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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사진 한 장
여 정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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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는 새벽에 일어나 눈을 비비며 베란다 커튼을 걷었다. 유리창 앞에 바짝 다가서서 아파트 단지 곳곳에 무덤처럼 쌓인 눈과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하늘을 원망하듯 말했다.
“이젠 그만 좀 왔으면 좋겠다.”
전국 농어 물 유통이 마비되어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고 있다고 뉴스에서 전했다. 또한, 혹한기에 며칠째 내린 폭설로 노숙자 서너 명이 동사했다고도 했다, 인도나 차도를 막론하고 쌓인 눈은 대형 유리를 깔아놓은 듯 반질반질했다. 길을 지나는 사람은 코트 깃을 세우고 자동차는 체인을 채우고도 거북이걸음을 하다가 미끄러져 추돌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아침 일찍 박 총무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도 눈 내리는데 기분전환도 할 겸 우리가 잘 가는 인사동 녹두전 집에서 오후 6시에 만나 소주 놓고 잡담이나 하자고 했다. 나도 술 생각이 나던 터라 좋다고 말했다.
집에서 인사동까지는 사십 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지만, 길이 미끄러워 일찍 아파트를 나섰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자 인도와 찻길은 매우 한산했다. 찻길이나 인도나 마찬가지로 곳곳이 결빙되어 반질반질했다. 전철을 타고 종각역에서 내려 조계사 길을 택했다. 큰길에는 염화칼슘이나 방설 모래를 뿌려 덜 미끄러웠지만, 골목길은 음지라서 결빙상태가 더욱 심했다. 넘어질 때를 대비하여 무릎은 조금 꾸부리고, 허리는 굽이고, 엉덩이는 뒤로 빼고, 양손을 벌려 비실이 거름으로 남의 집 벽을 의지하고 걸어야만 했다. 그때 뒤에서 보던 젊은 여자가.
“호호~ 아저씨 걷는 모습이 코미디언 배 삼 어어.”
어어 소리와 동시에 꽈당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엉거주춤 담을 집고서 뒤돌아봤다. 젊은 부인은 대짜로 드러누워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다. 나는 살금살금 기다시피 하여 그녀에게 닦아가 뒤에서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일으켜 줬다.
녹두전 집 문 앞에서 시계를 보니 늦지는 않았다. 문을 슬쩍 밀치자 온기가 훅하고 얼굴을 덮쳐왔다. 실내는 안개가 낀 것처럼 어둠침침했다. 온풍기에서 풍겨 나온 습기가 안경에 서려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문 옆으로 비켜섰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닿아 썼다. 홀 안은 술꾼으로 가득했다. 더구나 담배 연기로 목이 칼칼해 왔다. 뒤돌아 나가고 싶은 생각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때 박 총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야”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에 없던 벽화가 보였다. 초가지붕 위에 누렇게 익은 박들이 뒹굴고 있는 그림은 커다란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그 풍경은 농가 분위기를 연출해. 술맛을 돋우는 모양이다. 친구들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손짓했다. 식탁에는 녹두전과 소주병이 놓여있었다.
“야! 백수들이, 벌써 세 병이나 깠어.”
“어서 이리 앉아.” 박 총무가 말했다.
. 실지로 우리는 백수건달들이었다. 정년퇴직하고 연금으로 살아가는 노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백수라고 부른다. 우리는 항상 술좌석에서 하는 구호가 있다. 술잔을 높게 들면 박 총무가 “우리 백수들은” 선창을 하면 나머지 사람은 “건강을 지키자.”라고 했다. 그리고 짜릿한 첫 잔이 식도를 타고 위장에 안착하기도 전에 도우미 아줌마가 내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저쪽 창가에 계신 분이 선생님을 뵙자는 군요.”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박 총무가 너는 도우미 아줌마와 언제부터 귓속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느냐고 농을 걸었다. 창가에는 노인 세 사람이 원탁에 둘러앉아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 백발 머리에 굵은 검은 테 안경을 착용한 노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 지며 오라고 손짓했다. 그들 중 낯익은 사람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만두고 다시 의자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그러자 그중 한 사람이 내게로 와서 말했다.
“중대장님께서 잠깐만 뵙자는 데요.”
불쾌한 표정을 짓고 심부름 온 노인에게 말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니 할 말이 있으면 본인이 직접 오라고 하시오,”
“죄송합니다. 그분이 여기 오실 형편이 못 됩니다.”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굴려 위험을 주며 말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오.”
옆자리 친구는 혹시 너하고 관계있는 사람인지 모르니 가보라며 등을 밀었다. 또 한 친구는 오늘 너는 임자 만났어.라고 농담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자가 큰소리로 유영기라고 불렀다. 그자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 풍겨왔다.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낯익은 얼굴이었다. 며칠 전 서재에서 본 빛바랜 까까머리 사진 속 김정부의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갑기도 하고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어기적거리며 옮기던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빠르게 보폭을 넓혀 그자에게 다가갔다.
