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32강
나산띠숫땅
Nasantisuttaṃ
있지 않음 경(S1:34)
사뚤라빠 무리 천신들이 부처님께 다시 찾아와서 이번에는 게송으로 여쭈었습니다. 나산띠(Nasanti)는 고요하지 않음, 존재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na)는 없다, 아니다, 무(無), 불(不) 입니다. 산띠(santi)는 고요, 평화, 적정입니다. 그리고 지친, 피로한 이라는 뜻도 있으며 존재하는, 현존의, 선한, 참된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산띠(Nasanti)는 고요하지 않음이지만 여기서는 존재가 없다는 의미로 있지 않음입니다.
2.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티양 위하라띠 제따와네 아나타삔디깟사 아라메.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아타 코 삼바후라 사뚤라빠까이까 데와따요 아빅깐따야 라띠야
Atha kho sambahulā satullapakāyikā devatāyo abhikkantāya rattiyā
아빅깐짜완나 께와라깝빵 제따와낭 오바세뜨와 예나 바가와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ṃ jetavanaṃ obhāsetvā yena bhagavā
떼무빠상까밍수.
tenupasaṅkamiṃsu.
우빠상까미뜨와 바가완땅 아비와데뜨와 에까만땅 앗탕수.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aṭṭhaṃsu.
에까만땅 티따 코 에까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바시.
Ekamantaṃ ṭhitā kho ek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2. 그때 많은 사뚤라빠 무리의 천신들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어떤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감흥어로 여쭈었습니다.
3. 나 산띠 까마 마누제수 니짜, 산띠다 까마니야니 예수 밧도.
Na santi kāmā manujesu niccā,
산띠다 까마니야니 예수 밧도.
Santīdha kamanīyāni yesu baddho.
예수 빠맛또 아뿌나가가마낭,
Yesu pamatto apunāgamanaṃ,
아나간따 뿌리소 맛쭈데이야띠.
Anāgantā puriso maccudheyyāti.
찬다장 아강 찬다장 둑캉 짠다위나야 아가위냐요 아가위나야
Chandajaṃ aghaṃ chandajaṃ dukkhaṃ chandavinayā
아가위냐요 아가위나야 둑카위나요띠.
aghavinayo aghavinayā dukkhavinayoti.
3. 인간의 욕망은 갈증이 없는데
즐기는 것에 묶여있습니다.
게으름에 욕망이 길들여져 있으면
그 사람들은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
욕망의 사악함 때문에
욕망에 의해서 생긴 괴로움이 있고
욕망을 제어하면 사악함이 제어되고
사악함을 제어하면 괴로움이 제어됩니다.
지금까지 부처님과 천신의 대화는 주로 공덕에 관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수행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 산띠 까마 마누제수 닛짜(Na santi kāmā manujesu niccā)에서 까마(kāmā)는 욕구, 욕망, 갈망,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애욕 등의 뜻입니다. 마누제수(manujesu)는 사람, 인간입니다. 닛짜(niccā)는 굶주림이 없는, 갈증이 없는, 욕심이 없는, 만족한 등의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갈증이 없는데’입니다.
다음에 산띠다 까마니야니 예수 밧도(Santīdha kamanīyāni yesu baddho)에서 까마니야니(kamanīyāni)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적응할 수 있는,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싶은, 좋아하는 형색 등 원하는 대상을 말합니다. 우리가 즐기고 싶어 하는 감각대상은 다름 아닌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그리고 마음의 대상인 법입니다. 이것이 색, 성, 향, 미, 촉, 법입니다. 색, 성, 향, 미, 촉은 육체적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감각대상인데 이것을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정신적 감각대상인 마음의 대상인 법을 넣으면 육욕락(六欲樂)이 됩니다.
밧도(baddho)는 묶인, 매인, 잡힌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즐기는 것에 묶여 있습니다.’ 입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원래 인간은 살기위한 기본적 욕망은 크게 욕심이 없는, 그래서 갈증이 없는 것이지만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싶은 것에 묶여 있으면 욕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즐기고 싶은 감각적 욕망에 묶여 있으면 자연히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게으름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욕망을 쫓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부지런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음에 예수 빠맛또 아뿌나가가마낭(Yesu pamatto apunāgamanaṃ)에서 빠맛또(pamatto)는 게으름, 태만한, 부주의함이라는 뜻입니다. 아뿌나가가마낭(apunāgamanaṃ)은 욕망에 길들여져 있는 것, 욕구를 길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욕망에 길들여져 있지 않으면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에 다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에 욕망이 길들여져 있으면’입니다. 욕망에 길들여져 있지 않으면 집착이 끊어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때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러나 천신들은 아직 해탈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열반을 부정적인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음과 지혜의 차이입니다.
