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레곤주 포틀랜드 한국불교계의 산 증인 원진법사님
녹음이 푸른 6월은 젊음의 싱그러움과 활기참 그리고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 초여름의 시작입니다. 서북미 지역 오래곤주에서 이달에 만난 분은 포틀랜드 불교계의 역사이자 산 증인인 정인옥 법사님(원진 법사님)입니다. 정인옥 법사님은 1976년도경에 남편분을 따라 도미 한 후 지금까지 오레곤주 Mulino에 살고 계십니다. 여든이 훨씬 넘으신 연세에도 불구 하시고, 질문에 밝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답해주는 모습은 감동을 전해 주었답니다.
ᆞ법사님께서는 언제 부터 불교를 믿게 되셨는지요?
고향은 강원도 홍천인데, 원래 부터 유교집안에 태어나 인자하신 어머님으로 부터 삼강오륜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특히나 어머님으로 부터 천자문을 배워 일제시대에 태어나 어른이 되어 직업을 가질때 많은 도움을 받았답니다. 제가 자란 시대에는 한문을 대부분써서 어떠한 직업을 가질때 유용했죠. 저는 보건전문학교에서 근화여대 가정과를 졸업했습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났어도 어머님께서는 저를 유학도 보내주시고, 한문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본 유학 당시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 다시 고국으로 귀국하여 신문사 사원으로 일을했어요.
당시 15세였는데, 당장 학교갈 형편이 안되어 직업을 가지게 되었죠. 그때 직업을 가지게 된 계기가 한문을 알아서 였죠. 어린 나이지만 사원 월급을 많이 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한국 전쟁 6.25가 일어나며 1.4후퇴때는 피난도 갔었구요. 고향은 강원도 홍천이지만 살기는 서울에서 살고, 자랐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을 건널때 지뢰를 밟을까 아찔했던 생각이 나네요. 저는 직업을 간호사 그리고 여경도 했었답니다. 간호사란 직업은 당시대만 하더라도 간호사들이 한문으로 약재 처방전을 쓰는데, 제가 한문을 알아서 일을 하게 되었답니다. 물론, 여경도 그런사유로 일을 하게 되었죠. 어머님의 한자 교육으로 저는 정말 여자로서 많은 직업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미대사관에서 근무는 운전 이였는데, 당시로는 정말 여자 운전사가 드문 시대였답니다. 운전학교를 졸업한후 미대사관에 취직을 했을 당시에는 저는 기독교인이였으며, 용산교회에 다니고 있었죠. 저희 언니는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그시절 언니는 불교신자였답니다. 방학때를 맞춰 불교 신자인 언니를 열심히 전도 하려고 했었는데, 제가 살고 있던 집에 놀러 왔던 언니가 저의 전도 때문인지, 저녁에 떠났답니다. 기다렸던 방학때, 언니를 전도하려고 했다가 언니가 떠나자 미안한 마음이 얼마나 들든지… 그래서 거짓으로 절에 다녀왔다고 편지를 썼는데, 거짓인게 마음에 걸려 조계사에 가게되었답니다. 그때 조계사에서 무진장 스님의 사성제와 팔정도 법문이 있었죠.
팔정도의 ‘정견, 정명, 정사, 정정진, 정어, 정념, 정업, 정정’은 신선한 충격이였으며, 감동적이였답니다. 그리고 그 법문 후 다시 갔는데, 육바라밀 법문을 듣게 되었죠. ‘보시, 정진, 지계, 선정, 인욕, 지혜’는 인간으로서의 수행과 의무라는 생각에 다시한번 감동을 받게 되었답니다. 그시절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불교를 믿게 되었답니다.
ᆞ 1976년도에 미국에 오셨다고 하셨는데요, 당시에는 한인들이 대부분 크리스찬이신 분들이 많았을텐데, 어떻게 불교를 계속 믿을수 있었나요?
사실,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을 당시 오레곤에 한국 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미국교회를 나갔었는데, 당시 목사님께서 붓다에 대한 모순된 설교가 있어 그뒤로는 나가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집에서 혼자 불교를 믿고 있었는데, 81년도에 한국절 성불사가 이곳 오레곤주 포틀랜드에 생긴것을 알게 되었죠. 81년도 당시 성불사 주지 스님은 혜수스님이셨는데, 페인트및 그로서리에서 일을 하시며 절을 운영하고 계셨죠. 그뒤로 83년도에 정업스님이 오셨으며, 그후로도 정현스님, 호목스님등 여러스님이 오셨었습니다.
성불사라는 이름에서 보광사란 이름으로 바꼈고, 보광사는 다시 한번 법륜사로 바꼈었죠.
그런데, 법륜사란 이름에서 결국에는 보광사로 다시 바껴, 현 포틀랜드 보광사가 있답니다.
ᆞ 그렇다면 어떤 계기에 법사님이 되셨나요?
84년도에 정업스님의 초청으로 숭산 큰스님을 친견할 기회가 있었답니다. 86년도에 숭산스님이 계신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 젠센터에 가서 한달동안 참회하면서 스스로 바꿔지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으며, 숭산스님께서 이때 수좌계를 주셨습니다. 그당시 저의 바뀐 모습을 보고 남편도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9년도에 지도법사님의 권유로 법사계(Darhma Teacher)를 받았죠. 사실, 제 불명이 해성인데, 법사명은 ‘원진’법사입니다.
아직까지 제가 잊지 못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1987년도에 들은 세계일화에서 링컨 로드 박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단상에 있던 작은 꽃을 들어올리며 하신 말씀이
“This small flower came to the United State of America from Korea.
선사님, He brought this flower to the United State of America.
I’m sure this flower will grow up and grow up all over the world.
그당시에 얼마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들었는지요. 숭산 선사님께서 미주불교에 끼친 영향이 얼마 크신지 느꼈던 순간이였답니다.
ᆞ 법사님으로 활동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스님의 부재나 신도님들의 부탁 그리고 미국인 불자들에게 가서 법회를 하였답니다.
기억에 나는 신도님들중 미국인 여자 신도분이 있었는데, 스님이 되고자 한국에 들어가셨답니다.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해 지네요.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인지,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법사 활동을 못합니다.
절에서 스님과 신도님들과 함께 염불을 같이 하고 싶어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답답해 더이상은 법사로서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답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력이 뒷받침이 되질 않고, 알았던 염불도 잊어버리고....
그래도, 마음은 항상 누가 법회를 하겠다고 하면 기꺼히 나가서 도움을 주고 싶답니다. 또한, 언제나 수행과 정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ᆞ 좋아하는 불교 문구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불교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당시 처음으로 들었던 사성제(고,집,멸,도)와 팔정도(정견, 정명, 정사, 정정진, 정어, 정념, 정업, 정정)는 평생 잊을수 없답니다.
팔정도만 잘 지켜도 괴로움이 없어지고,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보며, 육바라밀(보시, 정진, 지계, 선정, 인욕, 지혜)까지 행해서 한다면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아 가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 참선을 하면 더욱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을수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열심히 정진하셔서 성불하시길 바랍니다.
장시간에 걸친 질문에도 힘든 내색 보이지 않으신 정인옥 법사님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2012/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