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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조선책략'과 한국의 '4강 외교'
19세기 후반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이 패권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당시 청(淸)나라의 주일 참사관 황준헌(黃遵憲)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저술했다.
※ 황쭌셴 (黃遵憲 황준헌 중국 시인·정치가)
1848 중국 광둥 성[廣東省] 가응(嘉應 : 지금의 메이 현[梅縣])~1905. 3. 28 가응.
문학과 사회 개혁에 앞장섰다. 외교관시절에 일본·미국·영국을 다니면서 견문을 넓히고 시와 평론을 위한 자료를 모았다. 그러나 고향인 가응에서 일반인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여 그것을 시에 재현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나아가 민요의 어투와 리듬을 모방하여 자신의 시 가운데 용해시켰다. 이렇게 백화(白話)와 민요조의 어투를 사용함으로써 중국 시문학의 새 장을 열었다. 1897년 후난 성[湖南省] 안찰사(按察使) 대리가 되었을 때는 성 정부에 신정(新政)을 도입하는 등 사회개혁에도 힘썼다.
※ 조선책략(朝鮮策略)
[요약]
청국인 황준헌(黃遵憲)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 일본, 청국 등 동양 3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서술한 책.
[본문]
필사본 1책. 1876년 한일수호조규를 맺고 일본에 개항한 조선은 그해 5월 제1차 수신사로 김기수를 파견한데, 이어 1880년 3월 23일에는 제2차 수신사로 예조참의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김홍집은 일본에 약 1개월간 머무는 동안 국제정세 탐문 및 국제법과 관련하여 활동을 전개했는데, 그는 특히 청국 공관을 왕래하면서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 참찬관 황준헌(黃遵憲) 등과 외교정책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귀국하는 길에 황준헌이 지은 《사의조선책략 私擬朝鮮策略》을 얻어와 고종에게 바쳤다.
이 책은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조선의 외교정책이 핵심 내용이다. 즉 황준헌은 러시아가 이리처럼 탐욕하여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정벌에 힘써온 지 300여년 만에 드디어 조선까지 탐낸다고 하면서, 조선이 이를 방어하기 위한 책략은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여 자체의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황준헌은 중국과 친해야 하는 이유로 중국이 물질이나 형국에서 러시아를 능가하고, 조선은 천여 년 동안 중국의 번방(藩邦)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양국이 더욱 우호를 증대한다면 러시아가 중국이 무서워서도 감히 조선을 넘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은 조선이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이고, 과거부터 통교해 온 유일한 국가라고 설명한 후 조선과 일본 중 어느 한쪽이 땅을 잃으면 서로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보거상의(輔車相依)의 형세이기 때문에 서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비록 조선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남의 토지나 인민을 탐내지 않고, 남의 나라 정사에도 간여하지 않는 민주국가로서 오히려 약소국을 돕고자 하니 미국을 끌어들여 우방으로 해두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의 외교정책은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때에 공평한 조약을 맺는 것이 이득이 되는 것이며, 중동과 같이 위세에 눌려 조약을 맺게 되면 자주권과 이익을 탈취 당하게 되니 서둘러야 된다는 것도 강조하였다.
《조선책략》은 황준헌이 쓴 작은 책자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조선에 유입된 후 조선 조야의 반향은 상당히 컸다. 정부에서는 찬반 논의가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재야에서는 보수 유생들을 중심으로 거국적인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났다. 1880년 11월 7일 유원식(劉元植)의 척사상소를 비롯하여 1881년 2월에는 이만손(李晩孫)을 소두(疏頭)로 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는 전국의 척사 풍조를 자극하여 신사(辛巳) 척사상소운동을 선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당시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에게는 큰 영향을 주어 1880년대 이후 정부가 주도적으로 개방정책의 추진 및 서구문물을 수용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조선책략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金弘集)은 이 책을 고종(高宗)에게 바쳤다.
주요내용은 방(防)러시아,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국이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 우선 동남아 3국인 중국(淸), 한국, 일본이 수호(修好)하고, 이어 미국과 연합하고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틀렸다.