다음에 아나간따 뿌리소 맛쭈데이야띠(Anāgantā puriso maccudheyyāti)에서 아나간따(Anāgantā)는 돌아오지 않는 님,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도과를 성취해서 윤회하지 않는 생명을 말합니다. 다음에 뿌리소(puriso)는 사람, 남자이고, 맞쭈데이야(maccudheyyā)는 죽음의 왕국, 악마의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어 윤회가 끝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두 문장을 요약하면 ‘게으름에 욕망이 길들여져 있으면 그 사람들은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돌아오지 않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문장인 ‘찬다장 아강 찬다장 둑캉(Chandajaṃ aghaṃ chandajaṃ dukkhaṃ)’에서 찬다(Chanda)는 욕망. 소망, 의지, 열의, 충동, 투표, 좋아하는 마음. 투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표를 주는 행위를 뜻합니다. 찬다(Chanda)는 욕망이라서 또 다른 이름의 갈애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의도인 쩨따나(cetanā)는 업이 되지 않지만, 찬다(Chanda)는 좋아하는 의도가 있어 업에 속합니다. 다음 아가(agha)는 사악함, 죄. 죄악, 잘못, 고통, 불행, 비참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가(agha)는 오온의 괴로움과 재난입니다. 아가(agha)는 오온으로 인해 생기는 갈애보다 더 적절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악함과 고통과 불행이라는 뜻의 아가(agha)는 바로 존재의 무더기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가진 것이 사악함이고 죄고 고통이고 불행이고 비참함입니다. 다음에 찬다장 둑캉(chandajaṃ dukkhaṃ)은 욕망에 의해 생긴 괴로움이 있고,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사악함 때문에 욕망에 의해서 생긴 괴로움이 있고’입니다. 이때의 욕망은 느낌을 원인으로 일어난 갈애입니다.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 괴롭지 않지만 느낌을 나의 느낌이라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욕망이 일어나면 갈애가 되어 집착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괴로움이 깊어지고 윤회를 계속합니다.
다음에 찬다위나야 아가위냐요 아가위나야 둑카위나요띠(chandavinayā aghavinayo aghavinayā dukkhavinayoti)에서 찬다위나야(chandavinayā)는 욕망의 제어입니다. 여기서 위나야(vinayā)는 제어, 억제, 조복, 제거, 파괴, 규율, 계율, 율(律)을 뜻합니다. 제어는 길들인다는 뜻인데 선정수행으로 제어할 수 있고,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으로 제어할 수 있고, 계율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어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사성제 팔정도입니다. 다음에 아가위냐요(aghavinayo)는 사악함이 제어되고,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제어하면 사악함이 제어되고’입니다. 다음에 아가위나야 둑카위나요띠 (aghavinayā dukkhavinayoti)는 사악함을 제어하면 괴로움이 제어됩니다. 라는 뜻입니다. 둑카위나요띠(dukkhavinayoti)는 괴로움이 제어된다는 뜻인데 해탈의 자유를 얻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결국 찬다(Chanda)라는 욕망, 또는 갈애 때문에 오온의 괴로움이 생깁니다. ‘욕망을 제어하면 사악함이 제어된다는’는 것은 갈애를 길들이면 오온이 길들여진다는 말입니다. ‘사악함을 제어하면괴로움이 제어된다’는 것은 오온이 길들여지면 윤회의 괴로움이 제거된다는 뜻입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4. 나떼 까마 야니 찌뜨라니 로께,
Na 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상깝빠라고 뿌리삿사 까모,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띳타니 찌뜨라니 따테와 로께,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아텟타 디라 위나얀띠 찬당.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ṃ.
4.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사람의 의도가 있는 애욕이 감각적 욕망이다.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
현자는 여기에 대한 욕망을 제어한다.
