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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열평형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에 대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결의안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는 다음과 같이 의결한다.
첫째, 우크라이나 인민은 공화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자결권을 보유함을 선언한다.
둘째, 우크라이나 인민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으로부터의 최종적이고 비가역적인 독립을 선언한다.
셋째, 우크라이나에 속하는 모든 영토는 불가침이며, 분리될 수 없음을 천명한다. 넷째, 독립을 선언한 순간부터 오직 우크라이나 헌법, 법령, 결의만이 이 국가에서 유효하다.
다섯째, 1991년 7월 31일까지 상기 결정을 유예한다.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의회 의장
1991년 5월 8일, 키이우
동독 기독교민주연합 당수이자 정부수반 로타르 마지에르가 슈타지 부역 이력 폭로로 공직을 사임하고 후임 페터미하엘 디스텔이 망명한 적군파 출신 테러리스트 주잔 알브레히트에 의해 저격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무렵, 소련 역시 작지 않은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1991년 초 고르바초프는 세 가지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외교 문제였는데, 고르비는 동독의 자유거국내각이 갈갈이 찢긴 틈을 타 민주사회당(구 사회주의통일당)의 재집권을 획책하라는 보수 강경파의 강력한 주문에 맞닥뜨린 상태였습니다. 이는 영국 작전의 성과를 ‘무’로 돌려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었죠.
둘째는 통치 문제였습니다. 옐친의 주도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공화국(RSFSR)이 주권을 선언하자 연방법은 연방 전역에서 제한된 효력만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는 모스크바가 구성 공화국들을 통제하는데 큰 어려움으로 작용했습니다. 이 문제의 경우 보수파뿐 아니라 메스너 등 고르바초프 파벌 내 상당수도 비판하는 것이었죠. 마지막 셋째는 연방 개편에 관련된 사항이었는데, 가장 복잡하면서도 많은 의견이 서로 대립하는 지점이었습니다. 연방을 해체하고 단일통화-단일외교안보 정책 하의 국가연합을 만드는 방안(사사노프)부터 다당제 민주사회주의 헌법을 의결해 연방을 유지하는 방안(나가이)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죠. 발트3국과 아르메니아, 몰도바가 이미 연방 탈퇴를 선언한 상황에서 연방체제 개혁안은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91년 5월, 우크라이나 SSR의 권력을 장악한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이하 독립주의자들이 “7월 31일까지 공화국들의 주권에 관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경우 독립을 강행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곧 연방의 해체나 마찬가지였기에 고르바초프와 보수파 모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죠. KGB로부터 공공연한 쿠데타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대통령 옐친, 카자흐스탄 대통령 나자르바예프 등과 회동을 가졌고… 소위 ‘6월 계획’이라는 물건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서막에 불과했죠.
08. 6월 계획
옐친이 만든 6월 계획이라는 것의 정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6월 11일 자정을 기해 발렌틴 파블로프 내각총리, 크류치코프 KGB 의장, 야조프 국방장관, 푸고 내무장관 등을 해임한다.
2. 내각총리직에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현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국방장관에는 콘스탄틴 코베츠 대장을, 내무장관에는 예브게니 람스도르프를 각각 임명한다.
3. KGB 등은 ‘당연히’ 반발할 것이므로, 레베드 장군 등이 이끄는 친위 병력을 동원해 적성세력에 대한 선제타격을 감행한다.
4. 상황이 불리해질 경우를 대비해 스베르들롭스크에 올렉 로보프 부총리를 파견, 예비정부를 구성케 한다.
5. 조치 완료 후, 단일통화-단일군-단일외교정책 하 동등한 주권을 가진 공화국 간의 신연방안을 공표하여 전인민투표에 부친다.