결과적으로 당시 조선의 적(敵)은 러시아가 아닌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일(淸·日)전쟁과 러·일전쟁, 미·일 간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과정을 거쳐 한민족의 비운인 한·일합방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비밀 조약이다. 이 협약은 당시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가 주최한 도쿄 비밀 회담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1905년 7월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를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와 비밀회담을 가지고 이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서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그 대가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조선에 대한 '보호 통치'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영일 동맹에 가담하여 극동 침략에서 미, 일, 영국이 공동 행동을 취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이 협약에 따라 미국은 일본이 조선 정부에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1910년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극비에 붙여져 있다가 1925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이 밀약에 따라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이 밀약과, 포츠머스 조약, 제2차 영·일 동맹을 계기로,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을 세계 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1905년7월27일, 미국 육군성(국방부의 전신) 장관인 윌리엄 태프트는 일본 도쿄를 방문해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과 장시간 회담을 했다. 1924년에야 그 내용과 실체가 알려진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 회담의 산물이다. 도대체 밀약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밀약과 관련해 어떤 점이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가.
우선, 1905년 7월의 동북아 국제정치 상황부터 살펴보자.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두 강대국이 벌인 일전이었다. 일본은 1905년 초,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러시아 점령하의 뤼순(旅順)을 함락시켰고, 3월에는 펑톈(奉天·지금의 선양)의 육전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그해 5월 동해상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러시아의 발틱함대까지 전멸시킴으로써 마침내 전쟁의 승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은 러시아는 물론, 일본 또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바닥난 상황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외교적 협상 구도를 미국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협조는 불가결했다. 우선 절실했던 것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관련 열강으로부터 확인받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일본에 대해 지지의사를 표명한 나라가 미국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배경에서 탄생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떤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점, 둘째 일본측의 일본-영국-미국 ‘비공식 동맹’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조약적 의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 셋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회담 내용의 일부는 1905년 10월 일본 신문 ‘고쿠민(國民)’ 지면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으나, 회담의 전체 내용은 1924년 미국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넷에 의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일 비밀조약(Theodore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전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밀약’이라는 표현은 데넷의 글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韓-比 맞교환 가능성은 낮아
데넷의 논문에는 회담 직후 태프트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이 실려 있는데, 전문에 나타난 회담 내용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 번째 사안이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문제와 관련해 가쓰라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이는 일본에 실로 중대한 문제”임을 밝혔다. 또한 그는 “만약 전쟁 이후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한국에 맡긴다면 한국은 또다시 다른 국가들과 협정이나 조약을 맺어 전쟁 이전과 같은 복잡한 상황을 재발시킬 것이므로 일본은 이러한 상황의 재발 가능성을 막기 위해 모종의 확실한(definite)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내세운 논리, 즉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
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태프트는 ‘모종의 확실한 조치’가 보호조약 체결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논리적 정당성’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면서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하게 요구하는 범위에서 일본 군대로써 한국에 대해 종주권(suzerainty)을 확립하는 것은 전쟁의 필연적 결과이며, 극동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 비밀협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쟁점을 던졌다. 첫째 이 협상 내용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quid pro quo)’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그것이 단순히 양국 고위관료간 의견교환 수준인지, 아니면 양국간 장래의 행동을 상호 약속하는 ‘협정(agreement)’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그 비밀협상이 한국-필리핀의 맞교환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약소국 문제를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전문의 내용상으로는 ‘A 대신 B’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더욱이 필리핀에 있어 미국의 입지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권 승인 요구는 외교적 흥정 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국의 인식은 그러했다.
일본은 한국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반군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던 점이 달랐다. 루스벨트 자신도 회담 3개월 후 태프트의 방일(訪日)이 외교적 흥정이었다는 소문이 일본 신문에 실리자 상당히 불쾌해하면서 미국은 “영토보전을 위해 누구의 지원이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가. 그것은 몇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루스벨트의 인종주의적 문명관과 친일론적 인식도 중요한 원인이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당시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시장이었다. 이미 1899년,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은 중국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해놓은 터였다. 즉 군사적 개입이라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문호개방 정책에 대해 일본은 외교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문호개방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 인식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일본의 대(對)러시아 전쟁을 “미국의 게임을 일본이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미국의 그러한 기대감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고 러시아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적대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미일 충돌의 원인(遠因)이 됐다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협정인가, 각서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양국간 법적 의무를 가진 협정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의견교환, 즉 각서로 볼 것인지는 다소 복잡한 문제다. 태프트 장관이 회담 직후 루스벨트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 회담의 성격을 ‘합의각서(agreed memorandum)’로 밝히고 있다.
