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민속박물관 및 박인환문학관을 돌아보며>
버스가 인제읍 박인환문화거리에 있는 주차장에 서자, 일행은 차에서 내려 산촌민속박물관으로 향했다. 주차장서부터 산촌민속박물관 및 박인환문학관까지는 가는 길은 상당히 넓었는데, 이 길이 박인환문화거리였다. 이 거리에는 이름 그대로 박인환시인의“목마와 숙녀”“세월이 가면”등 시비와 아름다운 단풍잎 문양과 나비 모양의 시설물이 있었다. 그러나 문화거리 옆에 병원이 있는 것은 괜찮았으나, 그 옆에 장례식장이 있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시설이었다.
<박인환시인의 "목마와 숙녀" 시비>
<박인환시인의 "세월이 가면" 시비>
<박인환 문화의 거리에 설치된 단풍잎과 나비가 있는 풍경>
박물관이 가까워지자“김부대왕당(金富大王堂)”이 나타났다. 김부대왕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라고도 하고 마의태자라고도 하는 인물이란다. 이것은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 있는 대왕당을 이전의 형태로 복원한 것이었다. 상남면 일대에 널리 전승되는 인물 신앙의 한 형태로 매년 5월5일과 9월9일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상황당과 비슷한 건물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특정 인물에 대하여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받들어 모신다는 것은 특이했다.
<인제군 상남면에 있던 것을 복원한 "김부대왕당(金富大王堂) 모습>
그 뒤에는 황장금표(黃腸禁標)가 있었다. 황장금표는 조선 중기 한계리 일대의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석에 음각으로 새긴 표석이었다. 황장목은 나무 중심부에 황심을 가진 소나무로서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보호했던 수종이었다. 황장목은 강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궁궐의 건축재, 왕실의 관재(棺材) 등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관리했다고 한다. 황장금표와 산촌민속박물관 사이에는 기린정(麒麟亭)이 있었다.
<황장목을 관리하던 표지석인 "황장금표">
<황장금표 뒤에 있는 "기린정(麒麟亭)"의 아름다운 모습>
일행은 “산촌민속박물관”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인제문화원 사무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양의 박제가 있는 현관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니 문화관광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용 마이크를 들고 일행을 안내하며 설명했다.
<인제산촌민속박물관 현판>
<인제산촌민속박물관 입구에 있는 산양 박제품>
<인제 산촌민속박물관은 사라져가는 인제군의 민속 문화를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기위해 국내 최초로 산촌민속박물관을 개관(2003.10.8)했어요. 전시실에는 1960년대 산촌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모형과 실물, 영상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지요. 이 전시실은 지역주민들의 자료기증과 참여로 이루어졌으며 현재도 아이들과 주민들의 참여로 전시물이 수시로 바뀌는 “살아있는 박물관”이어요>라며 설명을 마치고 전시실로 이동했다.
해설사가 종합설명을 한 뒷벽에는 여초선생이 쓴 율곡선생 풍악(금강산)여행기가 있고, 그 밑에는 당시 인제군민들의 세시풍속도가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의 내가 어렸을 때 보았거나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없어진 것들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나름대로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이율곡선생의 풍악(금강산)여행기를 쓴 여초선생의 예서>
제1전시실에는 “산촌사람들의 삶과 믿음의 세계”를 주제로 전시하고 있었다. 즉 겨울에는 눈에 덮인 산촌마을 풍경과 새해 세배모습, 산촌의 수렵 및 숯 굽기가 행해졌으며, 자리매기 등이 전시되어있었다. 봄에는 겨리쟁기로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등 농사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름에는 밭매기 등 농사일과 산촌의 운행수단이었던 뗏목을 띄워 춘천까지 가는 것 등이었다. 가을에는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로 햇곡식으로 조상께 천신하며, 탈곡기와 곡식을 저장하는 채독과 나무김장독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이남박, 함지박 등 생활용품들도 있었다.
<새해 세배드리는 모습>
<산촌의 너와집과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모습>
<촛대, 이남박, 함지박 등 산촌의 생활용품들>
<산촌의 산신당(성황당) 풍경>
<산촌의 곡식을 저장하는 채독과 나무 김치통>
제2전시실에는 “산촌사람들의 애환과 여유”라는 주제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 전시실은 배는 고팠지만 여유로웠던 시절, 산촌사람들의 먹을 거리와 즐길 거리들을 나름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산촌가옥에서 맷돌돌리기와 다듬질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주요 먹을거리로는 봄에는 참나물비빔밥, 여름에는 올챙이국수, 가을은 도토리묵, 겨울은 막국수 등이었다. 또한 올챙이국수 만들기와 막국수 만드는 모습 및 인제 산촌의 야생동물 박제가 전시되어 있었다. 나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여름에는 올챙이국수를 만들고, 겨울에는 맷돌질과 함께 다듬질을 하던 기억이 어른거렸다.