즉, 친위 쿠데타였습니다.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으나 이 계획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는데, 바로 고르바초프의 경호원을 통해 KGB가 이 내용을 그대로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계획이 실행되기 불과 1시간 전 크류치코프 의장이 진두지휘하는 보수파는 미리 준비된 소수 병력으로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체포, 나머지 ‘고르비파’ 인사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람스도르프 서클 일원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갑자기 KGB가 기동대를 동원해 궁정 쿠데타에 나선 것도 놀라웠지만, 고르바초프가 자신들에게는 일언반구 언질도 없이 친위 쿠데타를 먼저 실행하려 했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었죠. 그러나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선 다가오는 KGB와 군 내 동조세력의 위협을 피해야 했으니까요. 쿠데타 다음 날인 6월 12일, 발렌틴 파블로프를 명목상 수반으로 한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헌정질서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이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수호니, 위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회복이니 하는 지루한 수사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 고르비가 반대파를 군대로 날려버리려고 했다는데, 그런 게 중요할 리가 없었죠.
보수파들은 이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인민들이 ‘진정한 애국자’이자 책임있는 정치인인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죠. 사실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발표된 뒤로 모스크바 등 대도시들에서는 많은 가두시위가 있었는데, 보통 시위의 주제는 식료품 부족 해결, 일자리 창출, 언론 자유 확대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요구사항들이었습니다. 그러나 6월 13일 붉은 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는 오직 한 가지만을 요구했습니다.
“Уходи!“
(꺼져라!)
- 1991년 6월 14일, 당시의 시위 구호.
인민들은 공산당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르비든 보수파든, 개소리 그만 하고 좋은 말 할 때 꺼지라는 것이었죠. 모스크바 시내에 진입한 타만 기갑사단의 T-72 전차를 시위대가 둘러싸 전차병을 강제로 끌어내는 모습, 레닌그라드에서 시위대에게 우발적으로 발포한 병사들을 성난 군중들이 제압해 린치를 가하는 모습 등이 연출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몇몇 공화국들은 즉각 발표할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연방, 적어도 러시아 전역에서 대중적 정당성을 갖춘 정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브게니, 알렉세이, 아미나트, 나탈리야, 알렉산데르는 고심 끝에 이 “꺼져라” 열풍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상황이 시시각각 악화되며 체포 위협이 살해 위협으로 바뀌었고, 실제로 알렉세이의 여동생이 괴한의 총탄에 맞아 병원 신세를 진 상황에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죠. 이들은 갈 곳 잃은 레베드 장군의 공수군 및 사블린 제독의 해군 특전단과 함께 시위대(라기보다는 시민군)가 거점을 확보한 레닌그라드로 향했고, 스베르들롭스크 예비정부에 당장 자신들의 정부에 합류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한편 안드레이는 키이우로 향했습니다. 레닌그라드에서 투쟁정부가 수립될 예정이며, 이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공화국들에게 주권을 약속할 것이라는 사실(물론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람스도르프 서클 내에서도 공화국의 독립에 관한 사항은 정리된 바가 없었습니다.)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크라우추크 의장은 즉각 레닌그라드의 예브게니에게 연락해 사실여부를 물었고… 아미나트와 알렉세이가 펄펄 뛰는 상황에서 예브게니는 별수없이 시인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그 외 수많은 공화국 정부에서 레닌그라드 임시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이 도착했습니다. 물론 정부 수립은커녕 명칭과 지도자마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말입니다.
09.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러시아 혁명
러시아 공화국 정부 행정명령
전연방공산당 중앙당 및 모든 지역당, 운영조직, 콤소몰을 포함한 모든 유관조직을 해산하며 공화국 영토 내의 활동을 금지한다. 행정명령의 효력은 즉각적이며 영속적이다.