찌뜨라니 로께(citrāni loke)에서 찌뜨라니(citrāni)는 아름다움, 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찌뜨라니(Citrāni)는 아름다운 대상을 말합니다. 찌뜨라니(citrāni)의 어원은 찌따(citta)입니다. 찌따(citta)는 여러 가지의, 잡색의, 아름다운, 회화, 그림, 마음, 심(心) 이라는 뜻입니다. 찌따(citta)는 주로 마음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아름다움으로 쓰입니다. 로께(loke)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입니다.
다음 문장의 상깝빠라고 뿌리삿사 까모(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에서 상깝빠라고(Saṅkapparāgo)는 상깝빠(Saṅkappa)와 라고(rāgo)의 합성어입니다. 상깝빠(Saṅkappa)는 사유, 의도, 관념, 감정이라는 뜻이고, 라가(rāga)는 빛깔, 색채, 염색, 탐욕, 집착, 애착, 애욕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도를 가지고 애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의 애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것으로 물질적 애착과 정신적인 애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혼자서 생각을 하는 짝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상깝빠라고(Saṅkapparāgo)는 의도가 있는 애착입니다. 그러므로 의도가 있는 애착은 왓투까마(vatthukāma)라는 물질적 애욕이 아닙니다. 정신적 애욕인 낄레사까마(kilesakāma)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로서의 애욕입니다.
물질적 애욕인 왓투까마(vatthukāma)는 객관적 욕망이며 재물욕(財物欲)입니다. 여기에 비해
정신적 애욕인 낄레사까마(kilesakāma)는 오염된 것으로서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번뇌로서의 욕망, 주관적인 욕망, 욕애(欲愛)라고 합니다. 이러한 애욕이 괴로움을 주는 번뇌이지만 우리는 어리석음과 갈애로 인해 이것을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 결과로 다시 태어나는 괴로움을 겪습니다. 스님들은 생각으로 많은 애착을 하고 재가자들은 물질에 대한 애착을 많이 합니다. 집을 떠나 출가해도 생각에 애착이 많습니다.
여기서 라가(rāga)를 탐욕이라고 하는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고 할 때의 로바(lobha)도 탐욕입니다. 그러나 로바(lobha)라고 할 때의 탐욕은 수행에 의해서 탐욕 없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탐욕 없음을 아로바(alobha)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탐(無貪)입니다. 그러나 같은 똑같은 탐욕임에도 라가(rāga)는 탐욕 없음이라는 뜻의 아라가(arāga)라고 하지 않습니다. 애욕은 살아있는 생명의 기본적 본능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애욕 없음이라고 하지 않고 위라가(virāga)라고 합니다. 애욕을 분리해서 힘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예 없앨 수 있는 것과 없앨 수 없어서 분리해서 힘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위라가(virāga)는 애욕 없음이 아니고 애욕을 잠재워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리하는 뜻의 위(vl)을 사용합니다. 이는 위빠사나(vipassanā)라고 할 때의 위(vi)와 같습니다. 위빠사나 이전에는 무엇이나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알아차렸지만 부처님에 의해서 대상과 아는 마음을 분리하는 수행이 처음으로 발견되어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서 깨달음에 이른 것입니다.
다음에 뿌리삿사 까모(purisassa kāmo)에서 뿌리사(purisa)는 사람이고 까모(kāmo)는 감각적 욕망입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보통 왓투 까마(vatthu kāma)라고 할 때는 물질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일반사람은 물질적으로 많이 애착합니다. 하지만 낄레사 까마(kilesa kāma)라고 할 때는 번뇌를 즐기는 욕망입니다. 재가자가 아닌 출가자들은 물질보다 생각에 많은 애착을 합니다.
두 문장을 합치면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사람의 의도가 있는 애욕이 감각적 욕망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냥 그대로 있어서 그것 자체가 감각적 욕망이 아닌데, 내가 의도를 가지고 애욕을 일으켜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밖에 있는 아름다운 대상이 욕망이 아니라 내가 대상을 보고 내 마음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욕망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려면 대상이 아닌 나의 감각기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제어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알아차림이라는 행위로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역할입니다.
