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화실에서는 연례 행사로 매년 탐매여행을 하고 있다. 산청 3매와 선암매, 고불매, 계당매에 이어 올해는 화엄사 홍매를 답사하기로 했으나 화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행사를 실시하지 못했다. 그만 두자니 선암사 홍매가 눈에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라도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했다.
4월 5일, 서부터미널에서 아침 8시 버스를 타고 여행길에 올랐다.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목적지로 휑하니 달리는 것 보다 완행버스를 타고 곳곳에 안부라도 묻듯 군데군데 들러서 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대지가 겨우내 잠에서 깨어나 힘차게 새 생명을 키워내고 있는 대견한 모습도 볼 수 있거니와 곳곳에서 화사한 봄꽃들을 가까이서 더욱 친근하게 느낄 수 있어 좋다. 볼일 보러 가기위해 버스에 오르내리는 소박한 시골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정겨워서 좋다. 특히 이번 여행길에서 머리를 쪽진 할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더욱 고무적이다. 아직도 우리의 전통을 고수하고 계신 분이 계시다니! 시골 버스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한 만남이다.
하동에서 화개사이의 가로수 벚꽃은 이미 다 떨어지고 없었으나 주말이 아닌데도 화개 장터에는 관광차량들로 부적대고 있었다. 화개장터를 벗어나자 구례군과 하동군의 민심을 한데 아우르며 맑은 섬진강물이 소리없이 반짝거리며 흐르고 가로수 벚꽃이 구례까지 화사한 모습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三大三美의 고장인 구례, 구례는 예로부터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땅이라 하여 三大三美의 고장이라 했다. 三大는 지리산, 섬진강, 구례들판을, 三美는 수려한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첫인상은 편안하고 푸근하다. 12시가 되어서야 화엄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사찰까지는 걸어서 20~30분 걸린다고 했다. 홍매를 만난다는 맘에 설레이기도 하고 혹시 이미 져버리지 않았을까 불안하기도 하여 피곤했지만 발걸음을 재촉했다.
< 화엄사서오층석탑 보물 제 133호>
화엄사는 각황전과 사사자삼층석탑, 석등, 영산회괘불탱의 4개의 국보와 여러개의 보물급 문화재를 지니고 있는 대사찰이다.
각황전 옆에는 홍매가 아직까지 빛을 잃지 않고 붉게 타오르며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네 시간이나 달려온 보람이 있다. 이 홍매는 조선 숙종 때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기념 식수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300여년이란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도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운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 선홍빛은 붉다 못해 검붉어 흑매라고 불리며 장육화라고도 한다. 전국의 진사들은 다 모였나 보다 개미떼처럼 달라 붙어있어 홍매가 유명세를 치르느라 몸살을 앓고 있다. 사실은 이 홍매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화엄사 각황전 옆에 있는 홍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야매를 찾을 수 없어 스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구층암 뒤쪽에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450여년의 풍상에 지친 모습이 역역하다. 꽃이 이미 피고 졌는지 높은 가지에 아스라이 매달려 있는 몇 개의 꽃만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화엄사 야매 천연기념물 485호)
구층암이 눈길을 끄는 것은 중간 두 개의 기둥을 모과나무의 고목을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차방과 마루에서 제기를 닦고 있는 아주머니들의 모습도 이색적이었다.
<화엄사 구층암 (가운데 기둥2개가 모과나무 고목)>
홍매를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산동면 산수유 마을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산수유마을은 구례읍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다. 도로 양쪽에 벚꽃길이 아름답다. 이곳 사람들은 정서가 풍부하고 미를 아는 사람들이다. 눈길 돌리는 자리자리마다 벚꽃과 노란 개나리로 눈이 부셨다. 산수유 마을 사람들은 세상에는 노란색깔 밖에 없는 줄 알겠다 골목이며 산과 밭에 온통 노란색깔뿐이다. 이곳 할머니 말씀으로는 지금 꽃이 지고 있는 중이라 색깔이 좀 퇴색되었다고 한다. 한창 때에는 아주 샛노랗다고 한다. 돌담과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가 궁합이 잘 맞다.
