔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은 그 근방의 민가에도 오지 않아
그로 인한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최윤의 도력은
이렇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동물까지 감화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최윤 자신의 진술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최윤이 호랑이와 교류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목격되었고 회자되고 있다.
최윤이 무인년 호랑이띠라는 것도
우연의 일치로 흥미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송암 이원용은 최윤이 "이곳 용담정은
밤이면 호랑이가 내려오고 나는 그 호랑이와
한 식구처럼 지낸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조카며느리 이원임은
1941년경 용담정에서 함께 수도 중
경험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당시 깜깜한 밤에 마치
자동차 불빛보다 더 강렬한 불빛 때문에 놀랐는데
최윤은 "조용히 가만히 있어라.
저것 역시 한울님이시거늘
어찌 너는 놀라기만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깥의 불빛은
용담 고모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밥은 먹었느냐는 등……. 그 후 매일 밤중에
그 불빛이 찾아와서
청마루 밑에서 자고 가곤 했습니다.”
(최정간, 『해월 최시형家의 사람들』, 307-308쪽.
여기서 최윤은 “이렇게 깊은 산중에 혼자 있으면
오히려 호랑이가 오지 않을 때
더욱 쓸쓸하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정문화 옹이 어렸을 적에
용담정을 갔었을 적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는 최윤의 거처는 초가집이었는데
밖에서 문을 긁적이는 소리가 나면
최윤은 "아, 나 잘 있다. 너도 잘 있었어?" 라고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때는 자고 있는데
모래를 쫙쫙 뿌리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정문화 옹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최윤은 "내일 말해줄게 자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날 정문화 옹이 들은 이야기는
가끔씩 환자들이 요양하러 용담정에 오는데
가망 없는 환자가 오면
호랑이가 모래를 껸진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최윤은 그런 환자들에게
여기 있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으니
빨리 병원치료를 받아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현 용담교구 교구장 주암 이원주도
용담정의 호랑이가 실재했었고
"최윤 사모님이 청수를 뜨러 가시는 길을
안광으로 밝혀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나쁜 사람이 병을 고쳐 달라고 올라오면
고쳐 주지 말라고 문에다 흙을 뿌렸다고 해요."라고
회고한다.
또한 그는 아직도 그 호랑이가 앉던
까만 바위가 용담정에 보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해월에게도 호랑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는 점이다.
즉 포덕 12년 신미년(1871) 영해에서의 변란으로
해월이 소백산으로 피해 들어가서
13일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하고
잎사귀와 소금으로 근근이 버티면서 산 속에 있을 때
호랑이 한 마리가 지켜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아마도 최윤은
아버지 해월의 이런 호랑이와 관련된 일화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러한 기억은 내재화되어
호랑이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와 소통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지했을지도 모른다.
구미산 깊은 산 속에서
호랑이를 가족처럼 벗처럼 여기고 살았다는 점에서
일단 최윤이 얼마나 외로웠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최윤은 오랜 수련의 결과
그 외로움과 무서움을 도력으로 극복하고
산짐승도 차별 없이
소통의 대상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해월신사는 많은 법설을 통해
"서민들과 공감대를 이룸으로써 동학의 저변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최윤 또한 조용히
주변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포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최윤은 아버지 해월의 중요 사상 중 하나인
「誠․敬․信(성․경․신)」법설을
온몸으로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즉 최윤은
청수 한 그릇도 매우 정성껏 준비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치성을 드릴 때는 물론이고
매사에 정성된 태도를 견지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한울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최윤은 해월의 가르침대로
한울님에 대한 공경을 자신의 근처에 있는 사람들과
동물인 호랑이에게까지
미루어 실천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최윤의 행동은 해월이 말한
"사람마다 마음을 공경하면 기혈이 크게 화하고,
사람마다 사람을 공경하면 많은 사람이 와서 모이고,
사람마다 만물을 공경하면 만상이 거동하여 오니,
거룩하다 공경하고 공경함이여!"라는 법설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경천敬天 -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삼경(三敬)사상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포덕 97년(1956) 음력 3월 1일, 77세로
최윤은 주암 이원주의 어머님이 지키시는 가운데
"주무시는 것처럼 환원"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23년 동안 용담성지를 지키면서
한 번도 아파 본 적이 없었으며
운명하기 하루 전날 감기처럼 열이 나더니
그 날 밤 운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천도교 교인이 아닌 동네사람들까지도
모두 한 집에 쌀 한 말씩을 내어서
4일장으로 면장같이 성대하게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원암 이원벽은 "사모님 인품이 좋아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셨거든요."라고 회고하고 있다.
또 최윤은 대신사님 묘소 남쪽으로 약 50m 지점으로
용담이 보이는 곳에 모셔졌는데,
그녀는 본인의 묘 자리를 지정하고
"여기다 묻어달라. 용담정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
환영하고 지켜보겠다." 하셨다고
손자 정문화 옹은 전한다.
최윤은 사후에 근수당(謹守堂) 당호가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2019년 10월 19일에서야 비로소
그녀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