정부는 눈시울을 적시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앉아있는 친구의 넓은 가슴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이 뛰는 순간 그동안 세월의 뒤안길에서 빛바래 사라졌던 우정은 다시금 뜨거운 용수처럼 분출되어 눈물로 변해 뜨겁게 흘러나왔다. 오감으로 느끼며 관능적인 피부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포옹한 자세로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의자를 끌어다 놓으며 앉으라고 했다. 의자에 앉으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에 정부의 두 다리가 없는 몸뚱이만 전동휠체어에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입을 벌린 체 그의 넓적다리 없는 골반을 더듬었다. 친구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린 못 만났군.”
“그래, 오십 년 동안이나 못 만났지.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나, 며칠 전 서재를 정리하다가,”
서재를 정리하다 본 사진 이야기를 하려다 멈칫했다. 지금쯤 까맣게 잊고 있을지도 모르는 과거를 돌이켜 친구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친구는 물어왔다.
“며칠 전 서재를 치우다 어떻게 됐는데.”
“아니. 내가 딴생각을 했어.”
정부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박 총무는 말했다.
“오십 년 만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어!”
“우리 걱정을 말고 그 친구와 이야기해 우리는 마실 테니까!”
정부는 가정 형편상 사관학교를 지원했으나 떨어졌다. 그래서 육군보병학교를 지원했다. 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최전방에서 수색대 소대장를 지냈다. 첫 외출에 우리 집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아버지 사업이 잘되지 않아서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한 후였다.
정부는 소대장으로 근무할 무렵 한국군이 월남에 파병되기 시작했다. 월남에서 근무하면 진급이 빨리 된다는 말에 월남을 지원했다고 했다.
월남에 파병되어 소대장과 부 중대장을 거치며 수차례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항상 신은 자기편에서 자기를 지켜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훈장도 받았다며 자랑처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울음서긴 목소리로 말했다.
“월남전 4년 동안 부하도 몇 명 잃었어.”
귀국 특명을 받고 후임 중대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후임이 사령부에 도착하면서 말라리아에 걸려 야전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중대 작전이 하달되어 할 수 없이 야간 수색에 참여했다. 두 남자 중에 한 남자가 우리가 말하는 데에 끼어들었다.
“제가 중대장님 무전병으로 2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소주를 손수 맥주잔에 따라 마시고 녹두전을 한입 가득 담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때 중대장님은 소령으로 갓 진급했습니다. 내일 모래면 귀국하시는데 몸을 아끼세요? 했지만,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해.”라고 말씀하시며 직접 군장을 꾸렸죠.“
정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어금니를 꽉 물고 있었다. 그는 정부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 말을 이어갔다.
“중대장님은 소대장과 선임하사를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중대장님께서 지휘봉으로 상황판 위에다 좌표를 찍어가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수색은 위험한 지역이다. 무전병은 무전기를 가청주파수로 놓고, 개인 간 거리는 열 보를 유지한다. 상황판 위에 그림을 그리며 자세하게 살필 곳을 병사들에게 알리도록 하고, 라이터와 담배는 지참할 수 없다. 이상.”
초저녁 어둑어둑한 시각에 진지를 지키는 병력만 남고 출발 소리에 부대원은 발소리마저 죽여 가며 발을 옮겼다. 중대장과 무전병은 중앙에 위치했다. 선임 병사를 천병으로 하여 정글 속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둡고 높은 하늘은 반짝이는 별들만의 놀이터였다. 별똥별은 소리 없이 긴 꼬리를 끌며 산 너머로 날아가곤 했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는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우리가 풀을 밟는 순간 풀이 아스러지는 소리에도 소름이 끼치며 머리칼이 곤두섰다. 두려움에 숨이 고르지 않아 가슴도 답답했다. 한발 한발 발을 옮겨 좌표를 찍으며 앞으로 나갔다. 달은 없었으나 쏟아지는 별빛은 사물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풀숲에 잠들어있던 풀벌레들이 놀라서 소리쳐 울기 시작했다.
부대를 출발한 지 약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중대장 뒤를 따라오던 숙달되지 못한 병사는 긴장을 풀고 수칙을 어기며 발을 옮겨놓다가 베트콩이 설치해놓은 부비트랩 선을 건드렸다. 꽈 꽝 하는 폭음 소리가 연이어 울리면서 비릿한 냄새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저와 함께 자빠진 중대장님은 일어서려다가 쿵 소리를 내며 앞으로 넘어지면서 “사주경계”라고 조용히 명령했습니다. 중대장님의 양다리가 안 보이더군요. 저도 왼쪽 발목이 날아갔고요. 대대에 무전을 했죠. 대대장은 중대장 다리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헬기가 도작 전에 찾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소주를 따라 마시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을 이어갔다.