<나물과 송기떡 등 산촌의 먹을 거리>
<분틀로 메밀국수를 누르는 부부 모습>
<인제지역에 서식하던 야생동물의 박제 전시실 모습>
일행은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옆에 있는 박인환문학관으로 갔다. 문학관 앞에는 “시인의 품”이란 동상이 있었다. 이것은 박인환시인이 코트를 입고 바람을 맞으며 시상을 떠올리는 모습으로, 코트 안에 들어가 앉으면 센서에 의해 시인의 시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시인의 대표작인 “목마와 숙녀”의 목마 이미지를 사용해서, 아이들이 작은 도서관으로 이용하는 체험조형물이 있었다.
<박인환문학관 앞 잔디밭에 있는 "시인의 품" 동상>
<박인환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이미지화 해서 만든 작은 도서관>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자 왼쪽에 많은 책이 있는 “마리서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박인환시인이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서 운영하던 서점이었다. 이곳에는 국내외 여러 문인들의 작품과 문예지 등이 갖추어져 있어 김광균, 김기림, 오장환, 정지용, 김광주, 김수영 등 여러 문인들이 자주 찾은 명소로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난 발상지였다.
<박인환문학관 입구에 있는 시인이 운영하던 서점 "마리서사" 모습>
그 옆에는 김수영시인의 어머니가 빈대떡집을 운영하던 충무로4가의 선술집“유명옥(有名屋)”이 있었다. 이곳에서 박인환과 여러 문인들이 모여 빈대떡과 막걸리를 마시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출발과 후기 모더니즘의 발전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눴던 자리였다.
<김수영시인 어머니가 운영하던 빈대떡집 "유명옥"의 실내 모습>
또한 그 옆방에는 해방이 되자 명동부근에서 최초로 개업한 고전음악 전문점인 “봉선화다방”이 있었다. 이곳은 문인들의 연락처이자 시낭송의 밤, 출판기념회, 환송모임, 귀국보고회 등이 자주 열렸던 곳이란다.
<해방 후 명동부근의 문화센터였던 "봉선화다방" 모습>
앞에는 한국동란으로 폐허가 된 명동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모나리자다방”이 있었다. 다방이라는 공간이 차를 마시면서 시를 쓰고 잡담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당시 신문에 글을 게재하는 것이 생계수단이었던 문인들이 신문사 편집국장을 우연이라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형식의 시라고 한다.
<박인환과 영혼을 함께한 예술가들의 글이 게시된 "모나리자다방>
이외에도“동방싸롱” “포엠” “대포집 은성”등이 2층에 있었다. 특히 “세월이 가면”은 은성에서 외상 때문에 썼다는 시가 노래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한 2층 한쪽에는 인제의 자연과 풍물을 소재로 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박인환문학관 건물은 인제의 미술작품이나 사진 등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박인환시인이 "세월이 가면"을 쓰게 된 대포집 "은성" 모습>
박인환문학관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문학관과 그 전시방법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의 문학관들이 시인의 연대기, 유작, 유품을 전시한 것에 비하여, 여기는 당시 박인환과 관련된 “역사적 명소”를 드라마세트장 같이 현실감 있게 재현해 놓은 것이 나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문학관 건물은 컸으나 전시실 규모가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은 문학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문학관 건물주위를 배경으로 단체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인제문화원 사무국장의 안내로 걸어서 점심을 먹을 한국관으로 갔다. 그곳에 인제문화원장이 나와 같이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경남이나 전남지역에 갔을 때는 그곳 군수가 나오기도 하고 문화원장 등 관계자들의 인사말을 듣기도 했는데, 여기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마침 오늘이 인제 장날이고 시간이 있어 몇 사람이 장 구경을 나섰다. 지금이 농번기이기 때문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으며 장터도 그리 넓지 않아 여기도 평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장터를 한 바퀴 돌아보고 농협마트를 살펴본 후, 버스에 올랐다.
<박인환문학관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박인환문학관 앞에서 개인적으로 추억을 남기고>
<일행이 점심을 먹은 "한국관" 간판>
<일행이 한국관에서 먹은 점심상>
<인제 장날 풍경>
첫댓글 자기 고향 사람들의 자취를 보관해 놓은 박물관 문확관 을 보고 많이 부러워 했고 평창 사람들의 삶의 기록을 보관 할 박물관 같은것이 생길 수 있을까 생각 되었습니다.
어느 기관이나 지도자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지지요~~~
변두리시골사람으로서, 평창을 보면, 격동하는 변화보담은 안정적인것을 선호하는것 같은 느낌을 받었습니다.
무엇인가 조급씩이라도 발전해가는 모습이 보기 좋지요~~~
탐방문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청호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