불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담마(Dhamma)는 대상이라는 뜻과 진리라는 뜻이 있는데 이때의 진리란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담마(Dhamma)를 법이라고도 합니다. 내가 탐욕이나 애욕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때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 새로운 욕망의 차별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옛날 인도의 수행자들은 외부 대상을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귀도 막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떤 대상이 나타나든 마음의 문제로 봅니다. 아름다운 것이 나타나면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고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라한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냥 아름다운 것으로 봅니다. 아라한이 많은 시대에 전쟁도 일어나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냥 그대로 두고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라한들이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투쟁도 없으므로 사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로 살고 있는 나나 세상은 있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라서 이것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세간과 출세간의 차이입니다. 세간의 입장에서 보면 출세간을 이해하기 못합니다. 이는 괴로움의 근본원인이 무명과 갈애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음 문장인 띳타니 찌뜨라니 따테와 로께(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에서 띳타니(Tiṭṭhanti)는 서다, 머물다, 살다, 행동하다는 뜻입니다. 찌뜨라니(citrāni)는 아름다움이고, 따테와(tatheva)는 그대로, 참다운, 진실한 이라는 뜻이고, 로께(loke)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아텟타 디라 위나얀띠 찬당(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ṃ)에서 디라(Dhīrā)는 지혜, 슬기를 뜻합니다. 여기서 디라(Dhīrā)는 정진을 많이 해서 지혜로운 자입니다. 반면에 빤디따(Pandita)는 많이 알아서 지혜로운 자입니다. 위나얀띠 찬당(vinayanti chandaṃ)는 욕망을 제어하다, 욕구 길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 현자는 여기에 대한 욕망을 제어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여기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 찌뜨라니(citrāni)는 어원이 찌따(citta)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찌따(citta)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여러 가지의, 잡색의 아름다운, 그림, 회화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찌뜨라니(citrāni)를 여러 가지, 갖가지로 볼 때는 다양한 애욕인 라가(rāga)를 말합니다. 마음을 여러 가지의 종류라고 하거나 그림이라고 한 것은 마음이 여러 가지 애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애욕이 있어 마음이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에 ‘현자는 여기에 대한 욕망을 제어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을 보고 욕망을 일으킨 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대상은 항상 거기에 그대로 있는데 내가 감각적 욕망을 일으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된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가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욕망을 제어하면 사악함이 제어되고, 사악함을 제어하면 괴로움이 제어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없애려면 그 원인이 되는 좋아하는 마음인 욕망을 없애면 된다는 뜻입니다. 사악함이란 죄악, 고통, 불행을 망라한 말입니다. 욕망을 없애려면 욕망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만약 욕망을 없애려고 하면 욕망이 더 커져서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냥 욕망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 순간적인 소멸에서 일시적인 소멸로 다시 완전한 소멸의 길로 갑니다.
계속해서 부처님께서 천신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코당 자헤 윕빠자헤이야 마낭,
Kodhaṃ jahe vippajaheyya mānaṃ,
상요자낭 삽바마띡까메이야,
Saṃyojanaṃ sabbamatikkameyya,
땅 나마루빠스밈삿자마낭,
Taṃ nāmarūpasmimasajjamānaṃ,
아낀짜낭 나누빠딴띠 둑카.
Akiñcanaṃ nānupatanti dukkhā.
분노를 버리고 자만도 버리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고
정신과 물질을 집착하지 않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에게는
괴로움이 따르지 않는다.