“대대에서는 없어진 다리를 찾으라고 명령하고 중대장님은 병사를 희생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시 술잔을 채우고 목마른 사람처럼 꿀꺽거리며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찾을 가망은 0%였죠”
친구는 꽉 다문 입술 꼬리를 왼쪽으로 당기고 한참 후에 말했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양쪽 다리는 아마 들짐승들의 한 끼 식사는 족히 됐을 걸”
그들은 이동외과병원을 거쳐 귀국해 육군 수도 병원에서 함께 일 년 동안 입원해 있다가 제대했다.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역시 책임감 있는 군인으로서 그놈의 배짱은 알아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같으면 두 다리 아니라 발가락이 하나라도 날아갔다면 기절을 했을 텐데, 대담하게 일어서려고 했다는 말에 놀랐다.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자식은 몇이나 두었어?”
“아들 하나 결혼해서 살림을 내줬지.”
“자네는?”
자네는 하고 묻고는 후회했다. 우리가 평상시처럼 인사치레로 한 말이지만, 저런 상이군인에게 여자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부는 말했다.
“우리 대한민국 여자들은 생각이 달라.”
“무슨 생각이?”
“내 몸이 이 꼴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여자가 시집와서 아들과 딸을 낳아주고 남편을 하늘같이 여기며 잘 돌봐주는 여자가 있어.”
이른 시간에 우리 부부가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까지 했다. 친구는 잠바 윗주머니에서 명함지갑을 꺼내 명함을 나에게 건너 주었다.
‘날개 의상 대표 김정부’ 나는 정년퇴직하고 명함이 없다고 말했다. 대신에 친구 휴대전화기에 내가 직접 전화번호를 입력해주었다. 정부는 휴대전화기를 받으며 말했다.
“너에게 진 빚을 갚도록 해달라고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한 보람이 있어 오늘 우리가 만났지.”
오늘 길이 미끄러워 외출을 안 하려고 했는데 이 친구들이 옛 중대장인 나를 지방에서 일부러 보러왔기 때문에 나왔다고 했다. 이 친구 덕분에 꿈에도 잊지 못할 자네를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친구는 다시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뺨에 대고 비비기도 했다.
“소위로 임관하고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어.”
“그랬어.”
“평생 잊지 않고 살겠다며 봉투를 드렸더니 화를 내시더군.”
“웬 봉투를?”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며 담임선생님께서 내 월사금을 내주셨거든.”
“그랬어, 처음 듣는 이야긴데!”
정부는 코감기가 걸린 사람처럼 콧물을 훌쩍거렸다.
“나는 퇴원 후 군 정복에 훈장을 달고 휠체어를 타고서 학교에 찾아갔어, 담임선생님은 삼 년 전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데. 고등학교 행정반에다. 친구 몇 사람 이름을 대면서 주소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지. 행정반 직원은 딱 잘라서 말하더군, 알 수도 없지만, 알아도 알려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어.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지. 그래도 몇 번을 더 찾아갔어. 나중에는 교장실로 직접 들어갔지. 자네 주소는 옛날 주소로 남아 있더군, 그 후부터는 포기하고 냉가슴만 앓고 있었지. 뜻하지 않게도 오늘 이 집에서 학의 머리처럼 하얗게 변한 자네의 머리를 보고 한참을 망설였어,”
“왜?”
“혹시 자네가 내 꼴을 보고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에.”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자네를 찾아 시골에 갔었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동생은 보육원에 보내졌다고 그 집 할머니가 말했어. 자네한테는 전연 연락이 없다고 하더군.”
“친척이긴 했지만, 남만도 못한 사람들이었어.”
“동생은 찾아봤니?”
“응, 우리 삼 형제가 함께 살고 있어.”
“잘했다.”
정부는 눈이 쏟아지는 밖을 한참 동안 내다보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나는 제대하고 방을 구하러 다녔지만, 방을 구할 수가 없었어, 하반신 불구를 보고 사람들은 무서워서 방을 주지 않았어. 다행히 장애인 가족이 사는 집에 방을 얻었지. 정부 지원을 받아 작은 공장에 재봉틀 수십 대를 들여놓았지. 동네 사람들을 교육 일을 시작했더니 자기 일처럼 일해 그럭저럭 잘 되고 있어. 자네 친구들이 흉보지 않을까?”
“야! 나는 네가 자랑스럽게 보인다. 세계에 대한민국 이름을 날린 월남전에서 당한 부상인데 넌 정말 멋진 친구야.”
친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며 내 손을 꽉 잡고 역시 너는 변함없는 내 친구라고 했다. 그때 친구의 휴대폰 전화가 울렸다.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눈이 많이 내려서 장애인 차를 불렀어. 장애인 차가 왔으니 이만 헤어져야겠네. 돌아오는 수요일 6시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 시간 있지?”
