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 아짠 문(Phra Acharn Mun, 1870~1950)
프라 아짠 문(Phra Acharn Mun)은 모든 불제자들로부터 한결같이, 추앙받던 당대의 가장 위대한 위빠싸나 선사(禪師)였다. 그의 제자들은 아짠 문의 경지가 얼마나 심원한지를 그가 설한 다르마(法)의 교훈과 가르침을 통하여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마음속에 간직된 깊은 감동들이 이를 입증해 주었다. 제자들 가운데는 태국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 서북부 각국의 스님들과 재가불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짠 문은 일생 동안 세속인으로서나 스님으로서 훌륭하고 완벽한 삶을 살았다. 그의 생애는 한 점의 티도 없는 옥처럼 고귀하고 청정(淸淨)하여서 금강석과도 같이 여느 값진 보석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아짠 문은 불기 2414(서기 1870)년 1월 20일, 우볼 라자다니 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캄듀앙, 어머니는 낭 장 이었으며 양친 다 독실한 불자였다. 그는 여덟 형제 중 장남이었고, 그가 입적할 당시에는 형제 중 둘만 생존해 있었다. 그는 비록 키는 작았으나 용모가 단정했고, 어린 시절부터 무척 영민하고 활력이 넘쳤으며 이해력이 뛰어나고 재치가 비상하였다.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캄봉 마을의 사원에서 사미승으로 출가하였으며, 곧 다르마(法)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여러 불교 경전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의 신중한 성품과 행동거지는 주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아짠 문은 사미승이 된 지 2년 후, 아버지의 명으로 속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순결한 수행 생활은 그에게 깊은 만족감과 좋은 영향을 주었으므로, 언젠가는 다시 승려 생활로 돌아가리라는 다짐이 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에 대한 확신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그는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부름’을 받고 부모에게 간곡히 출가의 뜻을 밝혔다. 그들도 기꺼이 동의하여 그가 비구로서 수계 받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스님이 되는데 필요한 모든 뒷받침을 해 주었고, 마침내 그는 불기 2436(서기 1893)년 6월 12일, 우볼 라자다니 읍의 리압 사원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계사(戒師)는 아리야카비 스님 이었으며 수계 의식은 시타 스님이 인도하고 프라자크 스님이 수계 설법을 해 주었다. 그에게는 ‘부리닷또(Bhūridatto, 지혜의 은총을 받은)’라는 법명이 주어졌다.
비구계를 받고 난 후에는 리압 사원의 아짠 사오와 함께 위빠싸나 수행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