코당 자헤 윕빠자에이야 마낭(Kodhaṃ jahe vippajaheyya mānaṃ)에서 코다(Kodha)는 화, 성냄, 분노입니다. 자헤(jahe)는 뒤에 남기다, 포기하다, 버리다, 라는 뜻입니다. 윕빠자헤이야 (vippajaheyya)는 버리다, 포기하다, 단념하다는 뜻입니다. 마나(māna)는 자만입니다. 그래서 ‘분노도 버리고 자만도 버리고’입니다. 다음 문장에 상요자낭 삽바마띡까메이야(Saṃyojanaṃ sabbamatikkameyya)에서 상요자낭(Saṃyojanaṃ)은 속박, 구속, 장애, 결박이라는 뜻입니다. 삽바마띡까메이야(sabbamatikkameyya)는 삽바(sabba)는 모든, 일체, 전부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띡카(matikka)는 고르게, 평평하게,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고’인데 이는 온갖 굴절이 있는 장애를 모두 평평하고 고르게 펴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신견(有身見), 의심, 계금취견(戒禁取見)입니다. 유신견은 오온이 나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의심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을 말합니다. 계금취견은 규범과 계율의 금지조항을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계율을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음에 땅 나마루빠스밈삿자마낭(Taṃ nāmarūpasmimasajjamānaṃ)에서 땅(Taṃ)은 그것은, 즉, 이른바, 등의 뜻이 있습니다. 나마루빠스밈삿자마낭(nāmarūpasmimasajjamānaṃ)은 정신과 물질을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아낀짜낭 나누빠딴띠 둑카(Akiñcanaṃ nānupatanti dukkhā)에서 아낀짜낭(Akiñcanaṃ)은 아무 것도 없는, 무소유를 말합니다.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떠나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성자를 말합니다. 다음에 나누빠딴띠 둑카(nānupatanti dukkhā)는 괴로움이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에게는 괴로움이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해탈의 자유고 열반에 이른 성자의 삶입니다. 결국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라는 말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소멸하여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痴)를 완성한 아라한입니다.
빠하시 상캉 나 짜 마나맛자가,
Pahāsi saṅkhaṃ na ca mānamajjhagā,
앗쳇치 딴항 이다 나마루뻬,
Acchecchi taṇhaṃ idha nāmarūpe,
땅 치나간탕 아니강 니라상,
Taṃ chinnaganthaṃ anighaṃ nirāsaṃ,
빠리예사마나 낫자가뭉,
Pariyesamānā nājjhagamuṃ,
데와 마눗사 이다 와 후랑 와,
Devā manussā idha vā huraṃ vā,
삭게수 와 삽바니웨사네수띠.
Saggesu vā sabbanivesanesūti.
헤아림을 버리고 그리고 교만도 버리고
정신과 물질에 대한 갈애를 버리고
속박을 끊고 혼란이 없어 욕망이 없으니
천신이나 인간들이 이번 생에서 또는 저 생에서
천상이나 그 모든 거처에서나
그를 널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한다.
빠하시 상캉 나 짜 마나맛자가(Pahāsi saṅkhaṃ na ca mānamajjhagā)에서 빠하시(Pahāsi)는 때렸다, 버렸다, 라는 뜻입니다. 상캉(saṅkhaṃ)은 헤아림, 열거, 계산, 사량, 평가, 판단 등의 뜻입니다. 다음에 나 짜 마마맛자가(na ca mānamajjhagā)는 교만도 버리고, 입니다. 그래서 ‘헤아림도 버리고 교만도 버리고’입니다. 다음에 앗쳇치 딴항 이다 나마루뻬(Acchecchi taṇhaṃ idha nāmarūpe)에서 딴항(taṇhaṃ)은 갈애입니다. 그리고 나마루뻬(nāmarūpe)는 정신과 물질입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에 대한 갈애도 버리고’입니다.
다음에 땅 친나간탕 아니강 니라상(Taṃ chinnaganthaṃ anighaṃ nirāsaṃ)에서 친나간탕(chinnaganthaṃ)은 합성어로 친나(chinna)라는 베어진, 단절된 이라는 뜻과, 간탕(ganthaṃ)은 묶음, 속박을 뜻합니다. 아니강(anighaṃ)은 혼란이 없는, 격정이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니라상(nirāsaṃ)은 욕망이 없는, 기대가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속박을 끊고 혼란이 없어 욕망이 없으니’입니다.