“시간 없어도 만나야지,”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정부는 손을 흔들며 놔두게 내가 계산할 테니 하고 소리쳤으나 그들은 못 들은척하며 계산했다. 정부는 전동휠체어를 슬슬 움직여 의자를 피해 문까지 나왔다. 그들은 내게 인사했다.
“오늘 실례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잃었던 친구를 찾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거수경례하고 정부의 휠체어 뒤를 따라갔다. 정부가 말했다.
“길이 미끄러우니 술 조금만 해.”
검은색 벙어리장갑을 낀 손을 흔들고 전동 휠체어를 몰고 문을 나섰다. 나는 뒤따르면서 소리쳤다.
“빙판길 조심하고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알았지!”
친구는 손을 흔들며 휠체어 바퀴 자국을 남기며 골목길 모퉁이를 돌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전동 휠체어 바퀴 자국을 한 참 동안 쳐다보며 생각했다. 꼭 우리가 평행선을 마주하며 달려온 세월을 보는듯했다.
친구들은 그동안 거나하게 취해있었다. 나는 김정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열심히 설명하면서 참으로 자랑스러운 친구라고 말했다. 또한, 친구들도 내 말에 동의했다. 총무가 말했다.
“그네들이 월남에서 목숨 걸고 싸웠기 때문에 나라 경제가 이만큼 커지고 지구 끝까지 대한민국의 이름을 알리게 된 거야.”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면 안 돼.” 말이 없던 창덕이가 한마디 했다.
우리는 거나하게 취해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이차는 생맥줏집으로 들어갔다.
친구들과 지구를 반대편으로 돌릴 정도로 술을 마셨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김정부를 만난 것은 우연치고는 묘한 우연이었다. 며칠 전 큰마음 먹고 서재를 정리하다가 고등학교 시절 정부로부터 빌려온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가 지은 소설책이 나왔다. 책갈피 사이에 끼어있는 누렇게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과 노랑 메모지에 또박또박 여자아이처럼 쓴 메모지도 나왔다. 정부가 간단하게 “꼭 찾아올게” 앞날을 예측하지 못 하는 인사말과 내가 사진 뒷면에 검정 볼펜으로 쓴 ☀19☓☓ 년. ☓ 월. ☓ 일. 청평 강가에서 김정부와 함께☀ 누렇게 변한 흑백 사진. 사진 속에는 물을 잔뜩 먹은 하얀 삼각팬티가 누렇게 변색해 팬티에서 맑은 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김정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익살맞게 웃고 있었다. 졸업식 날 내 바지 주머니에 넣어주며.
“집에서 아무도 없을 때 읽어봐.”
억지로 미소 띤 얼굴로 준 메모지였다. 지금 생각하니 빛바랜 사진은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예시처럼 느껴졌다.
서울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가평으로 전근을 가면서 가족이 아버지를 따라 경찰서 관사로 이주했다. 정부는 서울에 남아서 자취했다.
여름방학에 정부를 따라 청평 강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항상 싱글벙글 웃으며 익살스럽게 웃기던 친구였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접어들어 첫 수업을 하는 날에 정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첫 주 내내 그 친구는 소식이 없었다. 담임선생님도 영문을 몰라 오히려 우리에게 정부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일요일 무작정 시외버스를 타고 청평 경찰서를 찾아갔다. 경찰을 붙잡고 정부 이야기를 했다. 정부 아버지 존함을 몰라 어물거리 물었다.
“서울서 얼마 전 이리로 오셨는데.”
“경찰서 뒷길로 가면 관사가 있다. 거기서 물어봐라.”
경찰서를 나와. 돌담 모퉁이를 끼고 돌다가 정부를 만났다. 정부는 깜짝 놀라.
“네가 어떻게? 여길.”
정부는 말없이 앞장서서 돌담을 넘어 강을 향해 백사장을 걸어갔다. 모래는 햇빛에 반짝 반짝 빛났다. 잠시 후에는 햇빛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열기는 대단하여 꼭 화덕 불 앞에 앉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모래밭을 맨발로 뛰었다. 모래 역시 불판을 받는 듯했다. 정부는 강물로 첨벙첨벙 물소리를 내며 들어갔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무릎까지 차는 곳에서 멈추어서며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있고, 목소리는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묵직했다.
“일 개월 전, 아버지가 야간 순찰 중에 요 앞 삼거리에서 미군용 트럭과 추돌했어, 병원으로 이송 도중 돌아가셨어. 그래서 장례를 치르느라고 학교에 연락 못 했어.”
강 건너엔 야트막한 둔덕길이 보였다. 원두막도 한 체가 있었다. 원두막에는 노인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지 동백 아가씨 노랫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원두막 바로 밑 강에는 물장구치며 노는 얘들도 보였다.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
“왜?”