만약 그것이 단순히 각서라면 미국은 아무런 법적 의무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해왔다. 법적 의무란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명기한, 우호적 중재(good office)와 관련한 체약국 의무를 의미한다. 게다가 태프트는 특히 한국 문제에 관한 그의 의견 표명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어떠한 지시도 받은 바 없으며, (외교문제에 관한 한) 태프트 자신이 어떤 직권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그의 의견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의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 자신이 육군성 장관이라 외교 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이 국무성 업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우려도 이 전문에 드러나 있다.
이 비밀협상을 단순히 각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회담 내용상의 표현, 그리고 구체적인 외교적 거래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논리의 근거로 내세운다.
루스벨트는 밀약에 동의했다
반면 이것이 실제로 협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중대성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이 비밀협상의 실질적 의미, 즉 일본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그 회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협상 이후 미국의 한국 정책이 어떻게 수행됐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국제정치적 중요성과 미국의 외교정책적 영역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문제에 대한 태프트의 발언에 대해 루스벨트는 “우리의 입장이 더는 그처럼 정확하게 언급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갖는 시기적 적절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외교정책 결정과정의 핵심이었다. 1903년 여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은 사실상 그가 주도했다. 그를 일컬어 ‘일인(一人) 국무성’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태프트는 회담에서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다. 그는 1905년 4월20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한 나는 강화조약의 일본측 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확인해준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 밀약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루스벨트 자신이 어떻게 인식했느냐 하는 문제다. 1905년 11월, 그의 친구이자 영국 외교관인 스프링 라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의 지시에 의해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회담에서 재차 강조한 것은, 구체적으로 영일동맹에서 명기하고 있고, 또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서 인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에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관한 국제적 승인이라는 점에서 제2차 영일동맹이나 포츠머스 조약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협정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약을 통해 그렇게 했듯, 루스벨트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핵심적 외교정책 결정자의 인식구도에는 그러한 등식이 성립돼 있었다.
아울러 루스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다.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이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 1910년 경술국치 직후 경복궁 근정전엔 일장기가 걸렸다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한미 양국관계에, 그리고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전기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올리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밀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다. 한국의 국제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1903년 친일 구도를 골격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이후 일본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 보여준 행동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그런 사실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마자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외교적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김기정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그로부터 120여 년이 지난 2008년 8~9월 이명박 대통령은,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인 미·일·중·러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소위 '실용주의적 4강 외교'를 전개했다.
미국과는 21세기 '전략적 동맹 관계'를, 일본과는 '성숙한 동반자 관계'를, 중국과 러시아와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특히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권고했던 '방(防)러시아'와는 반대로, 지난달 29일 한·러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양국 관계를 '포괄적 동반자 관계'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26건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 드미트리 아나톨리예비치 메드베데프(러시아어: Дми?трий Анато?льевич Медве?дев, 문화어: 드미뜨리 아나똘리예비치 메드베제브, 1965년 9월 14일 ~)
러시아의 제3대 대통령이며 2008년 5월 7일부터 임기가 시작되어 크렘린에 입주하였다.
[생애]
1965년 9월 14일에 레닌그라드의 한 대학 교수 가정에게 태어났다. 1987년에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 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졸업하였다. 2007년 12월 1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후계자로 지목하였고, 2008년에 실시된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70% 이상의 득표율로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그는 러시아 최대의 가스 회사인 가스프롬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신장이 162cm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 그는 젊은날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핑크 플로이드와 같은 록 밴드를 좋아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 한. 러 정상회담의 이명박 대통령과 메드베네프 대통령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러시아의 태도다.
러시아는 아시아·태평양 진출 전략의 일환으로 비단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과도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고, 남·북한을 상대로 '줄다리기 외교'를 펼치고 있다.
이미 지난 2001년 2월 당시 푸틴 대통령은, 한·러 정상회담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남·북한 철도를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 구상을 제시한 후, 불과 두 달 만에 모스크바에서 '북·러 군사협력협정'을 체결했다.
※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시베리아의 첼랴빈스크에서 연해주(沿海州) 남안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7616㎞를 연결하는 철도로 ‘시베리아본선(本線)’ 또는 ‘시베리아횡단철도’라고도 한다. 1850년대 극동지방의 군사적 의의 증대, 시베리아 개발, 대(對)중국무역 등을 목적으로 계획됐다. 1916년 완전 개통됐으며 37년 복선화됐다. 러일전쟁과 2차대전시의 공헌으로 군사적 의의가 실증됐다. 소련은 70년대부터 이 철도를 상업화하기 시작, 일본 등 극동지역의 유럽행 컨테이너화물 수송루트를 개발했으며 한국은 73년부터 이를 이용하기 시작, 82년까지 이란·아프가니스탄 등 ‘중동특수’ 물자수송에 주로 이용했으며 이후 유럽과 옛 소련 및 동구권 교역의 동맥으로 부상했다.