다음에 빠리예사마나 낫자가뭉(Pariyesamānā nājjhagamuṃ)은 그를 찾지 못한다, 입니다. 그래서 그를 널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데와 마눗사 이다 와 후랑 와(Devā manussā idha vā huraṃ vā)에서 데와(Devā)는 천신이고 마눗사(manussā)는 인간입니다. 이다 와 후랑 와(idha vā huraṃ vā)는 이번 생에서 또는 저 생에서, 입니다. 다음에 삭게수 와 삽바니웨사네수띠(Saggesu vā sabbanivesanesūti)에서 삭게수(Saggesu)는 천상입니다. 삽바니웨사네수띠(sabbanivesanesūti)는 모든 거처에서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헤아림을 버리고 그리고 교만도 버리고, 정신과 물질에 대한 갈애를 버리고, 속박을 끊고 혼란이 없어 욕망이 없으니, 천신이나 인간들이 이번 생에서 또는 저 생에서 천상이나 그 모든 거처에서나 그를 널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결국 생각도 버리고 교만과 아만심도 버리고 몸과 마음에 대한 감각적 욕망도 버리고 세 가지 속박인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도 버려서 혼란하지 않아 욕망이 없으니 천신들이나 인간들이 이번 생이나 다음 생이나 또 천상이나 다른 모든 거처에서 그를 널리 찾아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여의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붓다나 아라한은 지금 어디에 계신분이 아닙니다. 태어날 원인이 사라져서 태어나는 결과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논쟁을 할 때는 뭔가를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만심을 세우기 위해서 논쟁을 하고 분노를 가지고 논쟁을 합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마음이 청정해지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욕구의 애착에서 벗어난 사람은 삼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akiñcana)’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는 아라한을 말합니다. 결국 열반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모가라자(Mogharājā) 존자가 세존께 여쭈었다.
5. 단쩨 히 낫닥쿵 따타위뭇땅,
Tañce hi nāddakkhuṃ tathāvimuttaṃ,
데와 마눗사 이다 와 후랑 와,
Devā manussā idha vā huraṃ vā,
나룻따망 앗타짜랑 나라낭,
Naruttamaṃ atthacaraṃ narānaṃ,
예 땅 나맛산띠 빠상시야 떼띠.
Ye taṃ namassanti pasaṃsiyā teti.
천신들이나 인간들이 이번 생에서 또는 저 생에서
이렇게 해탈한 분을 보지 못한다면
선을 행하는 가장 훌륭한 인간을
어떻게 그들을 존경하여 칭찬할 수 있습니까?
첫 문장의 단쩨 히 낫닥쿵 따타위뭇땅(Tañce hi nāddakkhuṃ tathāvimuttaṃ)에서 낫닥쿵
(nāddakkhuṃ)은 보지 못하다, 관찰하지 못하다, 인식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따타위뭇땅(tathāvimuttaṃ)에서 땃타(tathā)는 이렇게, 그와 같이, 그렇게, 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자신을 호칭할 때 ‘이렇게 온 자’라는 뜻으로 여래(如來)라고 합니다. 이때의 여래(如來)가 따타(tathā)인데 이렇게 라고도 하지만 여여 하다, 있는 그대로 등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따타(tathā)와 함께 있는 위뭇땅(vimuttaṃ)은 해탈한, 자유로운, 해탈 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탈한 자를 보지 못한다면’입니다.
다음에 데와 마눗사 이다 와 후랑 와(Devā manussā idha vā huraṃ vā)에서 데와(Devā)는 천신이고, 마눗사(manussā)는 인간, 사람입니다. 이다 와 후랑 와(idha vā huraṃ vā)는 이번 생에서 또는 저 생에서입니다. 그래서 두 문장을 종합하면 ‘천신들이나 인간들이 이번 생에서 또는 저 생에서 이렇게 해탈한 분을 보지 못한다면’입니다.
다음 문장의 나룻따망 앗타짜랑 나라낭(Naruttamaṃ atthacaraṃ narānaṃ)에서 나룻따망(Naruttamaṃ)은 가장 훌륭한 사람입니다. 나룻따망(Naruttamaṃ)은 모든 아라한들이 인간들에서 최고이고 이 아라한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십니다. 앗타짜랑(atthacaraṃ)은 선을 행하는 입니다. 그리고 나라낭(narānaṃ)은 인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가장 훌륭한 인간을’입니다.
마지막 문장의 예 땅 나맛산띠 빠상시야 떼띠(Ye taṃ namassanti pasaṃsiyā teti)에서 나맛산띠(namassanti)는 경의를 표하다,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빠상시야(pasaṃsiyā)는 칭찬받을 만한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들을 존경하여 칭찬할 수 있습니까? 라는 내용입니다.