정부의 눈동자는 붉은 핏발이 솟아있고, 두 눈두덩은 퉁퉁 부어올라 꼭 두꺼비 눈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꼬대하듯 “왜? 왜?” 소리만 하며 친구의 푸석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말은 관사를 비워 주어야 하는데, 어머니와 어린 두 남동생이 갈 집이 없다고 했다. 자기가 하숙하는 집으로 식구를 데리고 들어갈 수도 없어 더욱 막막하다고 했다. 더구나 어머니는 심장병과 기관지 천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다. 차라리 지금 심정은 가족이 함께 죽고 싶다며 흐느껴 울었다. 나는 정부의 어깨를 잡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어,”
“잠깐 기다려 집에 가서 카메라 가지고 올게.”
정부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누렇게 변한 사진은 그때 놀러 온 사람에게 부탁하여 찍었던 사진이다.
나는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떻게 하면 친구를 도와줄 수가 있을까 하고 궁리를 해보았지만, 내 힘으론 도와줄 아무런 힘이 없었다.
다음 날 교무실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정부의 사정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가만히 듣고 만 계시다가 알겠다. 교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이 주가 지나서 정부가 학교에 나왔다. 반 친구들에게 걱정을 끼쳐 대단히 미안하다면서 담임선생님이 지난 일요일 청평에 찾아오셨다고 했다.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고등학교 중퇴하면 아무짝에도 못쓴다면서 학비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원주에서 농사짓는 큰아버지 댁으로 갔고, 큰아버지가 하숙비는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 손을 잡고 모든 것이 잘될 테니 너는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점심시간이면 학교 뒷산으로 슬그머니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남들이 교실에서 도시락을 먹는 것을 보고 피하는 눈치였다. 어머니께 도시락 세 개를 싸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세 개씩이나 싸 가느냐고 말씀하셨다. 저녁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도시락 두 개와 간식비로 몇 푼을 주셨다.
점심 도시락은 친구들 몰래 정부한테 건네주곤 했다. 학교 교문을 나서면서 우리 둘이 구립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간식 때문에 가기 싫은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늦은 밤 도서관에서 나와 우리는 재래시장에서 국수를 사서 먹거나 찐빵을 사 먹기도 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나 때문에 도서관에 다니는 것 다 알고 있어, 고맙다. 이다음에 내가 너에게 신세 진 것, 갚아줄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쑥스럽고 계면쩍어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야 친구끼리 그런 말 하는 것 아니야.”
시간을 보내려고 도서관에 다니다 보니 공부에 흥미가 붙게 되었다. 덕분에 반에서 하위에 머물던 나는 상위에 속했다. 정부는 일반 대학은 갈 수 없다며 돈이 안 드는 사관학교를 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이과 지망을 했고, 정부는 공군사관학교를 지망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졸업식장에서 정부는 내 주머니에 쪽지를 넣어주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사람에게 정부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친구도 대단하지만, 친구 아내가 더 대단한 사람이라며 꼭 친구 부부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맛있게 칼국수 대접할 테니 집으로 모셔오라고 했다. 나는 겨우 칼국수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우리 집 칼국수를 맛본 사람은 칭찬이 대단하다. 언제 또 먹을 수 있느냐는 인사를 받곤 했다.
집사람이 정부 아내가 더 대단하다는 말의 뜻을 되새기면서 생각해봤다. 양다리가 없는 남자를 가슴에 품고 잠을 잔다고 생각했을 때, 말의 뜻을 이해했다. 한쪽도 아니고 양쪽 골반이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사람을 사우나에서 함께 목욕한다고 가정해본다면 남자들도 그런 사람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나 역시 외면을 안 하겠다고 장담은 할 수가 없었다.
김정부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 아침 기온은 -20도로 기온이 뚝 떨어지고 하늘은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집을 나서려고 거실을 통해 밖의 동정을 살폈다. 하늘에서 목화송이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새 깃털처럼 가볍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올겨울은 예년보다 더 춥고 눈도 많이 온다며 짜증스러움에 혼자서 중얼거렸다. 귀가 밝은 아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추듯이 말했다.
“뉴스에서 들었는데요. 올겨울 들어 동사한 사람이 몇인 줄 아세요. 또한, 산짐승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을 다치게 한데요.”
아내의 말에 미소로 답해줬다. 아내의 따듯한 손을 잡고 현관을 나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행복감을 느꼈다.
“술 조금 하시고, 안주발만 받으세요.”
아내의 안주발이란 안주를 많이 먹고 술은 조금 마시라는 의미였다. 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입에다 붓는 내 습성을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매번 술친구를 만나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나가지만 술 마시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나에게 아내는 다시 젓가락으로 안주를 먹는 흉내를 냈다. 아내가 하는 짓이 너무나 귀여워 꼭 끌어안아 줬다.