▲ 시베리아 횡단철도(TRS)연결 구간
또 러시아와 북한은 평양과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3차례의 양국 정상회담을 열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의 연결 사업에 관한 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러시아가 진정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란다면, 이 같은 남·북한 '줄다리기 외교'를 지양해야 한다.
러시아가 진실로 한국과 '서(西)캄차카(Kamchatka)' 해상광구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면, 러시아의 동(東)시베리아 지역의 앙가르스크(Angarsk) 유전, 이르쿠츠크(Irkutsk) 근방의 코빅친스코예(Kovyktinskoe) 가스전, 사할린(Ostrow Sakhalin)의 석유·가스전 개발 및 파이프라인의 건설계획에서 중국과 일본은 참여시키되 한국은 소외시키는 편파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 앙가르스크 [Angarsk]
러시아 연방 중심부에서 남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위치한 이르쿠츠크 주에 있는 도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통과한다. 1948년에 세워진 후 정유공업과 석유화학공업의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해왔다. 합성섬유·화학비료·플라스틱·보일러·시멘트·전기제품 등의 공산품이 생산되며, 양조업이 이루어진다. 서부 시베리아에서 생산된 석유가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곳의 정유공장과 석유화학공업단지로 운반된다. 인구 268,500(1991).
※ 이르쿠츠크 [Irkutsk]
러시아 연방 중동부에 있는 이르쿠츠크 주의 주도.
앙가라 강과 이르쿠트 강의 합류지에서 앙가라 강변을 끼고 있다. 1652년 러시아가 이 지역을 처음 식민지로 만들 당시에 세운 월동 야영지에서 비롯되었으며, 1661년에는 요새가 건설되었다. 이곳은 시스바이칼리아와 러시아에서 중국과 몽골로 가는 무역로의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했다. 1686년 시가 되었으며 1898년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들어선 뒤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오늘날 이르쿠츠크는 다양한 기계제품들의 제조업을 비롯한 공업의 발달로 시베리아의 주요공업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철도·비행기·선박·차량 등의 수리소도 갖추고 있으며 운모 가공업과 소비재 제조업도 이루어진다. 앙가라 강의 이르쿠츠크 수력발전소가 이 도시 내에 있으며 그 저수지는 위로 바이칼 호에까지 이어진다. 강변의 제방이 아름다우며 가로수가 줄지어 있는 거리에 많은 목재 가옥들이 남아 있다. 동시베리아와 러시아 연방 극동지방의 행정·문화의 중심지인 이 도시에 이르쿠츠크국립대학교(1918)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시베리아 지부를 비롯하여 많은 교육·연구 기관들이 있다. 인구 604,500(1991).
▲ 캄차카 및 사할린 지도
※ 사할린 [Sakhalin]
Sachalin이라고도 씀. 러시아 연방 동쪽 끝에 있는 주.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주는 1947년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 열도를 일본으로부터 이양받은 후 설립되었다. 어업·제재업과 사할린 남부의 채탄, 북부의 석유 채취가 주된 경제활동이다. 면적 87,100㎢, 인구 714,000(1993).
※ 캄차카 [Kamchatka]
Kam?atka라고도 씀. 러시아 연방의 극동에 있는 주.
캄차카 반도 전체와 코랴크 산맥 남단으로 구성되며, 코랴크 자치구를 포함한다. 행정중심지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캄차츠키이다. 주민은 주로 러시아인 이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구밀도는 1㎢/명에 불과했다. 원주민은 북부의 코랴크족이 대부분이고, 그밖에 소수의 에벤족·추크치족·캄차달족이 있다. 대규모의 게 잡이와 통조림 제조를 포함한 어업이 경제의 중심을 이루며 캄차카 강 유역에서 약간의 목재가 생산되고, 얼마 안 되는 농토도 이곳에만 있다. 러시아 연방 최초의 지열발전소가 건설되었다. 면적 472,300㎢, 인구 423,000(1995).
러시아가 진실로 '아시아 국가'로서 아시아·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원한다면, 중국의 '스코브로디노 파이프라인'과 일본의 '앙가르스크 및 나홋카 파이프라인'을 두고 벌이고 있는 '중·일 에너지 전쟁'을 더 이상 부추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임양택·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
출처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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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선통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