모가라자(Mogharājā)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어본 내용은 천신들이나 인간들이 깨달음을 자들을 이번 생에서나 다음 생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과연 훌륭한 분들을 어떻게 존경하고 칭찬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는 윤회가 끝나서 볼 수 없는 분들에 대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충정으로 하는 말입니다. 실물이 있어서 친견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모가라자(Mogharājā) 존자 이야기는 꿋다까니까야의 압빠다나 빨리(Apadānapāli)에 나오는 이야기로 경전 4개 정도가 모가라자 존자 중심으로 쓴 것입니다. 아라한 스님들의 삶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모가라자는 금생에 왕으로 태어났지만 전생에 빠두뭇따라(Padumuttara) 부처님 시대에 하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때 사람의 수명이 일만 살이었습니다. 하루는 이 분이 스님들 계시는 공간에 와서 밥을 했는데 잘못하여 주변 공간이 시커멓고 더럽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법문을 듣고 있는데 빠두뭇따라 부처님께서 한 스님을 칭찬했습니다. 그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나처럼 어렵게 살면서 수행하시는 스님이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칭찬받은 스님은 분소의로 만든 가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은 분소의 제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인은 부처님께 나도 분소의 제일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처님께 말했고 부처님께서는 서원을 세우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분소의 제일의 제자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 하인은 태어날 때마다 밥할 때 더럽게 한 과보로 어떤 몸을 가지든 건강하지 못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마지막 생에도 피부병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왕인데 왕이면 뭐해, 다 가지면 뭐해, 라고 하면서 논쟁 잘하는 ‘자띨라’라는 16명 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논쟁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다니다가 부처님께 여쭤봅니다. 모가라자는 16명 중에서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믿고 자만심이 많았습니다. 부처님께 질문하려고 하니 부처님께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게 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하려고 일어났는데 또 부처님이 앉으라 하고 다른 사람을 시켰습니다. 부처님은 두 번까지는 거절하지만 세 번째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또 질문 드립니다. 죽음의 왕, 삼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모가라자 수따(Mogharājā sutta)에 나오는 모가라자의 질문과 부처님의 답변을 보겠습니다.
모가라자(Mogharājā)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면 죽음의 왕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가와(Bhagavā)
세존
산냐또 로캉 아웩캇수 모가라자 사다 사또 앗뜨자 사다 사또 앗따누딧팅
Suññato lokaṃ avekkhassu l mogharājā sada sato l attja sada sato l attānuditthiṃ
우핫짜 에왕 맛쭈따로 시야 에왕 로깡 아웩칸땅 맛쭈라자 나 빳사띠띠.
ūhacca l evaṃ maccutaro siyā l evaṃ lokaṃ avekkhantaṃ maccurāja na passatiti.
모가라자여 알아차림으로써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서 이 세계가 공함을 보아라.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중에 ‘이 세계가 공함을 보아라’라고 할 때의 세계는 오온을 말합니다. 불교의 세계관은 한 인간의 오온입니다. 그리고 공함은 순냐(Suñña)를 말합니다. 순냐(Suñña)는 빈, 텅 빈, 공허한, 비실체적인, 공(空) 등을 의미합니다. 몸과 마음은 있지만 이것을 주도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을 공(空) 이라고 합니다. 공(空)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인 인연에 따라 생겨나므로 아(我)라든가 아소(我所)라든가 실체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거나 나의 소유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은 있지만 이것을 주도하는 실체는 없고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연속되는 과정만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무상, 고, 무아의 통찰지혜가 났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공(空)이라는 것과 무(無)를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는데 공(空)은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하지 아예 아무 것도 없다는 부정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空)을 무(無)와 동일시하면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위험한 견해입니다. 있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주도하는 실체가 없고 원인과 결과만 있습니다. 본문 중에 앗따누딧띵(attānuditthiṃ)은 자아가 실체로 존재한다는 견해로 이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라고 말하지만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 공(空)의 뜻입니다. 나와 너는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실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깨달은 자는 나와 너를 말하지만 실체가 없는 것을 알고 말하지 실체가 있는 것으로 알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법문을 듣고 모가라자(Mogharājā)와 그의 제자 1000명이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출가했습니다.
모가라자(Mogharājā)는 부처님 공간을 더럽힌 과보로 태어날 때마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꿋따까 니까야에 보면 ‘너의 몸은 너무 못 생겼지만 너는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모가라자가 자신의 오온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히말라야의 추위 속에서도 볏짚으로 몸을 덮고 아주 어렵게 사셨습니다. 어렵게 사시는 비구 중에서 제일 으뜸 제자가 되었습니다. 왕이면서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분은 실천 수행을 하신 것입니다.