길에 쌓인 눈은 구두 목까지 파묻혔다. 어정쩡하게 걷다가 엉덩방아 찧는 사람을 볼 때면 “어이 구 저런” 소리를 내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넘어졌다가 쩔쩔매며 일어나는 것이 우습게 보였다. 나는 넘어져도 덜 다치겠다는 마음으로 양팔을 약간 벌리고 더듬거렸다.
정부와 약속한 장소에 일찍 서둘러 왔더니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술집에는 몇 사람이 앉아 담배를 열심히 피워대는 덕분에 홀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도우미 아가씨가 큰 컵에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뜨끈한 엽차를 부어 놓고 주문받을 양으로 내 얼굴만 쳐다보고 서 있었다. 나는 농을 걸었다.
“아가씨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뚫어지게 쳐다보게.”
“선생님, 정말 미남이시네요. 사모님 좋으시겠습니다. 주문은 뭐로 할까요?”
도우미 아가씨에게 한 대 맞은 꼴이 되었다. 손님이 오면 주문하겠다고 했다. 사십 분이 지났다. 퇴근 시간이 넘으니 홀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기가 불편해 소주와 모둠 녹두전을 시켜놓고 홀짝거리며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길게 내밀어 눈동자의 조리개를 최대한 좁혔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눈도장을 찍었다. 이 사람은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나중에는 아는 사람 아무나 와도 좋다고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며 소주 두 병을 마셨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약속 날짜를 잘 못 기억했나 싶어서 수첩을 꺼내 보았다. 틀림없이 수요일 6시로 기록이 되어있었다. 정부가 준 명함을 찾아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첩 주머니를 뒤졌으나 명함은 없었다. 그 날 입었던 잠바 주머니에 넣어놓고 잊어버리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것을 깨달았다. 아내에게 전화했다. 지난번에 입었던 주머니에 있잖아. 정부명함이 있으니 휴대전화 번호를 불러달라고 했다.
술에 취하면 특이하게 ‘있잖아.’ 말을 잘하는 특유의 내 습성을 알고 있는 아내는 친구도 못 만났다면서 벌써 술에 취했냐고 핀잔을 주었다. 두 시간이 지나서 나는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받지 않는 전화기에 대고 빈말을 해댔다.
“싱거운 자식 만나기 싫으면 애초에 약속하지 말든지, 아니면 아는 척하질 말든지, 괘씸한 놈 전화도 받지 않는 치사한 놈.”
나는 홧김에 소주를 더 달라고 했다. 도우미 아가씨는 혼자서 세 병을 잡수셨으니 그만 마시라고 했다. 사정사정해서 한 병을 받아놓고 또 한 시간을 기다렸다. 쭈그리고 앉아 세 시간을 기다리다 지쳐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끗한 내 입에서 “개자식” 소리가 나왔다.
“내가 고등학교 일 년 반 동안 도시락 싸다 받치며, 저녁 간식을 나눠 먹고 배가 고파도 어머니에게 밥 달라는 말을 못 하고 잠을 자곤 했는데, 자기가 뭐가 잘 났다고 나를 바람을 맞혀, 개자식 같으니라고.”
비척거리며 술집 문을 나오다가 엉덩방아를 쪘다. 술집 아가씨가 팔짱을 끼고 큰길까지 나와 택시를 잡아줬다.
“아가씨 고마워. 복 받을 거야.”
“조심해가세요.”
술에 완전히 꼭지가 돌아 몇 시에 집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옷도 입은 채로 아내 옆에서 새우잠을 잤다. 아내는 코미디언처럼 침대에 누워 손발을 휘적거리며 대사까지 겹 들였다.
“양쪽 다리가 없어 전동 휠체어를 타고 오십 년 만에 나타난 네놈이 잘났다. 너 마음씨가 그 모양이니 팔자가 그렇게 기구하지, 이 상종을 못 할 놈아.”
정말 친구로부터 배신감을 느껴 밤새도록 뒤적거리며 꿈속에서조차 분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 잠꼬대한 모양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자면서 못된 악담을 늘어놓은 것으로 보아 당신 화가 대단히 나셨군요. 아침 잡수시고 친구에게 다시 전화해보세요.”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엉덩이가 쑤시고 고통스러웠다. 아내 눈이 토끼 눈처럼 동그랗게 변하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어제 취중에 넘어졌다고 말했다.
“엎드려보세요.”
아내의 명령에 침대에 넓적 엎드렸다. 아내는 팬티를 종아리까지 잡아 내렸다.
“아니, 창피하게 뭐하는 짓이야.”
“누가 본다고 창피해요. 어이구! 시꺼먼 멍이 당신 손바닥만 해 병원에 가야 하는 것 아닌지 몰라.”
