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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70
창세기 25:27-34
장자권
흔히들 에서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들에 나가 사냥을 하고 상남자 같은 기개를 가진 존재로, 야곱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집에서 엄마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마마보이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성경이 그렇게 이해되도록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이제까지 야곱은 사기꾼이요 속임수에 능한 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아 왔고 또한 그렇게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야곱에 대한 선입견이 크다.
그런데 성경이 어떤 사람에 대해 표현한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격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계시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넘어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이삭에게서 야곱에게로 어떻게 언약이 이어지는가를 통해 언약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에서보다 에서와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러기에 우리가 오늘 본문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어떻게 이어가시는가 하는 언약적 흐름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다시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27절). “성장하매”라는 말의 히브리어 ‘가달’은 ‘성장하다, 크게 되다, 강해지다,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아들들이 ‘큰 자’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큰 자가 되었다는 것이 에서와 야곱에게서 어떤 상태로 보여주느냐 하는 문제이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익숙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을 지닌 ‘야다’이다. “사냥꾼”이라는 말 ‘차이드’는 ‘추적하다, 사냥하다’라는 뜻의 ‘추드’에서 온 말로 ‘사냥, 사냥한 것, (사냥하여 잡은) 양식, 음식’이다.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창 10:8-9)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여호와 얼굴 앞에, 여호와 얼굴에 대하여’라는 뜻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대적자라는 의미이다. “용사”라는 말의 ‘깁보르’는 ‘강한 자’라는 뜻이다. 즉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냥꾼의 이미지는 여호와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끝까지 추적하여 사냥하고자 하는 대적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게 볼 때 에서라는 인물에 대하여 소개할 때 “익숙한 사냥꾼”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사냥이 능숙한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끝까지 추격하여 죽이고자 하는 사냥의 일을 알고 그것과 하나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에서는 “들사람이 되고”라고 하였는데 ‘사데’는 ‘들, 밭, 전원, 토지, 땅’이라는 뜻이다. 예레미야 3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인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렘 32:7)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다시 회복될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4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 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43 너희가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없으며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다 하는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밭(사데)을 사되 44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방과 유다 성읍들과 산지의 성읍들과 저지대의 성읍들과 네겝의 성읍들에 있는 밭(사데)을 은으로 사고 증서를 기록하여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포로를 돌아오게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2:42-44)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밭을 사는 것으로 말씀하시며 그것을 “은으로 사고”(히, ‘케세프’)라고 하여 속전을 이루실 것을 보여주셨다. 이런 점에서 비록 에서를 “들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 속전을 이루실 밭이라는 의미를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말씀한 것이다.
에서와는 대조적으로 야곱에 대해서는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라고 하였는데 “조용한”의 히브리어 ‘탐’은 ‘타암’에서 유래한 단어로 ‘완벽한, 완전한, 온전한’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타밈)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탐)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노아에 대하여 “완전한 자”라고 할 때에 ‘타밈’이라는 단어도 ‘타암’에서 온 단어이다. 욥에 대해서도 성경은 ‘온전한 자’라고 하였는데 이 표현은 노아나 욥의 삶이 윤리도덕적으로 완전하였다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6:8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이미 표현하였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상태를 말씀한 것이다. 욥 역시 하나님께서 욥에게 의롭다함을 허락하셨기에 그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 상태를 온전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주어졌기에 온전하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단순히 우리 성경의 번역대로 조용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야곱에게 은혜로 베푸셨기에 온전한 상태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야곱이라는 사람이 온전하고 완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을 온전하게 만드실 것이다. 이는 그다음 “장막에 거주하니”라는 표현이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9:27에서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기로 하셨기에 언약이 주어진 셈의 후손들이 거하는 장막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막이 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이미 하나님께서 선어하셨다면 야곱이 장막에 거주하였다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장막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있을 때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다(18:1). 그러나 롯은 그의 장막을 옮겨 소돔에까지 이르렀고(13:12) 결국에는 소돔 성문에 앉았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해야 했었다(19:1).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28절). 이삭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의 취향 때문에 에서를 사랑하였기에 당연한 장자로 여겼다.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또한 야곱은 상속권(장자권) 얻기를 바랐고 자원하여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원하여 열심과 노력으로 이를 얻으려 하는 것이 같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선택이 계시되었으나 언약을 대하는 죄인들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취향과 성격에 따라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죄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29-30절). “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나지드’는 ‘끓인 것, 끓인 음식’이라는 뜻이고, “쑤었더니”라는 말의 ‘주드’는 ‘끓어 오르다, 오만하다, 교만하다, 반역적으로 행동하다’라는 뜻이다. 즉 에서는 붉은 것으로 끓어 오르는 교만함의 상태가 되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교만하다는 말도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기운이 없고 지친 마음으로 장자권 안에 담아 놓은 언약의 의미를 애써 외면하는 죄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라고 하여 붉은 것을 좋아하고 붉은 것이라는 이름을 가진자 답게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25절에서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라고 하였는데 ‘붉다’라는 것은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에서”라는 이름에는 이미 붉은 것, 즉 죄인의 상징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돔 아돔’이라고 하여 ‘그 붉은 것 그 붉은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피곤하고 지친 상태에서 끓어오르는 육의 양식에 대한 욕망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기에 충분한 죄인의 심성이었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1-32절). “장자의 명분”이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베코라’는 ‘장자권’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에서도 장자권을 판다고 해서 팔리는 것이거나 그것이 또한 야곱의 것이 되어 야곱이 장자가 되고 자신이 차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약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6)
“망령된”이란 말의 ‘베벨로스’는 ‘신성하지 않은, 불경스러운’이라는 뜻이다. 즉 장자권이 하나님께 소중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의미로 불경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을 “음행”과 같은 것으로 말씀하였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음행으로 우상숭배하는 상태라는 의미이다. 장자권이란 언약 안에서 후손(씨)에 대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에서는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장자는 큰 자가 아니고 또한 어린 자도 아니다. 그것을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이루려고 하는 모든 자들의 죄성을 드러내고 있다. 장자란 먼저 난 자도 아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도 아니고 세상의 영웅도 아니다. 이렇게 하여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언약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늘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있어서 언제나 기준은 하나님의 언약,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3-34절).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라는 말의 ‘바자’는 ‘경멸하다, 멸시하다’라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대하는 죄인들의 태도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심과 동시에 리브가의 태에서 에서와 야곱을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을 누리는 상태라 할지라도 이 땅을 사는 날 동안에는 우리 안에 늘 있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1-25)
(2024031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