모가리자는 부처님 공간을 더럽힌 과보로 20분의 부처님 시대에 계속 태어났습니다. 천상에 가서도 과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과보를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만약에 그런 과보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건강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면 그 공덕으로 과보에서 벗어납니다. 축생이 축생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살기 위해 살생을 계속하기 때문에 다시 축생으로 태어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반복되는 이유는 거기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6. 빠상시야 떼삐 바완띠 빅쿠 (모가라자띠 바가와),
Pasaṃsiyā tepi bhavanti bhikkhū (mogharājāti bhagavā),
예 땅 나맛산띠 따타위뭇땅,
Ye taṃ namassanti tathāvimuttaṃ,
안냐야 담당 위지낏창 빠하야,
Aññāya dhammaṃ vicikicchaṃ pahāya,
상가띠가 떼삐 바완띠 빅쿠띠.
Saṅgātigā tepi bhavanti bhikkhūti.
세존께서는 모가라자여, 라고 말씀하셨다.
비구여, 그들이 이렇게 해탈한 분을
존경 할 수 있다.
법을 완전하게 알아 의심을 제거한 뒤에는
비구여, 그들 역시 모임에서 건넌 자가 된다.
예 땅 나맛산띠 따타위뭇땅(Ye taṃ namassanti tathāvimuttaṃ)에서 나맛산띠(namassanti)는 경의를 표하다, 존경하다, 숭배하다는 뜻입니다. 따타위뭇땅(tathāvimuttaṃ)은 이렇게 해탈하신 분입니다. 안냐야(Aññāya)는 완전히 알고 나서, 개오(改悟)하고 나서, 라는 뜻입니다개오(改悟)는 잘못을 뉘우쳐 깨달음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안냐야 담마(Aññāya dhammaṃ)는 무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사성제 고집멸도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법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사성제를 완전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위찌낏창 빠하야(vicikicchaṃ pahāya)에서 위찌낏창(vicikicchaṃ)은 의심입니다. 빠하야(pahāya)는 버리고, 끊어버리고, 극복하고, 라는 뜻입니다. 상가띠가(Saṅgātigā)는 모임, 결합이라는 뜻인데 오온이라는 무더기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바완띠(Bhavanti)는 존재, 생성, 윤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가띠 바와(Saṅgāti bhava)라고 할 때는 몸의 구성요소인 지, 수, 화, 풍의 결합을 말합니다. 몸은 지대, 수대, 화대, 풍대라는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때의 구성이 결합입니다. 몸을 몸이라고 하면 나의 몸이라는 유신견이 생기지만 단지 몸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 요소로 보면 나의 몸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석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분석은 어리석음을 치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어 이런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윤회가 끝나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임인 오온이 구성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아 피안으로 건너간 자가 됩니다. 이렇게 피안으로 건너가서 볼 수 없고 존경을 표할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한다면 아직 존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나를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지 않고 오직 가르침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어디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원인이 없어서 태어나는 결과가 없을 뿐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상가띠가 떼삐 바완띠 빅쿠(Saṅgātigā tepi bhavanti bhikkhū)인데 ‘비구여, 그들 역시 모임에서 건너간 자가 된다.’입니다. 해탈한 분을 존경하는 사람도 사성제의 법을 알아 집착을 끊으면 자신도 오온이라는 무더기의 모임에서 벗어난 해탈에 이른 자라고 말하십니다.
천신들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천신들이나 인간들이 이번 생에서나 또는 다음 생에서 이렇게 해탈한 분인 부처님을 뵙지 못한다면 천신들이나 인간들이 어떻게 예경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믿음으로 여래를 칭송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성제와 팔정도의 법을 이해하고 꿰뚫어서 도와 과를 증득하여 모든 의심을 건너 스스로 해탈한 존재인 아라한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밝히고 계십니다. 여기서 의심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수행의 기본이 되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업 자성 정견입니다. 이는 자신이 행위에 따른 결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역대의 모든 붓다는 반드시 제일 먼저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는 아는 지혜를 얻어 의심에서 해방된 뒤에 본격적으로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이릅니다. 만약 의심에서 해방되지 않은 상태라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통찰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주석서에서 말하기를 모가라자가 이러한 내용을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고 천신들과의 대화를 정리하기 위해서 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