“병원은 무슨 병원 이게 다 친구 때문이야.”
아내 하는 말이 그분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덧붙여 말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제 놈이 나를 보고 싶으면 연락하겠지 하면서도 다시 연락할 마음도 생겼다.
아침을 먹고 울적한 기분을 전환할 겸해서 산이나 가자고 했다. 등산화에 아이젠을 덧신고 아내를 앞세우고 아파트 뒷산의 아담한 능선에 올랐다. 우리는 매번 쉬는 장소가 지정되어 있었다. 오늘은 엉덩이가 아파서 중간 지점에 앉아 쉬었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서 가지고 온 간식을 먹으며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높고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시내를 감싸고 있고. 시내는 길은 복잡하게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높고 낮은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눈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형극을 보는듯했다. 우리 부부 앞을 지나는 넉살이 좋은 사람들은 빙긋이 웃으며.
“보기 좋습니다.”
“즐거운 하루가 되세요.”
검질긴 사람은 같이 먹으면 안 될까요? 농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집사람은 상긋한 미소를 보내곤 했다. 산은 하얀 눈으로 덮였고 나뭇잎이 없는 앙상한 나무들은 잔바람에도 바르르 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맑은 공기에 기분이 전환되어 친구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왠지 마음은 점점 나쁜 쪽으로 흘러갔다.
“혹시 이놈이 잘 못 된 건 아닐까?”
산을 오를 때마다 그랬듯이 365m 정상 거북바위에 걸터앉았다. 집사람은 매번 여린 목소리로 구수하게 이야기하는 아내를 부드럽게 쳐다보곤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나는 친구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어 아내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눈은 초점을 잃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다.
“여보, 오늘 이야기 재미없어.”
“응, 아니.”
“아니면 아니지, 응, 아니라니 그런 대답이 어디에 있어요.”
“미안해 왠지 마음이 불안해서.”
그렇게 속 썩이지 말고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전화해보라고 했지만,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전화 걸기를 거부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도 전화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넣기를 반복했다. 중간지점 쉼터에 앉아 집사람이 전화기를 달라고 했다. 나는 남의 일에 신경 끊으라고 말은 하면서도 전화기를 주었다.
“여기에 이름이 메모리 되어있어요.”
“응, 김정부.”
아내는 메모리에서 김정부를 확인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계속 가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몇 번을 되풀이해서 전화를 거는 집사람 손에서 전화기를 가로챘다. 갑자기 발광이 솟아 등산화로 돌을 걷어차기도 하고 침을 퉤퉤 하며 뱉기도 했다. 돌출적인 행동이 못마땅한 아내는 얼굴을 찡그리며 주위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면서 그렇게 언짢은 기분이 계속되면 혈압이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밖에서 점심을 곁들여 간단히 소주 한잔하세요. 그럼 마음이 가라앉을 테니.”
나를 위로하려는 아내가 고마워 못 이기는 척하고 곰탕을 먹자고 했다.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재래시장이 있고, 시장 중간 지점에 옛날 곰탕 전문 집이 있다. 그 집 깍두기 맛은 일품이었다. 다른 집에서 흉내를 못 낸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갈만하다. 소주와 곰탕 두 그릇을 주문하며 특별히 깍두기 국물 한 그릇 달라고 했다. 무에서 우러난 국물은 달착지근하고 맛이 있다. 주인장은 깍두기 국물이 소화를 촉진한다고 말했다, 소주가 먼저 나왔다. 급한 김에 깍두기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집사람은 소주 반 잔에 뺨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집에 돌아오자 곧바로 침대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 나 누워있을게”
“그래 푹 자요.”
나는 서재로 들어왔다. 읽던 책을 집어 들었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오징어채와 양주병을 들고 서재로 돌아왔다. 책상머리에 서서 양주 한잔을 단번에 마셨다. 나는 빛바랜 사진은 다시 안 보려고 했지만, 손은 그 사진을 찾고 있었다. 사진을 꺼내 들고 치사한 세상에 너도 물들었구나. 옛 친구인 나를 다른 사람하고 똑같이 취급하면 안 돼지라고 중얼거렸다. 전화기 전원을 켜고 통화버튼을 눌렸다. 신호음이 몇 번 울렸다. 역시 마찬가지도 응답이 없었다. 전화기를 책상 위에 휙 집어 던졌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빠른 동작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고 통화버튼을 눌렸다. 수화기에서 “여보세요” 하는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다급하게 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이 전화는 김정부 님 전화입니다.”
“정부!”
너무나 반가웠다. 정부를 바꾸라고 했다. 수화기에서 잠깐 숨소리만 들렸다.
“제가 김정부 큰아들입니다. 유영기 아저씨죠, 아버지가 신세를 많이 졌던 친구를 우연히 인사동 술집에서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아버지를 바꿔줘.”