<구례 산동면 산수유마을>
지리산 온천 둘렛길 호텔에서 숙박을 하고 사성암으로 향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많은 비와 강풍이 동반된다고 했는데 다행히 부슬비가 오락가락하는 정도였다. 버스로 죽연까지 가서 거기서 셔틀버스로 10분, 걸어서 10분 정도 가야한다고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관광객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았다. 좋은 날씨엔 얼마나 복잡할지 상상된다. 버스로 올라가는 길은 꾸불꾸불 S자로 경사가 심하고 좁고 험하여 차가 서로 교차할 수 없으며 서로 교신을 하면서 운행하고 있는데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아찔했다.
사성암은 원효, 도선국사, 진각, 의상대사가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고 한다. 법당인 약사전에는 원효대사가 선정에 들어 약 25미터의 기암절벽에 손톱으로 새겼다는 마애여래 입상이 있는데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었다.
기암 절벽에 제비집처럼 의지해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안개가 짙어 형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아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맑은 날에는 섬진강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안개가 너무 짙어 볼 수 없는게 아쉬웠다. 수령 800년이 된 귀목나무와 소원바위, 도선굴 등 몇 개의 암자가 조가비처럼 바위에 아슬하게 붙어 있다.
<안개에 덮힌 사성암> <약사전 법당안에 있는 마애여래입상>
마지막 여행지인 운조루로 가야하는데, 시골은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고 출발지인 터미널로 가야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하고 시간도 낭비된다. 주민에게 운조루로 갈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콜택시로 만원이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친절하게도 택시를 호출해 주었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는 낙안부사를 지냈던 안동 출신의 유이주가 99칸의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집터는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라고 한다. 운조루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새겨진 나무로 된 큰 쌀독이 있다.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이며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쌀독을 열어 구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집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굴뚝을 높이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올라가면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배고픔을 느끼고 고달파 할까봐 그러한 사람들을배려한 뜻이라고 한다. 이러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가지고 덕을 베풀었기에 동학과 빨치산, 6.25전쟁을 겪으며 많은 부자가 피해를 보았지만 이 집만은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쌀독에 꽂혀있던 나무도막은 안타깝게도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지금은 과거의 위세를 찾아볼 수 없을 뿐아니라 입구에서 주인 할머니인지 모르겠지만 입장료를 받고 있고 반찬거리를 사라고 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지 않았다.
<운조루> <타인능해가 적혀있는 쌀독>
운조루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에 곡전재가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천상의 선녀가 떨어뜨린 금가락지 모양이라 하여 금환락지라고도 한다. 1929년 승주에 살던 박승림이라는 자가 지었으며 1940년 곡전 이교신이 인수하여 현재 5대 손이 살고 있다고 한다. 운조루보다 규모가 좀 작으나 집안에 정원과 연못이 아름다우며 집채마다 당호를 붙여놓은 것이 주인의 품격이 돋보인다. 특이한 점은 높이 2.5m 정도의 돌담을 성처럼 높이 견고하게 쌓아놓은 점이다. 담을 고리 모양으로 쌓아 집터의 환경을 금환락지로 나타냈다고도 한다.
<집안에 있는 연못> <가락지 모양의 담장>
이제 그만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게시인지 갑자기 돌풍이 몰아지치고 쌀쌀하여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다. 날씨만 좋으면 하루 더 연장하고 싶었지만 서둘러 부산으로 돌아왔다. 처음 계획했던 여행을 실행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첫댓글 臥龍梅의 緣이 분에 넘치는 화엄사의 紅梅와 野梅를 볼 줄이야!
이소님의 화엄사 탐매기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합니다.
서두에서 거명한 매화도 풍문으로 들었습니다만, 특히 구층암 뒤켠
야매는 저도 꼭 가서 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야매는 본시 꽃이 성글어
일반 名梅와 다를 수 밖에 없지만 겨우 몇 송이만 보셨다니 원로에
아쉬움 컷겠습니다. 산수유 눈에 담는 이소님의 표정에서 춘수를 달래는 맘을 느껴 봅니다.
감사합니다.
오우,,,,멋지ㅣ십니다,,,,,