공화국 임시대통령 알렉산데르 야코블레프
1991년 6월 15일, 극히 일부를 제외한 러시아 내 군 병력들은 그 어떤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습니다. 명목상 합법정부였던 고르비의 정부는 공중분해됐고 모스크바의 실권을 가진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따랐다가는 곧바로 ’인민의 적‘이 될 것이었으며 레닌그라드 정부는 아직 수립도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안드레이는 알렉세이와 아미나트의 싸늘한 시선을 느꼈지만, 거리낌없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 5개국이 지지를 천명했다“는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한숨을 크게 내쉰 아미나트는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고, 각 도시에서 자체적 ‘시민 소비에트(гражданский совет)’를 결성해 호응을 유도하자는 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제안은 즉각 수용되었습니다. ’페트로그라드‘ 시민 소비에트를 시작으로 모스크바, 노보시비스르크, ‘예카테린부르크’, 카잔, 옴스크, 우파 등에서 비슷한 조직이 수립되었고, 군부대 역시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 공화국군을 자칭하며 움직였습니다. 모스크바 시민 소비에트를 이끄는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는 심지어 자유민주당(LDPR)을 필두로 반공세력이 단일대오를 결성하자는 제안을 보내왔죠. 레닌그라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민 소비에트들에서 민족주의자들이 기세를 잡은 상황이니 거부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레닌그라드만을 기반으로 한 ‘언더독 여당’ 통합 러시아당(Единая Россия)은 자유민주당, 야블로코(진보 자유주의), 로디나(우익 민족주의), 정의당(시장 자유주의) 등과 연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1년 7월이 되자 승세는 보다 명백해졌습니다. KGB의 알파 및 빔펠 그룹마저 지도부를 배신하고 러시아 공화국 지지를 선언하는 상황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모든 전의를 상실, 해외 망명을 택했습니다. 파블로프 수반과 야조프 국방장관은 중국으로, 크류치코프 KGB 의장과 셰닌 부총리는 시리아로, 푸고 내무장관은 자살을 선택했죠. 이미 러시아 공화국 외무차관 직함으로 전세계를 돌며 서방 및 제3세계 국가들에게 지지를 부탁하던 알렉세이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할 기회까지 잡았습니다. 주유엔 소련대표부는 본국으로부터의 모든 지령이 끊긴 상태에서 이미 ‘러시아 및 구 소비에트 공화국 합동임시대표부‘로 이름을 바꿔단 상태였으므로 절차는 수월했습니다.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주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 6월 역시 페트로그라드 시민 소비에트 주도의 시민혁명으로 세워진 러시아 공화국에 의해 끝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시민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숭고한 간판과 달리 실상은 극우 민족주의에 의해 마구 흔들리는 중이었지만, 역사의 페이지는 이미 넘어가고 있습니다.
- 옐친의 친위쿠데타(…) 계획은 실제로 고르비, 누르술탄과 함께 논의한 내용입니다. 물론 KGB가 도청하고 있었다는 것도 실제 상황입니다.
- 동독 민주화를 이끈 주요 정치인 다수가 슈타지 협력사실을 폭로당해 통일 이후 정치활동을 접은 것 역시 꿀잼실화입니다. 로타르 마지에르 동독 기민당수가 대표적이었죠. 그 외 동독으로 망명한 서독 적군파 잔당이 동독 부총리를 암살시도한 사건도 실제 있던 일입니다.
- 원작과 달리 람스도르프 서클 내 입장분화가 일찍 시작되는 상황입니다. 앞으로도 “만나서 서로 더러웠…지만 계속 만나야 하네 XX” 상황이 많이 연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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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전 개판이 나는군요.
그나마 묘사에 의하면 내전 수준까지 안간게 다행인가.
근데 이럼 푸틴 집권은...?
아 옐친 이 쑤까놈이!
그래서 죽이고 시작 하는겁니다(?)
@dear0904 옐친 대체자가 없었나...
@931117 미래를 모른다는 관점에서는 옐친은 그때까지는 옳은 지도자로 보였을테니까요...
@dear0904 제가 지금 대통령을 찍고 후회하는 것 처럼요.
@돈이 곧 진리 그거 말하려다가 이건 대놓고 그쪽이라 우회한건데... 잠깐. 근데 대통령을 찍었다구요? 그게 되나?
+ 근데 그 사람은 여러개 확인 했을때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진짜 대 논쟁이 터질거니까 더 나가면 안됨...
@dear0904 저 투표권 있는데요?
@돈이 곧 진리 아. 맞다... 만 18세도 투표권이 있었죠. 올해 수능 보신다고 해서 옛날 기억이 우선 했습니다...