그리고 몇 초간 정적이 흐르고 훌쩍이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아버지 바꿔.”
나는 명령조로 딱딱하게 말했다. 아들은 훌쩍이면서 말했다.
“어제 새벽에 공장에서 급한 일이 생겼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는 공장에 가시다가 전동 휠체어가 빙판에 미끄러지며 머리를 다쳤습니다. B 병원응급실로 실려 갔으나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다."
"‧‧‧‧‧‧."
나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서 있다가 오금이 오므라들어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전화기를 책상 위에 놓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때 서재로 들어온 집사람이 전화기에서 말소리가 들리는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느냐고 했다. 그때야 정신이 들어 전화기를 귀에다 대고 말했다.
“어느 병원이냐?”
“B 병원 장례식장입니다.”
“알았다.”
빛바랜 사진을 들고 책상에 걸터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집사람은 뭔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김정부가 죽었데.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어 오십 년 만에 불쑥 얼굴을 내밀어 잠시 보여주고 떠나다니, 김정부 자네에게 할 말이 너무 많이 쌓여있는데. 한마디도 못 했잖아. 이 바보 같은 놈아.”
저승이라도 쫓아가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사람보고 함께 조문을 가자고 했다 대단한 친구 부인을 보고 싶다며 따라가겠다고 했다.
집사람과 함께 조문을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는 어린이 대공원을 지나 천호동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택시가 워커힐 언덕에 올라서자 자동차 정면으로 아름다운 천호 대교가 보였다. 천호대교는 사진으로 보았던 것보다 실물이 보기 좋았다. 대교 위에 택시가 올라서자 우측으로 올림픽 대교도 보였다. 시원스럽게 만들어놓은 둔치를 양쪽에 두고 한강 물은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택시는 천호대교를 건너 길동을 지나서 곧바로 B 병원 장례식장 앞에 멈추었다.
영안실에는 몇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육군 정복 견장엔 중령 계급장이 가슴엔 훈장이 달려있다.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군기가 잔뜩 들어있는 눈동자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찍은 영정사진에서 정부의 두 눈동자는 반짝이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영정 아래는 대통령 표창과 월남전에서 받은 훈장들이 용맹했던 과거를 증명하듯이 번쩍였다. 영정에 향을 올리고 명복을 비는 묵념을 했다. 정부 아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리며.
“당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친구 부부가 오셨어. 여보 말 좀 해봐요.”
통곡하는 정부 아내를 지켜보는 우리 부부 마음도 고통스러웠다. 큰아들은 우는 어머니를 말렸다. 나는 정부 아들에게 말했다.
“어머님을 놔두게. 슬픔도 아빠를 사랑했기 때문에 느끼는 걸세.”
상주 큰아들 작은아들과 부인을 마주 보고 앉았다. 아들은 정부 얼굴을 빼다 박은 듯해 보였다. 집사람은 부인을 이모저모 뜯어보는 눈치였다. 정부 부인은 훤칠한 키에 날씬한 몸매 피부는 가무잡잡하고 곱상하지만, 전체적으로 날카롭게 생긴 듯 보였다. 굳게 다문 입은 좀처럼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굳은 표정의 얼굴에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은 두꺼비 눈 모양 퉁퉁 부어있었고 목소리는 갈라져 쉰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고인과 고등학교 친구 유영기입니다. 이쪽은 제 집사람입니다.”
“사모님 추운 날씨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말했다.
“아빠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매일 도시락 싸다 주고, 간식비를 타다가 둘이서 찐빵으로 저녁을 대신해 먹었다는 말을 결혼 초에 들었습니다. 죽기 전에 꼭 만나서 신세를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인 말을 들으며 이틀 동안 친구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움찔하고 있는데 집사람은 채근하듯 나를 쳐다봤다. 부인은 울면서 말했다.
“남편은 친구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친구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지만, 어쩌다 술을 마시면 선생님 존함을 말하곤 했습니다. 그분은 친척도 별로 없습니다.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도 아닌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억울하게 세상을 살아오신 분입니다. 상이군인이라고 사람들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때면 그분은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분은 평생을 외롭게 살았습니다. 선생님을 만난 그 날 저녁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친구가 있어, 친구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야지.”
나는 부인의 말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대한민국에서 어깨를 활짝 펴 보지도 못하고, 상이용사로 살아온 고통으로 친구는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살아왔을까.
“장지는?”
남편은 국가 유공자이기 때문에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다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일 다시 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집사람과 장례식장을 나왔다.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빛바랜 흑백 사진이었다. 무심코 집에서 들고나온 모양이었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땅에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평생 내 가슴에는 김정부와 살아온 정한이 서려 지워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집사람의 손을 꼭 잡고 B 병원 정문을 나서기 전 빛바랜 사진을 들고 장례예식장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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