@돈이 곧 진리 애초에 대놓고 나 문제 있어요 하고 나온 애를 찍어준것부터...
@dear0904 옐친은 그나마 민주투사라는 이미지라도 있었지...
ㅋㅋㅋ... 그렇죠. 위기가 생겨야 입장 분화가 되는데, 그때는 수호법이 큰 위기였지, 지금은 독립 방어부터 해야 하는데 독립 방어용으로 "하필" 사사노프를 쓰면 ㅋㅋㅋ... 저거 바꿔말하면, 중국 민주화 시위 터져서 티베트, 신장, 홍콩, 마카오 등등에 사람 보낼때 톰페티 보내는거랑 다를바가 없는데 ㅋㅋㅋ...
정보) 보낸적 없다(…)
자기가 알아서 간겁니다. 가서 “야 우리 대빵이 독립시켜준댔음 ㅋㅋ” 이런 셈이죠. 물론 그렇게 안했으면 다들 뿔뿔이 독립했을거고 지지나 지원도 못 얻었겠지만…
@E.E.샤츠슈나이더 아하.... ㅋㅋㅋ... 그래서 더 화냈군요.
@E.E.샤츠슈나이더 아 그러니까 최교수랑 비슷한 행동을 한거군요?
@돈이 곧 진리 조금 다른점이 있다면, 이쪽은 블러핑을 해서라도 잡았어야 한다는거(...)
반공 대중주의 연대면 이거 완전 1921년 이탈리아가 떠오르는데요 ㅋㅋㅋㅋ
그나저나 다른 캐릭터에 바탕한 인물이 일을 벌리고 제 캐릭터에 바탕한 인물이 뒤늦게 대응하는 것도 볼만하네요. 실제로는 주로 반대였으니 (?)
ㅋㅋㅋ 그렇죠? 제 심정도 이해해 보실때가 되었습니다(?)
자꾸 예기치못한 사고가 터져줘야 다들 흑화하니까요(?)
@E.E.샤츠슈나이더 메스너는 진작에 "이건 미친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라고 하고선 올리가르히가 됐을듯요(...)
하긴 빨리 망하는게 다시 조립하긴 편하죠(..)
문양 그린 도로 블록이 개판 난 사진만 봐도 그렇죠 ㅋㅋㅋ 보니까 지우고 다시 그리는게 낫지... 그거 짜 맞추다가 사람 죽어요...
@dear0904 망하게하지 않으려고 데려온 자들이 알고보니 망하게 한 것에 대하여(feat. 프라미스드 랜드(..))
아직 본격적인 망함은 시작도 안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 알고보니 아수스는 본인들만 망한 착한 연대기였다?(...)
그런데 사사노프가 저런 짓을 벌였으니 일 끝나면 메스너와 나가이는 사사노프에게 "니놈은 소비에트 연방 전체가 아닌 우크라이나만 잘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놈이니까 모스크바에 있지 말고 걍 우크라이나로 가서 우크라이나 정치나 실컷 해!"라고 할 것 같은 기분이?
팩트) 진짜로 했다(...)
물론 차이가 있다면, 그때 우크라이나 정치를 한건 누구 누구 쉴드 치려다가 그랬던거고, 지금은 궁화국을 살...
@dear0904 원작에서도 저 말 할수 있는 상황이 있었죠. 바로 수호법 사태요(...)
어조는 좀 바뀌어 "되도 않는 이상주의로 연방을 망치지 말고 키예프로 가서 니 일에나 열심히해 이 망상병자야! 니놈 때문에 연방이 두쪽났잖아!" 겠지만?
@돈이 곧 진리 물론 그래서 서로 다른 길을 갔죠(...)
???: 우리 경제가 어려워서 곡물가격 좀 올려받아야겠는데 다들 괜찮으시죠? ㅎㅎ ㅈㅅ!
@E.E.샤츠슈나이더 "그리고 그것은 제 3차 오일쇼크의 서막을 알리는 문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동생도 있고 알료샤 너 가족이 늘어났구나... 본편에서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독소전쟁에서 다 죽어가지고 반강제 외동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